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3

고령에서 건너간 장인들, 야마토왜에 금속을 심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소리 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그 침묵의 저편에서 우리는 금속의 불꽃과 망치 소리, 그리고 땀과 기술로 새겨진 이주의 흔적을 포착할 수 있다. 가야, 특히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고령 지역에서 야마토로 건너간 장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술 이주의 차원을 넘어서, 한반도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일본 열도로 스며들었던 실질적 증거이자, 고대 동아시아 해양 교류의 중심축을 이룬 이야기다.

 

일본 열도에 철의 불꽃을 일으킨 이들이 누구였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단연 ‘가야’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남부, 특히 오늘날의 경상북도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했던 대가야는 비단 정치와 제사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고도의 금속 가공 기술을 가진 장인집단의 본산지였다.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토 정치체제의 물리적 기초, 다시 말해 철기 기반의 제도와 건축, 무기 생산의 토대를 놓았다는 주장은 이제 단순한 가설을 넘어서는 실증적 증거로 하나씩 뒷받침되고 있다.

 

야마토(왜) 시대 전기 무렵, 일본은 급격한 정체성 형성의 시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철제 무기, 제련로 유적, 금속 공예품, 그리고 고분 내 금속 장신구들은 일본 자체의 고유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도성을 띤다. 바로 여기서 가야계 도래 장인의 존재가 부상하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이주민이 아닌, 제사와 건축, 장례와 군사까지 포함하는 '기술-정치 복합체'의 일원이었으며,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에 있어 실질적 기반을 구축한 장본인들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오사카 가시와라시(柏原市)의 ‘오오가타 유적(大県遺跡)’이다. 대규모 제철 유적으로, 일본 고분시대로 알려진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에 걸쳐 이곳에서 활발한 제철 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유적에서 발굴된 다양한 철기 제작 도구와 제련로 흔적이 그것을 입증하는데, 이는 가야의 선진 제철 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된 사례로 보인다. 유적에서 출토된 철기 제작 도구와 기술이 가야 지역의 그것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역시, 오사카의 가타노시(交野市)에 자리한 ‘모리 유적(森遺跡)’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데, 고대 제철 유적으로 6세기 전후에 대규모의 활발한 제철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한다. 모리 유적은 고대 왜나라의 중심부였던 오사카와 나라의 중간부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자, 경제적 번성을 누리던 지역이다. 특히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부뚜막 형태의 건조물이나, 시루형 토기의 발굴 등을 이유로 이곳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개척자들의 집단 거주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부엌에 설치된 부뚜막이나, 시루솥 위에 올려 놓고 음식물을 찌는 데 사용하는 시루는 전형적으로 한반도에서만 보이는 생활 시설이자 생활 용기이기 때문이다. 모리 유적 주변에는 많은 고분들이 산재해 있는데, 아마도 이 지역에서 제철 산업에 종사하던 가야계 개척자들의 고분일 것으로 짐작한다.

 

모리 유적지에서 발굴된 시루와 부뚜막 설명문-오사카 카타노시 시립도서관(交野市立倉治図書館) 고고학 강좌 자료-

 

나라현 덴리시(天理市)의 ‘후루 유적(布留遺跡)’ 또한 고대 제철 유적으로 높이 평가되며, 철기 제작과 관련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지역도 야마토 왕권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당시 철기 제작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야마토 정권은 이와 같은 제철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본 열도 통일에 성공한다. 이곳의 유적과 유물이 증언하는 바는, 여전한 가야의 뚜렷한 영향이라 하겠다. 실제로 이들 유적과 주변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와 도구들, 특히 철제 검과 쇠못, 마구(馬具)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거의 동일한 기법과 양식을 보여준다.

 

가야 장인들의 이주는 우연적인 사적 이주라기보다, 정치 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이주로 보아야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속일본기(續日本紀)』는 이러한 교류의 자취를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그 가운데 특히 신공황후(神功皇后) 시기와 응신천황(應神天皇)기의 기록, 그리고 백제 · 가야계 귀화인(개척자)에 관한 기술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공황후(神功皇后) 시기부터 대가야와 야마토 간의 관계는 단순한 외교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인 기술과 인력의 이동을 동반한 정치적 동맹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5세기 중반, 가야 지역이 백제-신라 양강구도 속에서 점차 세력 위축의 위기에 놓이자, 많은 기술자와 장인들이 ‘개척자’로 일본에 이주했고, 이들은 야마토 왕실에 의해 귀화가 허락되며 국가적 기반 기술자로 배치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이동이 자발적 개인의 이주가 아니라, 정치 권력에 의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라는 점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원문 중 관련 구절:

原文:

「是歲、遣荒田別・鹿我別、以問新羅之罪焉。卽以、譬大加羅國主、令來貢職。」

「又遣阿知使主・都加使主、以求良工百濟・高麗・新羅。」

해석:

"이 해에 아라타와케와 카가와케를 보내 신라의 죄를 물었다. 그리고 대가야국의 왕에게 명하여 조공을 하게 하였다."

"또한 아치노오미와 츠카노오미를 보내 백제, 고구려, 신라에서 우수한 기술자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위의 부분이 한반도와 왜나라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인데, 이런 사례가 여럿 있지만 일부러 이 원문을 가져온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이전의 양국 간 교류 기록이 있기는 하나 이 기록이 그나마 조직적이고 실질적인 기술과 인력의 이동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가장 이른 시기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서라는 『일본서기』의 왜곡 문제도 함께 거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이 발생하는 근본적 이유는 한반도로부터의 문화 유입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왜나라 우위의 역사를 기술하고 싶은 그들의 심리 즉, 콤플렉스 때문이다. 기술력이나 문화적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이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기술과 문화의 전파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우수한 문화가 널리 향유된다. 어찌 되었든 여기서 『일본서기』가 주장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었을 거다.

 

"당시 일본은 문화나 기술 면에서 아직 미발전 단계였고, 가야는 철기 문명과 공예 기술을 보유한 우수한 나라였다. 일본은 이를 배우기 위해 가야와 동맹관계를 맺고 가야의 기술자와 문화를 수용했다."

 

문화 전파의 중개자로서, 고령을 비롯한 가야 지역 출신 장인들의 역할은 단순한 조역이 아닌, 역사 창조의 주체였다. 앞의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 설화와 그 이후 기록들은 실제로는 가야계 기술자 및 장인층의 집단적 이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신공황후의 명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가야에서 인재를 데려왔다"는 표현은 실질적으로 당시 왜나라가 고도로 조직된 기술 이주 정책을 수행했음을 뜻한다. 여기엔 왜나라의 정치적 야심뿐 아니라, 가야 지역 내의 정세 변화와 정치적 압박 속에서 이주를 택한 이들의 현실적 선택도 반영되어 있다.

 

가야는 삼국에 비해 영토는 작았지만, 해상 교역과 제철 기술에서 탁월한 위상을 자랑하던 나라였다.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은 대가야는 철 생산과 무기 제조, 특히 철제 무기와 갑옷, 말 투구, 철솥 제작 등에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수의 철기 유물과 금속 공예품들은 이러한 가야 장인의 기술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철기 문화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금속 도구와 무기의 질적 향상이 나타나는 시점이, 바로 가야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4세기 이후와 겹친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야마토(왜) 정권은 이러한 기술력을 필요로 했고, 그 필요는 단순한 경제적 교역을 넘어 인재의 이주를 동반했다. 이 과정에서 고령 출신 장인들이 주축을 이루는 가야계 기술자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 궁궐 건축, 무기 제작, 제례 도구 제조, 불상 주조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 고대 사원 건축에서 보이는, 기둥 상부에만 공포를 배치하는 주심포 양식이나 금속제 제례 기구, 초기 불상 제작 기술 등은 가야와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 중 다수의 전통은 ‘야마토노 아야씨(東漢氏)’와 ‘다카무쿠씨(高向氏)’ 등 한반도계 개척자 가문들을 통해 계승되었다. 이들은 단순한 기능공이 아니라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의 문화 · 정치계의 중심에 있었던 집단이었다.

 

특히 주목할 씨족 중 하나가 ‘야마토노 아야씨’이다. 『일본서기』 및 『속일본기』에 ‘조정의 금속 제례와 건축에 관여한 개척자 가문’으로 등장하며, 그 출신이 한반도라는 점, 특히 가야계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일본 고대 사회 내 가야계 기술자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일본서기』 – 응신기(應神紀)

原文:
「是歲、百濟人阿知使主、率其徒黨、來歸化焉。仍居倭漢之地、故號曰倭漢氏。」

해석:
"이 해에 백제인 아치노오미(阿知使主. 한반도 출신 개척자로 그 출신이 백제인지 가야인지는 불분명하다)가 그 무리를 이끌고 귀화하였다. 그들은 야마토의 한 지역에 거주하였으므로, '야마토노 아야씨(倭漢氏)'라 불리게 되었다."

 

『속일본기』 – 덴표호지(天平寶字) 6년(762년) 6월 조

原文:
「東漢氏之先、阿知使主也。奉詔而渡來、始仕天朝。因居倭郡、是以號曰倭漢。」

해석:
"동한씨(東漢氏)의 선조는 아치노오미(阿知使主)이다. 조정의 명을 받고 건너와 천황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야마토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으므로, '야마토노 아야씨(倭漢)'라 칭하였다."

 

‘야마토노 아야씨’는 궁궐 및 신전 건축뿐만 아니라 제사의 집행과 관장, 국가 의례의 관리 등에도 관여하며, 단순한 외래인 기술자라기 보다는 문명 이식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장인들의 기술이 단지 ‘이전’ 및 '도입'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착’과 ‘변용’을 거쳐 일본 고유의 기술 체계로 흡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가야계 기술자의 이주를 하나의 문명적 충격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듯 금속 제련 기술의 이식을 통한 문화의 전수는 단순히 무기나 농기구 제작에만 그치지 않았다. 고대 일본의 무덤양식인 고분의 형성에도 가야의 영향이 깊이 스며있다. 일본 고분시대 전기의 주요 무덤에서 보이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형식은 가야의 계단식 석실고분이나 봉토형 고분에서 유래한 구조적 특성을 보여주며, 축조 기술 역시 한반도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나아가 고분 내부에서 발견되는 금속 무기나 갑옷, 장식품 등의 출토품은 가야계 기술의 직접적 유입을 입증하는 물적 증거가 된다.

 

고분 축조 기술, 특히 석실형 고분의 양식이나 석관의 배치방식에서도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유사한 구조가 일본 각지에서 발견된다. 나라현 이코마시(生駒市)에 자리잡고 있는 ‘이코마 고분군(生駒古墳群)’ 등에서 출토된 일부 고분은 내벽 석재 처리 방식, 봉토 구조 등에서 한반도 양식이 명확히 드러나며, 이는 단지 묘제만이 아닌 장례 의식 자체의 이식 가능성까지 보여준다.

 

한반도 남부는 삼국 통일 전야의 전쟁과 연맹, 분열이 끊이지 않았고, 대가야 역시 이러한 격랑 속에서 세력의 부침을 겪었다. 정치적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또는 야마토 정권과의 동맹 강화를 위한 정치적 교섭의 일환으로, 가야 왕실과 귀족들은 기술자와 장인을 인재로 삼아 보내거나 이주시키는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자들은 일본에서 ‘도래인(渡來人)’이라는 명칭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그 정체성은 결코 단절되지 않았다. 야마토노 아야씨를 비롯한 도래인 계열 가문들은 자신들의 출신 지역과 문화를 기억하고 계승하며, 그것을 일본 속에 뿌리내리게 했다. 도래인으로 갔으나 개척자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문화의 전파나 식민적 지배가 아닌 주체적 이동이었으며, 오히려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뿌리’ 중 하나가 가야였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실마리가 된다. 우리는 지금껏 ‘일본의 영향’이라는 말에는 익숙하지만 ‘일본을 만든 한반도’라는 관점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왔다. 그러나 고고학 유물, 문헌 기록, 도래인 가계도, 그리고 지역 전승을 종합할 때,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일본을 만든 다리 중 하나는, 고령에서 시작된 가야의 철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령은 단순한 변한의 일개 거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아시아 제철 기술의 중심이었으며, 해상 무역의 허브였다. 그곳에서 자란 기술자들은 단순히 쇠를 두드린 것이 아니라, 문명을 단련했다. 그리고 그 문명은 일본 열도에 전파되어 야마토 정권의 기초를 다졌다. 이는 침략이나 정복의 역사가 아니라, 기술과 문화의 이동이며, 주체적 이주의 역사이다. 한민족의 기술력과 문화력이 국경을 넘어 또 하나의 문명을 꽃피운 사례인 것이다.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경상도 고령이 속한 변한에서 철을 생산하여 왜와 낙랑 등에 수출한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오환선비동이전)

原文: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해석:

”이 나라에서는 철이 나며, 한(韓), 예(濊), 왜(倭)가 모두 와서 사 갔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모두 철을 사용하니, 이는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한 변진은 철을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 고대 문화 속에 숨겨진 가야의 흔적을 재발견함으로써, 한반도의 역사적 위상과 기술적 역량을 재조명해야 한다. 이는 ‘침탈당한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건너가 문명을 전한 과거’를 회복하는 일이다. 가야의 기술자들은 결코 일본에 의해 끌려간 피지배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선택했고, 그들의 기술은 일본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변화의 불씨는 지금도 일본의 고대 유적과 유물, 제례와 전통 속에 찬란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고령에서 출발한 장인의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곳은 열도를 가로질러 문화의 축을 세웠고, 철의 열기 속에서 두 민족의 역사적 접점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그 금속의 불꽃 속에서, 묻혀 있던 우리의 역사를 다시 꺼내어야 한다. 가야 장인들의 일본 이주는 곧 고대 일본의 국가 형성과 문화적 기반을 이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철의 길’로 연결된 고령과 야마토, 그 중심에는 정치적 연맹의 이면에 존재했던 기술자(개척자) 집단이 있었으며, 그들이 남긴 유산은 일본 곳곳의 유적과 고분, 유물 속에서 오늘날까지도 생생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