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읽 기2014. 7. 19. 20:49

남의 나라 말 배우기를 막 시작했을 무렵, 이메일로 보낼 짧은 문장이라도 하나 만들라치면 어김없이 찾게 되는 게 구글 자동번역기였다.

 

그런데 이 자동번역기의 번역이라는 게 영 신통치 않을 때가 종종 있다. 번역해서 옮겨 놓은 것은 분명 한글로 된 우리말인데,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게 번역을 해 놓기에 그렇다.

 

자동번역기를 좀 사용하다보면 나름 요령 같은 게 생긴다. 단문으로 쓰되, 직설적으로 표현을 해야 그나마 보다 더 정확한 표현에 가까운 번역을 해 준다는 점이 그것이다. 바로 이게 기계적 소통의 한계다.

 

하지만 이게 어디 자동번역기(기계적 소통)에만 국한된 문제이겠는가? 오늘도 마구 내뱉고 있는 나의 말들이 바르게 전달이 될는지, 또 현재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내 뜻에 맞게 제대로 읽힐 수나 있을지 하는 궁금증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백수린의 소설집 『폴링 인 폴』에 실린 단편 <감자의 실종>은 그런 점에서 자기 고백에 가까운 소설이라 하겠다. 소통부재의 극한에 빠진 소설 속 ‘나(작가 자신)’의 심정은 참담함 그 자체이다. 내가 감자로 알고 있는 그것을 남들은 ‘개’라는 동물이라 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개’라고 부르는 동물은 내 머릿속에는 ‘신념’이라는 단어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직 방송국 성우이다. 언니의 결혼식 전, 형부가 될 사람이 인사차 집을 방문하여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 후, 가족들은 삥 둘러 앉아 옛날 사진들을 보았다. 그때 문득 나는 앨범 속에 감자의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가족 누구도 감자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나'는 어린 시절 가족들과 떨어져 외할머니 댁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그때 그곳에는 ‘감자’라고 부르던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다.

 

당시, 서너 살 정도에 불과하던 '나'는 감자를 친구 삼아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감자가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외할머니? 외삼촌?)가 잡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감자의 존재가 '나'에게 불현듯 떠오르며 언어적 지각 장애가 발생한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분석하는 방법 및 그 틀은 매우 다양할 것이나, 라캉의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라캉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소쉬르는 기호(글자, 그림)를 기표와 기의로 구분한다. 기호의 표면적 측면이 기표이고, 기호의 내용적 측면이 기의이다.

 

다시 <감자의 실종>의 감자(강아지)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강아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사람마다 다 다른 강아지를 떠올린다. 누구는 자기 집 강아지를 생각할 것이며, 또 누구는 플랜더스의 개를 떠올릴 것이다. 같은 강아지를 떠 올리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을 만큼 다들 각양각색의 강아지를 떠올린다.

 

여기서 강아지 또는 dog · 犬(inu) · 狗(gou)는 다른 글자이자 다른 나라 말이지만 이것을 보고 다들 특정한 자기 나름의 강아지를 떠 올리게 된다. 바로 이 글자들이 기표가 되고, 각자 떠올린 강아지는 기의가 된다.

 

이처럼 사람마다 다른 강아지를 떠올리기는 하지만 이 단어(강아지 · dog · 犬 · 狗 등)들을 보고 어느 특정한 강아지를 떠올리는 이유는 인간사회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야콥슨의 언어학과 실어증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야콥슨 언어학의 핵심은 은유와 환유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앞서의 예처럼 강아지라는 단어를 우리가 키우는 애완견(또는 개)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감자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은유적 실어증이라 하고, 하나의 단어를 보고 인접한 또는 연관된 단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환유적 실어증이라 한다. 강아지와 강아지 짖는 소리의 연관성 같은 게 되겠다.

 

그리고 라캉의 무의식 구조는 언어를 통해 만들어진 언어적 구조이다.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닌 둘 이상 즉, 다자가 모여 있는 현실의 세계라는 곳에 속해 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언어인데, 인간 주체의 정립은 언어체계의 내재화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라캉의 무의식은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가 씨줄과 날줄이 된 그물망처럼 되어 있다. 이제 비로소 <감자의 실종>에서 ‘나’의 상태가 이해가 된다.

 

작품 속 감자(강아지)의 죽음이 ‘나‘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였던 셈이다. 물론, 언니의 결혼을 계기로 무의식(상징계) 속의 그게 실재계로 발현이 된 것이고 말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의 핵심은 상징과 실재의 관계에 있다. 라캉식 표현을 빌리자면 상징계는 주체에게 “욕망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얻게 될 때 남들이 자신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타인에 의해 이름이 불려짐으로써 상징계에 들어선 인간은 주체로서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완전한 충족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결핍이 생긴다. 즉, 상징계 내부에서 채워지지 않는 이 결핍은 결국 상징계 밖에 있는 무엇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이게 바로 실재계이다.

 

하지만 실재계는 본래부터 접근할 수 없는 무엇이며, 인간이 알 수도 없는 무엇이다. 이 실재계를 상징계에서 대면할 수 있는 어떤 것, 상징계를 뚫고 나와 실재계와 조우하는 어떤 것을 라캉은 ‘증상(symptom)‘이라 한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이나 충격)가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금기와 억압의 산물인 그것이 실재계로 향하도록 해 주는 그것이 ‘승화(sublimation)’이다. 승화란 주체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결여나 공백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치 대상을 지우개로 지우듯 깨끗하게 지워버림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대상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이는 요즘 우리사회의 화두이기도 한 ‘힐링’이란 말에도 그대로 적용시켜 볼 수 있다. 결국, 힐링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아픔이나 상처를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치유가 가능해진다는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 보면, 작품 속 ‘나’ 역시 ‘감자(강아지)‘로 인해 소통이 불가능한 현실에 직면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소통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상황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날린다. 소통을 위한 '승화'로의 향함이다.

 

깊은 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에 접속해보니 내가 오래전에 게시해둔 질문 아래 새로운 답이 달려 있었다. ‘질문자님과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글귀가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띄었다... 글을 읽어나갈수록 나와 똑같은 일을 겪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시자 ‘ㄴㄷ’은 ‘감자’라는 단어가 연필로 쓴 글씨를 지울 때 사용하는 물건을 의미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차례대로 글자를 적어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나의 말言들이 빛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당신들에게 날아갔다. 아니, 날아가고 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