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감 상2015. 3. 28. 23:30

내 이야기다. 긴 설명이 필요 없이 그저 이렇게만 이야기해도 충분한, 술과 함께 살아온 내 삶의 여정을 나 아닌 다른 이가 들려주는 이야기. 이게 연극 「술꾼」이다.

 

연극이 끝나고 좋은 벗과 '역시나 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술과 맺어온 세월이 내가 살아온 내 일생의 길이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도 내 이마 한 가운데에는 작은 흉터자국이 선명하다. 옛날에는 다들 집에서 막걸리를 담가 드셨다. 특히 제사나 명절에는 아주 의례적인 일이었고 말이다.

 

역시 명절이 머지않았던 어느 날, 서너 살이 갓 넘었을 내가 얼마나 달라고 보채던지 부엌에서 술을 짜고 계시던 큰어머님께서는 바가지에 술을 그득 따라 내게 주셨고, 나는 그걸 벌컥벌컥 들이켰단다.

 

그리고는 채 몇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그만 부엌 옆 장작더미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그때 장작 모서리에 이마를 찌었고 지금껏 훈장처럼 내겐 그 자국이 짙게 남아있다.

 

그리고 초등학교 입학 무렵부터는 과수원이 많은 동네에서 살게 되었다. 지금이야 미성년자들에게는 술과 담배를 팔지 않는 게 당연시 되는 시대가 되었지만, 내가 어릴 때만해도 누구랄 것도 없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하면서부터는 부모님 술 · 담배 심부름을 도맡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빼 놓지 않고, 찌그러진 한 되짜리 양은 주전자를 들고 터덜터덜 먼 길을 걸어 술 받으러(사러) 동네 구멍가게(점방)까지 왕복해야 했다.

 

과수원 길을 돌고 돌아 돌아오는 길에는 무료함에 주전자 주둥이를 입에 대고 한 모금 또 한 모금 홀짝이며 오다 보면 - 특히나, 무더운 여름날은 - 적당히 취기가 오르기도 했다.

 

어린 내가 설마 그걸 마시며 왔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신 어른들은 매번 “조심해서 들고 오라고 그렇게나 일렀는데, 이 아까운 걸 또 다 흘리고 왔네.” 하시며 내 엉덩이를 툭툭 치시곤 했다. 어떤 날은 내가 봐도 좀 과하게 마셨다 싶기도 했다.

 

원인 없는 결과 없다지 않던가! 돌이켜 보건데, 이런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의 40대 이상 중년들은 자연스레 술을 밥 삼아 마시는 술고래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이르게도 된다.

 

▲ 연극 「술꾼」 포스터

▲ 공연 관람 후의 뒷풀이는 항상 즐겁다

 

연극 「술꾼」은 최송림 작가의 작품으로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아주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최송림 선생 최초의 국제 무대 진출작이 되는 셈이다.

 

최송림 선생과 나의 인연 또한 아주 각별하다. 내게 특히 그러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예술을 하겠노라며 거친 대학로 밥을 먹던 어느 날, 드디어 연극 연출로 데뷔하는 기회를 잡았는데 그 작품이 최송림 선생의 신작 희곡이었다.

 

그게 내 나이 29살 때였으니 무려 20여 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나는 공부를 하러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이후 서로 다른 밥을 먹는 처지가 되었으나 소중한 인연으로 내 기억 속에는 각인되어 있다.

 

연출은 유승희 선생이 맡았고, 배우 김재훈이 출연하는 1인 모노드라마이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배우란 고독한 존재다. 그의 곁에 동료 배우 누군가 서 있고 아니고, 무대 위에 배우의 숫자가 많고 적고는 그 고독감 해소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어둠과 정적에 휩싸인 객석. 그곳에서 무대를 주시하고 있는 무수한 시선들. 배우의 몸짓 하나라도 놓칠세라, 대사 한 토막, 무대 위를 휘감고 흐르는 공기 한 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꼿꼿이 앉아 있는 관객의 존재는 배우에게는 형언키 어려운 두려움이자 고독감의 원천이다. 때로 관객은 배우와 동일체로서, 또 때로는 배우의 대립자(비판자)로서 존재하기에 그렇다.

 

이런 점에서 모노드라마란 중견 배우에게조차도 쉽지 않은 도전이다. 글쎄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추송웅(빨간 피터의 고백) 선생, 그리고 윤석화(딸에게 보낸 편지)와 손숙, 정규수(품바) 선생 정도가 기억에 남아 있는 1인극의 대가들이다.

 

연극 「술꾼」은 최명수(김재훈 분)의 일대기를 그린 성장극이다. 한쪽 다리를 저는 아버지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그런 가정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명수는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충무로로 상경한다.

 

이곳에서 영화배우 지망생 봉자를 만났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녀는 술집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명수는 노발대발하나 그 이후 봉자의 행방은 묘연해 진다.

 

이 일을 계기로 충무로 생활을 청산한 명수는 봉자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술집을 전전하나 끝내는 찾지를 못하고 나이트클럽 웨이터가 된다. 그리고 개(웨이터) 같이 벌어 정승(영화감독) 같이 쓰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돈을 모아 마침내는 나이트클럽의 사장이 된다.

 

하지만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하지 않던가. 미성년자 고용 등으로 사업의 위기를 맞은 명수는 빚더미에 올라 앉게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간암 선고까지 받게 되자 아버지의 길을 따라 자살을 결심하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그리고는 포장마차를 끌고 길거리로 나선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그러던 어느 날, 애타게 그리던 봉자의 연락을 받고 둘만의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된다는 내용의 해피엔딩이다.

 

명수의 이런 고단한 인생 여정 곳곳에서 마주친 다양한 인물들을 1인 다역하며 배우 김재훈은 특유의 익살과 재주로 맛깔나게 표현해 낸다. 관객들과 진짜 소주 한잔을 나누어 마시며 말이다.

 

내 이야기이자 당신의 이야기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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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