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화'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05.31 영화 「써드 퍼슨」
  2. 2014.07.19 백수린의 감자의 실종을 읽고
2007년~현재/감 상2015. 5. 31. 17:51

마이클(리암 니슨)은 첫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받았을 만큼, 한 때는 잘 나갔던 소설가입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소설은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소설가로 출판사의 푸대접을 받기 일쑤입니다.

 

이에, 마이클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드는데 바로 자신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신의 일기를 소설화 한다는 표현도 적절치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기가 먼저 있었고 이를 소설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소설의 한 모티브로써의 일기인지 영화의 구조만으로는 영 불명확하기 때문입니다.

 

단, 그 일기가 3인칭 시점(Third Person)으로 쓰여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일기에 등장하는 ‘나’라는 표현 대신 ‘그’라는 단어를 통해 말이지요.

 

 

▲ 영화 「써드 퍼슨」, 롯데시네마 촬영

 

폴 해기스 감독의 영화 「써드 퍼슨」에서는 크게 3가지의 이야기구조가 있습니다.

 

첫째, 소설가 마이클(리암 니슨) - 연인 안나(올리비아 와일드) - 부인 일레인(킴 베이싱어) - 아들.

 

둘째, 스콧(애드리언 브로디) - 집시 여인 모니카(모란 아티아스) - 부인 테레사 (마리아 벨로) - 스콧의 아들과 모니카의 딸.

 

셋째, 줄리아(밀라 쿠니스) - 릭(제임스 프랭코) - 릭의 연인, 아들.

 

첫 번째 이야기 구조부터 설명을 드리면, 마이클은 잠시 전화를 받는 사이 아들이 수영장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를 당합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부인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자신의 일기 주인공이기도 한 연인 안나가 있습니다.

 

둘째 번 이야기 구조는 스콧과 집시 여인 모니카의 관계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스콧의 아들과 모니카의 딸이 등장합니다. 스콧의 아들은 스콧의 부주의로 익사 사고를 당했고, 모니카의 딸은 어딘가에 끌려가 있는 상태입니다. 그 딸을 구하기 위해 의기투합하면서 스콧과 모니카는 진심을 알아갑니다.

 

세 번째는 줄리아와 이혼한 남편 릭의 사이에 있는 아들이 모티브입니다. 남편에게 빼앗긴 아들을 찾아오고자 하는 줄리아의 힘겨운 노력이 눈물겹습니다.

 

자,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첫 번째 이야기 구조에서 등장했던 익사한 마이클의 아들에 이어, 두 번째 이야기 구조에서 등장하는 모니카의 딸, 세 번째 이야기 구조에서 등장하는 줄리아의 아들을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첫 스토리에서는 실재하는 것 같았던 아이의 존재가 두 번째 스토리에서는 긴가민가하게 그려집니다. 그리고 세 번째 스토리에서는 줄리아의 아들이 그곳에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그들이 잃어버렸던 것은, 아니 진실로 찾고자 갈구했던 것은 자신의 자식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즉, 아이들은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자아였던 셈입니다. 더구나 이 모든 이야기 구조들은 마이클 자신의, 또는 자신이 만들어 낸 가공의 이야기였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영화 「써드 퍼슨」은 “Watch me”로 시작해서 “Watch me”로 끝이 납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란 게 있습니다. 무의식이란 어린 아기들이 가지고 있는 일차적인 본능적 욕구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생명으로 막 태동하던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이미 그 본능적 욕구는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이 본능적 욕구라는 게 어느 순간부터인가 무한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한 억압감을 인식하게 되며, 욕구가 모두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절망감도 맛보게 됩니다. 시쳇말로 ‘산다는 게 다 그런 것’의 전형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또한 요즘 가장 핫(hot)한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의 이론을 잠시 빌려와 보겠습니다. 라캉의 무의식 구조는 언어를 통해 만들어진 언어적 구조입니다.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닌 둘 이상 즉, 다자가 모여 있는 현실의 세계라는 곳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언어인데, 인간 주체의 정립은 언어체계의 내재화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작가로서의 연이은 실패를 통해 잠재되어 있던 마이클의 일종의 트라우마가 고개를 내밉니다. 물론, 어떤 계기를 통해 무의식(상징계) 속의 그게 실재계로 발현이 되었을 것이고 말입니다. 라캉의 정신분석의 핵심은 상징과 실재의 관계에 있습니다. 라캉식 표현을 빌리자면 상징계는 주체에게 “욕망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얻게 될 때 남들이 자신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타인에 의해 이름이 불림으로써 상징계에 들어선 인간은 주체로서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완전한 충족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결핍이 생깁니다. 즉, 상징계 내부에서 채워지지 않는 이 결핍은 결국 상징계 밖에 있는 무엇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이게 바로 실재계입니다.

 

하지만 실재계는 본래부터 접근할 수 없는 무엇이며, 인간이 알 수도 없는 무엇입니다. 이 실재계를 상징계에서 대면할 수 있는 어떤 것, 상징계를 뚫고 나와 실재계와 조우하는 어떤 것을 라캉은 '증상(symptom)'이라 합니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이나 충격)가 그 한 예가 될 것입니다.

 

라캉에 의하면 금기와 억압의 산물인 그것이 실재계로 향하도록 해 주는 것이 '승화(sublimation)'입니다. 승화란 주체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결여나 공백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증상‘의 ’승화‘는 지워버리거나 없애버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없음에 대한 참인식입니다.

 

삼류 소설가로 전락한 마이클의 내부에서 애절한 호소의 목소리가 울려 나옵니다.

 

"나를 봐 주세요(Watc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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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7년~현재/읽 기2014. 7. 19. 20:49

남의 나라 말 배우기를 막 시작했을 무렵, 이메일로 보낼 짧은 문장이라도 하나 만들라치면 어김없이 찾게 되는 게 구글 자동번역기였다.

 

그런데 이 자동번역기의 번역이라는 게 영 신통치 않을 때가 종종 있다. 번역해서 옮겨 놓은 것은 분명 한글로 된 우리말인데,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게 번역을 해 놓기에 그렇다.

 

자동번역기를 좀 사용하다보면 나름 요령 같은 게 생긴다. 단문으로 쓰되, 직설적으로 표현을 해야 그나마 보다 더 정확한 표현에 가까운 번역을 해 준다는 점이 그것이다. 바로 이게 기계적 소통의 한계다.

 

하지만 이게 어디 자동번역기(기계적 소통)에만 국한된 문제이겠는가? 오늘도 마구 내뱉고 있는 나의 말들이 바르게 전달이 될는지, 또 현재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내 뜻에 맞게 제대로 읽힐 수나 있을지 하는 궁금증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백수린의 소설집 『폴링 인 폴』에 실린 단편 <감자의 실종>은 그런 점에서 자기 고백에 가까운 소설이라 하겠다. 소통부재의 극한에 빠진 소설 속 ‘나(작가 자신)’의 심정은 참담함 그 자체이다. 내가 감자로 알고 있는 그것을 남들은 ‘개’라는 동물이라 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개’라고 부르는 동물은 내 머릿속에는 ‘신념’이라는 단어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직 방송국 성우이다. 언니의 결혼식 전, 형부가 될 사람이 인사차 집을 방문하여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 후, 가족들은 삥 둘러 앉아 옛날 사진들을 보았다. 그때 문득 나는 앨범 속에 감자의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가족 누구도 감자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나'는 어린 시절 가족들과 떨어져 외할머니 댁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그때 그곳에는 ‘감자’라고 부르던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다.

 

당시, 서너 살 정도에 불과하던 '나'는 감자를 친구 삼아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감자가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외할머니? 외삼촌?)가 잡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감자의 존재가 '나'에게 불현듯 떠오르며 언어적 지각 장애가 발생한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분석하는 방법 및 그 틀은 매우 다양할 것이나, 라캉의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라캉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소쉬르는 기호(글자, 그림)를 기표와 기의로 구분한다. 기호의 표면적 측면이 기표이고, 기호의 내용적 측면이 기의이다.

 

다시 <감자의 실종>의 감자(강아지)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강아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사람마다 다 다른 강아지를 떠올린다. 누구는 자기 집 강아지를 생각할 것이며, 또 누구는 플랜더스의 개를 떠올릴 것이다. 같은 강아지를 떠 올리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을 만큼 다들 각양각색의 강아지를 떠올린다.

 

여기서 강아지 또는 dog · 犬(inu) · 狗(gou)는 다른 글자이자 다른 나라 말이지만 이것을 보고 다들 특정한 자기 나름의 강아지를 떠 올리게 된다. 바로 이 글자들이 기표가 되고, 각자 떠올린 강아지는 기의가 된다.

 

이처럼 사람마다 다른 강아지를 떠올리기는 하지만 이 단어(강아지 · dog · 犬 · 狗 등)들을 보고 어느 특정한 강아지를 떠올리는 이유는 인간사회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야콥슨의 언어학과 실어증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야콥슨 언어학의 핵심은 은유와 환유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앞서의 예처럼 강아지라는 단어를 우리가 키우는 애완견(또는 개)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감자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은유적 실어증이라 하고, 하나의 단어를 보고 인접한 또는 연관된 단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환유적 실어증이라 한다. 강아지와 강아지 짖는 소리의 연관성 같은 게 되겠다.

 

그리고 라캉의 무의식 구조는 언어를 통해 만들어진 언어적 구조이다.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닌 둘 이상 즉, 다자가 모여 있는 현실의 세계라는 곳에 속해 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언어인데, 인간 주체의 정립은 언어체계의 내재화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라캉의 무의식은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가 씨줄과 날줄이 된 그물망처럼 되어 있다. 이제 비로소 <감자의 실종>에서 ‘나’의 상태가 이해가 된다.

 

작품 속 감자(강아지)의 죽음이 ‘나‘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였던 셈이다. 물론, 언니의 결혼을 계기로 무의식(상징계) 속의 그게 실재계로 발현이 된 것이고 말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의 핵심은 상징과 실재의 관계에 있다. 라캉식 표현을 빌리자면 상징계는 주체에게 “욕망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얻게 될 때 남들이 자신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타인에 의해 이름이 불려짐으로써 상징계에 들어선 인간은 주체로서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완전한 충족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결핍이 생긴다. 즉, 상징계 내부에서 채워지지 않는 이 결핍은 결국 상징계 밖에 있는 무엇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이게 바로 실재계이다.

 

하지만 실재계는 본래부터 접근할 수 없는 무엇이며, 인간이 알 수도 없는 무엇이다. 이 실재계를 상징계에서 대면할 수 있는 어떤 것, 상징계를 뚫고 나와 실재계와 조우하는 어떤 것을 라캉은 ‘증상(symptom)‘이라 한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이나 충격)가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금기와 억압의 산물인 그것이 실재계로 향하도록 해 주는 그것이 ‘승화(sublimation)’이다. 승화란 주체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결여나 공백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치 대상을 지우개로 지우듯 깨끗하게 지워버림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대상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이는 요즘 우리사회의 화두이기도 한 ‘힐링’이란 말에도 그대로 적용시켜 볼 수 있다. 결국, 힐링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아픔이나 상처를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치유가 가능해진다는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 보면, 작품 속 ‘나’ 역시 ‘감자(강아지)‘로 인해 소통이 불가능한 현실에 직면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소통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상황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날린다. 소통을 위한 '승화'로의 향함이다.

 

깊은 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에 접속해보니 내가 오래전에 게시해둔 질문 아래 새로운 답이 달려 있었다. ‘질문자님과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글귀가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띄었다... 글을 읽어나갈수록 나와 똑같은 일을 겪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시자 ‘ㄴㄷ’은 ‘감자’라는 단어가 연필로 쓴 글씨를 지울 때 사용하는 물건을 의미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차례대로 글자를 적어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나의 말言들이 빛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당신들에게 날아갔다. 아니, 날아가고 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