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7회
스에키의 뿌리를 찾아서: 가야 토기의 기술과 일본 토기의 진화
낙동강의 잔잔한 물결이 철광석 깃든 흙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그곳, 가야의 고토. 해 질 녘, 산비탈에 길게 뻗은 터널형 가마의 입구에서, 도공들은 땀과 열망으로 혼이 깃든 점토를 빚었다. 그들의 손끝에서 태어난 회청색 토기는 그저 한낱 그릇이 아니었다. 그것은 흙과 불의 연금술, 세대를 이어온 기술의 서사, 그리고 바다를 건너 새로운 땅에 뿌리 내릴 문명의 씨앗이었다.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가마의 불꽃은 가야의 혼을 담아 타올랐고, 그 빛은 멀리 대한해협의 거친 파도를 너머, 일본 열도의 해안까지 닿았다.
김해의 고분 사이로 바람이 속삭이고, 함안의 들판에 고령의 산등성이가 그림자를 드리우던 시대. 가야 도공들은 철분이 스민 점토를 정제하고, 1,200℃의 뜨거운 가마 속에서 자연유의 광택을 불러냈다. 이 토기는 제사의 제기로, 일상의 항아리로, 그리고 신성한 상징으로 가야인의 삶에 깃들었다.
그러나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고구려군의 날카로운 칼끝이 가야의 가슴팍을 향해 파고들었다. 신라와 백제의 갈등이 낙동강 유역을 뒤덮자 지역 정세는 급속하게 불안해졌다. 일신의 위협을 느낀 가야의 도공들 또한 불씨를 품고 바닷길로 나섰다.
그들은 가야의 기술과 꿈을 돛단배에 싣고, 규슈의 사이토바루(西都原) 고분과 오사카의 스에무라(陶村) 가마터로 향했다. 스에키(須惠器)는 그렇게 태어났다. 가야의 흙에서 뿌리 내린 불꽃이 열도의 땅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순간이었다. 이 회청색 경질토기는 평범한 도구를 넘어,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문화의 다리, 고대 동아시아 교류의 살아 있는 증언으로 거듭났다.
스에키의 기원: 가야와의 기술적 연계
스에키는 일본 고분시대(4세기 말~7세기)에 등장한 경질토기로, 단단함과 은은한 광택으로 고급 토기로 여겨졌다. 그 뿌리는 한반도 가야의 도질토기에 있다. 낙동강 유역 - 김해, 함안, 고령 - 에서 발전한 가야 토기는 원삼국시대 와질토기의 전통을 계승하며, 지역 점토와 고온 소성 기술로 독창적 도예 문화를 꽃피웠다. 중국 한나라의 도기 기술이 간접적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있지만, 가야 토기는 영남 지역의 독자성을 바탕으로 체계화되었다.
가야 토기는 낙동강 유역의 철분 함유 점토를 정제해, 약 1,000~1,200℃의 터널형 가마(등요, 登窯)에서 주로 환원 소성으로 빚어졌다. 환원 소성은 산소 공급을 줄여 가마 속 철분이 산화되지 않도록 하여, 점토가 청회색을 띠고 표면에 유리질 광택(자연유)을 형성하게 했다. 이 과정은 도공의 숙련된 불 관리와 점토의 화학적 반응이 어우러진 결과로, 단단하고 은은한 광택의 토기를 완성했다.
이러한 기술은 5세기 오사카 스에무라 가마터에서 출토된 스에키와 뚜렷한 공통점을 보인다. 예를 들어, 스에키의 고배(높은 굽의 의례용 그릇)와 항아리는 가야 토기의 우아한 곡선과 매끄러운 표면을 공유하며, 일본 고분시대의 제사와 실용적 수요에 맞게 재해석되었다.
함안 우거리 토기 가마터와 스에무라 가마는 경사진 터널형 구조로 열을 효율적으로 순환시키는 설계를 공유하며, 연기가 빠져나가는 연도의 구조와 내부 공간 배치에서도 유사성을 드러낸다. 이는 가야의 고온 소성 기술이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에 뿌리내렸음을 증명한다.
가야 도공의 이주와 스에키의 탄생
스에키의 발전은 가야 도공의 이주와 밀접하다.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은 가야 지역에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고구려의 위협과 신라의 팽창, 백제와의 갈등, 그리고 경제적 요인으로 가야는 큰 혼란을 겪었고, 일부 도공이 일본 열도로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언덕의 경사면을 활용해 10° 이상의 경사도로 축조된 스에무라 가마의 등요 구조와 점토 정제 방식은 가야의 기술 전파를 뒷받침하며, 5세기경 일본에 뿌리내렸다.
스에키는 가야의 기술을 기반으로 일본의 토질과 수요에 맞춰 독자적으로 진화했다. 6세기 이후 간토, 도호쿠 지방으로 확산되며 고분 제사용 고배부터 일상용 저장 용기까지 다양한 기종을 낳았다. 이는 헤이안 시대(8~12세기) 도기 전통으로 이어졌으나, 12세기 이후 오카야마현의 비젠 지역에서 생산된 비젠야키(備前燒)와 같은 중세 도기와는 별개의 경로를 걸었다.
가야, 흙과 불의 정수
가야의 도질토기는 낙동강 유역의 독창적 도예 전통을 대표하며, 고대 동아시아에서 빼어난 기술로 빛났다. 김해, 함안, 고령의 찰진 점토는 도공의 손끝에서 정교히 빚어져 단단한 토기로 거듭났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가야의 철이 삼한, 왜, 낙랑으로 퍼졌다고 전하며, 철기 기술은 점토 가공 도구나 가마 건설용 내화재료 준비에 간접적으로 기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가야의 등요는 산비탈의 경사를 활용해 열을 균일하게 순환시키는 설계로, 연도와 긴 터널 구조를 통해 고온을 유지하며 청회색의 미학을 완성했다.
가야 토기는 실용성과 예술성을 조화시켰다. 장경호(긴 목 항아리), 시루(찜기), 기대(굽다리 접시)는 일상생활을 풍요롭게 했고, 고배(높은 굽의 의례용 그릇)는 제사에서 신성함을 더했다. 타날문(두드려 새긴 문양)과 투창(굽에 뚫린 구멍 장식)은 토기의 미학적 가치를 높였으며, 투창은 주로 장식과 의례적 상징성을 띠고 있다. 이 정교한 기술은 5세기경 가야 도공의 이주를 통해 오사카 스에무라 가마로 전파되었다. 스에키는 가야의 고온 소성과 자연유를 계승하면서 일본의 토질과 의례적 수요에 맞춰 독자적으로 발전하며, 일본 도예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일본의 갈망과 스에키 혁명
4세기 말 일본은 하지키(土師器)라는 연질토기를 사용했다. 600~900℃의 노천 소성으로 제작된 하지키는 내구성과 방수성이 떨어져 고급 용도에 한계가 있었다. 한반도에서 유입된 철기, 마구, 금동 장신구는 일본 지배층의 기술적 열망을 자극했다. 가야의 도질토기는 단단함과 광택으로 이 열망을 충족하며, 도공 이주와 함께 스에키로 구현되었다. 스에키는 하지키와 병행 사용되다가 점차 고분 제사와 고급 용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가야 각국의 유산
가야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다양한 토기로 스에키에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기술과 미학은 스에무라와 사이토바루에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다.
- 금관가야(김해): 고배와 장경호의 곡선미와 자연유는 초기 스에키의 토대가 되었다. 양동리 고분군 유물은 고온 소성의 정교함을 보여준다.
- 아라가야(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굽다리 접시는 투창 장식으로 독창성을 띠며, 스에키의 문양 다양성에 영향을 미쳤다.
- 대가야(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균일한 소성과 타날문 토기는 스에키 중기 형태에 기여했다.
- 소가야(고성): 송학동 고분군의 간결한 토기는 규슈 스에키에 간접적 영향을 주었다.
스에키의 종교적 상징성
스에키는 일본의 고대 종교적 의례에서 점차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담당하며, 불교 사찰과 신토 신사라는 두 가지 주요 종교적 맥락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6세기 불교의 일본 전파 이후, 스에키는 사찰 내에서 공양물을 담는 용기로서 점차 그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특히 헤이안 시대(794-1185)에 이르러 사찰 유적지에서 출토된 스에키 항아리와 고배(高杯)는 불교 의례에서 공양물, 특히 곡물이나 액체 제물을 담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용기는 단순한 실용적 도구를 넘어, 불교의 엄숙한 의례적 분위기를 뒷받침하는 상징적 매개체로 기능하였다.
신토 의례에서도 스에키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크다. 신토의 전통에서는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나 정화 의식에 사용되는 용기가 필요했으며, 스에키는 그 내구성과 세련된 외관 덕분에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선택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신사에서 행해지는 목욕재계의 종교 행위인 정화 의례(禊, 미소기)나 신에게 바치는 공양물(供物, 쿠모츠)을 담는 데 스에키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스에키가 일상생활의 물리적 용기를 넘어,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영적 매개체로서의 상징성을 띠었음을 시사한다.
스에키의 이러한 종교적 활용은 그 물질적 특성과 미학적 가치에서 기인한다. 스에키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져 견고한 내구성을 자랑하며, 회청색의 단아한 표면은 종교적 공간에서 요구되는 엄숙함과 조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특성은 스에키가 가야 토기의 제작 기법과 다기능성을 계승한 결과로, 일본 고대 사회의 기술적 · 문화적 연속성을 보여준다. 또한, 스에키의 형태적 다양성—항아리, 고배, 접시 등—은 다양한 의례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연성을 제공하였으며, 이는 스에키가 종교적 맥락에서 널리 수용된 이유 중 하나로 평가된다.
더 나아가, 스에키는 일본 고대 사회에서 종교와 일상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불교와 신토라는 서로 다른 종교 전통 속에서 공통으로 사용된 스에키는, 이 두 종교가 초기 일본 사회에서 상호작용을 하며 공존했던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스에키는 일상적인 도자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일본의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체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에키는 고대 일본의 물질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연구 대상으로, 그 상징성과 기능성은 오늘날에도 학술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스에키의 지역적 변이와 사회적 역할
6세기 이후 스에키는 지역별로 다양화되었다. 간토 지역은 실용적이고 간소한 형태를 특징으로 주로 일상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규슈는 가야의 곡선미를 일부 반영하여 보다 유려하고 장식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스에키는 평범한 도자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일본 사회의 계층 구조와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오사카의 스에무라 가마는 야마토왜 정권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이는 정치적 권위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정교한 스에키는 지배층의 제사와 같은 제례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는 권력과 신성함을 결합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단순하고 일반적인 스에키는 일반 대중의 일상생활에 사용되었으며, 이는 사회적 계층화를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이러한 계층화는 도자기의 형태와 사용 방식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었으며, 이는 일본 사회의 복잡한 구조와 문화적 맥락을 반영한다.
가야 토기의 미학적 영향
가야 토기의 유려한 곡선과 자연유는 스에키를 통해 일본 도기의 미학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스에키의 소박한 광택은 신토와 불교 의례의 정갈함과 조화를 이루었다. 비젠야키와 라쿠야키(楽焼, 주로 다례용으로 쓰이는 일본 전통 도자기)는 스에키의 기술과 질감을 간접적으로 계승했다.
와비사비(侘寂, 차적) 철학은 15~16세기 다도 문화에서 형성되었지만, 스에키의 자연스러운 광택과 질감이 그 초기 영감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와비사비 철학이란, 일본의 미학 개념 중 하나이다. 불완전함과 일시성, 그리고 소박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철학이다. 와비(侘)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아름다움을 뜻하며, 寂(사비)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생기는 고요함과 쓸쓸함 속에서 느껴지는 깊은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일본 전통 차도(茶道)나 정원, 건축, 문학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깊게 반영되어 있다.
학계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가야 토기의 실용성과 장식성의 균형이 스에키를 통해 일본 도기의 독창적 미학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스에키, 시간의 불 속에서 영원히 타오르다
스에키는 낙동강의 흙에서 태어나 태평양의 파도를 넘어 일본 열도에 뿌리내린 가야의 불씨다. 스에키는 그들의 땀과 꿈이 일본의 흙과 융합된 결실이었다. 회청색 도질토기는 그저 평범한 흙 그릇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대 동아시아의 교류를 품은 시간의 대서사였다.
호류지(法隆寺)의 불빛 아래,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신성한 숲속에서 스에키는 신과 인간을 잇는 신성한 용기로 거듭났다. 그 단단한 표면은 신토의 정화수를, 불교의 공양물을 담았고, 유려한 곡선은 가야 도공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미학을 속삭였다. 간토 지방의 농부 손에 들린 소박한 항아리에서, 규슈의 제단에 놓인 정교한 고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스에키는 가야의 숨결을 간직했다.
그 불꽃은 비젠도자기의 자연유로, 라쿠야키의 소박한 질감으로, 다도의 찻잔으로 이어졌다. 와비사비의 철학은 스에키의 불완전한 광택에서 싹텄고, 현대 마시코야키(益子焼, 19세기 초부터 만들어진 일본 전통 도자기)의 그릇에서 가야의 미학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스에키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가야와 일본,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손을 맞잡고 빚어낸 문화의 다리다. 낙동강의 바람이 김해의 고분을 스치고, 태평양의 파도가 규슈 사이토바루의 해안을 어루만지는 곳에서, 스에키는 고대 동아시아의 이야기를 속삭인다.
그 회청색 표면에 반사된 것은 도공들의 열망, 바다를 건넌 기술, 그리고 시간을 초월한 교류의 대서사다. 스에키를 손에 쥐는 순간, 우리는 가야의 불꽃과 일본의 흙이 함께 그린 꿈을 만난다. 그 불씨는 지금도 열도 곳곳의 도자기 가마 속, 신사와 신궁의 제단 위, 그리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영원히 타오르고 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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