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읽 기2014. 6. 19. 11:01

암이라 진단하고, 히로뽕을 처방하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11)’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12)’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15)’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16)’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 수 있다.(17)’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21)’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21)’

 

이상이 저자가 진단한 우리시대의 사회적 질병 양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병들은 어떠한 증상들을 갖고 있는지, 또 그에 따른 처방은 어떤 것이 있는지 역시 저자의 말을 인용해 살펴보도록 하자.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21)’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22)’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규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27)’



이것이 저자가 밝히고 있는 시대적 질병의 증상들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증상을 보이는 질병의 이름을 ‘성과사회’라 칭한다.

 

자, 그럼 이해를 돕기 위해 이쯤에서 저자의 이 말들을 풀어서 설명해 보도록 하자. 저자는 근대사회와 근대이후의 사회를 구분하여 근대사회를 '면역사회'라 하고, 근대이후 사회를 '성과사회'라 한다.

 

근대사회는 자아와 타자의 대립, 이질성과 타자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근대사회는 생산자의 사회이다. 즉, 노동의 사회라는 말이다. 그런데 근대 이후의 사회는 어떠한가?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소비중심의 사회로 나아간다.

 

당연히 근대이후의 사회에서 중시되는 것은 소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소비의 여부 문제이다. 소비할 수 없는 자는 ‘잉여인간’으로서 방치된 인생을 살아야 한다. 소비할 수 있는 자라고 해서 여유로운 것은 아니다. ‘나’라고 하는 객체가 중시되다 보니 모든 걸 다 개인 탓 -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았기에 - 으로 돌리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니 그들 역시 긍정성 과잉의 결과, 우울증과 히스테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가련한 인생들이다.

 

이처럼 내 탓이 횡횡하는 시대적 분위기 상 사회시스템을 논하는 자는 바보 취급당하기 일쑤다. 이게 현실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저자의 처방을 들어볼 차례다. 처방에 앞서 저자의 진단을 좀 더 명확히 해 보자. 저자는 우울증에 대한 알랭 에랭베르의 규정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알랭 에랭베르)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26)”

 

이 말에 더해 앞서 인용했던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규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27)’

 

이 두 가지가 저자가 생각하는 질병의 원인이라면, 그 처방 또한 이 원인의 제거가 되어야 타당할 것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저자의 말을 인용해 보자.

 

‘인간은 사색하는 상태에서만 자기 자신의 밖으로 나와서 사물들의 세계 속에 침잠할 수 있는 것이다.(35)’

‘한트케는 깊은 피로를 치유의 형식, 더 나아가서 회춘의 형식으로 승격시킨다. 피로를 통해 세계는 경이감을 되찾는다.(69)'

 

즉, 사색(심심함)과 한트케의 피로(깊은 피로?, 근본적 피로?)를 통해 치유될 수 있다는 처방이자 결론이다.

 

역시, 판단은 독자의 몫인가?



추신

1. 본문의 괄호 안 숫자는 해당 문장이 들어 있는 페이지이다.

2. 본 서적은 대안연구공동체의 읽고·쓰기 모임인 <공강일의 단호박> 첫 시간 텍스트였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