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감 상2015. 3. 16. 16:36

셰익스피어, 안톤 체홉, 헨릭 입센. 이들은 연극에 입문하는 이들에겐 마치 고전극의 교과서와도 같은 인물들이다. 연극을 하겠다면 반드시 한번은 거치고 가야하는 난관 비슷한 성역이다. 우선, 어렵다. 그리고 지루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들을 사실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연극계의 속성상, 입문작으로써의 작품은 원작에 충실한 공연들을 주로 하다 보니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정서와 부합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 우리말로 듣는 연극이었음에도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알 수 없어 실망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 기억 또한 적지 않다.

 

어찌되었든, 극예술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극작가 중 한명이라는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홉. 그의 갈매기(김소희 연출, 연희단거리패 공연, 대학로 게릴라극장)를 보고 왔다.

 

▲ 갈매기 프로그램 촬영

 

역시 작가도 인간인지라 본인이 살던 시대의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게다. 안톤 체홉 역시 예외는 아니고 말이다. 안톤 체홉이 활동하던 당시의 러시아는 19세기 말이다.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침략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저지당하며, 러시아는 패배의 쓴 맛을 보게 된다. 귀족들의 사치, 수탈과 수난으로 배를 곯는 농민들, 더욱 비참해져 가는 농노들의 처참한 생활.

 

전쟁에서 패한 뒤 러시아 사회는 극도의 불안과 뒤숭숭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며, 절망이 일상인 사회로 변해버린 채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불만은 점점 고조되어 간다.

 

그는 이렇듯 10월 혁명의 씨앗이 하나 둘 잉태되고 있던, 혁명 전야 러시아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예리한 그만의 특유한 감각과 시선으로 주시했다. 희망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세기말적 증상에 대한 체홉의 처방은 있는 그대로의 서술이었다. 이는 라캉의 ‘승화(sublimation)’와도 맞닿아 있는 개념이다.

 

라캉은 정신적 외상이나 충격과 같은 ‘증상(symptom)‘이 ‘승화’의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것이라 말한다. 즉, 승화의 단계란 그런 외상과 충격을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아픔이 있었음을 본인 스스로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그래서였을까? 체홉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오히려 지나치게 평범하기까지 한 자신 주변의 인물들과 그들의 삶을 극 속에 여과 없이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내 이웃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듣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내 이웃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그 얘기를 듣는 시간이 잠깐에 지나지 않을 때이다. 무려 3시간에 걸쳐 그저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얼마나 곤욕이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역으로 바로 이게 안톤 체홉 극의 장점이다. 내 이웃이 전하는 또 다른 이웃 누군가에 관한 장황한 이야기는 그 뒷담화를 전하는 이의 기억에 남은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뒷담화의 주인공이 되는 내 이웃은, 그 이야기 속에 그의 삶의 역사가 녹아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안톤 체홉의 희곡을 연극화 하는 과정 속에는 그 역사를 살려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이 제대로 묘사되지 못하면 우리가 늘 듣는 지루한 뒷담화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모사(Hyperrealism적)를 놓고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철학과 미학의 사상적 고리를 연결하는 작업이라 할만도 하다.

 

하지만 이게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그의 작품을 책임진 연출에게는 대사와 대사 사이의 여백과 그 속에 들어갈 동작들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며, 배우에게는 일상의 평범함 속에 들어차 있는 인간 욕망의 허물을 벗겨내도록 만들기에 그렇다.

 

연극배우 김소희의 처녀 연출작 「갈매기」는 심심함과 짜증, 광기와 온순,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이 된 인간 군상들이 만들어 내는 용광로와도 같았다. 그래서일까? 이들이 표방하고 있는 부제 역시 ‘우울한 희극-현실과 꿈 사이에서 부유하는 인간들의 웃픈 이야기‘이다.

 

관객들이 하나 둘 들어서는 소극장 무대 위, 한 남자가 마치 진행자(스텝)이기라도 하듯 의자의 배열도 살피고, 의자 상태도 확인하고, 위치도 이동시켜 가며 열심히(?) 작업 중이다.

 

관객들은 공연 시간이 다 되어서야 그가 배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극작가를 꿈꾸는 야망 가득한 청년 뜨레쁠레프(윤정섭 분)가 바로 그다.

 

또한 관객들이 입장하는, 객석에 위치한 출입문을 통해 소오린(도창선 분)이 등장하며 극은 시작이 된다. 연극 「갈매기」의 도입부가 극중극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배우의 관객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이후 무대장치는 배우들에 의해 움직여지며, 1막(소오린家의 정원), 2막(조그만 운동장), 3막(식당), 4막(응접실)의 장소를 연출해 낸다. 무대장치라고 해야 큰 테이블 두 개와 긴 의자 4개, 그리고 1인용 의자 열댓 개가 전부이기는 하다.

 

성공한 여배우이자 뜨레쁠레프의 어머니인 아르까디나(황혜림 분)와 그녀의 남자이자 성공한 극작가 뜨리고린(이원희 분). 성공하고픈 여배우 지망생인 니이나(조우현 분)와 그녀의 연인이자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극작가 지망생 뜨레쁠레프.

 

그리고 그 외 러시아의 외딴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연극 「갈매기」의 등장인물들이다. 또한 이들이 만들어 내는 갈등구조도 아주 간단명료하다. 크게 본다면, 두 개 정도로 압축해서 설명 가능하다.

 

앞서 거론했던 성공하고픈 두 청춘남녀와 이미 성공한 두 중년남녀가 갖고 있는 현실 인식에서 기인하는 갈등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니이나와 뜨린고린이 부적절한(?)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인물들 간 좌충우돌식 갈등이 그것이다.

 

전자는 주로 예술(연극)을 바라보는 신·구세대 간의 인식차로 단순화해 나타나나, 이는 활자화된 의미로써의 예술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  예술이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 전반에 가하는 체홉의 비판의 메시지이자 변혁의 염원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후자는 우선, 뒤돌아선 자와 버림받은 자로서의 니이나와 뜨레쁠레프의 갈등, 역시 같은 구조인 뜨리고린과 아르까디나의 갈등, 어머니의 남자에게 연인을 빼앗긴 뜨레쁠레프와 어머니 아르까디나의 갈등, 마지막으로 연인을 빼앗긴 자와 가로챈 자로서의 뜨레쁠레프와 뜨리고린의 갈등, 그리고 여기에 더해 그 주변부 인물들이 얽히고 설키며 만들어 내는 사랑과 애정의 갈등구조가 있다.

 

결국, 갈매기가 되고 싶었던 여인 니이나는 박제된 갈매기의 모습으로 남고, 갈매기를 쏘아 죽인 극작가 지망생인 청년 뜨레쁠레프는 자살하는 것으로 극은 막을 내린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 부분이 체홉 갈매기의 모티브가 되는 중심 사상으로 생각한다. 그 외의 갈등 구조는 그저 외피에 입힌 장식품 정도랄까?

 

그래서다. 앞서 소개했던 부제처럼 웃픈(웃기다+슬프다의 합성어) 형식이 아니면 몹시도 지루해 보이는,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희곡이 갈매기이다.

 

그 사이 사이에 어떤 웃픈 옷을 입힐 것이며, 그 옷의 색깔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의 선택은 전적으로 연출과 배우들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김소희의 갈매기에 뜨거운 박수로 화답한다. 수고들 하셨다.

 

단, 이것만은 기억해 두자.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면 그가 던진 대사는 극장 허공을 날아 다니는 죽은 언어가 된다. 그렇지만 무대 위에 삶의 터전을 구축해 놓으면 그의 대사는 살아 숨쉬며 관객의 가슴을 파고든다. 몇몇 배우들에게 드리는 Tip이다. 고민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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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