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시 사2017. 12. 27. 14:35

정당정치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고찰

 

. 서론

 

"지배계급이 동의를 잃었을 때, 즉 더 이상 지도적이지 못하고 지배적으로 되어 강제라는 순수한 폭력만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거대한 대중이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더 이상 그들이 전에 믿었던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기는 낡은 것이 사라졌는데도 새로운 것은 생겨나지 못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 「감옥에서 보낸 편지」 중에서

                               

12월 이때쯤은, 본래 예정되어 있는 역사의 일정표에 따르자면 차기 대통령선거일이 된다. 아마 지금쯤 대권을 향한 후보들의 열띤 선거유세로 전국이 들썩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그 시기를 한참 지나 차기 정부 6개월을 넘기고 있다. 박근혜의 대통령직 탄핵과 그에 따른 조기대선의 결과다.

   

작년 이맘때, 분노한 시민들은 이게 나라냐라며 거대한 촛불행렬로 자신들이 민주공화국의 주인임을 만천하에 고했다. 그 결과로 정권이 바뀌었고, 지금 적폐청산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허, 그 과정은 지지부진하기 이를 때 없다. 대통령 한 사람 바뀌었다고 변하는 게 많을 수 없음을 여실히 실감케 해주고 있다.

   

적폐의 정점이라 할 박근혜와 최순실은 자신들에게 들씌워진 국정농단ᆞ권력남용이란 죄명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반발하고 있고, 그에 부역했던 일당들 중 핵심 몇몇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청산대상에서 빗겨나고 있다. 한국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적폐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통령 한 사람과 그 몇몇 일당들이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무소불위한 사태를 경험했고, 견제되지 않는 권력이 적폐청산의 걸림돌이 되는 현실을 목도 중에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대통령 한 사람이 국정을 농단하고, 국가 권력을 사유화 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며, 역으로 대통령 한 사람 바뀌었다고 해도 변하는 게 결코 많지 않음을 실감해야 하는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이 논문은 출발한다. 그리고 그 결론은 공적기구(그리고 공적기구의 구성원으로서의)로서의 정당화(당원화), 대의제의 강화를 통한 민의의 반영이고, 시민주도형 직접민주주의의 생활화를 통한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견제력 확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제2장에서는 정당정치 혹은 정치의 위기는 위기가 아니라 발전적으로 진화 중인 현재진행형 민주주의의 성장통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의 현실을 논할 것이며, 3장에서는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정치위기는 단순히 정치의 위기가 아니라 정치체제의 생명체라고도 할 개인(시민)의 위기, 즉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견제하지 못하는 시민들의 연합체인 정치기구(정당)의 세력 약화에 기인한 위기임을 논하고, 마지막 4장에서는 결론을 대신하여 참여를 넘어 주도적 주체로서의 시민정당정치를 대안으로 제시하겠다.

 

. 정치의 위기? 정치는 진화 중!

 

많은 이들이 정치의 위기를 말한다. 정치적 결사체인 정당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대의민주주의의 결과물인 정치권력이 구태의 산물로 전락했다며 평가절하하려 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권자인 시민의 선택에 문제가 있다는 타박에 다름 아니며, 더 확대해서 해석하자면 시민들의 대리자들(정치인)에 대한 비판을 빌린 시민세력에 대한 심각한 도전 행위다.. 그러니 이런 논리를 확대재생산하며, 이를 다시 시민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세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음을 그람시의 지배통치’, ‘헤게모니라는 용어가 잘 설명해 준다.

   

그람시가 헤게모니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것은 1924년 빈에서 이태리 공산당에게 보낸 편지에서였으나, 헤게모니 개념이 그의 저작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로 명확하게 나타난 것은 1926년 봄 체포 직전에 쓴 미완성의 논문 『남부문제의 제주제』(Notes on the Southern Question)에서 인데 여기서 헤게모니 개념은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튜린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노동자 국가의 사회적 기반-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였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국가에 대항하는 다수의 노동자를 동원할 수 있는 동맹체제를 구축할 때에 비로소 지도계급(leading class, dirigente)과 지배계급(dominant class)이 될 수 있다. 실질적인 계급관계가 존재하는 이태리의 경우, 이것은 광범위한 농민대중의 합의를 확보하는 정도를 의미한다."[1]

   

이처럼 『옥중수고』 집필 이전의 그람시는 헤게모니 개념을 계급동맹적 관점에서 파악했다. 무페는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논문은 그람시 사상에 있어서 발전적 단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옥중수고』 11권에서부터 헤게모니의 문제영역에 중요한 혁신을 가져오게 된다고 말한다.

   

"앞으로의 연구가 기반으로 해야 하는 역사적정치적 기준은 다음과 같다. 즉 지배계급은 2가지 측면에서 지배적이다.  2가지 측면이란 다름 아닌 '지배(dominant)'와 통치(ruling)'의 측면으로서, 동맹계급을 통치하며, 적대계급을 지배한다."[2]

   

한편 그람시는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 획득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헤게모니의 쟁취가 선결적 과제임을 밝혀주었다. 지배계급은 헤게모니를 장악한 채 피지배계급을 정치적으로 종속시킬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까지 종속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 정신적 지배는 정치적 지배의 선결조건이라는 의미이다. 노동자계급의 세계관과 가치체계가 사회 제계급의 정치적 동맹이 되고,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의 위치로 서지 않으면 정치권력의 획득, 나아가 혁명 승리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또한 그람시는 대중들의 일상생활에서의 관습을 전환하기 위해 지적ᆞ도덕적 개혁을 강조한다. 지식인에 의한 대중의 지도가 필요해지는 지점이다. 여기서의 지식인에 의한 지도란 단순한 진리의 주입이 아니라 상식[3]의 일면성을 일관성 있는 세계관, 주체적 가치관으로 수렴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시민대중의 자발적 참여로 실현되었던 거대한 촛불민심이 보다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민주적 대중조직으로서의 시민혁명 촛불세력으로 나아가는 과정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대의제에 적대적인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입장에서 가장 요주의 권력은 바로 선출된 권력, 의회권력이다. 자칫 의회권력이 제 역할에 충실하게 되거나, 그 힘이 강력해지는 순간,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견제력 역시 강도를 더할 것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관료, 언론, 사학, 판ᆞ검사 등-은 암묵적 동의 하에 선출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끌어내리기를 시도한다. 그들의 입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으로 대표되는 메스미디어다. 정치위기라 불리는 것의 실체는 바로 여기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유독 대의제(입법부)의 의원들에게만 특권 내려 놓기를 강요하는 언론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시민들의 대리자로서의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생존 비결은 어떠한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 혹은 정치구조는 87년 체제가 그 토대를 이루고 있다. 짧디짧은 민주정치의 역사 속에서 명확한 특징 세가지가 눈에 띈다. 우선 영ᆞ호남으로 대변되는 지역주의와, 이 지역주의를 조장하며 지역주의에 기생한 채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친일ᆞ친미ᆞ반공ᆞ군부 등 반민족세력이 그것이다. 영ᆞ호남으로, 때로는 영ᆞ호남과 충청으로 이분할/삼분할 되는 지역구도는 그 기반이 워낙 공고해 설사 진보적 시민사회단체 또는 학생운동 출신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은 뒤로한 채, 출생지역에 따라 여ᆞ야당을 선택해야만 했다. 오직 1등을 한 단 한 명의 후보만이 살아남는 승자독식의 소선구제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리고 이처럼 콘크리트와 같이 견고한 지역주의에, 앞서 거론한 반민족세력이 기생하며 선거구도 및 사회적 이슈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선점해 나갔다. 그람시적 용어로 확실한 헤게모니장악에 이은 통치지배의 구도는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대한 재갈 물림 같은 것이었다. 이를 타개하는 기존의 방식은 3金식 리더쉽(87년 체제의 세번 째 특징), 즉 보스정치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당체제였다. 그런데 이 보스정치가 소멸하며 한국 정당정치가 새로운 모색의 첫발을 내딛게 되는데, 노무현의 등장과 열린우리당의 해체, 더불어 민주당의 탄생, 그리고 최근 사례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새누리당의 해체와 바른정당/자유한국당으로의 분화가 되겠다.

   

이러한 정치적 격동의 시기에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다. 2017년 겨울, 마침내 분노한 시민들이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연인원 천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나서서 대통령의 탄핵 및 구속, 그 일당들의 처벌을 외쳤다. 그런 촛불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왜 그 많은 사람들은 광장으로 나섰을까? 그저 단지 박근혜와 최순실 일당으로 대표되는 적폐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순수한 시민의식의 발로에서였을까?

   

시민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시민의 힘을 확인하고ᆞ과시하고ᆞ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정투쟁이었던 셈이다. 나는 이것을 시민파워(civil power)라 부를 것이다. 시민파워는 정치체제라는 구조 속에서 그에 참여하는 민중의 역량이 차지하는 비율에 따라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가늠하게 하는 척도와도 같다. 2017년 촛불혁명은 정당체제와 대의민주주의가 시민의 욕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할 때 시민들이 자신들의 힘을 촛불로 표현한 대표적인 사례다. 문제는 일회성 힘의 과시라는 점이다. 이를 어떻게 지속 가능한 힘의 우위로, 공적구조 내에서의 시민파워로 자리매김시킬 것인가가 관건이다. 정치위기를 논하면서 정치리더쉽의 부재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거론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혼란상은 단순한 리더쉽의 문제라기 보다는 역사청산 실패에 의한 구조적 측면이 더 크다. 한쪽에서는 상대를 청산되지 못한 친일과 군부독재의 잔재로 인식하고, 상대는 또 한쪽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이런 극단의 분위기 하에서 협치나 대화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보다 못한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선 것이다. 이 적폐들을 청산하라고 말이다. 이렇듯 대한민국의 정치(민주주의)는 깨어있으며, 참여하는 시민들에 의해 발전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 정당정치의 부활? 직접민주주의 강화!

 

대한민국은 삼권분립을 기조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다.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사법부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견제ᆞ감시하며 민주주의의 발전을 견인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비스듬한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하는 것처럼, 애초부터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면 문제가 된다. 강력한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하는 현재 대한민국의 삼권분립 체제가 그렇다.

   

앞서도 거론했던 바와 같이, 헤게모니적 우위를 점하려는 세력들에 의해 입법권력(의회)은 누더기 꼴이 되어 있다. 시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선출한 의회정치 권력을 본인들 스스로가 부정하며 깎아 내리는 형국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이렇듯 의회권력의 세력 약화를 획책하는 세력들은 의회권력의 견제를 받아야 하는 대부분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이라는 점은 이미 지적했다.

   

일례로, 얼마전 한 고위공직자는 술자리에서 민중은 개ᆞ돼지라며 막말을 했다가 대중들의 분노를 산 바 있다. 진정으로 시민파워가 살아있었다면, 그래도 그런 식으로 민중들 알기를 개나 돼지 보듯 했을까? 이 뿐만이 아니다. 현재 법원과 검찰의 비대화 및 권력독점 현상은 심각하다 못해 그들의 세상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법원부터 보자. 법원에는 차관급 대우를 받는 고등법원 부장판사급 판사들이 무려 200여명에 이른다. 검찰 역시 50여명의 검사장급 검사가 있다. 이들 또한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법무부에만 50여명의 차관급 국장들이 있다. 검사 출신들이 맡는 법무부 내 국장만 차관급 대우를 받지, ()검사 출신 국장의 대우는 그렇지 않다. 또한 법무부를 제외한 다른 부서의 차관급은 겨우 1~2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들의 공통점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더 아이러니 한 것은 이러한 지위와 대우에 걸맞지 않게 국민들의 사법부 신뢰도는 겨우 27%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OECD 42개 가맹국들과 비교했을 때, 처참하게도 최하위 수준인 39위라는 사실은 사법부 및 검찰 개혁이 얼마나 시급한 현안 문제인지를 잘 증명해 준다 하겠다.

   

정당은 국가장치의 한 구성요소이다. 대의제의 핵심인 정당이 살아야 민주주의도 건강해 진다. 그래서 현실 정치위기의 키워드는 정당이다. 그것도 공적기구로서의 정당이다. 또한 공적기구의 구성원으로서의 당원의 지위 확보가 관건이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그저 얻어지는 가뭄의 단비 같은 것이 아니다. 무수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주인된 자로서의 자각과 각성, 사회에 대한 이해는 민주시민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행정부는 공무원 입문을 통해, 사법부는 사법시험이라는 관문을 통해 그 이해의 수준을 넓혀 나가고 있으나, 유독 입법부만이 그러한 공적 기구가 없다. 정당과 당원은 있으되, 그 역할은 자율적이며 하향식 질서에 순응하는 요식적인 경우가 전부였다. 이제와서, 권리당원이라는 명분으로 그 기능을 확대 개편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부족하기 그지없다. 정당의 당원은, 공무원들이 공무를 보고 녹을 받듯이, 이와 동등한 공적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 또한 중앙의회(입법부)는 행정부 관료 및 사법부와 검찰의 인사심사권을 가져야 하며, 지방의회는 지자체 공무원 및 지역경찰, 지방직 소방관 등에 대한 인사심사권을 부여 받아야 한다. 견제와 감시라는 측면에서 시민의 대리인에 의한 이러한 권한은 정당하다. 정당이라는 공적기구는 민주주의 교육의 장이며, 행정부와 사법부를 견제ᆞ감시하는 시민의 기구이며, 지방분권시대를 꽃피울 시민주권의 결사체이기에  특히 그렇다.

 

. 결론: 시민참여를 넘어 시민주도로

 

장면 하나. 북한 선제타격설, 한반도 전쟁 위기설 등 북핵위기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언론의 보도만을 놓고 본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전쟁이 난다한들 하나 이상할 게 없을 듯한 팽배한 긴장감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있다. 북미 당국자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불에 기름을 붓는 듯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이쯤되면 불안과 공포, 사재기가 판을 쳐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봐서 알듯이 전혀 그렇지가 않다. 변죽만 주야장천 울려대는 매파 언론들에게, 마치 보란듯이 시민들의 반응은 몹시도 냉철하며 평온하다. 사태가 이리 전개되니 난감한 것은 저들이다. 예전과 달라도 너무나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무엇이 시민들을 이렇게 달라지게 만들었을까?

   

이는 직접 참여해서 세상을 바꾼 시민들의 자신감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꾸어 놓은 새로운 정권 또한 여하한의 전쟁에도 반대한다는 자신들의 생각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평온함이다. 이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보는 여론-지난 8월 중순 중앙일보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약 58.6%가 한반도에서의 무력충돌 가능성이 낮다[4]고 보았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같은 날짜 중앙일보 여론조사에 의하면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83.9%였다[5]-이 다 같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예증해주고 있다.

   

장면 둘. 며칠 전, 제천 스포츠센터에 화재가 발생해 29명의 인명이 희생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건물 외벽 마감재로 스티로폼을 사용하는 드라이비트 공법은 화재시 유독가스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부실한 건물관리, 소방대원의 부족 등 설마가 사람 잡은 전형적인 인재형 사고다. 그런데 그 현장에 달려간 여야 지도부는 마치 자신들이 사고의 주범, 혹은 방조자라도 된 양 죄 지은 사람들 같았다. 새누리당 원내대표인 김성태의원은 무릎까지 끓고 희생자 유족의 항의를 들어야만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국회의원(정치인)은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만능적(슈퍼맨) 존재인가? 아니, 국회의원에게 그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만한 능력이 있기는 한 것인가? 단언컨대 없다. 그런데 왜 자진해서 찾아가서 비굴한 태도를 보이며 굽실거려야 했을까? 정치인에게는 표가 생명줄이기에 그렇다. 이게 문제다. 모든 것을 표로 계산하는, 모든 인간이 표로 보이는, 이렇게 해서는 정치가 발전할 수 없다. 한마디로 넌센스다. 시민과 그들의 대리자는 하나의(같은) 연합체이다. 정치를 이렇게 희화화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사고에 대한 자초지종을 파악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개선책에 몰두해야 함이 정치인 본분의 역할이지,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며 빌 사안이 아니다. 무릎 꿇고 빌어야 할 인사들은 오히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갖고 있는 이들(관료 또는 공무원)이다. 인허가권 및 행정 지도단속의 권한이 그들의 고유업무이기에 그렇다. 그러니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을 잘못 찾은 정치인들의 행보다. 이게 바로 현재와 같이 지역에 기반한 소선거구제의 병폐이다. 국회의원의 선출방식이 정당명부제에 입각한 비례대표적 성격을 띠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정치위기를 설파하고, 정치를 폄훼하기를 일삼는 이들의 대부분은 그 자신들이 정치의 참된 주인임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정치불신으로 인해 자신들이 이득을 보는 자들이다. 정치불신 풍조가 만연할수록 정치는 마치 실체(시민)를 잃어버린 유령처럼 세상을 떠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기를 희망으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것을 생겨나게 하는 것 외에는 없다. 그 새로움은 시민주도형 풀뿌리 정당정치가 답이다. 국가로부터 녹을 받는 권리당원에 의해 운영되는 정당, 당원들의 의견으로 만들어진 정책, 그리고 그 정책을 성실히 수행하는 국회의원 혹은 대통령, 이렇듯 당원(시민)에 의해 주도되는 정당정치에 의해 대의제는 삼부의 한 축, 즉 입법부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 정치를 시민의 품으로!



[1] C. 무페, 《그람시의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 개념》, 한울, 1989

[2]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3] 그람시가 '상식'(senso comun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작업은 옥중수고에서 비로소 시작됐지만 그 용어에 대한 연구는 그의 정치-저널리스트 활동의 초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옥중수고에서 상식은 시민사회의 핵심적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참호'를 얻기 위한 투쟁은 특히 상식의 영역에서 벌어진다. 그람시의 상식에 대한 분석은 특히 깊은 다층성을 보여준다. 상식의 본질은 그것이 실제 일상생활의 영향을 받아 형성될 뿐만 아니라 미우 보수적인 요소들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람시는 상식과 진보적인 고급문화를 융합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전제가 통합적인 인식과정 즉, "지식으로부터 이해로, 느낌으로의 끊임없는 이행, 그리고 그 반대로, 느낌으로부터 이해로, 지식으로의 이행"을 반드시 회복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상식이 그람시에게는 실천철학과 그 정치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학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이 우선 상술돼야 한다.(자빈 케비어, 《안토니오 그람시의 시민사회》, 백의, 1994)

[4] http://news.joins.com/article/21848014

[5] http://news.joins.com/article/21848318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