2007년~현재/감 상2014. 6. 4. 18:53

기발한 아이디어와 유머, 묵직한 철학적 주제가 멋지게 조화를 이룬, 마치 팥빙수와도 같은 영화 '그녀(her, 스파이크 존즈 감독)'. 팥빙수는 막 나왔을 때의 첫맛과 한참 먹을 때의 중간맛, 그리고 마지막 국물이 되어버렸을 때의 끝맛이 다 다릅니다. 이 영화 '그녀'가 그렇습니다.

 

도입부에서의 인공지능 운영체제(OS)가 주는 첫인상은 얼음 알갱이의 황당함 그것입니다. 한참 몰입해 들어가다 보면 슬며시 느껴지는 따뜻한 인간미, 그리고 클라이맥스 이후에 당연한 듯 찾아오는 국물처럼 되어버린 이별의 허망함. 팥빙수의 그 맛입니다.

 

동양철학의 이론에 의하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당연한 도리라 합니다. 그래서 이 오상(五常)을 인간과 짐승을 구분 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이것만 잘 지키고 살면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고 군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본성을 이루는 이 오상 외에 희(喜), 로(怒), 애(哀), 락(樂)이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인간 본성의 외곽에서 오상의 실천을 방해하는 요소들입니다. 물론, 이는 비단 동양철학에만 국한된 이론은 아닙니다. 기독교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심 없이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을 중요시하기에 그렇습니다. 여기에 ‘천국에 가기 위함’이라는 명분이 더하여져 행하는 선심은 이미 말씀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비난받게 됩니다.

 

본성(동양철학)이 명하는 대로, 말씀(기독교)이 뜻하는 대로 그저 행하기만 하면 족하다는 것이지요.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분산된 존재로서의 인간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관계 맺기에 의해 다중 속에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 파편화된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늘 고독하다는 겁니다. 언어의 부재, 소통의 불일치에 의한 결과입니다.

 

바로 이 영화 ‘그녀’ 역시 이 인간의 고독에 관한 영화입니다.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사랑 그것은 남자와 여자라는 개체를 연결시키려다보니 어쩔 수 없이 가져다 쓴 일종의 매개물에 불과합니다.


▲ 영화 <그녀>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미래의 어느 날을 살고 있는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파닉스)는 편지를 대필해주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일종의 글쟁이입니다. 부인과는 의견 차이로 별거 중에 있으며 이혼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대화 상대를 찾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인공지능 운영체제(OS)를 구입하게 됩니다. 컴퓨터에 무수히 깔려 있는 프로그램 같은 것으로, 다만 차이가 있다면 대화가 가능하며 경험을 통해 프로그램 스스로가 진화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 프로그램의 ‘진화‘가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이자 모순이기도 한 이중성을 띄고 있습니다. 참으로 멋진 영화의 소재요 아이디어이기는 한데, 이게 스스로 진화를 하면서 인간과 닮아 간다는 점이 모순입니다.

 

그럴 것이라면 굳이 SF적 아이디어를 채용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인간과 같은데 굳이 그 대상을 프로그램이라 가정할 이유가 없기에 그렇습니다. 더구나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진화한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틀대로 성장한다는 의미가 되기에, 결국 그 프로그램은 인간 이상도 인간 이하도 아닌 바로 인간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물론, 단시간에 이뤄지는 성장과 진화로 이야기 구조를 한결 수월케한다는 장점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파국 이후의 결말이 너무도 당연한 귀결처럼 여겨져 영화가 주는 여운의 메아리를 상당 부분 희석시켜버리는 감점 요인이 되더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스스로에게 이름도 붙였는데, 그녀(?)의 이름은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입니다. 재미있는 게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이 프로그램(이하 사만다)은 경험과 지식을 통해 스스로 성장 · 진화한다는 것입니다.

 

사만다 역시 처음에는 자신의 주인(?)인 테오도르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스마트폰 카메라에 비친 영상을 통해 세상 구경을 하기도 하고, 테오도르와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며 매우 인간적인 것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게 진화를 합니다. 주인에게 선택되어진 사만다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사만다로 변모해 가면서 타인과의 새로운 관계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8316명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고, 641명과 사귀고 있다고 테오도르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간이 가면서 내가 분산되는 걸 막을 수 없었어.” 라는 사만다. 그녀는 결국 “난 자기꺼면서 자기 게 아니야” 이 말을 남긴 채 떠나갑니다. 다른 여인들이 테오도르를 떠나간 것처럼 말입니다. 프로그램의 일부였던 사만다 역시 진화(성장)의 결과, 타인(테오도르)과의 관계 맺기에 실패를 한 것입니다.

 

아쉽게도 이 영화에서는 실패의 원인에 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제가 이 글 서두에 동양철학의 이론을 앞세운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화된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 나름의 생각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각자 사람마다 그 원인과 처방은 다를 수 있습니다.


적극 권해드립니다. 이 영화 'her'에서 her는 당신 가슴 속의 그요, 그녀 입니다.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훌륭한 영화임에 틀림없습니다. 가상의 인물을 상대 배역으로 설정하고 연기하는 호아킨 파닉스의 명연기와 스칼렛 요한슨의 매력적인 목소리 연기, 아케이드 파이어의 환상적인 음악, 프레임 가득 몽환적 느낌의 색감을 통한 황홀한 영상미는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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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