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영'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07.02 영화 <소수의견>
  2. 2014.08.06 영화 해적-바다로 간 산적 1
  3. 2014.07.29 군도 민란의 시대 1
2007년~현재/감 상2015. 7. 2. 00:36

그래도 역사는 발전한다.

 

내 청춘을 통틀어 수없이 되뇌었던 가장 긍정적이자 간절한 언어 중 하나다. 그런데 굴곡이 있더라. 앞서가는 듯싶다가는 어느 순간 현실을 직시해 보면 다시 한참을 뒷걸음 친 것 같은 아이러니한 상황들. 그런 우여곡절의 역사를 내 삶으로 살아내면서 예술(영화)이란 장르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영화를 통해서라면 내 방식대로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도 있겠구나 싶은 철부지 같은 무모함에 간절히 그 길을 갈망했던 젊은 날들이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니 느끼겠더라. 영화 같은 이야기는 꼭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로구나 하는 깨달음 같은 것 말이다.

 

60억 인구가 복작대는 지구촌 어느 구석에선가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들이 현실이 되어 있더라는 불편한 진실 같은 것이다. 하기야 그 예가 꼭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나라의 어느 구석일 필요는 없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에서도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들이 부지기수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음이 현실이니 말이다.

 

그렇게 철(?)이 들어가면서 영화에 대한 간절한 갈망은 하찮은 젊은 날의 꿈 정도로 전락되어 버린 채 이 나이에 들었다.

 

 

▲ 영화 소수의견

 

김성제 감독의 영화 「소수의견」은 '이 영화의 사건과 인물이 허구'임을 자막으로 밝히며 시작한다. 재건축을 위한 철거현장에서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고 2명이 목숨을 잃는다. 이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측과 이를 막고 은폐하려고 하는 측의 법정 공방이 주된 내용이다.

 

어쩌면 자유, 민주, 평등의 원리는 ‘다름’을 서로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가치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의 다름이란, 비단 생각의 다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상과 이념, 경제적 정도, 신체적 조건, 지능의 높고 낮음, 거주지역의 수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다름은 깡그리 무시한 채 1등부터 꼴찌까지를 일렬로 서열화 시키려는 무한 경쟁 체제, 다른 한편으로는 다름을 반대(부정)로 인식하고 오로지 하나로만 통일시키려는 획일화된 독재적 발상이 되겠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그런 편협한 행위를 숭고한 애국이라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모든 반인륜적 행위가 용서 가능해 지는 것이고 말이다.

 

영화 「소수의견」의 구조 역시 같은 맥락이다. 국가를 위해 공권력의 남용을 당연시 하는 세력(다름을 부정하는)과 이를 부당하다며 저항하는 세력(다름을 인정하는) 간의 극한 대치 구조가 영화의 핵심 얼개다. 다소 엉성하긴 하지만...

 

이런 좋은 주제의 영화들을 볼 때면 간혹 느끼는 문제 중에 하나가, 좋은 이야기를 보다 더 훌륭한 영상과 스토리텔링으로 꾸며낼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더 멋졌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무리 절실한 문제의식이라 한들 그게 모두가 예견 가능한, 내지는 일상화된 사건의 나열로 흐른다면 극적 긴장감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아들을 잃은 박재호(이경영 분)는 자신의 쇠파이프에 의해 목숨을 잃은 전경 김희택의 아버지(장광 분)에게 재판과정 중에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를 연발하며 사죄하는 장면이 나온다.

 

글쎄다, 세상에 미안해해야 하는 이들이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나 또한 이렇듯 혼탁한 세상의 일원인 것을... 그래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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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7년~현재/감 상2014. 8. 6. 17:19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글을 쓰는 분들이나 영화감독들은 '상상력과 가정법의 마술사'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 말입니다. 밖으로 드러난 하나의 줄기를 번쩍 들어 올려 무수히 많은 고구마 줄기를 끄집어내듯이, 그들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나 봅니다. “그게 그때 만일 그랬었다면...” 이런 번뜩이는 상상력과 가정법이 돋보이는 영화가 ‘해적-바다로 간 산적’ 입니다.

 

1388년 고려말기, 요동정벌에 나선 이성계가 압록강 하구 위화도에서 전쟁을 단념하고 회군을 결정하자, 장수 모흥갑(김태우 분)의 부하였던 장사정(김남길 분)은 역적질에 함께할 수 없다며 반발하다가 도망쳐 산적떼의 두목 노릇을 합니다.

 

한편, 바다에서는 소마(이경영 분)를 두목으로 한 일군의 해적떼가 무리를 지어 세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 밑에 부두목급 인물이 여월(손예진 분)로 이 네 사람이 영화 ‘해적’의 중심축을 이룹니다.

 

▲ 영화 <해적>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같은 시기, 고려를 엎어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이성계는 명나라로부터 국호와 국새를 하사받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게 되는데, 예문춘추관대학사 한상질(오달수 분)이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명으로부터 국호와 국새를 받고 귀국길에 오르던 배 위에서 고래의 습격을 받아 배는 반파되고 국새를 고래가 삼켜버리는 황당한 사고가 발생합니다.

 

바로, 이 고래를 잡아 국새를 되찾으려는 또는 차지하려는 자들의 물고 물리는 갈등과 대립의 쟁탈전을 영화 ‘해적’은 나름 코믹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름’이라는 토를 단 이유는 제 개인적으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사실, 연기를 하거나 연출을 했던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코믹연기만큼 어려운 게 없다고들 합니다. 어찌 보면 코믹연기는 타고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만큼 웃음을 유발하는 연기가 어렵다는 의미일 겁니다.

 

이 영화 '해적' 역시 웃음을 통한 재미를 표방하는 작품이기에 영화 곳곳에 웃음 코드들을 깔아 놓고 있습니다. 철봉역의 유해진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뛰어난 배우임에 틀림없습니다만, 항상 보던 유해진식 유해진 연기는 다소 식상하다는 것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좋은 연기자, 오래가는 배우가 되려면 분명히 고민해봐야 할 대목이라 사료됩니다.

 

그리고 작품의 주연이라 할 김남길의 코믹성에 대해서는 인물분석을 통한 캐릭터 창조가 좀 미진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열심히 하고자 하는 것은 보이는데, 뭔가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는 것과 같은 어색함이 영화를 보는 내내 눈에 거슬렸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연기는 대사와 몸짓, 감정의 삼위일체가 핵심이자 필수입니다. 예를 들어, 대사는 어리바리하게 하는데 몸짓이나 행동하는 것은 의젓하고 바르다면 이것은 굉장히 거북스러운 연기가 됩니다. 즉, 대사가 어리바리하면 몸짓도 어리바리 해야 자연스러운 연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감정은 어떨까요? 대사와 몸짓은 어리바리한데 감정이 이입이 안 되어 따로 노는 경우, 이것은 눈빛이 말해줍니다. 연기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다들 '좀 모자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인물일 수도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인물분석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물분석이 중요한 것이 됩니다.

 

영화 '해적'의 압권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된 스펙터클한 화면의 조합입니다. 초반의 칼싸움 장면, 대포를 훔쳐 달아나는 장사정 패거리와 여월간의 추격전 그리고 언덕을 굴러 내려오는 물레방아, 고래의 유영, 바다 위에서의 전투 장면 등 많은 볼거리들을 CG가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유쾌한 웃음과 통쾌한 즐거움을 원한다면 지루하지 않은 두 시간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세상의 모든 순진한 것들은 권력의 재물이 되는 법”이라는 악질 해적 두목 소마(이경영 분)의 일갈 역시 요즘 같이 얼치기들이 판치는 세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도 말씀 드리고 싶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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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7년~현재/감 상2014. 7. 29. 09:05

한 여론조사 전문 기관이 50대 여성 30여만 명을 대상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으십니까?”

 

그런데 굉장히 의외의 대답이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대답은 “현재의 50대가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인즉, 10대는 공부에 시달려야 하고, 20대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부담, 30대는 자녀들 돌봄에 지치고, 40대는 여유가 안 되고, 비로소 50대가 되니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여유 있는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일견 이해되는 대목이 많습니다. 이는 역으로 우리사회 50대의 급격한 보수화 경향을 잘 설명해 주는 한 예로써도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50년 고생 끝에 이제 막 삶의 안정을 찾고, 그것을 만끽하고 있는 이들에게 변화와 개혁은 터부시하고 싶은 어떤 것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기만 한 우리사회에서 변혁의 동력을 놓고 고뇌하고 있는 분들의 고민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잘 웅변해 주는 결과인 것 같습니다.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를 봤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불현듯 이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마도 50을 목전에 둔 저 자신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란의 성공을 간절히 희구하는 제 속마음이 오버랩 되어 나타난 현상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니, 어쩌면 영화 ‘군도’에 대한 찐한 아쉬움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것일지도 모르겠고 말입니다.


▲ <군도> 포스터,   롯데시네마 촬영


‘군도’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조선 철종 13년(1862년), 실제로 당시의 서민 삶이라고 하는 것은 거죽만 붙어 있는 산송장과 같았다고 합니다. 자연재해로 인한 연이은 흉년에 더해 세도정치를 등에 업은 탐관오리들의 학정 탓이었음은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를 참지 못한 농민들과 몰락한 양반계층은 힘을 모아 봉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전국적으로 약 삼사십 여회에 이르는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영화 ‘군도’는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쇠백정에서 깨우친 농민군으로 변신하는 도치(하정우 분)와 부잣집의 서얼로 태어난 자신의 출신 성분이라는 굴레를 평생 떨쳐버리지 못한 채 오로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살아가는 조윤(강동원 분). 이 두 대립축이 농민군과 세도가로서 영화 '군도'의 핵심 모티브입니다.

 

쇠백정으로 살아가던 도치는 어느 날 조윤의 부름을 받습니다. 남편을 잃고 절로 피신해 있는 조윤의 제수(弟嫂, 본처 아들의 부인)를 없애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과 함께 돈을 받게 됩니다. 조윤은 기생 어머니를 둔 서얼 출신이므로 아버지의 본처가 낳은 동생의 씨앗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가업을 물려받아야 하는데 본처의 씨가 있는 한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쇠백정은 그녀를 없애기 위해 절간으로 향했으나 임신한 상태인 그녀를 본 후, 죽이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와 받은 돈을 되돌려 줍니다. 하지만 이에 앙심을 품은 조윤의 부하에 의해 어머니와 여동생이 불에 타 죽고, 자신은 간신히 목숨만 건집니다.

 

이후, 쇠백정은 농민군의 일원이 되어 조윤에게 복수할 날만을 학수고대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조윤의 집을 털기로 하고 거사를 실행에 옮기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농민군의 지리산 산채는 조윤과 관군의 급습을 받고 전멸하게 됩니다.

 

이때, 그곳에서 조윤은 자신의 어린 조카(동생의 아들)를 발견합니다. 조윤의 제수가 농민군에 몸을 의탁한 채 애를 낳은 후 죽게 되어 이 아이는 농민군들이 키우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조카임을 한 눈에 알아 본 조윤은 그 아이를 데려 갑니다.

 

하지만 조윤의 아버지 역시 그 아이가 자신의 피붙이임을 직감으로 알고는 조윤에게서 몰래 빼내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조윤은 그 길로 아버지에게로 달려갔으나 여전히 싸늘한 냉대에 절망한 그는 아버지마저 목 졸라 살해합니다. 「더러운 땅에 연꽃이 피어오르는 것이 신의 뜻인가, 아니면 연꽃의 의지인가?」 조윤의 독백입니다.

 

그리고 끝내는 조카를 품에 안은 채 도치의 칼을 받고 목숨을 잃습니다. 피로 끌리는, 뭔지 모르는 그 애틋한 감정을 지키려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셈이지요.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가 봅니다.

 

‘군도’는 그냥 재미있게 만든 오락영화다, 저는 그렇게 봤습니다. 한국산 웨스턴 무비, 아니면 한국산 무협지라고나 할까요. 흥행의 요소를 잘 아는 감독의 작품인 듯한 느낌 또한 강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우선, ‘군도’라는 제목부터가 잘못되었지 않나 싶었습니다. 차라리 ‘아들의 이름으로‘가 더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주체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한 사람의 인간이 주체가 된다는 의미는 타인에 의해 이름 불려짐(상징 기호)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이름 불려짐 즉, 어려서는 개똥이가 되고, 성장해서는 직장에서의 직급이 되기도 하며, 또는 누구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려지는 과정들에 의해 사회구조 속에서 주체로서 자신의 위치가 정립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주체의 정립 뒤에는 소외라는 결핍감이 동반됩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첫 단계는 자신의 욕망 대상으로서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욕망의 팔루스는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를 포기하게 되는데, 아버지라는 법을 인정하고 어머니를 포기하는 거세의 과정을 통해 주체에게는 소외(빈공간)가 따르게 됩니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이 결핍감을 안고 사는 주체로서의 ‘조윤’은 욕망의 화신으로 화한 채 인생을 허비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이름이 불리기(인정 받기)를 기대하며 말이지요. 「타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해 생을 걸어본 자가 있거든 나서라. 그자의 칼이라면 받겠다.」 자신과 대치 중이던 농민군들을 향한 조윤의 외침입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군도’는 두 개의 큰 대립축이 있습니다. 도치를 중심으로 한 농민군 세력이 하나고, 조윤으로 대표되는 포악한 세도가들이 다른 한 축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민란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민란의 반대편에 있는 타락한 세도가 자제로서의 인간 조윤의 캐릭터가 워낙 조밀하다보니 이쪽으로 관객의 감정이 이입되어 이 두 대립축이 강하게 부딪히지 못한 채, 이쪽저쪽 모두를 긍정하는 쪽으로 흘러버리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즉, 악질 지주인 조윤을 절대로 미워할 수만은 없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거기다가 얼굴까지 잘 생겼으니...

 

이렇듯 시나리오 상으로만 이야기 하자면 치명적인 모순을 처음부터 잉태하고 출발한 셈이 됩니다. 거기다가 오락성까지 가미가 되다보니 처절해야 할 민란 영화로서의 ‘군도’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받기가 쉽지 않은 태생적 구조를 갖고 있다 하겠습니다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제목을 그대로 고집했다면 이는 솔직하지 못한 탓이고, 진실로 '민란의 시대'를 조명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의도했던 것이라면 이는 작품성의 실패로 귀결된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시각을 다소 바꾸어서 보면, 오락영화로서의 ‘군도’에는 아주 다양한 즐길 거리들이 즐비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를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정우와 강동원, 이경영, 이성민으로 대표되는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은 영화 보는 재미를 더해줄 뿐만 아니라 영화 속으로 흠뻑 빠져들게 합니다.

 

여기에 더해, 활극 영화로써의 스케일과 만화적 요소의 삽입 등으로 영화의 재미는 한층 배가 되는데 마치 예전에 유행했던 홍콩느와르의 조선 버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옥에 티와도 같은 어색한 부분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컴퓨터 그래픽의 톤이 너무 맑지 않았나 -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한다면 - 하는 점과 농민군의 지리산 산채의 위치 - 관군의 공격에 수비하기 좋은 위치여야 하는데 산속 협곡에 위치하고 있어 기습 공격에 치명적 - 가 적절치 않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에 민란은 없습니다. 재미는 있습니다.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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