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4회
기마민족설과 가야계 개척자: 에가미 나미오가 열어준 일본 고대사의 또 다른 문
일본 열도의 고대국가 성립 과정을 이해할 때, 우리는 보통 일본 내 자생적 발전, 즉 점진적 권력 통합과 지역 엘리트 간 연맹으로 야마토(왜) 정권이 탄생했다는 주류 인식을 떠올린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 통설에 균열을 일으킨 이론이 등장한다. 도쿄대학교의 동양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교수가 제시한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騎馬民族日本征服説)’이다. 이 학설은 단순히 외래인으로서 한반도인이 유입되었다는 차원을 넘어, 일본 열도의 권력 구조와 문화 양식 전반을 뒤바꾼 ‘체계적 충격’이 한반도를 통해 유입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에가미 교수는 동북아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고고학적 증거, 인류학적 비교, 민속학적 자료를 아우르며 당시로선 획기적인 통합적 접근을 시도한 학자였다. 기마민족설은 일본 고대국가의 기원을 외래 문명에서 찾으려는 급진적인 주장 이상이었다. 그것은 고대 동아시아의 인적 · 물적 흐름 속에서 일본이라는 정치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민족사적 관점에서 조명한 하나의 해석 방식이었다.
이 이론을 정립한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일본이 패전의 폐허 속에서 민족 정체성을 재구성하던 시기에, “일본은 원래부터 단일하고 순수한 문명의 연속체였다”는 보수세력들의 내재적 발전론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전후 일본 지식계에 만연한 천황 중심 사관, 문화적 자생론, 일본문화 우월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에가미 교수는 4세기 중엽 이후 즉, 일본 고분시대 중기에 갑작스레 등장한 기마 전사 문화, 철제 무기, 대규모 전방후원분, 그리고 말을 탄 지배계층의 출현에 주목했다. 이 변화를 자연스러운 내부 발전의 결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 이전의 유물 · 유적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고등 문화가 갑자기 발견(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열도에서 급격하게 나타나는 고고학적 변화는 자생적으로 설명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특히 대형 전방후원분의 출현, 철제 무기의 대량 사용, 마구와 기마 장비의 급속한 확산, 무사 계층의 성립, 그리고 집권적 권력 구조의 등장 등이 모두 새로운 외래 세력의 유입에 의해 촉발되지 않았다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시기부터 일본의 지배층은 단순한 부족장 연합체를 넘어서 중앙집권적 군사 권력을 바탕으로 하는 정권 형태, 즉 야마토왜 정권의 형태로 발전해 간다. 에가미 교수는 이 변화를 주도한 집단이 바로 한반도 남부, 특히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마민족 집단이라고 보았다.
에가미 교수는 이 기마민족의 기원을 동북아시아의 스텝 지역-풀만 무성한 평원 지역으로 몽골과 만주 일대-으로 봤다. 기원전 수세기부터 이 지역에선 말을 이용한 마상 기술이 뛰어났다. 이동성과 전투 능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부족 연맹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서서히 남하하며 중국 북부, 만주, 한반도로 문화적 압력을 가했다. 이 중 일부 집단이 삼한(마한·변한·진한)사회 내부로 흡수되거나 연맹체를 이루어 가야라는 정치적 단위로 발전했다. 그 중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던 세력이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기마민족의 특징은 그저 말을 탈 줄 아는 민족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마상 전투에 특화된 군사 문화를 바탕으로 한 정복 지향적 사회구조를 지닌 민족이라는 점에 있다. 이들은 기마술과 철제 무기를 기반으로 한 우수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으며, 동시에 제사 체계, 건축 기술, 정치 행정 조직 등 선진적인 국가 형성 능력도 함께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이 일본 열도에 이주했을 때, 일개 피난민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주체였다는 것이 에가미 이론의 핵심이다. 즉, 야마토왜 왕권의 핵심 엘리트는 외래 기마 귀족이며, 이들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에 정착하면서 지배 이데올로기와 물리적 권력 기반을 동시에 이식했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도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 가야 지역의 적석 목곽묘와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묘제 구조, 부장품 구성, 축조 방식, 순장 풍습 등에서 강한 유사성을 보이며, 특히 가야의 지배층 무덤에서 출토된 마구, 철기 무기, 장신구 등은 일본 열도의 동일 시기 고분에서 거의 동일한 양식으로 출현한다. 이는 일반적인 문화의 전파 정도가 아니라 실제 사람의 이동, 더 나아가 지배 구조의 교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문헌 사료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 일본의 고대 문헌에는 한반도계 귀화인(개척자)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많으며, 이들 중 일부는 야마토 정권 초기의 핵심 권력층으로 활동했다. 일본 천황가 역시 내부 혈통의 연속이 아니라, 복합적 융합의 산물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제15대 오진천황(応神天皇)은 모계가 백제 혹은 가야계라는 주장 - 일본 역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郎) 처럼, 그가 백제 21대 개로왕의 동생 즉, 왕자 곤지왕이라고 해석하는 국내외 학자들도 꽤 있다 - 이 강하게 제기되며, 일본 내 일부 고대 귀족 가문도 한반도 출신 개척자 혈통임을 자랑스레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일본 고대 씨족 일람 서적인 『신찬성씨록』에는 백제, 신라, 가야 등지에서 건너온 수많은 성씨가 일본의 귀족 가문으로 편입된 내력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들 중 대표적인 하타씨(秦氏), 스가와라씨(菅原氏), 오토모씨(大伴氏) 등은 소위 말하는 이주민 가문이 아니라 왜나라의 정치, 경제, 종교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한 주체였다.
에가미 교수는 기마민족이 보통의 외래 세력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고대 국가의 형성 주체라고 주장했다. 즉, 야마토 왕권의 실질적 건국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온 기마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들의 영향이 행정 제도, 군사 조직, 고분 양식, 무기 체계, 제사 문화, 농경 기술, 심지어 왕위 계승 제도에까지 미쳤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초기 야마토왜 정권의 행정 체계는 읍성 단위의 가야 지역 행정 모델과 유사하며, 기병 중심의 군사 편제도 가야의 집단 전투 방식과 상당히 닮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일본 사회에서 상당한 지지와 동시에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전후 일본은 천황제의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했고, ‘기마민족이 정복하여 야마토 정권을 세웠다’라는 주장은 곧 천황의 기원을 외래로 본다는 점에서 민감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일본 우익 진영은 에가미를 반일학자, 외세 사주자 등으로 몰아붙였고, 일부 언론은 에가미 교수의 주장을 마치 천황제 부정 혹은 공산주의 세력의 역사 왜곡에 동조하는 발언으로 마녀사냥 하기도 했다. 그를 ‘일본의 뿌리를 부정하는 자’로 비난했다.
가야나 백제, 심지어 중국의 동북방 기마민족과의 연관성을 언급한 그의 발언을 트집 잡은 것이다. 학계 내부에서도 에가미 교수의 주장은 고고학적 사실을 과잉 해석한 ‘음모론적 역사관’으로 폄하되었으며, 실제로 에가미는 연구비 지원 중단, 논문 발표 기회 박탈, 학회 초청 제외 등 실질적인 탄압을 경험했다. 그 당시의 일본 사회에서 '외래 기원'이라는 단어는 거의 금기어와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역사는 민족의 자존심이 아니라, 사실의 탐구 대상이어야 한다”라고 일갈하며, 역사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에가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일본은 과연 외부 세계로부터 독립적으로 형성된 문명인가, 아니면 한반도와 대륙으로부터의 수많은 자극과 영향을 통해 진화해 온 ‘융합적 국가’인가. 안타깝게도 에가미 교수와 같은 양심적 지식인의 목소리는 1990년대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일본 내 보수우익들의 탄압과 압력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왜곡 역사론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기마민족설은 단지 군사 정복의 역사 해석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정치학, 국경을 넘는 역사 서사, 그리고 정체성의 열린 해석에 대한 도전이자, 민족이동과 문화 전파, 기술 이전과 정치권력의 재편이라는 복합적 역동성 속에서 동아시아 고대사의 본질을 되묻는 시도였다. 한반도의 가야가 단순히 세력 다툼의 와중에서 패배한 후 사라진 지역연맹체가 아니라,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문화적 기틀에 기여한 동력이었다면, 이는 한국사와 일본사가 단절된 두 개의 다른 역사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가미 교수는 일본이 스스로를 바라 보는 거울에 '다문화적 기원'이라는 균열을 냈고,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 또한 다시 보게 된다.
기마민족설은 오늘날 한일 양국이 공유하는 고대사의 공동 기반을 탐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우리는 역사를 민족 중심 서사로 환원하는 데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그 역사를 움직인 것은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교류했던 사람들, 즉 도래인, 정복자, 장인, 제사장, 무사 등 개척자들이다.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기마민족설은 바로 그 사람들의 발자취를 통해 국가의 기원을 추적하고, 민족이라는 개념조차 초월한, 보다 넓은 역사 인식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에가미 교수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도전적인 유산이다.
에가미 교수는 일본을 고립된 섬나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동북아 전체의 인류 이동과 문화 융합 속에서 일본을 바라 보았다. 한반도와 대륙, 열도는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공간이었으며, 일본의 고대사도 그 흐름 속에서 복합적으로 형성된 결과물이라는 것이 그의 기본 관점이다. 그는 야마토 정권 초기의 문화적 DNA에는 확실히 한반도의 유전자가 섞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 지적은 지금도 많은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계속 지지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이론을 한편의 정복 내러티브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거국적 인구 이동과 정치 융합의 상징적 모델로 볼 수 있다. 고대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은 일본 열도의 주변인으로서가 아니라 권력의 중심에서 국가 형성의 실질적 동력이었던 '이방의 창조자'였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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