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시 사2014. 9. 27. 23:27

오늘은 함께 공부하고 있는 한 지인께서 의미 있는 사업을 시작하신 날입니다. 앎을 지향하는 카페라고 해야 할까요? 책도 읽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하는 그런 형태의 공동체 공간을 개업했습니다. 요즘은 여기저기 이런 모습을 띤 공부 모임 비슷한 공동체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바람직한 현상으로 봅니다.

 

언제부터인가 산에 오르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등산화에 등산복 한 벌씩은 갖추고 있고, 등산복이 대한민국 아줌마 아저씨들의 일상복이 되었다는 비아냥거림도 들립니다. 하긴, 밖에 나가보면 온통 거리가 등산복 일색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입어 보면 편하고 좋은 것을요. 일상복이라고 해서 따로 이런 것이다 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편하고 게다가 기능성까지 만족스러우면 즐겨 입는 거지요.

 

건강을 위해 산에도 오르고, 둘레길도 걷고, 또 마음 맞는 분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은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건강을 위해 산과 둘레길만 찾을 게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하나의 열풍처럼 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특히나 정치가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절망의 시절이기에 더욱 그런 바람이 간절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보면, 소위 정치평론가라는 양반들 아주 물 만난 고기들 같습니다. 특히나 씹기 좋은 야당의 분열상에 다들 숟가락 하나 얹기 식의, 대안이 전무한 논평(말장난)들을 쏟아내며 정치의 홍수시대를 맞이한 듯도 보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정치평론가들만 횡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일반 국민들 역시 정치를 상갓집 강아지 취급하며 정치 불신에 일조들 하고 있음이 현실이니 나라꼴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기야, 국민들 입장에서 입법·사법·행정 3부 중에 게 중 만만하고 같잖은 게 입법부로써의 정치인들일 겁니다. 부정할 수 없지요. 자신들이 뽑는 건데요.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데요. 하지만 사법이나 행정부는 그렇지 않잖아요? 나름 권력 행사의 무시무시한 무기 또한 갖고 있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치의 위기라고 판단됩니다. 아니, 단순히 정치의 위기라기보다는 입법부의 위기요 더 크게 본다면 국민 삶의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옛말이 있습니다만, 결국 그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 개개인의 몫이 된 채 자신에게 또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바르게 인지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식의 정치 불신과 정치 혐오의 결과로 정치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순간, 정치는 특화되어 대한민국 1% 명망가 집안의 전유물로, 계계승승 그들만을 위한 세습제 정치로 변질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정치에 관심이 없으시다고요? 정치적 노예로 전락하는 지름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치를 상갓집 개 취급하기 시작한 게 일반 국민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언론과 방송이 나서서 정치권력에 대한 혐오성 흠집 내기 여론을 조성하여 이를 널리 확산시켰으며, 이는 다시 불순한 목적을 가진 권력형 알바세력들에 의해 온·오프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들 정치하면 혀를 내두르기에 바쁩니다. 그렇다고 정치가 아주 잘했다라든가 정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정치(인)를 만들어(뽑아) 놓은 것도 역시 앞서 말했듯이 국민들의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정치만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냉정하게 이야기 한다면, 현재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야당)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측면도 분명 있습니다. 세월호법과 관련한 사안으로 당내 혼란을 거듭하고 있지만, 문제는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현재 그들이 갖고 있는 자체 역량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하다는 게 객관적 관점에서 본 제 솔직한 심정이기에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미 국민들은 재·보선과 지방선거라는 평가를 통해 새누리당에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여당 입장에서도 의외의 결과라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의미하고 있는 함의는, 국정 운영은 “정부 여당의 뜻대로 하라"는 국민의 지시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안하무인격 무소불위의 권력을 앞세운 강한 정부가 세상을 옥죄고 있는 판국에 야당이 설혹 승리를 했다한들 쉽지 않은 협상의 테이블로 나서야 했을 터입니다만, 역으로 국민은 야당의 마지막 숨통 마저 끊어버리 듯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으니 이미 그 협상의 결과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여기까지가 세월호법 문제로 야당이 자중지란을 보였던 진실의 전모라 할 만합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당내 계파문제와 주도권 다툼 같은 것도 있었겠지요. 허나 세상에 그런 것 하나 없는 정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최종적으로 정권을 잡기 위한 다툼과 협상의 과정들이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승리를 거두었다면 세월호법을 포함한 정국의 향방은 좀 달라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리 야당의 행태와 지도부의 리더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세월호라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도 여당에게 승리를 안기는 대한민국의 민의는 그날로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민의가 바로서야 정치(나라)가 바로 서는 법이라는 산 역사를 남긴, 교훈적 결과라 할 만합니다.

 

자, 어찌되었든 지금이야 뭐 눈에 띄는 게 야당의 흔들리는 모습뿐인 듯하니 이게 야당만의 문제로 보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야당이 쑥대밭이 되고 나면 그 다음 차례는 여당이 될 것임은 불문가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 하면, 의도된 정치 불신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치의 위기를 조장하는 주체세력을 논하기에 앞서, 왜 야당이 먼저 그 매를 맞고 있는지를 말씀드리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는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독재와의 투쟁 속에 발전해 왔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보수세력이든 진보세력이든 싸움의 핵심 지도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제왕적 또는 1인 보스체제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 세대들이 정계를 떠나면서 보수진영이나 진보진영 모두 새로운 시험에 든 셈이 되었습니다. 사실, 진보진영은 노무현대통령의 탄생이 그 신호탄이었으며 보수진영은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그 신호탄으로 볼 수 있습니다. MB의 등장은 잠시의 휴지기(休止期)였고 말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보스정치체제는 박정희와 3김시대 즉, 국민의 정부 마감과 동시에 막을 내렸어야 합니다. 헌데, 그 자식되는 박근혜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오늘의 이 현실은 민주주의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실로 불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박근혜 이후의 보수진영의 앞날은 오늘의 야당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반면교사의 전형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야당의 행태를 보면서 여당인 새누리당도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겁니다. 동병상련의 아픔 같은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정치 위기)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정치인 -여·야를 막론한- 들 또한 분명 존재할 것이기에, 그게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간에 새로운 정치 체제 탄생을 위한 용트림이 조만간 가시화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으로까지 발전해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러한 우리 나름의 정치 지형적 특성에 더해, 정치 위기의 조장세력으로서의 자본의 정치적 목표는 아주 분명합니다. 간섭 없는 무한 자본의 세계로 세상을 이끌고 가고자 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한때 세계는 군사적 대국을 목표로 경쟁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제1, 2차 세계대전과 미·소 냉전체제가 그 한 예가 될 것입니다. 전쟁과 쟁탈이 잠시 물러선 자리에 이번에는 경제적 대국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자본이 최고의 선(善)이라는 명제를 안고 출현합니다. 하지만 이조차 제대로 순항하지 못하고 70년대 이후 극심한 불황 아래 허덕이게 됩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삼은 것이 지역을 넘나드는 금융적 투자와 가난한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산업발전형 자금 투자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그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정치를 몰락시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정치를 자본에 예속시켜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정치가 자본을 컨트롤 할 수 없게끔 만들어 놓는 게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가장 중요한 핵심 중에 하나입니다. 언론 매체를 통해 이런 논리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자들이 바로 일군의 정치평론가와 정치학자들입니다. 자본의 꼭두각시가 되어 정치 혐오와 사적 욕망을 부채질하는 것이지요.

 

이들은 자본에 대한 끝없는 욕망 부풀리기와 사회 구성원의 개별화 전략을 앞세워 자기책임론 여론을 강화합니다. 자본 획득에 대한 욕망에 방해가 되는 '나' 이외의 '타자'는 이제 나의 공동체 속 구성원이 아닌 겁니다. 아니, 공동체라고 하는 개념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회 속에는 오직 욕망하는 ‘나’만이 존재하며, 정치적 선택 또한 이 구도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희망하는 사람(세력)들을 적대시하도록 만듭니다. 그게 바로 자기책임론의 핵심입니다. 이런 모습은 세월호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 중에도 무수히 목도 -자기들이 놀러 가다가 사고가 난 것을 왜 정부 보고... 그만하면 됐다, 그만해라. 등등- 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나의 욕망과 국가의 권력만이 존재하는, 실로 무서운 세상의 도래인 것이지요. 그런 세상에서는 옆집에서 “강도야” 하는 외침이 들리더라도 예전처럼 몽둥이 들고 뛰어 나가는 인정 따위는 기대조차 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얼른 우리집 현관문을 철저하게 걸어 잠그고 마는 그런 막장 세상으로의 이행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런 모습이 우리의 미래라면 참으로 암울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경제적 대국을 꿈꾸다가 이제는 목숨 연명하기에조차 전전긍긍하고 있는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는 또 다른 경쟁(갈등) 형태를 통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려고 할 것입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는 우리가 바로 보고 깨어 있지 않으면, 또 다시 우리 구성원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군사적 대국’과 ‘경제적 대국’에 이은 인간성 멸종의 새로운 대국을 향해 세상은 움직여 나갈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입니다. 다수가 행복한 ‘인간적 대국’을 염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강렬한 ‘삶(앎)의 공동체’ 열풍이 불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 산을 열심히 오르는 것 못지않게, 내 육신과 정신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도 열과 성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모든 지식인들이 공동체적 삶의 현장으로 나서야만 합니다. 학자들은 강단에만 몰두할게 아니라 자신의 주변과 이웃으로 나가 앎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며, 재야의 지식인과 정치인들 또한 자신의 주변에서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독서 모임도 좋고, 함께 책 읽는 모임도 좋고, 강사를 초빙하여 강의를 하는 형태도 좋고, 어떤 형태로든 미래를 준비해야만 합니다. 앞서 소개드렸던 제 지인처럼 말이지요.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