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감 상2019. 6. 3. 10:05

<단체로 기생충 보다>


보니,


나의 이야기고, 당신의 이야기고, 오늘 이곳의 이야기더라.


세상에는 금수저도 있고, 일회용 플라스틱 수저도 있다.


출발선이 앞선 놈도 있고, 출발선 자체가 희미한 놈도 있다.


세상 살아보니 느끼겠더라.


인생은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죽어라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되는, 그래서 시작은 미약했으나 막판 추월이 가능한 마라톤과 같은 것이 아니더라는 사실을 말이다.


달리다 보면, 중간 중간 새로운 이동수단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더라는 거다.


예를 들어, 어느 지점에 도착하면 “다음 구간의 이동수단을 선택해서 달리시오”와 같은 그런 것 말이다.


명문대학 · 좋은 직장, 그리고 의사 · 변호사 · 판사 · 검사 · 박사 등 소위 ‘사’자로 끝나는 직업군들이 그것이다.


출발 신호가 울리고, 일정 지점에 제일 먼저 도착한 놈은 당연히 제일 빠른 오토바이를 선택해서 다음 구간으로 달려 나간다.


그 다음에 도착한 놈은 그 다음으로 빠른 이동수단인 자전거를 선택해서 앞으로 내달린다.


그 다음 놈부터는, 그저 맨발로 계속 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다툰다.


이미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타고 달려나간 녀석들은 맨발의 청춘들의 경쟁상대가 아니게 된다. 싸움의 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번 처진 인생은 만회가 쉽지 않은 거다. 하물며 출발선 자체가 훨씬 앞서있다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나마 나 어릴 적에는 개천에서 용 나는 기회라도 잡을 수 있었다지만, 이제는 그 또한 기대할 수 없는 시대다.


왜?


세상은 요지경 속이라고, 아빠 엄마가 오토바이를 선택했던 집안의 자식들이 대를 이어 오토바이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독점하더라는 거지.


그래서다.


희망(영화에서는 빛으로 묘사)과 계획(영화에서는 계단으로 묘사)은 개인만이 만들어야 하거나, 개인에게만 강요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 자체가 그리 세팅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가 말이다.


기생충?


따지고 보면, 세상에 기생충 같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나?


제 잘난 것 같고, 제 잘난 맛에 살아도,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있어 너도 있고, 네가 있으니 나도 있는 법. 그게 세상의 이치다.


이 영화는 웃기다고 웃을 수만도 없는, 또 웃는다고 웃는 게 아닌, 웃픈 사회의 자화상이다.


그 날 이 올 때 까 지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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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