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감 상2015. 4. 22. 20:37

化粧에서 火葬으로 - 나를 향해 날아드는 묵직한 돌직구 같은 영화

 

우선 용어 정리부터 하고 가겠습니다.

 

화장(化粧) : 화장품을 바르거나 문질러 얼굴을 곱게 꾸밈.

화장(火葬) : 시체를 불에 살라 장사지냄.

 

이렇듯 우리말로는 같은 화장이라는 글자이건만, 그 의미는 사뭇 다릅니다. 아니, 다르다 못해 거의 상반되기조차 합니다.

 

김훈 선생의 단편소설 「화장」에 등장하는 몇 구절을 옮겨 보겠습니다.

 

“죽은 아내의 몸은 뼈와 가죽뿐이었다. 엉덩이 살이 모두 말라버려서 골반 뼈 위로 헐렁한 피부가 늘어져 매트리스 위에서 접혔다.”

 

“전립선염은 나이 먹으면 저절로 생기기도 합니다. 병이라고도 할 수 없는 노화현상이지요. 옛말에 늙으면 오줌줄기가 약해진다는 게 바로 이겁니다.”

 

“당신의 몸은, 구석자리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결재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당신의 둥근 어깨와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이 당신의 두 뺨에 드리운 그늘은 내 눈앞에서 의심할 수 없이 뚜렷했고 완연했습니다. 아, 살아있는 것은 저렇게 확실하고 가득 찬 것이로구나 싶어서, 저의 마음속에 조바심이 일었습니다.”

 

“누런 털의 순종 진돗개였는데, 콩알처럼 생긴 마른 사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국에 말아주는 밥만 먹었다. 딸이 취직해서 출근을 하자 집 안이 썰렁하다고 아내가 얻어온 개였다... 간병인이 아내의 아랫도리를 벗기고 두통 발작 때 흘린 사타구니 사이의 똥물을 닦아낼 때도 아내는 개밥을 못 잊어 했다. 개의 이름은 보리였다. 내세에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아내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이상 네 개의 인용문이 소설 「화장」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묘사한 글들 중 제가 임의로 따온 것들입니다.

 

▲ 영화 화장 & 소설 화장

 

제일 위 인용문이 죽은 아내(김호정 분)에 대한 묘사, 두 번째는 화자인 오상무(안성기 분) 자신의 전립선염 증상에 대한 의사의 진단, 세 번째는 오상무의 눈에 들어온 풋풋한 젊은 여인 추은주(김규리 분), 마지막 네 번째가 진돗개 '보리'에 관한 묘사입니다.

 

이렇게 한 제 의도를 이해하시겠는지요? 바로, 化粧에서 火葬으로 이행되는 인생사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김훈 선생의 소설 「화장」은,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굉장히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뭐랄까요? 심오하다고 해야 할까요? 사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만 해도 임권택 감독께서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 작품을 영상으로 표현해 내실까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트릭도 없이 정공법으로 승부를 하시더군요. 마치, 내 가슴 속 깊은 곳을 향해 날아드는 묵직한 돌직구와도 같았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컴컴한 극장을 나와 영화관 로비 창밖으로 보이는 환한 대지를 대하는 순간, 아직은 다하지 않고 남아 있음에 대한 감사함으로 한쪽 가슴이 싸해 왔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닐는지요. 위 네 개의 예문 중에 제일 하단에 있는 강아지 ‘보리’의 입장이 유아기적 단계에 해당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지속적으로 보호받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더구나 그 대상은 태어날 때부터 다시 태어남(윤회)을 예비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즉, 죽음에 이르더라도 육체와 정신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업력은 소멸되지 않고 새로운 연(緣)을 찾아 윤회한다는 설에 따른 해석입니다.

 

어찌되었든, 그런 단계를 거쳐 극중의 추은주처럼 인생이 한창 물오른 시절을 거치고 나면 자연스레 찾아오는 노화현상(오상무의 전립선염)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게 됩니다. 물론, 이어지는 순서는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죽음(아내의 뇌종양)이 있는 것이고요. 극중 의사가 강조해 마지 않던 '생명현상'의 전형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아내와 김규리의 관계입니다. 전혀 다른 인물인 이 두 여인이 오상무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아내와 추은주는 둘이자 동시에 하나입니다. 아내는 현실의 여인이고, 추은주는 과거의 아내입니다. 한창 때의 아내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복선이 헷갈리게 되면 자칫, 이 작품이 마치 정신 못 차리는 한심한 한 남자의 불쾌하기 그지없는 불륜 정도로 폄훼될 우려가 크기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 사료됩니다.

 

만약, 이런 구도를 배제하고 죽어가는 아내를 간병하는 남편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과거 회상으로 설정했더라면 이 얼마나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소설이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앞서 말씀 드렸던, 진돗개 보리와 아내 역시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보리라는 연(緣)에 의해 아내의 업력 또한 사라지지 않고 다시 인간으로 세상에 올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영화 「화장」에서도 결국은 나(오상무)만 남고 다 떠나버리는 것으로 귀결이 됩니다. 아내의 죽음과 함께 추은주는 떠나보내고, 보리는 안락사 시킴으로 생사윤회의 한 획을 긋게 되니 혼자 남은 ‘나(我)'는 혼자가 아닌 게 되는 겁니다.

 

안타까운 점은 이 영화가 한두 군데에 등장하는 다소 선정적(?)인 장면으로 인해, 청소년 관람불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부부의 정사씬에 등장하는 추은주의 전라 모습, 그리고 아내를 목욕시킬 때 보이는 하반신 탈의 정도가 되겠습니다. 겨우 이 정도를 보여주자고 성인물이 되었다는 점은 못내 아쉽습니다. 나이 불문하고 온 세대가 함께 보기에 더없이 좋은 영화인데 말입니다.

 

비정하다 못해, 처절하고 참혹한 삶의 한 가운데에서 힘겹게, 마치 시이소 게임이라도 하듯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한 인간, 당신과 나의 적나라한 모습이 바로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꼭 직접 보시고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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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