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정 보2012. 8. 29. 21:03

'일본사회는 병들었다'

 

맞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가해의식과 피해의식의 일반화 현상이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정체성의 혼동 정도로 이해해도 좋겠습니다. 참 복잡 미묘한 사고의 소유자들입니다. 자기 자신들도 상당히 헷갈려 하고 있는 것이지요. 도대체 자신들이 가해자의 입장인지, 아니면 피해자의 입장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저들을 어르고 달랬던 미국의 책임 또한 없다 할 수는 없습니다만, 물론 그 이면에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해자의 신분으로 저들은 무고한 조선인들(중국, 대만, 필리핀 등 포함)을 학대·살해 했습니다. 식민과 전쟁의 시대였으니까요. 식민지 국민을 다스리기 위해, 또 새로운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 저들은 식민지 미개론을 설파합니다.

 

전쟁이란 생면부지인 한 인간을 아무런 이유 없이 적으로 간주해 죽여야만 하는 야만적 행위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니 정신교육이다 뭐다 해 가며 병사들에게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듭니다. 그러자면 있는 사실 없는 사실 만들어 날조에 날조를 더해야만 했을 테고 말입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조선인(한반도인)에 대한 각종 음해와 편견의 한 가운데에는 저런 광기의 어둔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1923년 9월 도쿄 근처를 강타했던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에 속아 무려 7천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무참히 학살당했습니다. 믿어지십니까? 7천명이라니요. 더구나 그 행위는 말 그대로 학살에 가까운 수준이었습니다. 때려죽이고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했으니까요. 그러고도 제대로 된 진상조사나 사과 · 보상 하나 없는 게 저들의 양심입니다.

 

그로부터 무려 9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해 3월 11일 발생했던 히가시니혼(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도 그런 유언비어가 난무했던 것으로 일본 언론은 전하고 있습니다. 조선인을 포함한 외국인이 폭동을 준비하고 있으며 약탈이 자행되고 있다는 허위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그뿐인가요?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정치인인 도쿄도지사 이시하라신타로는 자위대 대원들 앞에서 "만일 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삼국인 - 주로 일본 거주 조선인과 대만인에 대한 차별적 언어 - 의 폭동이 있을 수 있는 바, 자위대가 치안유지에도 나서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에 한 발언입니다.

 

여기에 더해 전쟁 패전국 특히, 원자폭탄 피해국이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가해자로서의 과오 청산 시간을 갖았어야 할 바로 그 시간에, 역으로 피해자의 신분이 되어 스스로를 위로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로 몰고갔던 겁니다. 가해자의 몸통 위에 피해자의 가면을 쓴 채 피해자의 심장을 달고 살고 있는 셈입니다. 이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인의 정체성 혼란 증후군 개략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수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악용하는 거대한 세력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어떤가요? 환자가 본인의 증세에 대한 인정을 통해 치료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정자체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그런 과정을 일본 사회는 밟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쪽으로 몰고 가고 있는 세력의 힘 또한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거부하기가 쉽지 않고 말입니다.

 

병리학적으로 그 증상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진단은 전문가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회라면 자국은 물론이고 주변국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려는 자세가 필수라고 봅니다. 이게 결여되어 있으니 문제라는 겁니다.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서경식 / 형진의역
출판 : 반비 201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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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게도 이런 문제 중의 하나인 재일조선인과 관련한 역사책 한 권이 선을 보였습니다. 도쿄 게이자이대학에 재직 중인 서경식교수가 지은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은 현재 일본 땅에 삶의 뿌리를 두고 있는 재일조선인에 관한 보고서라 할 수 있습니다.

 

서경식교수는 리츠메이칸대학의 서승교수와 인권운동가인 서준식씨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학자이자 인권운동가 입니다.

 

저자는 재일조선인은 왜 일본에 있습니까?란 물음으로 시작해서 재일조선인 문제는 언제쯤 해결될까요? 라는 물음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세세히 책 내용을 소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직접 구입해서 일독해 보시면 될테니 말입니다.

 

단, 우리가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우리가 재일조선인에 대해 또는 조선족으로 불리는 재중동포들에 대해 갖고 있는 막연한 선입견을 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미 일본 사람 아니야?" 또는 "조선족들은 중국인이더구먼." 이라고 단정 짓기 전에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해준 것이 무엇이 있었나를 돌이켜 보는 일이 순서일 것 입니다.

 

저는 일본 유학 당시 이곳저곳에 일본과 관련한 글들을 제법 많이 썼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만, 글이라는 것은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이 하고 싶은 얘기를 얼마나 쉽게 전달할 수 있느냐가 우선이라고 봤습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더 용감하게 글을 쓸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런 글쓰기를 계기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조선인 청년들과의 교류 기회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몇몇 분들은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시기도 했고 말입니다.

 

물론, 그분들과의 만남 이전에 저는 일본에서 한국어와 영어·일본어로 발행되는 인터넷 매체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단순히 이것을 인터넷 신문과 같은 언론싸이트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보다는 한·일 인적 네트워크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 사회와 세계에 우리(한국에 거주하는 사람과 재일조선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지나간 불행한 식민 역사에 대해 누가 우리만큼 알고 있을 것이며, 누가 우리만큼 가슴 절절한 이야기를 품고 살고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우리의 시각으로 풀어 내고 싶었던 겁니다.

 

그때, 그분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저는 일본 사회에서 재일조선인 - 편의상 명칭은 재일조선인으로 통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 서경식교수가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저 역시 크게 거부감이 없는 용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 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보다 많이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기대와는 달리 별로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만들어 놓지 못하고 현재 한국으로 돌아와 있습니다. 핑계 같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대학원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또 생각의 차이랄까 그런 것도 존재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때 만났던 많은 분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감사한 마음 못지않게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하지만 당시에 저는 진실로 갈구했었다는 점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아주 반갑고 의미 있는 책을 한 권 만나게 되어 기쁜 마음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책이 드문 이유는 다들 이런 책 내기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칫 밥그릇이 날아갈지도 모를 정도로 위험한 행위입니다. 적어도 일본에서 밥 먹고 살고 싶다면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렇듯 생생한 현실감 있는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사실, 한일관계 전반에 걸쳐 아쉬운 점은 일본과의 외교 제자리 찾기 작업은 보수정권이 아니면 시도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진보 정권이 일본과의 갈등구조를 만들게 되면 국내 여론이 바로 돌아선다는 겁니다. 특히, 보수 언론쪽이 트집을 잡기 시작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타이틀로 뽑힙니다. 경제도 어려운데 설상가상, 지지율을 의식한 보여주기 정책, 막대한 경제적 손실, 한류 완전히 물 건너 갔다 등등. 그러면 이런 기사를 보는 일반 국민들은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냐", "조용히 처리하면 될 것을 괜시리 시끄럽게 해 우리가 손해를 보고 있다" 라는 식으로 여론몰이가 됩니다.

 

이는 결국 정권의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지니 표를 먹고 살아야 하는 정치의 생리상 아예 시도도 못하거나 중도에 포기하거나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수정권이 나서서 바른 관계 정립에 힘써줘야 하나 이 또한 초록은 동색이라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산적한 문제를 내재하고 있는 한일관계가 바로 서는 길은 국민의 지혜와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깨어있는 시민의식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어있는 내가 애국자 입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