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일 상2015. 4. 24. 12:32

장면 1. 어린이집 정문 앞. 할머니의 손을 놓지 못한 채 하염없이 울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다.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서럽다, 서럽다 해도 그렇게 서럽게 울기도 쉽지 않다. 보다 못해 할머니가 한 마디 하신다. “너, 어린이집에 안 가면 바보 된다고 그랬어. 바보 되도 좋아?” 어린아이는 천진난만하게도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 할머님의 주름진 얼굴 사이로 난감함이 더해진다. 모르긴 해도 외할머니와 외손녀일 것이다.

 

장면 2. 어르신 요양원이 들어서 있는 빌딩의 엘리베이터 앞이다. 일군의 사람들로 인해 소란스럽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일행을 주목한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님을 가족들이 단체로 면회를 온 모양이다. 함께 밖에 나가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이제 헤어져야 할 순간이 온 거다. 할머니는 아드님 한 분이 모시고 올라가고, 다른 가족들은 밑에서 기다리기로 한 모양인데, 할머니께서 가족을 따라 집으로 가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신다. 집에 가고 싶다는 할머니와 말리는 가족들.

 

이게 2015년 오늘, 우리들의 민낯이요 자화상이다. 이 대목에서 행복 따위를 운운하는 것은 그 말에 대한 모욕이다. 그저 가슴이 아플 뿐이다.

 

며칠 전, 글을 통해 「연세 강서 리더스 아카데미」라는 평생교육 프로그램의 행복 강의를 소개해 드린 적이 있다. 반응이 아주 뜨거웠다고...

 

▲ 연세 강서 리더스 아카데미

 

그리고 어제는 연세대학교 독문과 김용민 교수의 ‘게으름의 발견’이란 주제의 강의가 있었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요지의 강의였다. 그런데 강의 후, 반응들이 영 신통찮다.

 

대다수의 수강생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공통적이다. “도대체 하루 4시간 일해서 뭘 먹고 살겠다는 거야? 현실에 맞는 얘기를 해야지.”

 

수업 후에 술 한 잔씩 나누며 친목을 돈독히 하는 자리였기에 그냥 헛헛한 웃음으로 내 생각을 피력해 버리고 말았지만, 나 역시 노동시간을 줄이자는 입장에 격하게 동의하는 인간인지라 웃음 뒤의 그 뒷맛은 여간 씁쓸한 게 아니었다.

 

물론, 이 씁쓸함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일부 동료 수강생분들에 대한 감정이 아니다. 사회와 사회적 메커니즘, 그리고 지배권력을 향한 씁쓸함이다.

 

당연한 듯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체제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라 믿기에 그렇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게 사회가 작동을 한 거고, 권력이 인도를 한 거다.

 

사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새의 양 날개와 같은 것이다. 새가 한 쪽 날개만으로는 날 수가 없듯이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민주국가에서는 이 두 양 날개가 삶의 질을 규정하는 척도와도 같은 거다.

 

그런데 한 쪽에서는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전(?)을 해 나가고 있는데 반해, 그 다른 한 쪽에 위치한 민주주의라는 녀석은 제자리걸음조차 영 버거워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평등주의이다. 대표적인 게 1인 1표제로 대변되는 대의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평등주의가 붕괴되고 있다.

 

바로, 이게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가장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는 ‘불평등’의 핵심 원인인 거다. 이 불평등의 해소 없이 건전한 자본주의는 없다. 민주주의의 회복을 통한 민주자본주의의 완벽한 실현없이 인간다운 사회, 행복한 삶 또한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요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파이의 크기 문제가 아니라 - 우리는 이미 충분히 큰 것을 갖고 있다 - 그것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분배의 문제라는 말이다.

 

당연히 이 분배의 범주에는 노동시간 줄이기(나눔)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필수사항인 것이고 말이다. 포디즘으로 대변되는 산업사회 이후 인간은 노동현장에서 기계에 의한 소외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 현상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어 종국에는 노동가능인구의 단 5%만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연구 결과도 있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지금부터, 나누어 함께 하려는 노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파국을 피할 길이 없다. 지금부터다.

 

그리되자면 결국은 사회구조가 변해야 하고, 자본의 논리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과하리만치 누리고 있는 안락한 것과 편안한 것, 맛있는 것과 포만감을 주는 것. 그 중에 아주 많은 것을 포기하고 버리더라도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사회란 어떤 세상인지에 대한 고민들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노동자의 노동력이 창조해 놓은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자신의 몫으로 몽땅 가져가 버리는 게 아니라 아예 잉여가치 자체를 배제한 생산, 더 나아가 필요한 양만큼 만을 만들어 내고 이를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는 공동생산제사회 역시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그런 사회는 절대 불가능할 것처럼 주장들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전제로 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불평등이 만연한 천민자본주의 하에서의 인간형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면, 그 사회에 적응하려는 또 전혀 새로운 모습의 인간형이 탄생할 것이기에 그들의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요람(어린이집)에서 나와 무덤(요양원)으로 가는 그 순간까지 파편화된 개인으로 흩어져 살다 가는 분할의 삶이 아니라, 가족과 더불어 사는, 인간다운 삶, 행복한 인생은 이처럼 ‘인간’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나를 믿고, 당신을 믿고, 우리를 믿고 함께 가 보자. 사람 사는 세상의 그 길로...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