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읽 기2022. 3. 15. 16:33

꺾일 줄도 모른 채, 지친 기색이라고는 하나 없이, 모습마저 바꿔가며 세를 확산하고, 인류의 존망조차 위협할 듯 무서운 기세로 덤벼드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이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라 부른다. 코로나는 짧은 시간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물질적인가 비물질적인가, 혹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를 떠나 인간세계에 끼친 영향이 너무도 크고 막중하다.

 

누구에게는 생명의 종말을, 누군가에게는 육체적·정신적 아픔을, 누군가에게는 상실의 고통을, 누군가에게는 타인 기피증을 코로나는 안겼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미래를 그려볼 기회를 제공했다. 뿌연 안갯속 불분명함으로 인해 말만 무성했던 4차 산업혁명의 실체를 코로나가 또렷이 보여주기도 했다. 비대면과 거리 장벽의 극복이 그것이다.

 

뿐인가? 소중한 한 권의 책을 안겨주기도 했으니, 그 영향력의 끝이 어디일지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학창 시절에는 신사임당을 꿈꿨었다는 류자 선생의 『코로나 1박 2일』(대양미디어)이 그 주인공이다. 코로나라고 하는 엄중하며, 기괴하고, 때로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던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 저자는 한 송이 장미꽃을 피워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담담한 어조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살다 보면 앞만 바라보며 걷던 걸음이 갑자기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도 있다.” 저자에게 코로나는 그런 존재였나 보다. 그렇듯 일상에서 불쑥 튀어나오곤 하는, 속된 말로 ‘제수 옴 붙은’ 것 같은 그런 존재 말이다.

 

그래서일까? 코로나 팬데믹의 종말에도 다소 낙관적이다. “코로나는 예방백신과 치료제의 등장으로 곧 정복될 예정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던 걸음걸이가, 툭툭 털고 일어서서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그 용기에 의해 별것 아닌 잠시의 해프닝 정도로 그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들은 때로 난관 앞에 서서야 자신의 참된 진가를 발견하곤 한다. 그저 그런 일상인 줄로만 알았던 하루하루의 평온과 혼란, 기회와 위기가 실은 그의 육신과 내면을 단련시키는 담금질이었다는 사실은 언젠가 닥칠 지리멸렬한 곤란 앞에 섰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된다.

 

우리도 그렇다. 식민지배의 굴욕, 동족상잔의 전쟁과 폐허, 분단의 현실은 현재진행형으로 우리를 왜소화하는 요소였다. 당연히 우리는 스스로를 하찮게 여겼으며, 가야 할 길이 먼 후진적 국가의 국민으로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눈 떠 보니 선진국이더라는 누군가의 말마따나 우리는 선진 대한민국에서 풍요로운 국민으로 살고 있음을, 마치 새삼스레 발견이라도 한 듯 놀라워한다. K-문화, K-방역, K-푸드 등으로 호들갑을 떨지만, 이미 그런 호사들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 불과할 따름이다. 역시나 코로나 위기 상황이 가져다준 재발견이라면 재발견이다.

 

혹자는 세계 각국이 코로나 위기를 헤쳐나가는 극복 방안들을 분석하면서 우리 삶의 방식이 옳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우리의 고유한 공동체 중시 문화가 서구의 개인주의적 삶의 태도에 앞서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이 주장에 공감하든 아니든, 아무튼 이번 코로나 위기는 우리에게 소중한 경험을 안겨준 것만은 분명하다.

 

서구적 삶과 우리의 삶에 대한 비교 역시 그 한 예다. 사상사적으로 특히 그렇다. 서구문화의 우월감은 학문하는 이들에게는 넘기 힘든 벽과도 같다. 그 넘사벽은 두껍고도 높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이러한 서구 우위적 사고에 일대 전환을 위한 일종의 기폭제이자, 서구 문명 재인식의 긍정적 바이러스로 작용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서구, 특히 유럽 문명은 종교(기독교, 가톨릭)를 빼놓고 논하기란 곤란하다. 서구에서 종교는 종교 이전에 문화라고 봐야 하기에 그렇다. 확고하게 계급이 지배하던 고대 로마와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 신(神)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발상이었으나, 그런 시도가 있었다. 이는 이후 서구사회를 지배하는 중심 이데올로기로 발전한다.

 

여기에 더해 16~17세기 벌어진 시민(부르주아)혁명은 자유를 위한 피의 투쟁이었다. 물론, 이 당시의 자유 개념은 오늘날의 자유 개념과는 차이가 컸다. 당시의 자유는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 즉, '축적의 자유'를 의미했다.

 

봉건영주의 절대적 힘이 마치 법과도 같았던 중세 봉건시대 말기에 ‘상인’이라고 하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한다. 상업을 통해 이윤을 얻는 집단으로 역사상 일찍이 없던 계층이자 역할의 출현이었다. 당시의 이윤은 땅(토지)에서 얻어지는 농산물이거나 지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상업활동의 보장을 놓고 영주계급과 갈등을 빚던 이들 상공업자 부르주아 계층은 농민과 서민을 규합해 부르주아 혁명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들의 구호가 바로 ‘자유’였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숭고한 의미로서의 자유 개념은 근대 이후가 돼서야 비로소 정립된다.

 

정리하자면, 신 앞의 만인의 ‘평등’ 정신과 ‘자유’ 개념은 지금까지도 서구문화의 중심 사상이다. 이 두 정신은 서로 보완하고 충돌하며 인간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라고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단적으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자유 우위)를 지향하는가, 아니면 민주 공화정(평등 우위) 체제를 지향하는가에 따라 그 정책이 사뭇 달라진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개인의 자유이기는 하나,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진보와 보수로 가르는 경계점이기도 하다)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한 가지는 이 둘은 단지 상부구조일 뿐이고, 이 둘이 발 딛고 서 있는 토대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사실이다.

 

토대가 자본주의 체제라는 점은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바가 자본 축적의 고도화를 추구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여기에 자유(경제활동을 위한)를 더 중시할 것이냐, 아니면 평등(분배)을 더 중시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단순한 선택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자본에 자본을 더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에 평등을 더할 것이냐의 문제로 볼 수 있기에 그렇다. 어느 쪽으로 향할 때 기울어진 운동장이 될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런 이유에서다. 코로나 이후 서구사회의 마스크 거부 운동이 수긍되는 이유가 말이다. 전통적 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한 표현의 일환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한 자유, 그것을 위해 피의 깃발을 들었던 저들의 치열했던 과거 부르주아 혁명을 상기해 보자. 충분히, 저들은 그렇게 행동하는 게 맞는 거다. 개인의 마스크 쓰지 않을 자유가 몹시도 소중하기에 저들은 투쟁한다. 나와 타자 모두 자신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개인이다.

 

반면, 우리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사상은 어떠한가? 홍익인간은 주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나인 ‘인간’과 타자인 ‘인간’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연 혹은 관계에 주목한 사상이다.

 

재세이화는 인간 존재의 공(在)·시()성을 바른 이치()로 바꾸어 낸다는 의미다. 이는 홍익인간이 함의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공간성(在)에 더해, 그 기원이나 연원까지를 아우르는 역사적 시간성()까지도 포함하는 광의의 사상이다. 인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인간 상호 관계를 이치(체계)화 한다는 의미다. 그러니 내 개인적 자유와 타인에 대한 배려를 동일한 기준 위에 놓은 채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관습이다.

 

이들이 꿈꿨던 미래는 자연스럽게 대동세상(大同世上)으로 이어진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그 역사성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는 인간 상호성의 인정이며, 상호 다양성에 대한 이해이고, 상호 다름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이 공공선으로 이어진 곳에 대동세상이 존재한다.

 

각설하고,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보자. 역시, 저자에게도 코로나는 그저 악의 화신으로만 머물지 않고 일상의 어떤 것들이 새롭게 드러나고, 그것을 밝게 밝혀주는 등불의 역할로 확대된다. 무료하게만 느껴지던, 하지만 어김없이 늘 반복되던 일상이, 철저히, 단절되었다.

 

그것에 대한 그리움과 그로 인한 행복감. 코로나가 가져다준 마치 선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니다. 그 감흥을 저자는 이렇게 멋진 시로 풀어낸다.

 

행복한 날 – 류 자

 

아무 일도 없는 날들은 참 지루했지

매일매일 그럭저럭 지내는 날들

어제와 다를 게 없는 오늘을 살며

 

뭔가 좀 특별한 게 없을까

내일은 좀 다르게 살아보자고

허파에 바람 든 소리나 하며 살았지

 

먼 바다를 꿈꾸며 흘러가는 시냇물

있는 듯 없는 듯 졸졸 흐르는 물소리

리듬이 깨지면 안 되는 걸 그땐 몰랐지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코로나19

보이지 않는 창살에 꽁꽁 묶여보고야

평범한 일상이 행복이었던 걸 알았네

 

아침에 일어나 허겁지겁 출근을 하고

친구와 만나 악수를 하며 밥을 먹다가

때론 침 튀기며 언쟁도 좀 벌이던

 

늘 쳇바퀴처럼 돌기만 하던 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던 그날이 행복이었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7년~현재/읽 기2015. 8. 9. 12:10

인간 수명 100세 시대를 넘어 이제는 120세 시대를 기대하는 눈치다. 그리고 뒤이어 수명연장은 과연 축복이냐에 대한 의문도 추가된다.

 

100세가 되었든, 120세가 되었든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만 살다가 갈 수 있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겠으나 신체연령의 한계는 우리의 바람을 따라주지 못함이 현실이기에 그렇다.

 

그런데 이 신체연령의 한계에 더해 뇌 속 인지기능의 이상반응은 장수를 희구하는 우리들의 삶에 피폐함을 더해 준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치매라는 게 그것이다.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들어 있어.” 정우성과 손예진이 주연했던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도 신경퇴행성 질환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청춘 남녀의 로맨스를 담고 있다.

 

기억이 사라진다고 하는 극단적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어줬던 영화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중장년층으로 갈수록 제일 무섭다고 느낀다는 치매. 어느 연구 조사에 따르면, 60대 연령층에는 1~2%에 불과한 치매 환자가 80대가 되면 20~30%로 급증하고, 90세가 넘어가면 거의 절반 이상이 치매를 앓게 된다고 한다.

 

치매에 대한 두려움의 근저에는 기억이 사라진다거나 초조, 불안, 폭력성이 증가한다는 점 외에도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이라는 인식이 제일 크게 자리하고 있다.

 

오랜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이 있다. 치매를 앓고 있는 부모를, 아내 또는 부인을 살해한 이들의 슬픈 이야기가 신문 지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노년의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의 가정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자 절망의 외침이기도 하다. 도대체 언제까지 개인책임론만 되뇌고 있을 텐가? 국가는? 사회는? 노년의 문제는 이미 가정의 경계를 벗어난 지 오래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류자 선생의 시어머님은 치매를 앓고 계신다. 8년 전의 이야기란다.

 

치매 앓는 어머니와 함께 했던 8년, 그 인고의 세월을 시집 「치매도 시가 되는 여자」에 담아냈다.

 

 

▲ 류자 지음. 치매도 시가 되는 여자

 

치매를 앓는 부모의

자식은

마치 형벌을 등에 지고

아슬아슬한 절벽을 오름과 같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내게로 와

살을 파고 뼈를 도리는지

원망과 한탄으로 보내기에

다른 것은 너무도 멀쩡하다.

 

... 중략 ...

 

치매도 시가 되는

여자로 살기로 하자

마음 하나 바꿨을 뿐인데

밀쳐뒀던 쓴 도라지

산삼뿌리 기운을 내니

살아갈 힘이 솟는다

 

... 후략 ...

 

류자 시인의 시 <치매도 시가 되는 여자>의 일부이다.

 

우연한 자리에서 류자 시인으로부터 이 책 소개를 받았을 때, 공교롭게도 퍼뜩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은 고향에 계신 연로하신 내 어머니였다.

 

그래서 그날 술자리에서 건배사를 제안 받고서도 그 생각이 떠나지를 않아 “우리들의 어머니를 위하여”로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렇다고 내 어머니께서 현재 치매를 앓고 계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은연 중에 지금 이후의 어머니에 대한 걱정은 있다. 그래서였을 거다.

 

<치매시를 왜 쓰느냐 물으신다면...>

 

치매 8년차에 접어드는

시어머니와 함께하는

며느리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치매 진단을 받고

왜 나냐고

내가 왜 이걸 감당해야 하냐고

낙담과 슬픔에 빠진 건

당사자보다 더 아플 준비에 두려운

며느리였습니다.

 

... 중략 ...

 

그러던 어느날

시를 쓰게 되었지요

사건이 에피소드가 되고

도저히 알 수 없는

행동의 뒷면이 보이며

아하 그래서 그러셨구나

 

... 중략 ...

 

지옥으로 떠밀리다

천국의 계단에 발을 걸친

아슬아슬하고

생생한 이야기

“치매도 시가 되는 여자”입니다.

 

 

▲ 강동완이 추천하는 「치매도 시가 되는 여자」^^

 

시를 소개하는 도중에 중략과 후략을 둔 것은 저작권의 문제도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직접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픈 마음 때문이었음을 밝혀둔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7년~현재/읽 기2014. 7. 19. 20:49

남의 나라 말 배우기를 막 시작했을 무렵, 이메일로 보낼 짧은 문장이라도 하나 만들라치면 어김없이 찾게 되는 게 구글 자동번역기였다.

 

그런데 이 자동번역기의 번역이라는 게 영 신통치 않을 때가 종종 있다. 번역해서 옮겨 놓은 것은 분명 한글로 된 우리말인데,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게 번역을 해 놓기에 그렇다.

 

자동번역기를 좀 사용하다보면 나름 요령 같은 게 생긴다. 단문으로 쓰되, 직설적으로 표현을 해야 그나마 보다 더 정확한 표현에 가까운 번역을 해 준다는 점이 그것이다. 바로 이게 기계적 소통의 한계다.

 

하지만 이게 어디 자동번역기(기계적 소통)에만 국한된 문제이겠는가? 오늘도 마구 내뱉고 있는 나의 말들이 바르게 전달이 될는지, 또 현재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내 뜻에 맞게 제대로 읽힐 수나 있을지 하는 궁금증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백수린의 소설집 『폴링 인 폴』에 실린 단편 <감자의 실종>은 그런 점에서 자기 고백에 가까운 소설이라 하겠다. 소통부재의 극한에 빠진 소설 속 ‘나(작가 자신)’의 심정은 참담함 그 자체이다. 내가 감자로 알고 있는 그것을 남들은 ‘개’라는 동물이라 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개’라고 부르는 동물은 내 머릿속에는 ‘신념’이라는 단어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직 방송국 성우이다. 언니의 결혼식 전, 형부가 될 사람이 인사차 집을 방문하여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 후, 가족들은 삥 둘러 앉아 옛날 사진들을 보았다. 그때 문득 나는 앨범 속에 감자의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가족 누구도 감자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나'는 어린 시절 가족들과 떨어져 외할머니 댁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그때 그곳에는 ‘감자’라고 부르던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다.

 

당시, 서너 살 정도에 불과하던 '나'는 감자를 친구 삼아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감자가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외할머니? 외삼촌?)가 잡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감자의 존재가 '나'에게 불현듯 떠오르며 언어적 지각 장애가 발생한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분석하는 방법 및 그 틀은 매우 다양할 것이나, 라캉의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라캉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소쉬르는 기호(글자, 그림)를 기표와 기의로 구분한다. 기호의 표면적 측면이 기표이고, 기호의 내용적 측면이 기의이다.

 

다시 <감자의 실종>의 감자(강아지)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강아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사람마다 다 다른 강아지를 떠올린다. 누구는 자기 집 강아지를 생각할 것이며, 또 누구는 플랜더스의 개를 떠올릴 것이다. 같은 강아지를 떠 올리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을 만큼 다들 각양각색의 강아지를 떠올린다.

 

여기서 강아지 또는 dog · 犬(inu) · 狗(gou)는 다른 글자이자 다른 나라 말이지만 이것을 보고 다들 특정한 자기 나름의 강아지를 떠 올리게 된다. 바로 이 글자들이 기표가 되고, 각자 떠올린 강아지는 기의가 된다.

 

이처럼 사람마다 다른 강아지를 떠올리기는 하지만 이 단어(강아지 · dog · 犬 · 狗 등)들을 보고 어느 특정한 강아지를 떠올리는 이유는 인간사회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야콥슨의 언어학과 실어증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야콥슨 언어학의 핵심은 은유와 환유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앞서의 예처럼 강아지라는 단어를 우리가 키우는 애완견(또는 개)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감자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은유적 실어증이라 하고, 하나의 단어를 보고 인접한 또는 연관된 단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환유적 실어증이라 한다. 강아지와 강아지 짖는 소리의 연관성 같은 게 되겠다.

 

그리고 라캉의 무의식 구조는 언어를 통해 만들어진 언어적 구조이다.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닌 둘 이상 즉, 다자가 모여 있는 현실의 세계라는 곳에 속해 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언어인데, 인간 주체의 정립은 언어체계의 내재화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라캉의 무의식은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가 씨줄과 날줄이 된 그물망처럼 되어 있다. 이제 비로소 <감자의 실종>에서 ‘나’의 상태가 이해가 된다.

 

작품 속 감자(강아지)의 죽음이 ‘나‘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였던 셈이다. 물론, 언니의 결혼을 계기로 무의식(상징계) 속의 그게 실재계로 발현이 된 것이고 말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의 핵심은 상징과 실재의 관계에 있다. 라캉식 표현을 빌리자면 상징계는 주체에게 “욕망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얻게 될 때 남들이 자신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타인에 의해 이름이 불려짐으로써 상징계에 들어선 인간은 주체로서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완전한 충족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결핍이 생긴다. 즉, 상징계 내부에서 채워지지 않는 이 결핍은 결국 상징계 밖에 있는 무엇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이게 바로 실재계이다.

 

하지만 실재계는 본래부터 접근할 수 없는 무엇이며, 인간이 알 수도 없는 무엇이다. 이 실재계를 상징계에서 대면할 수 있는 어떤 것, 상징계를 뚫고 나와 실재계와 조우하는 어떤 것을 라캉은 ‘증상(symptom)‘이라 한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이나 충격)가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금기와 억압의 산물인 그것이 실재계로 향하도록 해 주는 그것이 ‘승화(sublimation)’이다. 승화란 주체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결여나 공백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치 대상을 지우개로 지우듯 깨끗하게 지워버림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대상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이는 요즘 우리사회의 화두이기도 한 ‘힐링’이란 말에도 그대로 적용시켜 볼 수 있다. 결국, 힐링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아픔이나 상처를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치유가 가능해진다는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 보면, 작품 속 ‘나’ 역시 ‘감자(강아지)‘로 인해 소통이 불가능한 현실에 직면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소통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상황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날린다. 소통을 위한 '승화'로의 향함이다.

 

깊은 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에 접속해보니 내가 오래전에 게시해둔 질문 아래 새로운 답이 달려 있었다. ‘질문자님과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글귀가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띄었다... 글을 읽어나갈수록 나와 똑같은 일을 겪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시자 ‘ㄴㄷ’은 ‘감자’라는 단어가 연필로 쓴 글씨를 지울 때 사용하는 물건을 의미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차례대로 글자를 적어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나의 말言들이 빛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당신들에게 날아갔다. 아니, 날아가고 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7년~현재/읽 기2014. 7. 16. 12:17

인간의 자아 형성을 위해서는 ‘나’ 이외의 대립물로써 ‘타자(他者)’가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어린시절 최초로 맞이하게 되는 대립물적 ‘타자’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고 정신분석학자 라캉(Jacques Lacan)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울단계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즉, 말을 배우기 훨씬 이전의 어린 아이는 거울 속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처음으로 자아가 형성되는 시점이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거울단계는 유아기적 현상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성인이 된 이후에도 유사한 경험들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편의상 이를 ‘스크린단계’라 부르겠습니다.

 

거울단계는 일방적 수용자로서의 자아이지만, 스크린단계에서는 투사와 수용을 동시에 일으키는 능동적이며 양면적 단계로 전개가 됩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A와 B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이 둘 사이에는 하얀 스크린이 쳐집니다. 그리고는 있는 그대로의 A와 B가 아닌 자신이 보고 싶은 A와 B의 모습만이 자신의 맞은편 스크린에 투사됩니다. 시쳇말로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스크린이 걷혀지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A와 B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고 완벽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대의 빈틈이 본인의 가슴에 빈공간으로 남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서로의 빈공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비어 있는 공간으로 인한 허전함(결핍)은 두고두고 인간을 허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살다보면, 나의 그 빈공간에 딱 들어맞을 것 같은 상대를 만나기도 합니다. 쉘 실버스타인의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이란 동화가 그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그 빠져버린 한쪽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야기 입니다. 


한번은 너무 큰 한쪽을 만나 끼웠더니 삐걱거려 제대로 구르지 못하고, 또 한 번은 아주 작은 한쪽을 만나 끼우기는 했으나 채 한 바퀴를 구르지 못하고 그냥 빠져 버리고 마는 등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강 건너고 산을 지나 짝 찾기 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꼭 맞는 한쪽을 찾아 반가운 마음에 얼른 끼웠습니다만, 너무 꼭 맞다보니 구르는 속도를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쉽지만 그것에도 만족을 못하고 빼내버린 채 계속 짝을 찾아 떠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내 가슴 속 빈공간에 채울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은 영원한 숙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상대를 만났을 때 나이를 불문하고 끌리는 감정이 싹트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회적 관습과 규율이란 게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선을 넘기를 주저하고, 알아서 자제를 합니다. 물론, 간혹 일탈을 하여 사회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숙명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인간은 고독한 존재일지 모르겠습니다. 외로운 인간이란 이야기이지요.

 

미국의 주목받는 신예작가 앤드루 포터의 단편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바로 이 인간의 고독에 관한 소설입니다. 여기서의 ‘빛’이란 ‘끌림(정서)’을 의미하며, ‘물질’은 ‘사회적 규범’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헤더)'와 로버트는 대학교수와 제자의 사이입니다. 콜린과 '나'는 같은 대학의 선후배로 연인 사이 입니다.

 

어느 날, 교수인 로버트가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하면서 '나'와 로버트의 관계는 묘해집니다. 물론, 아버지뻘 되는 그와 '나'는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고 하는 게 전부입니다만 로버트를 만나면 편안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라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끝마치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슬픈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 이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려워요. 헤더.”

“무엇 때문에요?”

“이런 만남.” 그가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 이런 만남을 되돌아보며 나를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려워요”

나는 그를 보았다. “내가 두려운 게 뭔지 알아요, 로버트?” 나는 그의 손을 만지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려워요”」

 

콜린은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며 뛰어난 수영선수이기도 합니다. '나'와 결혼을 약속했으며 가끔 잠자리도 함께 합니다.

 

하루는 로버트의 아파트에서 차를 마시다가 로버트의 제안으로 술을 마시러 '바'엘 가게 됩니다. 학교 주변에 위치한 ‘바’였으니 단지 그저 상투적 의미로써의 ‘바’가 아니라 많은 시선들이 상존하는 일상적 세계로의 진출을 의미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콜린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때 '나'와 로버트는 손을 꼭 잡은 채로 다정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나'와 로버트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콜린과 '나'는 결혼을 했으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해 로버트와는 연락조차 끊겨버렸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로버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림프종으로 죽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통곡을 합니다.

 

그동안 '나'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이 전혀 없는, 잘 나가는 의사의 아내로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삶이 참다운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가슴 한 구석이 휑한, 알지 못할 결여감 같은 것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무기력한 삶 같은 것이었습니다.

 

로버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나'는 문득 옛 기억 하나를 떠 올립니다. 로버트와 사랑을 나누겠다는 마음을 먹고 그의 비어 있는 아파트를 찾아 간 '나'는 옷을 벗고 로버트의 침대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몇 시쯤 로버트가 돌아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기다리기로 한 것이지요.

 

하지만 로버트는 예상 했던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한 두어 시간여를 그렇게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 옷을 입고 창밖을 내다봅니다. 바깥 거리에서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대학생들이 미식축구 공을 던지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 또래였지만, 그 순간 그들은 나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한 순간이었다.」

 

'나'와 로버트의 사랑은 그렇게 극한의 어느 지점까지 가 있었음을, 비록 직접적인 육체적 관계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무언가 또한 있었음을 암시해 주며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그렇게, 고독했던 한 남자는 갔고, 외로운 한 여자는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녀 옆에 있는 그도 예외 없이 멜랑꼬리(mélancolie)한 존재로 남아 있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왜? 사랑이란 서로의 빈공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7년~현재/읽 기2014. 6. 19. 11:01

암이라 진단하고, 히로뽕을 처방하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11)’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12)’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15)’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16)’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 수 있다.(17)’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21)’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21)’

 

이상이 저자가 진단한 우리시대의 사회적 질병 양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병들은 어떠한 증상들을 갖고 있는지, 또 그에 따른 처방은 어떤 것이 있는지 역시 저자의 말을 인용해 살펴보도록 하자.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21)’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22)’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규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27)’



이것이 저자가 밝히고 있는 시대적 질병의 증상들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증상을 보이는 질병의 이름을 ‘성과사회’라 칭한다.

 

자, 그럼 이해를 돕기 위해 이쯤에서 저자의 이 말들을 풀어서 설명해 보도록 하자. 저자는 근대사회와 근대이후의 사회를 구분하여 근대사회를 '면역사회'라 하고, 근대이후 사회를 '성과사회'라 한다.

 

근대사회는 자아와 타자의 대립, 이질성과 타자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근대사회는 생산자의 사회이다. 즉, 노동의 사회라는 말이다. 그런데 근대 이후의 사회는 어떠한가?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소비중심의 사회로 나아간다.

 

당연히 근대이후의 사회에서 중시되는 것은 소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소비의 여부 문제이다. 소비할 수 없는 자는 ‘잉여인간’으로서 방치된 인생을 살아야 한다. 소비할 수 있는 자라고 해서 여유로운 것은 아니다. ‘나’라고 하는 객체가 중시되다 보니 모든 걸 다 개인 탓 -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았기에 - 으로 돌리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니 그들 역시 긍정성 과잉의 결과, 우울증과 히스테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가련한 인생들이다.

 

이처럼 내 탓이 횡횡하는 시대적 분위기 상 사회시스템을 논하는 자는 바보 취급당하기 일쑤다. 이게 현실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저자의 처방을 들어볼 차례다. 처방에 앞서 저자의 진단을 좀 더 명확히 해 보자. 저자는 우울증에 대한 알랭 에랭베르의 규정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알랭 에랭베르)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26)”

 

이 말에 더해 앞서 인용했던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규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27)’

 

이 두 가지가 저자가 생각하는 질병의 원인이라면, 그 처방 또한 이 원인의 제거가 되어야 타당할 것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저자의 말을 인용해 보자.

 

‘인간은 사색하는 상태에서만 자기 자신의 밖으로 나와서 사물들의 세계 속에 침잠할 수 있는 것이다.(35)’

‘한트케는 깊은 피로를 치유의 형식, 더 나아가서 회춘의 형식으로 승격시킨다. 피로를 통해 세계는 경이감을 되찾는다.(69)'

 

즉, 사색(심심함)과 한트케의 피로(깊은 피로?, 근본적 피로?)를 통해 치유될 수 있다는 처방이자 결론이다.

 

역시, 판단은 독자의 몫인가?



추신

1. 본문의 괄호 안 숫자는 해당 문장이 들어 있는 페이지이다.

2. 본 서적은 대안연구공동체의 읽고·쓰기 모임인 <공강일의 단호박> 첫 시간 텍스트였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