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1

"일본 열도에 남겨진 가야의 흔적: 사라지지 않은 기억"

 

가야는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진 듯하지만, 실은 사라진 적이 없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이 말이 다소 생뚱맞거나 의아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한반도 남부의 여러 소국 연맹이었던 가야는 기원후 6세기 중엽까지 제철 기술과 해상교역을 바탕으로 나름의 세력을 형성했다. 하지만 562년 대가야가 최종적으로 신라에 병합되며 역사의 중심 무대에서는 물러났고, 이후 수백 년 동안 '부록적 존재'로만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서 다시 바라보면, 이 작고 복잡한 나라의 흔적은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깊고, 무엇보다도 지속적이었다.

 

가야와 일본 열도, 단순한 이주가 아니었다

 

일본 열도에서 발견되는 다수의 유물, 유적, 문화재, 사찰, 고분군 등을 그저 '한반도 계통'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통칭하곤 한다. 그러나 이 중 상당수가 가야계 개척자들의 자취라는 점은 아직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후쿠오카, 사가, 구마모토 등 규슈 지역과, 야마구치, 오사카, 나라, 교토에 이르기까지 일본 고대 문화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지역들에는 가야계 인물과 집단이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들은 단순히 흘러 들어온 기술자나 유민이 아니라, 체계적인 기술과 제사 지식, 심지어 정치 제도까지도 전달한 '문화 이식자'였다.

 

예를 들어, 고대에 편찬된 일본 역사서 『속일본기』에는 아야씨(東漢氏), 다카무코씨(高向氏), 사키씨(狭城氏) 등 한반도계 귀족 가문이 신라 · 백제 출신으로 소개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실질적으로는 가야계특히 대가야나 금관가야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아야씨는 신사 건축과 궁중 제의, 천문과 복식, 금속공예에 이르기까지 조정 핵심 기술을 담당했다. 이는 단지 한 명의 귀화 인물이 아니라, 일종의 전문가 네트워크가 조직적으로 일본 조정과 융합되었음을 시사한다.

 

고분과 철기, 묻힌 시간 속에서 되살아나는 목소리

 

후쿠오카현의 이토시마 평야나, 사가현 카라쓰 지역의 고분군은 한반도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과 여러 구조적 유사성을 보인다.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3세기~6세기 일본 고분 시대에 등장하는 대표적 무덤 양식) 형태가 일본 고유의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 중 상당수는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 덧널(목곽)을 짜고 그 위에 냇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봉토를 덮어 쌓는 무덤 양식) 계통과 혼합된 구조를 보이며, 특히 내부 석실의 배열이나 부장품 구성 방식이 가야 고분과 매우 닮았다.

 

이를 구조적 유사성과 상호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구체화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내부 석실의 형태를 보면, 규슈 지역의 일부 전방후원분 내부에서 가야 돌무지덧널무덤과 유사한 횡혈식 석실 구조가 발견된다. 또한 무덤 속 부장품 역시 장검, 철기류, 토기 등으로 이것들의 배치방식이 서로 유사한데 특히 규슈 고분에서 가야계 토기나 무기가 출토되는 사례도 있다. 봉토 형식에서도 흙만 덮는 일본식 전방후원분과는 이질적이게도 돌을 혼합하여 쌓는 적석식 요소가 규슈 일대의 고분에서 발견된다. 대가야나 금관가야 고분과의 유사성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대표적으로 구마모토현(熊本県)에 위치한 '에타후나야마 고분(江田船山古墳, 5세기 후반)'이다. 전방후원분이기는 하나, 내부 석실은 횡혈식으로 돌을 쌓은 적석구조가 일부 확인이 되고, 대형 철제 무기와 방패, 가야계 장검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전방후원분과 돌무지덧널무덤의 예

 

가야에서 건너온 이들은 철을 만들 줄 알았고, 철을 다루어 무기를 만들 줄 알았으며, 철제 농기구로 새로운 농업 혁명을 이뤄냈다. 특히 일본 열도의 서북부 즉, 규슈 북부와 야마구치, 오카야마 지역에는 지금까지도 대형 제철 유적지가 다수 남아 있다. 그중 일부는 고령 지역의 제철 슬래그(쇳물 찌꺼기)와 동일한 성분 분석 결과를 보였으며, 이는 실제로 고령계 개척자가 해당 지역에 대규모로 정착했음을 시사한다.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光市) 지역에서는 탄소연대측정과 고고학적 층위 분석을 통해 5세기 초부터 시작된 고온 제철로 흔적이 확인되었고, 여기에 동반 출토된 철제 농기구와 무기는 고령 대가야 지역에서 확인된 것과 양식이 거의 일치했다. 이는 단지 기술의 전파가 아니라, 기술 집단의 이주를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신사의 구조와 제례 방식에 남겨진 가야의 제사 체계

 

가야는 그저 철을 다루는 기술자 집단이 아니라, 신관 계급을 포함한 제사 국가이기도 했다. 대가야 왕실은 고대 동아시아에서 드물게 왕권과 제사권이 결합한 정치 구조를 유지했고, 이는 곧 일본의 야마토 왕권 초기의 제사 시스템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컨대, 일본 신사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평가받는 '이즈모 대사 (出雲大社, Izumo Taisha)'는 제사의 주체가 천손강림이나 황족 중심의 천손 제사 구조에 종속되지 않는 토착의 신관 계층이라는 점에서 대가야와 유사한 이중 권위 체제를 떠올리게 한다. 신사의 운영은 '이즈모 가문(出雲氏), 이즈모 신관 가문(出雲臣)' 같은 토착 신관 가계가 맡아 왔다. 이즈모 대사는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시에 위치한 일본 최고(最古)의 신사 중 하나로, 오오쿠니누시(大国主神)를 주신(主神)으로 모신다. 오오쿠니누시는 지역 공동체와 씨족의 신이다. 중앙과는 별개의 권위체계를 가졌던 지방신이다. 중앙신은 황족신인 아마테라스(天照大神)나 타케미카즈치(武甕槌神) 등으로 이 신들은 일본 황실의 조상신이자 신화 체계의 중심에 있는 신들이다.

 

대가야 역시 왕과 별도로 존재하는 신관 계급이 제사의 주체였다. , 왕과 제사장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정치체제였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을 포함한 대가야 고분군에서는 '이중 묘역 구조'가 확인되는데, 이는 왕과 제사장의 공간이 구별된 것임을 뜻한다. 즉, 왕권과 제사권이 일치하지 않으며, 제의 공간이 지배자 공간과 별도로 구축되어 있다. 제사를 담당하는 별도의 신관 계층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와 열도 간 이러한 유사성은 단순히 제사 형식의 닮은 형태를 넘어서 정치권력과 종교 권위의 구조적 모델의 공유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일본 신사에 남아 있는 영혼을 모시는 전각 '타마야(魂殿)' 개념은 고령에서 출토된 가야식 제의 시설과 구조적 일치를 보인다. 타마야는 고대 일본의 신사나 고분에서 발견되는 영혼을 모시는 구조물을 말한다.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는 공간으로 고분 인근이나 신사의 영역 안에 신전으로 구축된다. 이러한 공간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대형 고분 일부에서도 발견되는데, 고분 본체 외부에 별도로 구성된 제의 시설이다. 이 구조물은 무덤 부속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혼령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 즉, ‘혼의 공간으로 해석된다. 이 외에도 건축의 고상가옥 구조라든가 제단과 일반 영역의 분리 방식, 제사에 사용된 청동거울과 도검류는 가야식 제사의 틀을 일본에서 구체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타마야(魂殿)의 일종

 

토기, 언어, 복식보이지 않는 문명의 확산

 

가야계 개척자의 영향은 건축이나 철기, 고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문명의 바탕을 이루는 토기에서 그들의 존재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스에키(土師器)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본 고대 회청색 도기는, 본질적으로 가야의 계림식 토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는 김해 및 고령 지역에서 제작되던 고온 소성 토기의 기술적 전승으로, 반지하식 돌가마 구조와 1,000도 이상의 고온 소성 온도 조절 기법, 회청색 점토 처리 방식 등이 고스란히 일본 열도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계림식 토기가 대략 3세기 후반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반면, 스에키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문화의 전이 과정 자체라 할 것이다.

 

스에키(土師器)

 

이 외에도 일본 고대 야마토 왜 정권 시기(4~6세기) 궁중 복식에서 보이는 금속 장식의 결합 구조나 허리띠 장신구, 복식 도해 문양은 김해 양식과 유사한 사례가 많으며, 이는 금관가야 중심의 귀족 양식이 일부 왕과 대신 등 귀족층에 수용되었음을 시사한다. 금관가야는 철기와 금속 공예 기술이 뛰어나기로 유명했으며, 귀족 계층의 복식에서도 그 기술력과 화려함이 잘 드러난다. 청동이나 철 또는 금속판으로 만든 허리띠에 여러 개의 금속 장식물을 달아 복식에 위엄과 장식을 더 했는데, 이러한 장신구는 단순한 꾸밈이 아니라 신분과 지위, 혹은 종교적 의미를 지닌 상징물이기도 하였다. 복식 문양에서도 반복적인 기하학무늬나 동물 문양을 새겼으며, 용 · 새 · 해 등의 도상은 제의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복식 문화는 일본 고대 궁중 복식과도 매우 유사함을 보이고 있는데, 궁중 고관의 복식에서 보이는 포(긴 옷)와 띠, 장신구의 조합이 금관가야의 엘리트 복식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등장한다. 장신구 부착 위치나 금속제 고리 장식 등이 대표적이다. 구마모토현 다마나시(熊本県 玉名市)의 '에타후나야마 고분(江田船山古墳)'에서 출토된 허리띠 장신구는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나온 것과 형태, 연결 방식, 장식 기법이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대 복식 형태

 

기억의 실타래를 다시 잇기 위한 여정

 

결국, 우리는 이 모든 흔적을 통해 단 하나의 진실을 바라보게 된다. 가야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본 열도로 이동하여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기술, 제례, 예술, 정치적 위상은 일본의 고대 국가 형성과 문화 정착기에 중요한 자산으로 기능했다. 일본이 야마토왜 왕권 체제를 구축해 나가던 시기, 가야계 개척자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동아시아 문명권의 전이자로서 존재했다.

 

여기서는 '가야의 일본 정착'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고령계, 김해계, 성산가야계, 대가야계로 구분하여 각 계통이 일본 열도에서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추적할 것이다. 특히, 일본 각지의 유물 · 유적 · 사찰 · 신사 · 고분 · 기술유산 등을 하나씩 짚으며, 그 속에 숨어 있는 가야의 흔적을 밝히는 데에 집중할 예정이다. 가야를 잊지 않고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