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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6.01 일본 건국신화의 거울

프롤로그

 

역사는 기록되기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것은 광활한 대지에 각인된 삶의 치열한 흔적, 바다를 건너 전해진 이름 없는 자들의 쇳내 나는 목소리, 그리고 바람에 실려 퍼져나간 인간과 자연에 얽힌 생존의 서사였다. 우리가 신화라 부르는 것들은 그러한 무명의 역사가 세월 속에서 형태를 갖추고, 공동체가 기억하는 방식으로 체계화한 사유의 산물이다. 그러나 신화는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수동적 매체가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미래를 형성하는 도구가 되며, 정체성과 권력을 정당화하는 서사로 재구성된다.

 

우리는 신화를 종교적 이야기, 민속적 전승으로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는 그저 흔한 일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국가를 잇는 신성한 권위의 줄기이자, 신화 속 낱말 하나하나가 제도와 권력, 지리와 혈통, 이름과 정체성을 정교하게 조율하는 장치였다. 그래서 신화를 읽는다는 것은 정치의 기원을 해독하는 일이며, 감춰진 ‘권력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험난한 여정이다.

 

역사는 기억을 기록하는 일이자, 때론 기억을 지우는 일이다. 그리고 신화는 그런 기억의 가장 오래된 틀이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과거를 들여다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신화를 만든 자의 의도와 권력,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기억의 조각들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건국신화는 단편적인 민속 전승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기원의 설계도이자, 정체성의 가장 깊은 뿌리를 관장하는 기억의 장치다.

 

일본의 건국신화도 그러하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서술된 아마테라스의 이야기는 단지 고대의 풍속이나 전설을 담은 문헌이 아니다. 그것은 8세기 야마토 왕권이 자신들의 기원을 신성화하고, 왕권을 영속화하며, 외래의 흔적을 ‘자국화’하려는 시도였다. 그 신화의 깊은 구조 속에는 놀랍게도, 열도 바깥에서 건너온 또 다른 기억의 파편들이 숨어 있다.

 

그 기억은 한반도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고조선의 단군신화, 부여·고구려의 하늘 제의, 가야·백제의 왕계 서사와 제사 체계는 일본 고대 왕권 신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일본은 이 영향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 대신, 한반도에서 받아들인 사상과 전통, 의례와 이름들을 철저히 재조립하고, 야마토 중심의 신성 서사로 전유(轉有)했다. 일본 건국신화는 그렇게, 거울처럼 타자의 얼굴을 비추되 왜곡된 상으로 되돌려주는 기제가 되었다.

 

왜 일본은 8세기에 들어와 고대 한반도의 신화 구조를 모방하거나 재편입했는가? 왜 신화를 문서화했는가? 왜 그것은 정치적인 기획이어야 했는가? 이는 평범한 고대사의 기술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정체성을 구축하고 정당성을 설계하는지를 묻는 작업이다. 신화는 언제나 ‘말해진 것’일 뿐 아니라, ‘누가 말하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정치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명확하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자생적 창작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유입된 고대 왕조 신화를 모방하고 변형하여, ‘자국화’한 서사 체계다. 아마테라스는 단군의 그림자를 반사하는 거울이다. 스사노오의 분노는 부여와 고구려의 왕위 다툼을 연상시키며, 닛폰(日本)의 ‘동방 기원’ 담론—일본이 외래 문명을 수입해 만들어진 나라임에도, 이를 감추고 스스로를 동방 문명의 기원 및 중심으로 재서술한 정치적 서사론— 은 문명의 수여자인 가야와 백제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그 수혜자인 일본이 이를 철저하게 자기화한 기억의 정치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한반도 신화를 받아들이되,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자기화’했는가? 답은 권력에 있다. 고대 일본은 한반도 도래인의 지식과 기술,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이며 문명을 형성했다. 하지만 ‘외래 기원’이라는 사실은 왕권의 신성성과 자족성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따라서 일본은 문명적 종속을 감추기 위해 신화를 창작해야 했다. 그것도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왜곡이자, 신화의 정치이다.

 

신화는 반영의 장치다. 그러나 그 반영은 언제나 선택적이며 왜곡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거울 속에 비친 타자의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다시 그 반사된 상을 ‘진실’로 제도화했다. 그리고 이 왜곡된 거울은 근대 국가 형성과 식민주의 담론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천황 중심의 역사, 대동아공영권, 정통성 있는 신성 군주국이라는 서사는 모두 이 신화적 기원의 정치에서 파생된 산물이었다.

 

이 책은 바로 이 ‘거울의 구조’를 해부하려 한다. 일본 건국신화에 담긴 모방과 왜곡, 차용과 자기화의 흔적을 추적하며, 신화가 어떻게 정치권력을 정당화하고 역사적 타자를 지워왔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단군과 아마테라스의 비교는 단순한 문화사적 흥미를 넘어서, 문명의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지배당하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다.

 

거울은 빛을 반사하지만,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스스로를 비추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지워진 타자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왜곡된 상을 바로잡고, 감춰진 흔적을 복원하는 일은 단지 과거의 회복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역사적 책임을 묻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일본 건국신화의 거울』은 그 작업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이제 그 왜곡된 반사의 구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들이 감추고 싶었던 원형의 서사, 지워진 기억의 주체들, 거울 밖의 진짜 얼굴을 복원해 내야 한다.

 

신화는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쓰이고 있는 이야기다. 이제, 우리는 일본 건국신화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 이면에 숨겨진 기억의 정치와 역사적 욕망의 흔적을 직시해야 할 때다.

 

이제, 그 거울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갈 시간이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