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읽 기2014. 7. 16. 12:17

인간의 자아 형성을 위해서는 ‘나’ 이외의 대립물로써 ‘타자(他者)’가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어린시절 최초로 맞이하게 되는 대립물적 ‘타자’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고 정신분석학자 라캉(Jacques Lacan)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울단계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즉, 말을 배우기 훨씬 이전의 어린 아이는 거울 속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처음으로 자아가 형성되는 시점이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거울단계는 유아기적 현상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성인이 된 이후에도 유사한 경험들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편의상 이를 ‘스크린단계’라 부르겠습니다.

 

거울단계는 일방적 수용자로서의 자아이지만, 스크린단계에서는 투사와 수용을 동시에 일으키는 능동적이며 양면적 단계로 전개가 됩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A와 B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이 둘 사이에는 하얀 스크린이 쳐집니다. 그리고는 있는 그대로의 A와 B가 아닌 자신이 보고 싶은 A와 B의 모습만이 자신의 맞은편 스크린에 투사됩니다. 시쳇말로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스크린이 걷혀지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A와 B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고 완벽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대의 빈틈이 본인의 가슴에 빈공간으로 남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서로의 빈공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비어 있는 공간으로 인한 허전함(결핍)은 두고두고 인간을 허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살다보면, 나의 그 빈공간에 딱 들어맞을 것 같은 상대를 만나기도 합니다. 쉘 실버스타인의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이란 동화가 그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그 빠져버린 한쪽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야기 입니다. 


한번은 너무 큰 한쪽을 만나 끼웠더니 삐걱거려 제대로 구르지 못하고, 또 한 번은 아주 작은 한쪽을 만나 끼우기는 했으나 채 한 바퀴를 구르지 못하고 그냥 빠져 버리고 마는 등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강 건너고 산을 지나 짝 찾기 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꼭 맞는 한쪽을 찾아 반가운 마음에 얼른 끼웠습니다만, 너무 꼭 맞다보니 구르는 속도를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쉽지만 그것에도 만족을 못하고 빼내버린 채 계속 짝을 찾아 떠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내 가슴 속 빈공간에 채울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은 영원한 숙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상대를 만났을 때 나이를 불문하고 끌리는 감정이 싹트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회적 관습과 규율이란 게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선을 넘기를 주저하고, 알아서 자제를 합니다. 물론, 간혹 일탈을 하여 사회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숙명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인간은 고독한 존재일지 모르겠습니다. 외로운 인간이란 이야기이지요.

 

미국의 주목받는 신예작가 앤드루 포터의 단편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바로 이 인간의 고독에 관한 소설입니다. 여기서의 ‘빛’이란 ‘끌림(정서)’을 의미하며, ‘물질’은 ‘사회적 규범’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헤더)'와 로버트는 대학교수와 제자의 사이입니다. 콜린과 '나'는 같은 대학의 선후배로 연인 사이 입니다.

 

어느 날, 교수인 로버트가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하면서 '나'와 로버트의 관계는 묘해집니다. 물론, 아버지뻘 되는 그와 '나'는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고 하는 게 전부입니다만 로버트를 만나면 편안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라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끝마치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슬픈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 이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려워요. 헤더.”

“무엇 때문에요?”

“이런 만남.” 그가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 이런 만남을 되돌아보며 나를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려워요”

나는 그를 보았다. “내가 두려운 게 뭔지 알아요, 로버트?” 나는 그의 손을 만지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려워요”」

 

콜린은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며 뛰어난 수영선수이기도 합니다. '나'와 결혼을 약속했으며 가끔 잠자리도 함께 합니다.

 

하루는 로버트의 아파트에서 차를 마시다가 로버트의 제안으로 술을 마시러 '바'엘 가게 됩니다. 학교 주변에 위치한 ‘바’였으니 단지 그저 상투적 의미로써의 ‘바’가 아니라 많은 시선들이 상존하는 일상적 세계로의 진출을 의미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콜린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때 '나'와 로버트는 손을 꼭 잡은 채로 다정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나'와 로버트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콜린과 '나'는 결혼을 했으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해 로버트와는 연락조차 끊겨버렸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로버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림프종으로 죽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통곡을 합니다.

 

그동안 '나'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이 전혀 없는, 잘 나가는 의사의 아내로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삶이 참다운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가슴 한 구석이 휑한, 알지 못할 결여감 같은 것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무기력한 삶 같은 것이었습니다.

 

로버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나'는 문득 옛 기억 하나를 떠 올립니다. 로버트와 사랑을 나누겠다는 마음을 먹고 그의 비어 있는 아파트를 찾아 간 '나'는 옷을 벗고 로버트의 침대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몇 시쯤 로버트가 돌아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기다리기로 한 것이지요.

 

하지만 로버트는 예상 했던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한 두어 시간여를 그렇게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 옷을 입고 창밖을 내다봅니다. 바깥 거리에서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대학생들이 미식축구 공을 던지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 또래였지만, 그 순간 그들은 나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한 순간이었다.」

 

'나'와 로버트의 사랑은 그렇게 극한의 어느 지점까지 가 있었음을, 비록 직접적인 육체적 관계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무언가 또한 있었음을 암시해 주며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그렇게, 고독했던 한 남자는 갔고, 외로운 한 여자는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녀 옆에 있는 그도 예외 없이 멜랑꼬리(mélancolie)한 존재로 남아 있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왜? 사랑이란 서로의 빈공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