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시 사2011. 11. 23. 18:23

정치인들 중에는 만약 그가 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희대의 사기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세치 혀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의 공통적 특성 때문이랄까?

 

재미난 이야기 하나 하자.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다소 서글픈, 그래서 어쩌면 아이러니한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일본 총리를 지낸 인물 중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 라는 양반이 있다. 한때 일본을 개혁하느니 뭐니 해 가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이미지 정치의 대가, 꼼수 정치의 달인. 고분고분 하며 좀처럼 목소리 높이는 일 없는 일본인의 특성상, 고이즈미식 어법은 파격 그 자체였다. 언제나 단호했으며, 직설적이었고, 명쾌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모습은 마치 개혁을 진두지휘하는 장수의 카리스마처럼 일반 국민들에게는 비춰졌으니 어찌 미친 듯이 열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특히, 일본 젊은이들은 그런 고이즈미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아뿔싸. 본인들의 밥그릇을 반으로 쪼개 놓은 장본인이 바로 고이즈미인 것은 꿈에도 생각치 못한 채 말이다.

 

전후 3번째 장수 총리를 역임한 고이즈미의 최대 지지자는 프리타 (정해진 일정한 직장 없이 파트타임으로만 생활하는 사람들, 프리 아르바이터[free part-time worker]라는 일본어 준말)와 니트족 (NEET는 Not in Employment, Education or Training의 두문자로 청년 무직자를 가리키는 신조어)으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였다.

 

이는 고이즈미 자민당이 압승을 거뒀던 중의원 선거의 표를 분석해 본 결과로 나타났다. 자민당의 고정표에 비례표 500만 표가 더해져서 압승을 거두게 되었는데 그 500만 표의 내역을 분석해 보니 프리타가 400만, 니트인구가 80만에 이르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고이즈미 총리를 지지했던 이유가 사람을 참 당혹스럽게 만든다. 거두절미하고 고이즈미 총리가 '너무 멋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는 대답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정작 중요한 고이즈미 총리가 외치는 개혁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 젊은 세대들이 보기에 고이즈미 총리는 마치 게임이나 만화 속의 주인공과도 같았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적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특출한 카리스마, 게다가 한치의 양보나 머뭇거림도 없이 단 칼에 적을 베어버리는 단호함과 테크닉, 가히 상상 속의 주인공에 버금가는 이런 모습들에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와 불황 그로 인한 실업률의 증가로 갈 곳 잃은 청년 실업자들의 불만과 불안이 이처럼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모습으로 표출되는 양상이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결국 이들이 고이즈미 개혁의 최대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 그렇다면 도대체 고이즈미 개혁이라는 게 무엇이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구체적인 내용들은 내가 예전에 썼던 글들을 아래에 링크 시켜 놓았으니 일독을 해도 좋다.

 

간단히 말하자. 고이즈미 개혁의 핵심은 우정산업(우편산업) 민영화였으며, 그게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미국이 간절히 원하니까. 무엇 때문에 미국이? 그게 엄청나게 돈이 되는 사업이었으니까.

 

우정산업이 민영화 되기 전에 이미 비슷한 전례가 있었다. 일본장기신용은행이란 곳이 있었는데, 이곳이 사정이 어려워지자 6조엔의 세금을 퍼 부어 놓고 이를 10억엔에 외국 자본에 팔아 넘긴 사례였다. 한 마디로 누구 좋은 일만 시킨 꼴이다.

 

우정산업 민영화 역시 그런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유대자본이 간절히 원하는 일을 고이즈미는 개혁이란 명분을 깔아 해 치운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정치인들을 치기 위해 구조개혁이란 이름을 빌린 것에 불과했던 거다.

 

사실, 당시 일본 국민들은 우정산업 민영화나 개혁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국민의 관심사는 온통 연금문제와 경제회복 문제에 쏠려 있었다. 그런데 고이즈미는 그걸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그 속에 우정산업 민영화와 정치적 정적 제거까지 같이 섞어 넣어버렸던 거다.

결국, 결과는 국민의 관심사였던 연금 및 경제회복 문제는 흐지부지 되어 버렸고 고이즈미의 목표만 달성한 채 끝나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국민들이 먹튀에게 당했다고 보면 된다.

 

당시, 한 저널리스트가 이런 말을 했다. "고이즈미 구조개혁의 실체는 능력 있고 돈 많은 사람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자유를 주겠다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본인들이 알아서 살아라" 라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것은, 가진 것 하나 없어서 알아서 살아야 할 사람들이 전폭적으로 고이즈미식 구조개혁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 이라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이 쉽게 잊혀 지지가 않는다. 아이러니의 극치라 할만 하다.

 

어떤가? 남의 나라 일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오늘 우리의 현실과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래서다. 정치란? 프로야구 중계 보면서 심심풀이로 씹어대는 땅콩 같은 것이 아니라, 마치 나의 삶을 지탱 시켜주는 의식주와도 같은 것이다. 깨어 있어야 한다. 국민들이 깨어 있을 때, 정치적 먹튀는 박멸된다.


무엇을 위한 우정산업 민영화인가?
고이즈미 자민당 압승의 베일을 벗겨보자
일본정국, 소설 한번 써 볼까요?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