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감 상2014. 7. 29. 09:05

한 여론조사 전문 기관이 50대 여성 30여만 명을 대상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으십니까?”

 

그런데 굉장히 의외의 대답이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대답은 “현재의 50대가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인즉, 10대는 공부에 시달려야 하고, 20대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부담, 30대는 자녀들 돌봄에 지치고, 40대는 여유가 안 되고, 비로소 50대가 되니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여유 있는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일견 이해되는 대목이 많습니다. 이는 역으로 우리사회 50대의 급격한 보수화 경향을 잘 설명해 주는 한 예로써도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50년 고생 끝에 이제 막 삶의 안정을 찾고, 그것을 만끽하고 있는 이들에게 변화와 개혁은 터부시하고 싶은 어떤 것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기만 한 우리사회에서 변혁의 동력을 놓고 고뇌하고 있는 분들의 고민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잘 웅변해 주는 결과인 것 같습니다.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를 봤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불현듯 이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마도 50을 목전에 둔 저 자신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란의 성공을 간절히 희구하는 제 속마음이 오버랩 되어 나타난 현상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니, 어쩌면 영화 ‘군도’에 대한 찐한 아쉬움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것일지도 모르겠고 말입니다.


▲ <군도> 포스터,   롯데시네마 촬영


‘군도’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조선 철종 13년(1862년), 실제로 당시의 서민 삶이라고 하는 것은 거죽만 붙어 있는 산송장과 같았다고 합니다. 자연재해로 인한 연이은 흉년에 더해 세도정치를 등에 업은 탐관오리들의 학정 탓이었음은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를 참지 못한 농민들과 몰락한 양반계층은 힘을 모아 봉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전국적으로 약 삼사십 여회에 이르는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영화 ‘군도’는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쇠백정에서 깨우친 농민군으로 변신하는 도치(하정우 분)와 부잣집의 서얼로 태어난 자신의 출신 성분이라는 굴레를 평생 떨쳐버리지 못한 채 오로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살아가는 조윤(강동원 분). 이 두 대립축이 농민군과 세도가로서 영화 '군도'의 핵심 모티브입니다.

 

쇠백정으로 살아가던 도치는 어느 날 조윤의 부름을 받습니다. 남편을 잃고 절로 피신해 있는 조윤의 제수(弟嫂, 본처 아들의 부인)를 없애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과 함께 돈을 받게 됩니다. 조윤은 기생 어머니를 둔 서얼 출신이므로 아버지의 본처가 낳은 동생의 씨앗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가업을 물려받아야 하는데 본처의 씨가 있는 한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쇠백정은 그녀를 없애기 위해 절간으로 향했으나 임신한 상태인 그녀를 본 후, 죽이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와 받은 돈을 되돌려 줍니다. 하지만 이에 앙심을 품은 조윤의 부하에 의해 어머니와 여동생이 불에 타 죽고, 자신은 간신히 목숨만 건집니다.

 

이후, 쇠백정은 농민군의 일원이 되어 조윤에게 복수할 날만을 학수고대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조윤의 집을 털기로 하고 거사를 실행에 옮기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농민군의 지리산 산채는 조윤과 관군의 급습을 받고 전멸하게 됩니다.

 

이때, 그곳에서 조윤은 자신의 어린 조카(동생의 아들)를 발견합니다. 조윤의 제수가 농민군에 몸을 의탁한 채 애를 낳은 후 죽게 되어 이 아이는 농민군들이 키우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조카임을 한 눈에 알아 본 조윤은 그 아이를 데려 갑니다.

 

하지만 조윤의 아버지 역시 그 아이가 자신의 피붙이임을 직감으로 알고는 조윤에게서 몰래 빼내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조윤은 그 길로 아버지에게로 달려갔으나 여전히 싸늘한 냉대에 절망한 그는 아버지마저 목 졸라 살해합니다. 「더러운 땅에 연꽃이 피어오르는 것이 신의 뜻인가, 아니면 연꽃의 의지인가?」 조윤의 독백입니다.

 

그리고 끝내는 조카를 품에 안은 채 도치의 칼을 받고 목숨을 잃습니다. 피로 끌리는, 뭔지 모르는 그 애틋한 감정을 지키려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셈이지요.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가 봅니다.

 

‘군도’는 그냥 재미있게 만든 오락영화다, 저는 그렇게 봤습니다. 한국산 웨스턴 무비, 아니면 한국산 무협지라고나 할까요. 흥행의 요소를 잘 아는 감독의 작품인 듯한 느낌 또한 강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우선, ‘군도’라는 제목부터가 잘못되었지 않나 싶었습니다. 차라리 ‘아들의 이름으로‘가 더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주체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한 사람의 인간이 주체가 된다는 의미는 타인에 의해 이름 불려짐(상징 기호)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이름 불려짐 즉, 어려서는 개똥이가 되고, 성장해서는 직장에서의 직급이 되기도 하며, 또는 누구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려지는 과정들에 의해 사회구조 속에서 주체로서 자신의 위치가 정립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주체의 정립 뒤에는 소외라는 결핍감이 동반됩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첫 단계는 자신의 욕망 대상으로서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욕망의 팔루스는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를 포기하게 되는데, 아버지라는 법을 인정하고 어머니를 포기하는 거세의 과정을 통해 주체에게는 소외(빈공간)가 따르게 됩니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이 결핍감을 안고 사는 주체로서의 ‘조윤’은 욕망의 화신으로 화한 채 인생을 허비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이름이 불리기(인정 받기)를 기대하며 말이지요. 「타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해 생을 걸어본 자가 있거든 나서라. 그자의 칼이라면 받겠다.」 자신과 대치 중이던 농민군들을 향한 조윤의 외침입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군도’는 두 개의 큰 대립축이 있습니다. 도치를 중심으로 한 농민군 세력이 하나고, 조윤으로 대표되는 포악한 세도가들이 다른 한 축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민란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민란의 반대편에 있는 타락한 세도가 자제로서의 인간 조윤의 캐릭터가 워낙 조밀하다보니 이쪽으로 관객의 감정이 이입되어 이 두 대립축이 강하게 부딪히지 못한 채, 이쪽저쪽 모두를 긍정하는 쪽으로 흘러버리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즉, 악질 지주인 조윤을 절대로 미워할 수만은 없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거기다가 얼굴까지 잘 생겼으니...

 

이렇듯 시나리오 상으로만 이야기 하자면 치명적인 모순을 처음부터 잉태하고 출발한 셈이 됩니다. 거기다가 오락성까지 가미가 되다보니 처절해야 할 민란 영화로서의 ‘군도’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받기가 쉽지 않은 태생적 구조를 갖고 있다 하겠습니다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제목을 그대로 고집했다면 이는 솔직하지 못한 탓이고, 진실로 '민란의 시대'를 조명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의도했던 것이라면 이는 작품성의 실패로 귀결된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시각을 다소 바꾸어서 보면, 오락영화로서의 ‘군도’에는 아주 다양한 즐길 거리들이 즐비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를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정우와 강동원, 이경영, 이성민으로 대표되는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은 영화 보는 재미를 더해줄 뿐만 아니라 영화 속으로 흠뻑 빠져들게 합니다.

 

여기에 더해, 활극 영화로써의 스케일과 만화적 요소의 삽입 등으로 영화의 재미는 한층 배가 되는데 마치 예전에 유행했던 홍콩느와르의 조선 버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옥에 티와도 같은 어색한 부분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컴퓨터 그래픽의 톤이 너무 맑지 않았나 -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한다면 - 하는 점과 농민군의 지리산 산채의 위치 - 관군의 공격에 수비하기 좋은 위치여야 하는데 산속 협곡에 위치하고 있어 기습 공격에 치명적 - 가 적절치 않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에 민란은 없습니다. 재미는 있습니다.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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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