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감 상2015. 8. 15. 13:18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김중배의 다이아반지가 그리도 탐나더란 말이냐? - 이수일과 심순애.'

 

'마음씨 고운 여선생님, 그 선생님의 도움으로 검사가 된 청년의 순애보적 이야기 - 검사와 여선생.'

 

'기생의 한 많은 삶과 사랑 그리고 고단한 결혼생활 - 어머니의 힘.'

 

적당한 코맹맹이 소리의 변사가 변죽을 울리며 들려주던 애절한 이야기.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고, 손수건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치 전설과도 같은 신파극의 명작으로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작품들이다.

 

블랙과 화이트, 그리고 천정에 매달려 있는 홍등의 대비. 검은색 막이 둘러쳐져 있는 무대, 그 위에 흰색으로 치장된 높고 낮은 단들로 무대는 꾸며져 있다. 단출하다.

 

▲ 연극 「홍도」의 무대

 

이와 같은 단출한, 마치 무대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그리고 진짜로 텅 비어있는 그런 연극 방식은 폴란드의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에 의해 ‘가난한 연극’이라 이름 붙여졌다.

 

그로토프스키의 실험극 이론인 가난한 연극은 단지 무대만을 배제한 이론이 아니다. 배우를 제외한 여타의 모든 것을 배제해도 가능한 것, 그게 바로 연극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격한(?) 이론은 당시의 매스미디어(영화나 TV)의 활발한 세 확산과도 관계가 깊다. 영화나 텔레비전이 의존하는 테크닉에 반대하고 조명, 의상, 무대장치로부터도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배우의 몸짓이 미장센이 된다.

 

이제껏 보아온 연극 중에 그래도 개인적으로 명작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89년인가 90년인가 러시아국립극단이 내한해서 문예회관대극장(現 아르코극장)에서 공연했던 「햄릿」이다.

 

그 넓은 대극장 무대 위에 장치라고는 달랑 원통형 기둥 네 개뿐. 그리고 이어서 펼쳐지는 햄릿의 장엄한 의식들. 3시간 반의 공연을 이렇듯 텅 빈 무대 위에 펼쳐 놓는대도 지루할 틈도 없이 긴장감으로 무대를 응시해야 했다. 마치 그때그때 무대가 바뀌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때로는 그 네 개의 기둥이 기준선이 되어 앞쪽은 이승의 세계가 되고 뒤쪽은 저승의 세계가 되며, 또 때로는 궁궐의 안과 밖이 되기도 하고, 네 편과 내편의 경계선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공연의 피날레는 네 개의 기둥이 관객석을 향해 들어 올려지며, 그 기둥들로부터 환한 빛줄기가 어둠에 싸인 객석을 향해 투사된다. 희망이다.

 

희고 검은 단출한 무대를 보며, 이십 여 년 전의 그 무대 「햄릿」을 떠올렸던 이유는 어쩌면 그때와 비슷한 감동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나름의 길한 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다. 고선웅 연출의 「홍도」는 훌륭했다. 배우 예지원씨의 연기도 압권이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예지원에 의한, 예지원을 위한 연극’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연극 「홍도」는 예지원을 돋보이게 했다.

 

▲ 연극 「홍도」의 포스터와 함께 강동완

 

이 연극 「홍도」의 원작은 1936년 임선규 선생이 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다. 이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것이 고선웅 버전의 「홍도」라고 볼 수 있다.

 

내용이야 뭐 이미 다들 아는 것이니 여기서 다시 소개할 필요는 없을 듯 하나 간략히 적어 본다면, 오빠(홍의준 분)의 공부를 위해 기생이 된 홍도(예지원 분)의 기구한 운영 정도가 되겠다. 요즘 우리들 안방을 수놓고 있는 신파형 아침드라마의 원조격이다.

 

연극은 크게 두 개의 스토리로 나눠 볼 수 있다. 이는 고선웅 연출의 의도적인 구분선 긋기로 판단이 된다. 초반부 무대 위를 밝히고 있는 홍등과 중반 이후 홍등이 올라가고 사람 인(人)자 모양의 기와집 지붕이 천정에 내걸리는 부분으로 양분화 된다.

 

홍등의 의미는 홍도의 전반부 인생, 사람 人자 모양의 기와집 지붕은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홍도의 후반부 인생을 상징화한 형상물처럼 보인다.

 

배우들의 연기는 원작의 느낌을 살리고자 했던 이유 때문인지 신파극조의 발성법을 따르고 있는데 홍도의 이미지와도 부합이 되고, 나름 마당극과 현대극을 뒤섞어 놓은 듯한 극의 이미지 상, 그리고 코믹한 극의 전개 등을 고려해 볼 때 의미 있는 선택으로 보인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완전히 비어 있는 텅 빈 무대를 지향한 것이 아니었다면 굳이 조명까지도 배제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백색 계열의 무대장치 위를 좀 더 다양한 조명효과를 통해 구획 지웠더라면 장소의 전환이나 분위기 창조에 한층 기여했을 것이기에 그렇다.

 

특히나,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홍도의 집안일과 관계된 다양한 소품들이 조명 밖에 위치해 있는 탓으로 마치 극과는 동떨어진 화면 밖 어떤 물체를 보는 느낌이 들더라는 점이다. 배우의 움직임이 무대의 생명이듯, 소품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것은 역시 조명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음향의 사용이 간혹 있었는데 이것 역시 마당극의 형식을 빌려 무대 위에서 라이브로 실연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현대음악이든, 고전음악이든, 아니면 음향이 되었든 무대 위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공간에서 충분히 실연 가능하기에 그렇다. 그랬다면 극의 분위기와 한층 조화를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마지막으로 무대(배우)와 관객과의 구분을 그렇듯 철저히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부분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과 어우러져 함께 하는 극으로 만들었더라면 재미와 흥, 웃음과 즐거움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결과가 예측 가능한 뻔한 스토리라는데 보는 관객의 곤혹스러움과 지루함이 있다. 이를 상쇄하기에는 관객의 참여가 절대적일 수 있다.

 

이 연극 「홍도」의 백미는 마지막에 홍도가 자신의 라이벌 혜숙(최주연 분)을 살해하고 경찰이 된 오빠 철수의 손에 체포되어 잡혀가는 대목이다. 하얀색 무대 위로 붉은 꽃잎이 눈처럼 쏟아진다. 울림이 크다.

 

이제까지의 연극이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였다면 고선웅 버전의 연극은 “홍도야 울어라, 오빠는 없다”가 되겠다.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부분이나 시사하는 바는 제법 크다. 전자의 연극이 주는 메시지는 오빠의 존재가 홍도의 어려운 형편을 구해줄 수 있다는 희망적 대사라면, 후자는 그게 가능하지 않은 시대적 상황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다. 더 이상 신분상승의 엘리베이터는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다.

 

그래도 홍도는 꿋꿋하게 대답한다.

 

“오빠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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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