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역사는 기록되기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것은 광활한 대지에 각인된 삶의 치열한 흔적, 바다를 건너 전해진 이름 없는 자들의 쇳내 나는 목소리, 그리고 바람에 실려 퍼져나간 인간과 자연에 얽힌 생존의 서사였다. 우리가 신화라 부르는 것들은 그러한 무명의 역사가 세월 속에서 형태를 갖추고, 공동체가 기억하는 방식으로 체계화한 사유의 산물이다. 그러나 신화는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수동적 매체가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미래를 형성하는 도구가 되며, 정체성과 권력을 정당화하는 서사로 재구성된다.

 

우리는 신화를 종교적 이야기, 민속적 전승으로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는 그저 흔한 일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국가를 잇는 신성한 권위의 줄기이자, 신화 속 낱말 하나하나가 제도와 권력, 지리와 혈통, 이름과 정체성을 정교하게 조율하는 장치였다. 그래서 신화를 읽는다는 것은 정치의 기원을 해독하는 일이며, 감춰진 ‘권력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험난한 여정이다.

 

역사는 기억을 기록하는 일이자, 때론 기억을 지우는 일이다. 그리고 신화는 그런 기억의 가장 오래된 틀이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과거를 들여다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신화를 만든 자의 의도와 권력,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기억의 조각들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건국신화는 단편적인 민속 전승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기원의 설계도이자, 정체성의 가장 깊은 뿌리를 관장하는 기억의 장치다.

 

일본의 건국신화도 그러하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서술된 아마테라스의 이야기는 단지 고대의 풍속이나 전설을 담은 문헌이 아니다. 그것은 8세기 야마토 왕권이 자신들의 기원을 신성화하고, 왕권을 영속화하며, 외래의 흔적을 ‘자국화’하려는 시도였다. 그 신화의 깊은 구조 속에는 놀랍게도, 열도 바깥에서 건너온 또 다른 기억의 파편들이 숨어 있다.

 

그 기억은 한반도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고조선의 단군신화, 부여·고구려의 하늘 제의, 가야·백제의 왕계 서사와 제사 체계는 일본 고대 왕권 신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일본은 이 영향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 대신, 한반도에서 받아들인 사상과 전통, 의례와 이름들을 철저히 재조립하고, 야마토 중심의 신성 서사로 전유(轉有)했다. 일본 건국신화는 그렇게, 거울처럼 타자의 얼굴을 비추되 왜곡된 상으로 되돌려주는 기제가 되었다.

 

왜 일본은 8세기에 들어와 고대 한반도의 신화 구조를 모방하거나 재편입했는가? 왜 신화를 문서화했는가? 왜 그것은 정치적인 기획이어야 했는가? 이는 평범한 고대사의 기술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정체성을 구축하고 정당성을 설계하는지를 묻는 작업이다. 신화는 언제나 ‘말해진 것’일 뿐 아니라, ‘누가 말하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정치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명확하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자생적 창작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유입된 고대 왕조 신화를 모방하고 변형하여, ‘자국화’한 서사 체계다. 아마테라스는 단군의 그림자를 반사하는 거울이다. 스사노오의 분노는 부여와 고구려의 왕위 다툼을 연상시키며, 닛폰(日本)의 ‘동방 기원’ 담론—일본이 외래 문명을 수입해 만들어진 나라임에도, 이를 감추고 스스로를 동방 문명의 기원 및 중심으로 재서술한 정치적 서사론— 은 문명의 수여자인 가야와 백제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그 수혜자인 일본이 이를 철저하게 자기화한 기억의 정치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한반도 신화를 받아들이되,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자기화’했는가? 답은 권력에 있다. 고대 일본은 한반도 도래인의 지식과 기술,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이며 문명을 형성했다. 하지만 ‘외래 기원’이라는 사실은 왕권의 신성성과 자족성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따라서 일본은 문명적 종속을 감추기 위해 신화를 창작해야 했다. 그것도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왜곡이자, 신화의 정치이다.

 

신화는 반영의 장치다. 그러나 그 반영은 언제나 선택적이며 왜곡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거울 속에 비친 타자의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다시 그 반사된 상을 ‘진실’로 제도화했다. 그리고 이 왜곡된 거울은 근대 국가 형성과 식민주의 담론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천황 중심의 역사, 대동아공영권, 정통성 있는 신성 군주국이라는 서사는 모두 이 신화적 기원의 정치에서 파생된 산물이었다.

 

이 책은 바로 이 ‘거울의 구조’를 해부하려 한다. 일본 건국신화에 담긴 모방과 왜곡, 차용과 자기화의 흔적을 추적하며, 신화가 어떻게 정치권력을 정당화하고 역사적 타자를 지워왔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단군과 아마테라스의 비교는 단순한 문화사적 흥미를 넘어서, 문명의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지배당하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다.

 

거울은 빛을 반사하지만,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스스로를 비추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지워진 타자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왜곡된 상을 바로잡고, 감춰진 흔적을 복원하는 일은 단지 과거의 회복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역사적 책임을 묻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일본 건국신화의 거울』은 그 작업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이제 그 왜곡된 반사의 구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들이 감추고 싶었던 원형의 서사, 지워진 기억의 주체들, 거울 밖의 진짜 얼굴을 복원해 내야 한다.

 

신화는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쓰이고 있는 이야기다. 이제, 우리는 일본 건국신화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 이면에 숨겨진 기억의 정치와 역사적 욕망의 흔적을 직시해야 할 때다.

 

이제, 그 거울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갈 시간이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가야편 결론

일본 열도를 건설한 가야의 개척자들

 

고대 가야는 한반도 남부,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 일대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은 작지만 강한 나라였다. 기원후 1세기경부터 6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던 독특하고 역동적인 문명으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나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그 존재 자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가야에 대한 연구가 현대 고고학적으로 본격화된 것은 불과 4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추론하건대, 가야가 초기 일본 국가 형성에 기여한 여러 문화적 유산이 고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연구의 걸림돌로 작용했던 듯싶다. 한반도를 강점했던 자들의 임나일본부설등 식민지적 발상 때문이었으리라.

 

가야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를 비롯해 고령, 창원 등지에 흩어진 여러 소규모 부족 국가들이 느슨한 연맹체를 형성하며 성장했다. 이 연맹체는 중앙집권적 왕국 체제와 달리 각 소국이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하면서도 상호 협력과 경쟁을 병행하는 독특한 정치 구조를 특징으로 했다.

 

이러한 유연한 구조는 가야가 백제, 신라, (일본) 등 주변 세력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성을 지킬 수 있게 했다. 김해의 금관가야는 연맹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 기능하며 다른 소국들을 통합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지역은 풍부한 철광석과 해상 무역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 덕분에 경제적, 문화적 발전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가야의 경제는 철기 생산과 해상 무역에 크게 의존했다. 낙동강 유역의 풍부한 철광석과 뛰어난 제철 기술은 가야를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금속 가공 문명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들은 철제 무기, 농기구, 장신구, 옥구슬 등을 대량 생산해 한반도 내의 백제와 신라뿐 아니라 낙랑, 중국, 왜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교역망을 통해 거래했다.

 

특히 왜와의 해상 무역은 가야 경제의 주요한 무역 축 중 하나였다. 철기 제품과 공예품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교역 활동은 가야를 동아시아 교역 네트워크의 중요한 허브로 자리 잡게 했으며, 경제적 번영은 사회 전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가야의 항구 도시들은 무역선과 상인들로 북적였고, 이를 통해 다양한 문화적 요소가 유입되어 가야의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

 

가야 사회는 명확한 계층 구조를 바탕으로 조직되었다. 왕족과 귀족이 사회의 최상층을 구성했고, 그 아래로 장인, 농민, 노비 계층이 존재했다. 특히 장인 계층은 뛰어난 철기 생산과 공예 기술로 인해 다른 고대 국가들에 비해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이들의 기술력은 가야의 경제적 성공뿐 아니라 문화적 세련됨을 뒷받침했다. 농민 계층은 농업과 어업을 통해 가야의 식량 기반을 책임졌으며, 노비 계층은 노동력을 제공해 사회의 하부 구조를 유지했다. 이러한 계층적 질서는 가야 연맹체의 안정성과 효율적인 운영을 가능하게 했으며, 각 계층의 역할 분담은 사회적 통합을 강화했다.

 

문화적으로 가야는 독창성과 개방성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그들의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과 섬세한 문양으로 유명하며, 금속 공예는 장신구, 무기, 의례용품 등에서 높은 예술성과 기술력을 드러냈다.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가야의 공예 기술이 당시 동아시아에서 손꼽힐 만큼 정교했음을 증명한다. 전통 현악기 가야금으로 대표되는 음악 분야와 건축에서도 가야는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특히 일본과의 밀접한 문화 교류는 가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가야의 토기와 철기 제품은 일본 규슈 지역의 고대 유적지에서 다수 발견되며, 이는 양 지역 간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준다. 가야는 외부 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융합하는 유연성을 통해 다원적이고 역동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종교와 신앙 체계는 가야 사회의 중요한 축이었다. 태양신 숭배와 조상 제사, 자연 숭배가 중심을 이루었으며,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례 의식은 농경과 어업에 기반을 둔 가야 사회의 단합을 강화했다. 이러한 의식은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고, 계층 간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제례에 사용된 정교한 금속 공예품과 토기는 가야의 종교적 세계관과 예술적 감각을 동시에 보여준다.

 

정치적으로 가야는 왕과 귀족 집단 간(, 촌장 등)이 의사결정을 주도했다. 왕은 대외 교섭과 군사 전략 수립에서 절대적 권한을 행사했으며, 소국 간 관계를 조정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귀족 집단은 내정, 경제, 군사 정책을 포괄적으로 관리하며 연맹체의 운영을 뒷받침했다. 이러한 정치 구조는 소국 간의 경쟁과 협력을 균형 있게 유지하며 가야 연맹의 지속성을 보장했다. 그러나 내부적 갈등과 외부의 압박은 가야의 발전에 끊임없는 도전 과제였다. 백제와 신라의 점진적인 세력 확장은 가야의 독립성을 위협했고, 내부적으로는 소국 간의 이익 충돌이 종종 발생했다.

 

고고학적 증거는 가야의 복잡하고 세련된 사회를 생생히 보여준다. 김해, 고령, 함안 등지의 고분에서 발굴된 철기 제품, 금속 공예품, 토기는 가야의 높은 기술력과 문화적 수준을 입증한다. 특히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과 고령의 지산동 고분은 가야 귀족의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풍부한 유물을 남겼다. 이 유물들은 가야가 단순한 지역 문명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음을 보여준다.

 

가야의 발전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5세기부터 신라와 백제의 압박이 심화되면서 가야 연맹은 점차 분열되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 소국 간의 갈등과 자원 경쟁은 연맹의 단결을 약화시켰고, 외부적으로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 신라의 군사적 공세가 가야의 독립성을 위협했다. 6세기 중반, 신라에 의해 점진적으로 통합되면서 가야는 독자적인 문명으로서의 역사에 조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결국, 562가야 연맹의 마지막 중심국이었던 대가야의 멸망으로 가야의 독자적 역사는 종식되었다.

 

그럼에도 가야의 유산은 한국 역사와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뛰어난 철기 기술은 신라와 백제의 금속 가공 기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해상 무역을 통한 경제적 네트워크는 후대 한반도의 대외 교류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가야의 개방적인 정치 구조와 다원적인 문화는 고대 한국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 남아 있다. 오늘날 가야 유적지와 유물은 한국의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가야가 단순한 지역 문명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독특하고 혁신적인 역할을 했음을 증명한다. 가야의 이야기는 고대 한반도의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며, 그 유산은 현대 한국의 역사적 정체성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가야인들의 일본 개척 경로도

 

가야의 철기 기술과 일본으로의 전파

 

고대 가야의 철기 문화는 한반도 남부 지역의 기술적 혁신을 상징하며,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야는 낙동강 유역의 풍부한 철광석과 고도로 발달한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철기 생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김해와 창원 지역의 제철 유적에서 발견된 고온 용광로와 제련 도구는 가야의 선진적인 금속 가공 기술을 보여준다. 초기에는 단순한 제련 방식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고온에서 철광석을 정제하고 반복적인 단조와 가열로 철의 순도와 강도를 높이는 복합적인 기술을 개발했다. 이러한 기술은 농기구, 무기, 장신구 제작으로 이어져 가야 사회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강화했다.

 

가야의 철기 기술은 정교한 가공 능력과 고품질 철 생산으로 특징지어진다. 장인들은 철광석을 고온 용광로에서 정제한 뒤, 단조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철제 제품을 제작했다. 특히 쟁기, 괭이, 낫 같은 농기구는 농업 생산성을 높였고, , , 화살촉 등의 무기는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와 함께 장신구와 의례용품은 가야의 예술적 감각과 기술적 세련됨을 드러냈다. 고분에서 발굴된 일부 유물은 가야의 철기 기술이 청동기 시대의 금속 가공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더욱 복잡하고 정밀한 수준으로 발전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기술적 성취는 가야가 백제, 신라, 낙랑, 일본 등 주변 지역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가야의 철기 기술은 특히 일본 열도로의 전파를 통해 동아시아 문명 교류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다. 해상 무역로를 통한 기술 교류는 가야 장인들이 일본에 직접 건너가 철기 제작 기술을 전수하거나, 교역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기술이 유입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북부 규슈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초기 철기 문화는 가야의 제철로 구조와 철제 제품 양식을 강하게 반영한다. 나가사키와 후쿠오카 이토시마 지역에서 발견된 노천 제련로(반지하식 제철로)는 가야식 제철로와 유사한 시설 형태를 보인다. 두 지역 간의 계획적이고 구조적인 기술 교류를 보여준다. 5~6세기 일본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식 철기 유물(: 쿠마모토 후나야마 고분 출토 철제 창, 후쿠오카 요시노가리 유적의 제철 잔재 등)은 양 문명 간의 긴밀한 접촉을 입증하며, 이는 단순한 기술 이전을 넘어 문화적, 사회적 변화를 동반했다.

 

일본으로 전파된 가야의 철기 기술은 농업과 군사 분야에서 혁신을 가져왔다. 철제 농기구의 도입은 일본 농경 사회의 생산력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이는 식량 생산 증가와 인구 성장으로 이어졌다. 군사적으로는 가야의 주조 기술로 제작된 철제 무기가 일본의 무기 체계를 강화하며 군사력과 정치권력 구조의 변화를 촉진했다. 또한 가야의 철기 기술은 일본 사회의 계층적 생활양식과 문화적 가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야 기술자들은 일본 내에서 기술 엘리트로 기능하며, 철기 생산을 통해 귀족 계층의 권위를 뒷받침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제철 기술은 가야의 기술을 수용하고 재구성하며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나, 그 뿌리에는 가야의 영향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가야의 철기 문화는 단순한 기술적 성취를 넘어 사회 전반의 발전을 이끈 동력이었다. 경제적 번영, 군사적 우위, 문화적 교류의 기반을 제공하며 가야를 한반도 남부의 강력한 세력으로 만들었고, 일본으로의 기술 전파는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가야의 독창성과 영향력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가 되었다.

 

가야의 고분 문화와 일본으로의 전파

 

고대 가야의 고분 문화는 한반도 남동부 지역의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특성을 생생히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산으로, 가야 문명의 정체성과 복잡한 계층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자료이다. 가야 고분은 주로 김해, 창원, 고령, 함안 등 낙동강 유역의 구릉지나 평지에 조성되었으며,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와 석관묘(돌널무덤) 형태가 주를 이룬다. 이 고분들은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직경 10미터 미만의 소형부터 40미터 이상의 대형까지 다양하며, 대형 고분은 지배층의 권력과 부를 상징했다. 고분의 위치는 지형적 우월성, 수로 접근성, 상징적 조망성을 고려해 선정되었으며, 이는 가야인들의 자연과의 조화 및 실용적 공간 활용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가야 고분 문화의 대표적 사례로, 세심한 설계와 정교한 축조 기술을 보여준다.

 

가야 고분의 내부 구조는 고도의 토목 기술과 예술적 감각을 드러낸다. 석곽묘는 돌로 쌓은 매장 공간에 목재나 점토로 보강된 구조를 갖추었고, 석관묘는 거대한 돌판으로 만든 석제 관을 사용했다. 고분 내부에는 청동거울, 철제 무기, 농기구, ·은 장신구, 옥구슬, 토기 등 다양한 부장품이 안치되었으며, 이들의 종류, 품질, 배치는 피장자의 신분과 위상을 명확히 나타낸다. 예컨대,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정교한 철제 무기는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며, 다호리 고분의 세밀한 토기는 가야의 공예 기술과 심미적 수준을 보여준다. 이러한 부장품은 가야의 경제적 번영, 선진적인 금속 가공 기술, 활발한 교역 활동을 증명하며, 일본, 낙랑, 백제 등과의 문화 교류를 반영한다. 고분 축조는 대규모 인력과 자원을 동원한 복잡한 과정으로, 이는 가야 사회의 조직력, 기술적 숙련도, 공동체 결속을 드러낸다.

 

고분은 단순한 매장 공간을 넘어 종교적 · 우주론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매장 의례와 부장품 배치는 사후 세계에 대한 가야인들의 신념, 즉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다음 세계로 안내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했다. 예를 들어, 고분에 안치된 청동거울은 태양신 숭배와 관련된 상징성을 가지며, 철제 무기는 사후 세계에서의 신변 보호를 상징했다. 이러한 의례는 공동체의 단합을 강화하고 지배층의 권위를 과시하는 사회적 행위로, 가야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정체성 유지에 기여했다. 고분의 배치와 구조는 또한 천문학적 지식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일부 고분은 특정 방향이나 별자리와 연계해 정렬된 것으로 추정한다.

 

가야의 고분 문화는 동아시아 문명 교류, 특히 일본 열도의 고분 시대(3세기~7세기 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야 고분은 타원형 또는 장방형 봉분, 정밀한 석곽·석관 배치, 배수로와 통기 구조로 체계적인 설계를 자랑하며, 이러한 축조 기술은 일본 규슈와 서부 혼슈 지역의 고분에 직접 전파되었다. 예를 들어, 오카야마 쓰쿠라야마 고분(造山古墳)과 후쿠오카의 대형 석실 고분은 평면 구조, 석재 조합, 축조 방식에서 가야 고분의 영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고고학적 증거는 가야 장인들이 일본으로 이주해 기술을 전수했음을 시사하며,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닌 계획적인 문화 교류의 결과였다. 일본 고분에서 발견된 가야식 철제 무기, 금동 장신구, 토기는 두 지역 간의 물질적, 기술적 교류를 입증하며, 사회 제도와 의례 문화의 전파를 동반했다.

 

가야와 일본 고분은 여러 측면에서 공통점을 가지나, 규모와 장식에서 차이도 존재한다. 가야 고분은 10~30미터 내외의 실용적 구조로, 기하학적 문양과 소박한 토기 장식이 특징이다. 반면,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100미터 이상의 거대 봉분에 해자, 하니와(토기 인형), 석재 조각으로 장식되며, 중앙집권적 권력과 왕권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예컨대, 오사카의 다이센 고분(大仙陵古墳)은 일본 최대 규모의 전방후원분으로, 정치적 선전과 권위 과시를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입지 선정에서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가야는 주변 산이나 하천 등과의 풍수적 조화를 중시해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위치를 선호했으나, 일본은 정치 중심지나 왕권의 영향력 아래에 고분을 배치하고, 축선을 따라 여러 고분을 정렬해 상징적 공간을 구성했다.

 

부장품에서도 유사성과 차별성이 공존한다. 가야의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일본 나라현 후지와라쿄(藤原京) 인근 고분의 금구는 장식 기법과 형태에서 유사성을 보이는데, 이는 공통된 장인 기술이나 기술자의 이동을 시사한다. 그러나 일본 고분은 하니와와 같은 독특한 장식 요소와 대규모 토우를 추가해 신화적 · 의례적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러한 차이는 일본의 중앙집권화 과정과 가야의 연맹체 구조라는 정치적 배경의 차이를 반영한다.

 

가야의 고분 문화는 일본의 사회적 위계질서와 정치 체계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은 축조 기술뿐 아니라 불교, 금속 공예, 무기 제작 기술을 전파하며 야마토 정권의 중앙집권화를 뒷받침했다. 4세기~6세기 규슈와 오카야마 지역 고분에서 확인되는 가야식 요소는 두 문명 간의 정치적 연계, 종교적 의례, 기술 교류를 보여준다. 특히 가야 장인들의 이주는 일본 고분 축조의 기술적 기반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귀족 계층의 생활양식과 권력 상징 체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규슈 지역 고분의 가야식 석실과 부장품은 가야계 이주민이 일본 사회에서 기술 엘리트로 기능했음을 나타낸다.

 

가야 고분 문화의 전파는 단순한 기술 이전을 넘어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동반했다. 일본 고분 시대의 전방후원분은 가야의 축조 기술과 권력 상징 방식을 수용해 지역 통치자들의 위엄을 강화했으며, 이는 일본 초기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야의 고분 문화는 동아시아 문명 교류의 복합성을 이해하는 핵심 단서로, 가야가 일본 고대사의 기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을 보여준다. 고분을 통해 드러나는 가야와 일본의 연결고리는 정치적 상호작용, 기술 전파, 의례와 세계관의 공유를 포괄하며, 고대 한일 관계의 깊이와 다층성을 증명한다. 가야 고분 문화는 한반도 남부의 지역 문명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역할을 한 가야의 위상을 재조명하는 중요한 유산이다.

 

가야의 제례 문화와 일본으로의 전파

 

가야 사회에서 제례는 종교적 의식을 넘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역할을 수행하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고 왕권의 신성성을 강화하는 핵심 장치였다. 제사장과 왕족은 제례를 통해 신성한 권위를 부여받아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했으며, 이는 가야 사회의 위계 구조와 통합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특히 농경과 깊이 연관된 제례는 풍작과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중요한 의식으로, 생존과 직결된 행위였다. 봄의 파종기와 가을의 수확기에 맞춰 진행된 대규모 제례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공동체 구성원들의 집단적 참여를 유도했다. 이러한 의식은 단순히 종교적 행위를 넘어 사회적 유대감을 강화하고, 공동체의 단결을 도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례에 사용된 도구들은 가야의 뛰어난 기술력과 문화적 세련미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청동기와 철기로 제작된 정교한 제례용 그릇, , 장신구 등은 의식적 기능뿐 아니라 지배 계층의 사회적 위신과 권력을 상징하는 문화적 자산으로도 기능했다. 이러한 도구들은 가야의 금속 가공 기술의 높은 수준을 드러내며, 고고학적 유물로서 그들의 문화적 성취를 입증한다.

 

조상 숭배는 가야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로, 씨족과 가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세대 간 전통을 전승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상에 대한 제례는 특히 왕족과 귀족 집단에서 정치적 정통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가문의 역사와 연속성을 보장하며 사회적 안정성을 뒷받침했다. 제례는 또한 외교적 기능도 수행했다. 주변 국가들과의 제례 교류는 평화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통로였으며, 특히 가야와 일본 간의 문화 교류에서 제례 관습은 문화 전파의 하나로 작용했다. 이는 상호 존중과 문화적 융합의 기반을 마련하며 후대에 이르는 정치적, 문화적 교류의 토대를 형성했다. 가야의 제례 문화는 일본 열도, 특히 규슈 지역의 고분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자연과 조상을 동시에 숭배하는 가야의 독특한 의식은 일본의 초기 신도 문화 형성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일본 유적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철기 도구, 그리고 제단의 구조는 가야 제례 방식의 직접적인 흔적을 보여준다. 제물을 바치는 방식, 의식의 순서, 그리고 사용된 도구들에서 가야 문화의 영향 및 그 유사성이 발견되며, 이는 가야 제례가 일본의 종교적 관습에 뿌리내렸음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가야 제례는 단순히 종교적 의식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일본 초기 사회에 전수했다. 농경과 계절 변화에 맞춘 제례 의식은 일본 사회의 구조와 가치관에 스며들어, 공동체적 정체성과 화합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가야와 일본의 문화 교류는 단방향이 아니었다. 양측은 제례에 사용된 음악, , 의복, 그리고 의식의 세부 요소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점진적으로 융합된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두 문명 간의 깊은 문화적 연결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가야 제례의 자연과 조상 숭배는 일본의 토착 신앙 체계와 융합하며 독특한 종교적 세계관을 형성했다. 특히 규슈 지역의 고분 유적에서 발견된 가야식 제례 도구, 예를 들어 청동제 칼, 토기, 정교한 장신구 등은 두 지역 간의 긴밀한 문화적 연결을 입증한다. 일본의 초기 제례 의식은 가야의 조상 제사, 자연신 숭배, 그리고 풍요와 번영을 기원하는 의식을 상당 부분 차용했으며, 이러한 요소들은 일본 사회의 종교적,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례는 공동체의 화합과 계층 간 연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일본 사회의 공동체적 가치관과 사회적 질서 형성에 기여했다. 가야 제례 문화는 단순한 종교적 전파를 넘어 일본 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는 일상적인 문화 교류를 넘어 두 문명 간의 깊은 상호작용과 융합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연구는 가야 제례 문화가 일본 문화에 미친 영향의 깊이와 광범위함을 지속적으로 밝혀내고 있으며, 이는 가야의 제례가 단순한 지역적 관습을 넘어 동아시아 문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입증한다.

 

가야의 토기와 일본으로의 전파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은 고대 동아시아 도공 문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뛰어난 문화유산으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드러난 토기는 가야 문명의 고도로 발달한 기술력과 예술성을 입증한다. 가야 도공들은 점토를 정교하게 다루는 고도의 기술을 보유했으며, 점토를 고르게 다져 기포 없는 매끄러운 표면을 만들고 800~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안정적으로 구워내는 전문적 요업 기술을 통해 실용적 용기뿐 아니라 예술적 가치를 지닌 토기를 제작했다. 이들은 점토의 입자와 점성을 정확히 이해해 불순물을 제거하고, 손으로 빚거나 회전판을 활용해 균형 잡힌 형태를 만들어냈다. 건조 후 고온 소성 과정을 거쳐 완성된 토기는 내구성과 세련된 외관을 자랑했다.

 

가야 토기의 형태는 곡선미와 균형감이 두드러졌으며, 기하학적 문양, 자연을 모방한 섬세한 장식, 특히 나선형 소용돌이 문양은 가야의 독특한 미학을 반영했다. 붉은색과 회청색 계열의 색조는 도공들의 뛰어난 색상 조절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일부 토기는 표면에 장식을 추가해 예술성을 극대화했다. 가야 토기는 용도에 따라 일상용 취사 및 저장 용기, 제사와 장례를 위한 의례용 토기, 무덤에 부장되는 장송용 토기로 구분되었다. 각 토기는 용도에 맞는 크기, 형태, 문양을 지니며, 당시 가야 사회의 복잡한 문화와 사회적 계층을 반영했다.

 

예를 들어, 의례용 토기는 정교한 문양과 장식으로 신성함을 강조했으며, 장송용 토기는 무덤의 주인공의 지위를 상징했다. 제작 과정은 체계적이고 전문화되어, 점토 채취부터 소성까지 모든 단계가 세심하게 관리되었다. 이러한 기술적 우수성은 가야 토기의 균일한 두께, 높은 내구성, 세련된 디자인에서 드러나며, 이는 당시 다른 지역의 토기와 비교해도 탁월한 수준이었다.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은 후대 한반도와 일본의 도자기 문화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경질토기 제작 기술은 동아시아 도공 문화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가야의 토기 문화는 일본 열도, 특히 규슈 지역에 전파되며 현지 토기 제작 기술에 혁신을 가져왔다. 고고학적 유적에서 발견된 가야식 토기는 단순한 물류 교류를 넘어 기술과 문화의 전파를 입증한다. 가야 도공들은 점토 선택과 소성 과정에서 뛰어난 기술을 보유했으며, 고온에서 구워내는 경질토기 제작 기술은 일본 도공들에게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다.

 

특히 4~6세기 사이,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은 일본의 토기 문화에 깊이 뿌리내렸으며, 이는 규슈 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식 토기(스에키 도기와 유사한 경질 회청색 토기)를 통해 확인된다. 가야 토기의 문양, 형태, 제작 기법은 일본 문화에 스며들어 예술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담은 용기로 발전했다. 가야 토기의 적갈색과 회청색 색상, 기하학적 무늬, 나선형 소용돌이 문양은 일본 초기 토기에서도 나타나며, 이는 문화적 상징의 전파를 보여준다. 규슈 고분에서 발견된 토기는 가야의 곡선 처리, 소성 기술, 표면 처리 방식과 거의 동일한 특징을 보이며, 이는 장인과 기술의 직접적 이동을 시사한다. 가야의 고온 소성법은 일본 토기의 내구성과 품질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균일한 기벽과 세련된 디자인은 일본 도공들에게 새로운 기술적 기준을 제공했다.

 

토기의 용도에서도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가야와 일본 모두 의식용, 실용용, 부장용 토기를 제작했으며, 특히 의례용 토기의 정교한 장식과 부장용 토기의 상징성은 두 문화의 공통된 가치관을 반영한다. 가야의 토기 문화는 단순한 기술 전달을 넘어 문화적 교류의 중요한 통로로 작용했으며, 토기의 문양과 형태는 가야와 일본의 미학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매개체였다. 고고학적 증거와 문헌 연구는 가야와 일본 간 토기 문화 교류의 광범위함과 깊이를 밝히며, 이는 동아시아 고대 문명 간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가야의 우수한 토기 제작 기술과 독창적 문화 요소는 일본 토기 문화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두 문명 간의 깊은 문화적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가야의 불교와 일본으로의 전파

 

가야 사회는 4세기 중반 이후 중국 남조를 통해 전파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변혁을 경험했다.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야의 주요 세력은 불교를 단순한 종교가 아닌 통치 이데올로기와 국제 교류의 도구로 활용했다. 특히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과 그녀의 오빠 장유화상이 48년 인도 아유타국(오늘날 아요디아)에서 파사석탑을 가져와 불교를 전파했다는 전승은 가야의 불교 수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4세기 중반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파사석탑은 불교의 상징적 유물로, 가야가 국제적 교류의 일환으로 불교를 조기에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불교는 주로 왕족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수용되었으며, 그들은 불교의 사상과 의례를 통해 왕권의 신성성을 강화하고, 중국 및 한반도와의 외교적, 문화적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불교는 기존의 샤머니즘적 토착 신앙과 혼합되어 독특한 종교 실천 방식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가야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과 개방성을 드러낸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김해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 불상, 범자(梵字) 명문이 새겨진 금속 공예품, 불경 파편 등은 가야의 불교문화가 얼마나 세련되고 복합적이었는지를 증명한다. 파사석탑과 관련된 전승은 이러한 유물의 역사적 맥락을 더욱 풍부하게 하며, 가야가 불교를 단순한 종교적 실천을 넘어 사회적 통합과 정치적 정당성을 위한 도구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가야의 장인과 지식인은 중국과 한반도 불교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재해석하여 불상 제작, 사찰 건축, 불교 의례에서 가야 특유의 미적 감각과 기술력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불상 제작에서는 섬세한 조각 기법과 금속 가공 기술이 돋보였으며, 사찰 건축에서는 목조 구조와 장식이 가야의 건축적 창의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불교문화의 발전은 가야 사회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며, 후대 일본 불교문화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야는 바닷길을 통해 일본 열도에 불교문화를 전파하며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핵심적 매개체로 활동했다. 가야의 상인과 승려는 불교 교리뿐 아니라 예술, 건축, 사상, 문자, 과학 등 다양한 지식을 일본에 전달했다. 일본의 초기 사찰 건축 양식은 가야의 목조 건축 기술과 장식 기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불상 제작에서는 가야의 금속 공예 기술이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불교는 일본 귀족층에 새로운 세계관과 통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고, 민중에게는 정신적 가치를 제시하며 사회 구조와 사상에 변화를 불러왔다. 가야 승려들은 일본에서 문화 전달자로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불경 번역에서 한자 해석 능력을 갖춘 가야 학자들은 불교의 일본 내 내면화를 가능케 했다.

 

6세기 중반부터 가야는 백제와의 밀접한 교류를 통해 중국 불교문화를 일본에 중계하며 경전, 의례, 복식, 악기, 건축 양식을 전파했다. 김해 대성동 고분 근처에서 발견된 청동 불상과 범자 명문 유물은 가야의 초기 불교문화를 보여주며, 백제를 통해 일본에 영향을 미친 가야의 기술적 기여를 시사한다. 일본 아스카 지역의 호류지 사찰은 주로 백제 양식을 반영하지만, 가야의 금속 공예와 조각 기술이 불상과 장식품 제작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가야의 불교문화는 4세기 이후 대승불교를 중심으로 발전하며, 일본의 종교 실천과 의례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불교는 동아시아 국가 간 외교적 소통의 통로로 기능했으며, 가야는 백제와 왜를 연결하는 문화 네트워크의 중요한 고리였다. 고고학적 자료(: 고령 지산동 고분의 연꽃 무늬)와 일본서기(720)에 기록된 백제의 불교 전파(538년 또는 552)에서 가야계 인물의 중개 역할이 암시되며, 이는 가야가 왜에 불교와 함께 금속 공예, 도기 기술을 전파했음을 뒷받침한다. 가야 불교는 일본 고대 불교의 정신적 · 문화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는 동아시아 문명의 상호 연결성과 역동성을 증명하는 강력한 사례다.

 

가야의 장인, 왜나라(일본)를 변모시키다

 

고대 가야의 장인과 기술자들은 뛰어난 기술력과 창의력으로 동아시아 문명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철기 생산, 도자기 제작, 목공, 금속 세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은 가야 문명의 핵심 동력으로, 단순한 노동자가 아닌 혁신과 예술성을 겸비한 전문가였다.

 

제철 기술은 동아시아 최고 수준으로, 고도로 발달한 제련 기술을 통해 정교한 철제 무기, 농기구, 장신구를 제작했다. 이는 가야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며, 주변 국가와의 교역에서 경제적 자원으로 기능했다.

 

도공들은 점토를 섬세하게 다루어 기하학적 문양과 자연을 모방한 장식이 돋보이는 토기를 제작했으며, 붉은색과 회청색 계열의 세련된 토기는 예술성과 실용성을 결합해 가야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건축 기술자들은 고분, 성벽, 주거지를 설계하고 건설하며 가야의 도시 기반을 다졌고, 정교한 목조와 석조 기술로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뒷받침했다. 금속 세공 기술자들은 주조와 세공 기술로 장신구, 의례 용품, 무기를 만들어 지배층의 위신을 상징했다.

 

이들 장인은 사회적 존경을 받으며 기술을 세습했고, 뛰어난 장인 가문은 가문의 명예와 연결되어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했다. 가야의 장인들은 단순한 생산자가 아니라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혁신가로, 그들의 기술은 가야 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성취를 이끌며 문명의 독창성과 선진성을 증명했다.

 

가야 장인들은 일본 열도로 이주하며 왜국 정권에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전파해 일본 사회를 변모시켰다. 이주는 주로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가야의 기술자들은 일본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기도 했다.

 

철기 기술자들은 정교한 제련과 단조 기술로 무기와 농기구를 제작해 일본의 군사력과 농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특히 철제 농기구는 농업 효율성을 높여 식량 생산을 증대시켰고, 이는 일본 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했다.

 

도공들은 새로운 성형 기법, 고온 소성법, 섬세한 장식 기술을 도입해 규슈 지역의 토기 품질과 예술성을 끌어올렸다. 가야식 토기의 곡선미와 나선형 문양은 일본 고유의 도자기 문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규슈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계 토기는 이러한 기술 전파의 증거다.

 

건축 기술자들은 목공과 석조 기술로 대형 목조 건축물, 사찰, 고분을 축조하며 일본 건축 양식의 기초를 닦았다. 이들의 기술은 일본의 도시와 종교 시설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고분 축조 기술은 야마토 정권의 권위를 상징하는 데 활용되었다.

 

금속 세공 기술자들은 정교한 장신구, 의례 용품, 무기를 제작해 일본 귀족 사회의 미적 감각과 문화적 세련미를 고양시켰다. 가야 장인들은 기술뿐 아니라 생활 방식, 예술 감각, 사회적 관습을 전달하며 일본 고대문화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들은 일본의 기술과 문화를 학습하며 쌍방향적 교류를 이끌었고, 이는 단순한 기술 이전을 넘어 심층적인 문화 융합으로 이어졌다.

 

고고학적 유물, 특히 규슈와 혼슈에서 발견된 가야계 철기, 토기, 금속 공예품은 이들의 활발한 활동과 영향력을 입증하며, 일본 유적지의 가야식 문양과 제작 기법은 장인들의 직접적 기여를 보여준다. 가야의 장인과 기술자는 일본 사회의 기술적, 문화적, 사회적 성장을 촉진하며 동아시아 문명 간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증명하는 연결고리였다. 이들의 유산은 한일 문화 교류의 초석으로, 가야 문명의 선진성과 독창성을 동아시아 전역에 알렸다.

 

왕족과 귀족의 일본 방문: 정치적, 문화적 영향

 

고대 가야의 귀족과 왕족은 일본 열도로의 이동을 통해 한반도와 일본 간의 정치적, 문화적 교류를 심화하며 동아시아 문명사에 중대한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들의 이동은 단순한 개인적 여정이 아니라 두 문명 간의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상호작용을 상징했다. 5세기와 6세기, 가야 귀족들은 외교적 동맹과 문화 교류를 위해 일본을 방문하며 야마토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특히 왕족 간 통혼은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는 핵심 전략으로, 가야 왕족의 혈통이 일본 왕실에 스며들며 일본의 정치 체제와 문화 형성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혼인은 양국 간 전략적 동맹을 상징하며, 가야의 정치적 노하우와 사회 조직 체계가 일본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고학적 유물은 가야 귀족들이 규슈와 혼슈 지역에 정착해 사회 엘리트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철기 제작, 금속 가공, 토기 제작, 선진 농업 기술을 전파하며 일본 사회의 기술적, 경제적 발전을 촉진했다. 철제 농기구와 무기는 농업 생산성과 군사력을 향상시켰고, 가야식 토기의 문양과 제작 기법은 일본 도자기 문화의 예술성을 높였다. 불교와 제례 문화, 사회 조직 방식도 함께 전달되어 일본의 종교적, 문화적 지형을 확장시켰다. 불교는 새로운 세계관과 사회 위계를 제공하며 일본 귀족층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강화했다.

 

가야 왕족과 귀족의 일본 방문은 외교 사절을 넘어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 협력을 강화하는 핵심 메커니즘이었다. 당시 동아시아는 백제, 신라, 고구려, 중국, 일본 간의 유동적인 국제 정세 속에서 복잡한 외교 관계를 형성했다. 가야 귀족들은 군사적 지원, 기술 교류, 외교적 조율을 통해 양국의 상호 이익을 도모하며 야마토 정권의 국제적 입지를 강화했다.

 

고분 문화와 장송 의례에서도 가야의 영향은 뚜렷하다. 가야의 토목 기술과 장묘 문화는 일본 고분의 구조, 매장 방식, 부장품 제작에 반영되었으며, 규슈 지역 고분에서 발견된 가야계 토기와 금속 공예품은 이러한 영향을 입증한다. 정치적으로 가야 귀족들은 야마토 정권의 국가 운영과 대외 전략 수립에 자문역이나 정책 결정자로 활동하며 일본의 중앙집권적 통치 체계 발전에 기여했다.

 

일부 가야 출신 인물은 일본 정치 체계 내에서 높은 지위를 얻어 외교와 내정을 조율했고, 이는 일본이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입지를 넓히는 데 실질적인 기반이 되었다. 문화적으로 그들은 철기와 금속 공예 기술을 통해 일본의 군사력과 경제 구조를 혁신했으며, 불교는 종교적 실천뿐 아니라 사회적 계층과 정치적 위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가야의 제례 문화는 일본의 토착 신앙과 융합되어 새로운 의례 체계를 낳았고, 이는 일본 사회의 문화적 복잡성을 더했다.

 

고고학적 자료, 특히 규슈와 혼슈 유적에서 출토된 가야계 유물은 이들의 활발한 활동을 보여준다. 가야식 철기, 토기, 장신구의 제작 기법은 일본 장인들에게 전수되어 현지 기술 수준을 끌어올렸다. 가야의 왕족과 귀족은 단순한 이주민이 아닌, 새로운 문명 질서를 정착시킨 문화 촉진자였다. 그들은 한일 양국 간 최초이자 핵심적인 교류의 연결고리로서, 기술, 문화, 정치, 사회 전반에 걸친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가능케 했다. 이는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상호 연결성과 역동성을 증명하는 역사적 다리로서, 가야 문명의 선진성과 개방성을 동아시아 전역에 알렸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카테고리 없음2025. 5. 5. 11:25

가야편 제10회

히무카(日向): 고향 땅 가야를 향한 그리움

 

바다 너머 태양의 고향

 

옛적, 동쪽 바다 너머 한반도의 남녘 끝자락에 가야라 불리는 강대한 연맹이 있었다. 금관가야의 중심지 김해는 철의 불꽃과 바다의 숨결로 번영을 누렸다. 그곳 백성들은 태양을 신성한 존재로 섬기며, 매일 아침 동쪽 지평선에서 솟아오르는 빛을 향해 기도했다. 그들에게 태양신은 생명의 근원이었고, 권력과 번영의 상징이었다. 가야의 강줄기는 이 신앙을 품고 멀리 일본열도까지 뻗어 나갔다. 파도 위로 실린 배들은 철과 토기, 그리고 태양신에 대한 믿음을 싣고 규슈의 남쪽 해안으로 향했다.

 

대한해협을 건너는 가야의 배들은 그저 흔하디흔한 상선이 아니었다. 그들은 문명을 전파하는 전사이자, 고향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시인이었다. 그들의 항해는 평범한 이동이 아니라, 새로운 땅에 가야의 불씨를 심고, 태양신의 빛을 퍼뜨리는 여정이었다. 이 도래 개척자들은 규슈 남동부에 자리한 히무카(日向), 그 중 다카치호(高千穂)라는 신성한 언덕을 목적지로 삼았다.

 

일본열도 남단, 오늘날의 미야자키현(宮崎県)에 해당하는 고토 히무카는 고대 일본 신화에서 천손강림(天孫降臨)’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의 이름 日向(히무카)’를 단지 신화의 무대로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태양() 숭배의 땅을 향한() 그리움의 다른 이름, 히무카. 태양 숭배의 땅은 그들의 고향 가야다. 히무카라는 지명 속에는 가야의 후예들이 품었던 정서와 세계관, 그리고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겹쳐 있다. 히무카(日向)는 『 일본서기』에서 신들의 자손이 내려와 나라를 세운 성역으로 칭송되지만, 그것은 곧 '외부에서 온 존재'가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서사의 중심 무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외부에서 온 존재'라는 개념은, 고대에 일본 열도로 이주한 다수의 한반도계 도래 개척자들, 특히 가야계 도래인들의 정체성과 겹친다. 태양을 숭배하며 바다를 건너온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고 새로운 땅에서 해를 향한신념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의 회한을 지명으로 새겼다.

 

다카치호는 하늘이 땅과 맞닿은 곳, 가야의 고향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이는 규슈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고향의 태양신을 기리며 새로운 서사를 썼다. 바다를 건너온 이들은 고향의 황금빛 들판을 떠올리며, 태양신의 축복 아래 새로운 터전을 일구었다.

 

히무카(日向)의 위치 @구글 지도

 

다카치호(高千穂), 신의 강림지

 

다카치호의 가파른 언덕은 태양신의 숨결이 깃든 성지였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의 손자 니니기노미코토(邇邇芸命)가 하늘에서 그 땅으로 내려왔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신화의 뿌리에는 가야 도래 개척자들의 신앙이 깊이 얽혀 있다. 그들은 다카치호에 정착하며 고향 가야의 태양 숭배를 이곳에 뿌리내렸다. 그들의 기도는 바다 너머 북쪽, 김해의 신성한 언덕 구지봉을 향했다.

 

매일 아침, 그들은 다카치호의 언덕 위에서 태양을 향하여 기도했다. 그리고 고향 김해의 신어산(神漁山)과 두 마리 물고기를 상징하는 쌍어 문양(雙魚文)을 떠올렸다. 쌍어 문양은 허황옥이 김수로왕에게 시집오면서 인도로부터 가져온 신앙의 상징이다. 그들의 마음은 고향과 새로운 땅 사이를 오가며, 두 세계를 잇는 영혼의 다리를 놓았다. 이들은 다카치호와 그 일대를 히무카(日向)라 불렀다. ()는 태양신의 축복을, 무카()는 고향 가야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을 담았다. , 태양신을 숭배하는 고향, 가야를 그리는 마음이 히무카인 것이다.

 

'태양()'은 단지 천체로서의 해가 아니다. 가야의 무속 · 제례 문화, 특히 수로왕계의 태양 숭배 전통은 일본 초기 신사 신앙의 구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이 붉은 해를 상징하는 붉은 천에 이끌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전승이 있고, 일본 열도에 도착한 한반도계 집단이 태양 숭배와 제사 규범을 동시에 전수했다는 기록도 다수 존재한다. 가야의 여러 고분군에서 출토된 청동 거울의 존재 역시 태양의 빛(숭배)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청동 거울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 곳곳의 고분에서도 상당량이 출토되었다.

 

그렇다. 히무카는 그저 평범한 지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야의 태양신을 숭배하는 성소를 바라보는 시선, 바다를 건넌 이주민의 가슴에 깃든 고향의 메아리였다. 히무카는 그들의 정체성이자, 고향과 새로운 땅을 잇는 영혼의 다리였다. 이 이름은 가야의 불씨가 타오르는 규슈의 언덕에서, 태양신의 빛 아래 영원히 빛났다.

 

다카치호에는 아마노이와토(天岩戸, 천암굴) 신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일본 건국 신화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동굴에 숨어 버리며 세상에서 태양이 사라졌고, 신들이 춤과 노래로 그녀를 불러냈다. 이 동굴 신화는 가야 도래 개척자들의 태양 숭배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들은 아마노이와토에서 태양신의 부활을 기리며, 가야의 빛을 다카치호에 새겼다. 신사의 바위 동굴은 고향의 기억과 새로운 땅의 희망을 속삭이는 성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태양신의 부활을 축하하며, 고향 가야를 향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태양의 융합, 신화의 탄생

 

가야의 도래 개척자들은 다카치호에서 토착민들과 손을 맞잡았다. 그들의 철은 농기구와 무기로, 토기는 제사 그릇과 일상 도구로 변모했다. 가야의 태양 숭배는 규슈의 토착 신앙과 융합되며 새로운 서사를 낳았다. 태양신은 아마테라스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고, 히무카는 일본 왕가의 기원지로 우뚝 섰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이 위대한 융합을 기록하며, 히무카를 일본의 신성한 발상지로 찬양했다.

 

히무카의 백성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고향을 떠올렸다. 그들의 노래는 김해의 고분, 가야의 황금빛 들녘을 그리워하는 선율로 가득했다. 그들은 새로운 땅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들의 철은 농지를 일구었고, 토기는 신앙과 생활을 담았다. 히무카는 가야의 영혼과 다카치호의 희망이 만나는 성지였다. 이곳에서 태양신은 더 큰 빛으로 타올랐다.

 

가야 도래 개척자들은 고향을 떠난 한낱 이주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문명을 심는 개척자였다. 그들의 기술과 신앙은 규슈의 토착 문화와 어우러져 독특한 융합 문화를 창조했다. 예를 들어, 가야의 경질토기는 미야자키의 고고학 유적에서 발견되며, 그들의 철기 기술은 농업과 전쟁의 도구로 지역 사회를 변화시켰다. 이 융합은 단순한 물질적 교류를 넘어, 신화와 정체성의 재구성을 낳았다. 히무카는 가야의 태양신과 규슈의 토착 신앙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화의 용광로였다.

 

히무카의 메아리, 『만엽집』 의 노래

 

히무카의 서사시는 일본 고대 시집 『만엽집萬葉集』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에 걸쳐 편찬된 이 시집은 일본 고대문학의 거대한 집합체로, 고대 일본의 시와 노래를 모은 중요한 문헌이다.

 

4,500수의 와카(和歌)를 담고 있으며, 히무카의 신성한 풍경과 신화적 상징성을 노래한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日向なる 高千穂の峯を 仰ぎ見て 天津神の 御代を思ふ”
“히무카의 다카치호 봉우리를 우러러보며,
천상의 신들의 치세를 떠올린다.”

 

이 시에서 언급된 '천상의 신의 치세'는 일본의 신화적인 전통을 넘어서,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들의 기억과 정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다. '천상의 신들의 치세'를 회상하며, 고대 일본 신화의 세계를 떠올리지만,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떠나온 고향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미개척의 새로운 땅을 향해 걸어온 이들이 품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향수를 엿볼 수 있다.

 

이때의 '천상의 신'은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가야인들이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던 자연 신앙 속 신()의 일종이자, 가야 사회의 신적 세계관을 반영한 정신적 흔적이다. 일본의 신화 속 '천손강림' 이야기는 사실, 외부에서 온 존재들이 새로운 땅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의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 이는 고대 가야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이들이 겪었을 정신적 여정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바다를 잇는 영원의 다리

 

히무카의 서사시는 고고학의 흔적과 신화의 메아리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미야자키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가야의 경질토기는 그들의 존재를 증언한다. 『일본서기』는 가야와 규슈의 끈끈한 인연을 기록하며, 바다를 통한 고대 동아시아의 해상 교류를 보여준다. 이 기록들은 히무카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가야와 일본을 잇는 문화적 다리였음을 말해준다.

 

히무카의 의미는 한자 그대로 태양을 향한 곳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태양을 숭배하는 곳, 가야를 향한 그리움이다. 히무카는 지리적 방향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니라 심적 방향을 드러내는 말이다. 히무카는 가야의 도래 개척자들이 바다를 건너며 품은 꿈, 고향을 향한 간절한 마음,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 피운 희망의 상징이다. 다카치호의 언덕에서 태양은 여전히 떠오른다. 아마노이와토의 바위 동굴은 태양신의 부활을 속삭이고, 신사는 가야와 일본의 융합을 기념한다. 히무카는 가야의 태양신을 다카치호의 아마테라스로 잇는 영원의 다리다.

 

히무카라는 지명은 실제 일본 각지에 분포한다. 규슈 남부 미야자키 지역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같은 이름의 유사 지명(日向村, 日向山, 日向谷 )이 혼슈, 시코쿠, 큐슈 전역에 존재한다. 고대 도래 개척자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와 정착할 때, 그들이 가져온 정신적 표식이 '히무카'라는 이름에 담겼다.

 

히무카는 그런 전통의 연장선이자, 태양을 향한 땅에 자신의 정체성을 새기려는 도래 개척자들의 언어적 기억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히무카는 새로 정착한 땅이면서도, 잃어버린 뿌리를 재생산하는 정신적 거점이었다. 이 서사시는 고대 동아시아의 해상 교류, 이주민의 용기, 그리고 태양 아래 하나 된 문명의 찬가로 빛난다. 가야의 도래 개척자들은 그저 새로운 땅에 정착한 이주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향의 불씨를 품고, 태양신의 빛을 따라 문명을 창조한 개척자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바다를 건너, 세대를 이어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쉰다.

 

히무카의 빛, 우리의 유산

 

히무카는 한낱 과거의 전설에만 그치지 않는다. 가야에서 건너온 이들이 자신의 영성과 정체성을 투영하여 붙인 이름, 그 언어의 기억이 일본 곳곳에 히무카日向라는 글씨로 새겨졌다. 그것은 가야와 일본, 바다와 육지, 신앙과 정체성을 이어주는 살아 있는 유산이다. 오늘날 미야자키의 다카치호를 방문하는 이들은 여전히 태양신의 숨결을 느낀다. 아마노이와토 신사의 고요한 숲길, 고봉 다카치호 협곡의 맑은 물줄기는 고대 도래 개척자들의 발자취를 떠올리게 한다. 이곳에서 태양은 여전히 하늘을 밝히며, 가야와 히무카의 이야기를 속삭인다.

 

히무카는 가야 도래 개척자들의 고향 사랑, 다카치호의 신성한 언덕, 그리고 태양의 영광을 노래하는 불멸의 찬가다. 그 이름은 단순한 지명을 넘어,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적 융합과 이주민의 용기를 상징한다. 『만엽집』 의 시들은 히무카의 신화적 풍경을 영원히 기록하며, 가야의 태양신과 일본의 아마테라스가 하나 되는 순간을 노래한다. 히무카의 서사시는 우리의 뿌리 깊은 이야기를 하늘 높이 띄우며, 태양신의 빛 아래 영원히 빛난다.

 

이 이야기는 역사로써의 과거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히무카는 우리에게 정체성과 문화의 융합,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의 희망을 말해준다. 가야의 도래 개척자들이 바다를 건너며 품은 꿈은 오늘날에도 우리 안에 살아 있다. 히무카, 그 이름은 태양신의 축복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어우러진 영원의 노래다. 이 서사시는 고대 동아시아의 해상 교류, 이주민의 용기, 그리고 태양 아래 하나 된 문명의 찬가로, 우리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울려 퍼진다.

 

히무카(日向)- 고향을 향한 그리움

 

바다를 건너온 저녁 빛,
가야 땅 김해의 해가 이마에 머물고,
나는 아직 고향의 흙냄새를 기억한다.

 

한 줌의 흙을 가슴에 품고
규슈의 최고봉 다카치호에 첫발 디딜 때,
바다는 등 뒤에서 끝없이 밀려왔다.

 

히무카(日向)라 이름 붙인 이곳,
그 이름은 빛이 아닌
그리움이었다.

 

태양을 본다.
그러나 나는
태양 아래 있던 고향을 생각한다.

 

언덕 위 바람이 분다.
어머니의 숨결처럼 따뜻하고
형제의 울음처럼 깊다.

 

우리는 정착한 자,
그러나 마음은 매일 떠도는 자.
돌아갈 수 없는
그 옛집의 기억을 품은 나그네.

 

히무카,
너는 떠나온 고향의 그림자.
그리고
새로이 살아갈 아침의 이름이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가야편 제9

가야의 속삭임: 사이토바루 고분군과 일본 왕실 서사에 남은 가야의 유산

 

낙동강의 잔잔한 물결이 남해의 푸른 파도와 포옹하고, 그 파도가 규슈의 해안에 부드럽게 속삭이던 시절, 고대 동아시아의 바다는 문명과 신화, 사람과 꿈을 잇는 거대한 다리였다.

 

한반도의 가야 연맹은 철의 날로 강인함을, 토기의 곡선으로 섬세함을 새기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 이야기는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의 고분 속에 고요히 잠들었다.

 

미야자키현의 사이토바루 고분군(西都原古墳群)은 그 이야기의 살아 있는 심장이다. 이곳의 흙은 가야 장인들의 손길을 기억하고, 고분에서 나온 유물은 바다를 항해한 가야 개척자들의 숨결을 간직한다.

 

일본 왕실은 일본서기의 신화적 서술에 따라 사이토바루가 위치한 이 땅 히무카(日向)를 진무천황(神武天皇)의 출발지로 기념하며, 그의 궁궐 자리였다는 야자키 신궁(宮崎神宮)을 신성시하고 이곳을 왕실의 상징적 발상지로 삼는다. 신화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자신들의 기원을 이곳에 심었다.

 

그러나 고고학의 삽과 붓은 신화의 안개를 걷어내고, 가야와의 깊은 연관성을 드러낸다. 사이토바루의 토기는 가야의 뿔잔과 닮았고, 철기는 가야 대장간의 망치 소리를 담고 있다. 이 유사성은 흔한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두 문명이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채 손을 맞잡고, 문화와 기술, 그리고 어쩌면 혈맥까지 공유한 증거다. 가야의 장인들은 규슈의 언덕에서 불을 피웠고, 그 불꽃은 일본 왕실의 초기 서사를 따뜻하게 비추었다.

 

일본 왕실이 황실의 발상지라고 부르는 사이토바루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적 · 유물과 가야의 유적 · 유물을 비교하며, 일본 왕실과 가야가 맺은 깊은 갈증의 흔적을 추적한다. 우리는 시간의 강을 거슬러 두 문명이 나눈 대화의 메아리를 찾는다. 이 여정은 단지 과거의 유물을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바다를 건넌 사람들의 열망, 그들이 일본 왕실의 뿌리에 남긴 영감, 그리고 낙동강의 바람이 규슈의 바다와 만나며 울린 노래를 되새기는 일이다. 우리는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가야의 울림이 왕실의 신화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그리고 그 울림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지 탐구한다.

 

낙동강과 규슈의 파도가 서로를 끌어안는 순간, 우리는 역사의 심연에서 고대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이토바루 고분군과 삼각연신수경의 출토: 권력 중심지였다는 증거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일본 미야자키현(宮崎県) 사이토시(西都市)의 드넓은 평야와 완만한 언덕에 자리 잡은 고대 무덤들이다.

 

3~6세기에 걸쳐 조성된 고분군으로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31, 원형분(円墳) 286, 방분(方墳) 2기 등 총 319기가 현존하고 있는 대규모 고분군이다.

 

일본 규슈 남부의 대표적 고고학 유적으로, 지역 수장층의 정치적 ·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며, 고대 일본의 사회 구조와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전방후원분은 마치 옛날 열쇠 구멍 모양으로 생겼다. 후원부(원형 부분)에는 시신을 안치하고, 전방부(사다리꼴 부분)에는 제단을 만든 독특한 구조다. 대규모의 고분 조성을 위해 투입된 노동력의 규모 등을 고려할 때, 일본 고분 시대의 계층 사회와 권력 상징성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300여 기의 많은 고분 중에 특히 오사호즈카 고분(男狭穂塚)과 메사호즈카 고분(女狭穂塚)으로 유명하다. 오사호즈카 고분은 일본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 니니기노 미코토의 무덤으로, 메사호즈카 고분은 역시 일본 신화 속 여성 신 고노하사노 사쿠야히메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남북 4.2km, 동서 2.6km, 175천 평에 걸쳐 펼쳐져 있는 이 고분군은 일본 내에서도 보기 드문 규모와 보존 상태를 자랑하며, 1952년 일본 국가 특별사적지로 지정되었다.

 

고분군은 농경지와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경관 속에 위치하며, 고분의 배치와 크기는 고대 일본 국가 형성 과정에 있어 이 지역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에서 주목할 유물 중 하나는 바로 삼각연신수경(三角縁神獸鏡)이다. 이 거울은 주로 일본 열도의 전방후원분에서 발견되며, 4세기 초 야마토 정권이 중국 후한 및 위진남북조와 교류하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삼각연신수경은 통치자의 권위, 신성성을 상징하는 정무적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그 출토 자체가 해당 지역이 당시 중앙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이토바루에서 이 거울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이 단지 변방이 아니라, 규슈 야마토 정치체제의 핵심부이자 전략적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 권력의 중심에 가야계 세력이 관여했다면, 일본 황실의 뿌리에도 그 영향이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이토바루 고분군과 가야 유적: 가야와 일본 왕실의 교차점

 

일본서기에서는 진무 천황과 관련된 무덤으로 전해지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는 신화적 내러티브로 간주한다. 하지만 실재했던 인물이라면 이는 가야의 도래 개척자 집단 중 일부일 수 있다.

 

최근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한반도 남부의 고대 국가 가야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면서, 이곳이 그저 일본 고유의 시원지가 아닌, 가야계 도래인의 거점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 왕실의 발상지인 곳이,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의 생활 거점이었다면, 그 의미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 철제 무구, 금동 장신구, 청동거울, 옥구슬 등이다. 일본 고분 시대의 물질문화를 생생히 증언하며, 특히 한반도 가야와의 뚜렷한 유사성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가야는 1~6세기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번성한 연맹체 국가로,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 등의 고분은 널무덤(목관묘), 덧널무덤(목곽묘),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순으로 형식이 변했다.

 

합천 옥전 고분, 김해 대성동 고분, 고령 지산동 고분 등에서 상형토기, 철기, 금동관, 청동거울이 무수하게 출토되었으며, 가야는 철기 생산과 해상 무역의 허브로서 동아시아 교류를 주도했다.


사이토바루 고분과 가야의 유물들은 일본 왕실의 초기 형성에 가야의 깊은 관여를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다.

 

먼저, 토기는 두 문명의 가장 선명한 연결고리다. 가야의 회청색 경질토기는 뿔잔, 삼족기, 장군 등의 상형토기로 독특한 미학을 뽐내며,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의례용 토기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뿔잔은 곡선적 형태와 섬세한 표면 처리에서 사이토바루 46호분에서 출토된 토기 복합구연호, 111호분에서 출토된 스에키 및 하지키와 상당한 수준의 공통점을 보인다.

 

토기의 문양예를 들어 물결무늬와 격자무늬는 사이토바루 고분에서도 확인되며, 이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 기술 전수의 증거 가능성을 말해준다.

 

이는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이 해상로를 통해 규슈로 전파되었으며, 일본 왕실의 의례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학계에서는 사이토바루 고분의 토기가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에 의한 현지 제작의 흔적을 보이며, 왕실의 제사나 권력 과시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논의된다.

 

철기는 가야의 선진 기술이 일본 왕실의 군사적 기반에 기여했음을 증명한다.

 

합천 옥전고분의 말투구(마면)와 판갑옷(마갑)5세기 가야의 철기 문화를 상징하며, 와카야마현(和歌山縣) 오타니 고분(大谷古墳)의 유사한 말갑옷과 비교된다. 가야의 철기 유물은 일본의 유물보다 50~100년 앞서며, 제작 기술의 정교함에서도 우위를 보인다.

 

사이토바루의 철기가 가야의 대장간 기술을 반영하며, 야마토 정권의 군사적 통합에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이 관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남원 월산리 고분에서 발굴된 화살촉인 철촉 역시 야마토와의 연관성을 드러내며, 가야가 철기 무역의 중심지였음을 입증한다.

 

장신구와 의례용품은 가야의 미적 감각이 왕실의 상징 체계에 스며들었음을 보여준다. 가야의 금동관과 금제 귀걸이는 김해와 고령에서 다수 출토되었으며, 사이토바루에서도 유사한 금동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가야의 장신구는 세공 기술과 화려한 문양에서 더 정교하며, 일본의 유물은 이를 모방한 흔적이 엿보인다.

 

가야의 청동거울은 백제-신라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독자적 양식을 유지하였다. 사이토바루 고분의 동경(銅鏡)과 유사한 원형 문양을 공유하지만, 가야 거울의 제작 연대가 더 이르다.

 

일본 학계에서는 사이토바루 고분의 장신구가 가야계 도래인의 공방에서 제작되었으며,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데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러한 유물들은 가야의 선진 문물이 일본 열도로 전파되며 왕실의 초기 문화 형성에 기여했음을 증언한다.

 

유적의 구조와 일본 왕실의 지리적 뿌리


유적의 비교는 가야의 묘제가 일본 왕실의 초기 무덤 문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드러낸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전방후원분은 일본 고분 문화의 상징으로, 후원부의 원형 구조와 전방부의 사다리꼴 형태가 수장층의 권위를 강조한다.

 

가야의 횡혈식 석실묘는 입구와 석실의 정교한 설계를 통해 역시 권력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고령 지산동 고분의 석실은 사이토바루 고분의 후원부와 유사한 평면 구조를 가지며, 적석 방식에서도 공통점이 확인된다.

 

가야의 묘제는 부장품의 다양성과 석실 장식의 복잡성에서 더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며, 이는 일본 왕실의 초기 무덤 설계에 간접적 영감을 주었을 수 있다.

 

사이토바루 고분의 전방후원분이 가야의 석실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이며 정치적 상징성을 발전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지리적으로, 가야 유적은 낙동강과 남해안에 밀집해 해상 무역의 전략적 요충지를 형성했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규슈 남동부에 위치하며, 가야와의 해상로로 연결되었다.

 

국립 가야 문화유산연구소와 국립 김해박물관의 최신 지리정보시스템(GIS) 기반 해상로 분석은 4세기 후반 가야와 규슈 간의 교류가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며, 이는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조성 시기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이 해상 네트워크는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이 규슈를 거쳐 야마토 정권에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하며, 왕실의 발상지신화에 가야의 지리적 흔적이 투영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분포와 규모는 가야의 해상 교류망과 연계된 지역적 중요성을 보여주며, 왕실의 신화적 기원에 가야의 현실적 기여가 겹쳤음을 시사한다.

 

왕실과 가야의 연관성: 한반도 도래 개척자와 신화의 교차


일본 왕실은 사이토바루 고분군이 자리한 미야자키현을, 진무천황 신화에 기대어 자신들의 발상지로 기념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가야와의 연관성을 더 선명히 드러낸다.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은 5~6세기 일본 야마토 정권의 문화 형성에 깊이 관여했다. 속일본기에 기록된 야마토노아야씨(東漢氏)는 가야계 집단으로, 철기 제작과 토기 기술을 전파하며 왕실을 포함한 귀족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사이토바루 고분의 철제 무구는 가야의 대장간 기법을 반영하며, 이는 도래 개척자들의 기술적 기여를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야마토노아야씨가 사이토바루를 거점으로 야마토에 기술과 문화를 전파하며, 왕실의 초기 정치 구조 형성에 기여했을 가능성을 논의한다.

 

가야와 백제의 동맹도 왕실과의 간접적 연계를 시사한다. 백제의 왕인 박사는 일본 왕실에 한문학과 행정 기술을 전파했으며, 가야와 백제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하면 가야의 문화적 요소가 왕실 형성에 스며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야 귀족층과 야마토 왕실 간의 혼인 가능성을 제기하는 주장도 있지만, 문헌 증거가 부족해 추정에 그친다. 그러나 사이토바루 고분의 유물은 가야의 물질문화가 왕실의 초기 서사에 녹아들었음을 강력히 증언한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이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이 창조한 다양한 문화와 문물의 집약지이자 집단 거주지이며, 일본 왕실의 신화적 기원에 가야의 현실적 기여가 중첩되었다고 직설적으로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예를 들어, 사이토바루 고분의 토기와 철기는 가야계 도래인이 현지에서 직접 제작한 것으로 보이며, 이를 일본 왕실의 권위와 상징에 사용했을 것이라는 점에서다. 왕실은 자신들 고유의 정체성을 고집하며 외래의 문물 수용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가야계 개척자들이 만든 의례 용품으로 제례를 올리고 제사를 지냈다면, 그들 또한 가야계일 가능성이 크다.

 

왕실의 발상지주장은 신화적 색채가 강하지만, 그 신화의 뿌리에는 가야의 문화적 흔적이 잠재해 있다. 일본 학계는 이러한 연관성을 문화적 융합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가야가 왕실의 초기 정체성 형성에 다층적 역할을 했을 것이란 점을 배제하지 않는다.

 

결론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흙은 가야의 장인들이 남긴 따뜻한 손길을 품고 있다. 낙동강의 바람이 규슈의 언덕을 어루만지며, 가야의 대장간에서 피운 불꽃은 일본 왕실의 초기 서사를 환히 밝혔다.

 

뿔잔에 담긴 가야의 의례는 사이토바루의 고분에서 숨을 되찾았고, 말투구의 단단한 철은 왕실의 권위를 지탱했을지 모른다. 일본 왕실은 미야자키를 발상지라 노래하지만, 그 노래의 깊은 선율에는 가야의 음색이 아로새겨져 있다.

 

고고학의 삽은 신화의 안개를 걷어내고, 부드러운 솔질은 두 문명이 바다를 건너 맺은 깊은 연관성을 선명히 드러낸다.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발굴과 학문적 대화는 잊혀진 서사의 장을 하나씩 열어젖힐 것이다. 사이토바루의 고분과 가야의 유적은 단순한 돌과 흙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바다를 항해한 사람들의 열망이 새겨진 캔버스이자, 일본 왕실의 신화 속에서 가야의 영혼이 숨 쉬는 생생한 증거다.

 

가야의 울림은 왕실의 서사에 영원히 얽혀, 역사의 심연에서 조용히, 그러나 힘 있게 노래한다. 우리는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과거가 미래에 전하는 메시지를 포착한다.

 

낙동강의 물결과 규슈의 파도가 서로를 끌어안는 그 지점에서, 가야와 일본 왕실의 갈증은 시간을 초월해 찬란히 빛난다. 이 빛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하나로 이어주며, 우리의 마음속에 새로운 이야기를 짓는다.

 

가야의 손길이 사이토바루의 흙에 남긴 흔적은, 왕실의 신화가 품은 깊은 갈증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고대인의 꿈과 그 꿈이 건너온 바다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가야와 일본 왕실이 함께 써 내려간 서사의 다음 페이지를 상상한다.

 

 

 

바람에 새긴 이름 가야에서 히무카(日向)

 

한때,

바람보다 먼저 이 땅을 지나간 이들이 있었다.
물결보다 빠르게,

별빛보다 깊게.


가야.


강과 산이 서로를 끌어안고,

바다가 하늘을 닮던 시절,
그들은 땅을 일구고 철을 다루었으며,
뜨겁게 피고 지는 생애를 노래했다.

 

그러나 모든 빛나는 것들이 그러하듯,
가야 또한 서서히 저물어갔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어떤 이들은 무너진 제단 위에 남았고,
어떤 이들은 마지막 불꽃을 품고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저 멀리,

규슈의 남단,

미야자키의 사이토시에 이르렀다.


그들이 잠든 곳.
사이토바루 고분군.

 

이곳은 마치,

잃어버린 고향을 대지 위에 다시 그린 듯하다.


수십, 수백 개의 봉분과 봉분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끝없이 펼쳐진다.


전방후원분 고분은,

마치 하늘을 향해 비밀스러운 열쇠를 들이미는 듯하다.


고분을 감싸는 초록의 바람,

푸른 하늘,

멀리 흐르는 강줄기.


모든 것은, 말없이 과거를 노래한다.

 

그들의 손길은 이곳에서도 섬세했다.


흙을 다지고, 돌을 골라 쌓고,

한 줌 부장품에도 이야기를 담았다.


봉분의 높이와 비율, 매장의 순서,

토기와 장신구의 모양까지,
모든 것이 가야의 숨결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와 혼, 눈물과 희망이 엮인 새로운 서사였다.


바다를 건너온 이들은 단지 도래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땅의 숨결이 되어, 시간을 새롭게 빚어냈다.


개척자이자 창조자.
낯선 땅에 고향을 심은 이들.

 

일본서기는 이 땅을 '히무카(日向)'라 불렀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고국, 가야를 바라볼 수 있는 곳,
신화의 장막 아래, 새로이 깃발을 세운 땅.


그러나 신화는 늘 현실의 눈물을 감춘다.


왕권의 욕망과 권력의 설계는,

과거를 왜곡하고 기억을 짓눌렀다.

 

한때 일본 학계는 이 서사를 무기로 삼았다.


사이토바루 고분군과 한반도 남부를

'지배''식민'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들었다.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이름 아래,

진실은 왜곡되고,

기억은 가려졌다.

 

그러나

흙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오늘, 고고학은 말한다.
칼이 아닌 손으로, 불꽃이 아닌 씨앗으로.


가야의 개척자들은 바다를 건넜고,

스스로 삶을 일구었다고.

 

사이토바루의 봉토 아래,

그들의 땀과 숨결은 여전히 뜨겁다.

 

사라진 제국. 잊힌 왕국.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대지 아래에, 별빛 어린 고분군 사이에,

미세한 토기 조각 하나하나 속에,
여전히 그들의 노래는 흐른다.

 

우리는 들을 수 있다.
바람을 타고 오는, 그 옛날의 속삭임을.
물결에 실려 오는, 사라진 이들의 발걸음 소리를.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8

낙동강의 축원, 바다를 건너다: 신녀와 묘견공주, 히미코 전설

 

새벽녘, 낙동강의 은빛 물결이 고령의 언덕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안개가 지산동 고분군을 감싸고, 첫 햇살이 금동관의 찬란한 문양을 비추는 순간, 천 년 전 가락국의 제사 행렬이 되살아난다. 철의 불꽃이 제단에서 타오르고, 청동거울이 신령의 빛을 반사하며 신성과 권력이 하나 되던 그곳, 가야의 심장에서 성스러운 숨결이 시작되었다. 이 숨결은 낙동강의 메아리를 따라 바다를 건너, 규슈의 푸른 해안과 이즈모의 신성한 숲속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멀리 아리아케해(有明海)의 잔잔한 파도 속에서 별빛이 춤춘다. 구마모토의 야쓰시로 신사(八代神), 묘견궁(妙見宮, 795)의 신성한 경내에서 북극성의 신, 묘견신(妙見神)이 고요히 빛난다. 이곳으로 한 여인이 바다를 건너온다. 거북의 등에 실려, 구름을 타고, 그녀는 천상의 빛을 품은 묘견(妙見)공주다. 그녀의 이야기는 낙동강의 바람과 규슈의 파도가 만나 엮어낸 신화적 유물, 고대 한일 교류의 장대한 서사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가락국의 신녀(神女)이자 야마타이국(邪馬台国)의 여왕 히미코(卑弥呼)일까? 그녀의 동반자, 왕자 선()은 낙동강의 축원을 규슈의 제단에 심은 이일까? 그리고 거북, 하늘의 뜻을 전하는 신성한 사자는 가락의 구지가와 묘견공주의 배를 하나로 잇는가?

 

가락국의 샤먼 전통과 야쓰시로 신사의 묘견신앙, 히미코의 신탁과 거북의 항해를 엮으며, 별빛 아래 펼쳐진 영원의 서사를 그려낸다.

 

낙동강의 축원: 가락국의 샤먼 씨앗

 

김해의 푸른 평야, 낙동강 하구에서 가락국은 1세기부터 6세기까지 꽃피웠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초대 왕 김수로(재위 42~199)는 금알(金卵)에서 태어나 하늘의 명을 받아 왕국을 세웠다.

 

그의 부인 왕비 허황옥,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신령한 여성은 가락국이 해양 교류를 통해 외부 문화를 포용한 강국이었음을 보여준다. 건국 설화의 중심에는 구지가(龜旨歌)가 있다. 거북이 하늘의 뜻을 전하며 왕의 탄생을 예고하는 이 노래는 가락국의 샤먼 전통이 천신과 인간을 연결했음을 암시한다.

 

수로왕은 아홉 간(, 촌장)의 지지를 받아 연맹적 통치를 구축했다. 대성동 고분군의 웅장한 무덤과 청동거울, 파형동기는 왕권의 권위가 점차 강화되었음을 증언한다.

 

파형동기(巴形銅器) , 천신과 교감하는 독특한 이 제사 도구는 가락국 샤먼의 상징이었다. 2대 거등왕(199년경)에 이르러 가락국은 철기 생산과 해상 교역을 활성화하며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학계 일각에서는 거등왕이 연맹 체제를 넘어 중앙집권적 왕권을 시도했을 것으로 본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은 가락국이 주변국 및 왜국과 활발히 교류했음을 암시하며, 철의 수출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왕권에 의한 철기의 관리를 통해 외교와 권력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략을 썼을 가능성있다. 당시에 철은 매우 귀중한 자산이었기에, 이의 생산과 분배는 아주 중요하고, 한편으로는 미묘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의 중앙화는 부족 촌장(干, 간)들과의 사이에 갈등을 낳았을 개연성이 크다. 편년가락국기》 「초선대편은 거등왕의 아들 왕자 선()이 세상의 혼란함과 세상사의 허망함을 탄식하며 신녀와 함께 구름을 타고 떠났다고 기록한다.

 

승운이거(乘雲離去)” 설화는 정치적 갈등과 왕위 계승의 상징적 메타포로 해석된다. 일국의 왕자 신분인 이가 단지 인생무상을 이유로 나라를 떠나 타지로 간다는 것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 여러 의문을 남긴다. 혼란스러운 세상에 대한 왕자 선의 탄식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왕자 선을 둘러싼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듯싶다. 어찌되었든, 왕자 선과 신녀의 여정은 가락국의 샤먼 전통을 품고 새로운 터전을 찾는 항해, 곧 규슈의 묘견공주, 즉 히미코 전설로 이어진다.

 

김해의 민담은 이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초선대 바위, 낙동강 지류가 흐르는 신성한 경계에 서서, 선과 신녀의 천상 여정을 기린다. 한 민담은 선이 안개 낀 언덕에서 빛나는 신녀를 만나 북두칠성이 이끄는 먼 땅의 운명을 들었다고 전한다.

 

그들은 구름을 타고 일본으로 떠났으며, 신녀는 그곳에서 여왕이 되어 새 왕국을 형성했다. 이 신녀가 묘견공주요, 히미코다. 가락국의 샤먼 씨앗이 규슈의 제단에 뿌려진 순간이다.

 

야쓰시로 신사: 북극성의 신성한 항구

 

아리아케 해의 잔잔한 파도 속, 야쓰시로 신사(묘견궁)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신, 묘견신을 모시는 천상의 성소다. 이곳에서 묘견공주의 전설이 살아 숨 쉰다. 지역 민담은 그녀를 바다에서 나온 천상의 처녀로 그린다. 귀사(龜蛇) 즉, 뱀의 머리에 거북의 몸을 한 배를 타고 상륙한 그녀는 별빛으로 반짝이는 옷을 입고, 야쓰시로 사람들에게 북두칠성의 인도에 따라 바다를 항해하는 법을 가르쳤다. 어떤 전승은 그녀를 묘견신의 화신으로,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다리로 묘사한다. 다른 전승은 그녀를 씨족을 통합한 여왕이나 여사제로 본다.

 

매년 11월 22일~23일 늦가을, 야쓰시로 일대에서 열리는 묘견제(妙見祭)는 묘견신의 은혜를 기리는 유서 깊은 축제다. 규슈지역을 대표하는 3대 마츠리 중 하나다. 북극성을 상징하는 화려한 카사호코(笠鉾)와 묘견공주를 태운 거북뱀(亀蛇)이 이끄는, 신을 모신 임행 행렬(神幸行列)이 쿠마가와(球磨川) 강변을 따라 펼쳐지며, 사자춤과 제례 음악이 묘견신의 보호를 소원하는 찬가로 울려 퍼진다. 야쓰시로 신사의 사제들은 이 행렬이 북두칠성과 연결된 묘견신의 천상 기원을 기념한다고 전한다. 쿠마가와 강 근처의 카메바네(亀津, 거북나루)는 거북뱀의 신성한 상징과 연결된 장소로, 지역 전승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묘견공주가 히미코라면, 야쓰시로 신사는 그녀의 신탁이 규슈에 뿌리내린 성소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에 따르면, 히미코는 사람을 홀리는 귀신도(鬼神道, 무속행위)를 통해 영적 권위를 행사하며 야마타이국을 통치했다.

 

그녀의 주술적 역할은 묘견신의 천상적 상징과 조화를 이룬다. 북극성은 묘견신의 신성한 빛으로, 질서와 운명을 관장한다. 히미코의 예언은 이 빛 아래 여러 부족을 하나로 묶었다. 묘견제에서는 그녀의 이러한 주술적 유산을 기린다. 묘견제의 화려한 신코 행렬과 쿠마가와 강변의 거북뱀 의식은 이 무속적 전통을 계승하며, 묘견공주가 히미코의 신화적 후계자임을 암시한다.

 

히미코와 왕자 선: 가락의 신녀, 야마타이의 여왕

 

2~3세기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는 중국 사서 《후한서》나 《삼국지》귀신도를 써서 무리를 현혹(事鬼神道能以妖惑衆 )”하는 무녀(혹은 제사장)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서사는 그녀를 가락국 왕자 선과 함께 구름을 타고 떠난 신녀로 비정한다. 선은 히미코의 신탁을 전달하며 야마타이국을 보좌한 남동생, 가락국의 샤먼 전통을 규슈에 심은 이로 해석된다.

 

그들의 여정은 192~194년 동북아시아를 휩쓴 대기근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시작되었다. 후한서192년 후한의 극심한 기근을 묘사하며, 이 재앙이 해상 교역을 통해 가락국과 규슈로 파급되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신라본기는 193년 굶주린 왜인들이 신라로 식량을 구하러 온 사건을 기록하며, 규슈 북부의 불안을 증언한다. 규슈 북부 요시노가리 유적(吉野里遺跡)의 깊은 환호(고랑)와 목책은 기근으로 촉발된 갈등을 반영한다.

 

일본 신화 속 천손강림을 전하는 고대 역사 기록 중에 당시 사회의 혼란상을 암시하는 듯한 기술이 눈에 띄는 게 있다. 일본 천손강림의 무대로 알려진 히무카(日向, 지금의 미야자키현 일대) 지역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술한 《일향국풍토기(日向国風土記)》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니니기노 미코토가 천손강림할 당시 세상이 캄캄했는데, 호하시(大鉏)와 오하시(小鉏)라는 두 사람이 니니기에게 치호(千穂)의 벼에서 얻은 쌀을 뿌리면 좋겠다고 아뢰었고, 그렇게 하자 하늘이 맑아지며 밝아졌다. 이런 연유로 천손 니니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선 장소를 “히무카 다카치호의 이중의 봉우리(日向の高千穂の二上の峰)”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니조산(二上山)으로 여겨진다."

 

위 내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치호의 벼에서 얻은 쌀을 뿌리자 캄캄했던 세상이 밝아졌다라는 구절이다. 치호(千穂)란 니니기노 미코토가 천상으로부터 강림할 때 가져온 천상의 벼이삭을 뜻한다. 즉, 본격적인 농경문화의 시작을 알리는 표현이며, 또한 그 지역에 새로운 세력에 의해 비로소 신성한 물질인 쌀 생산이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 표현이다. 그래서 니니기노 미코토가 천손강림한 땅을 '다카치호(高千穂)'라 부르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참고로 위 기록을 근거로 천손강림의 땅이 흔히 알려져 있는,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기리시마산(霧島山) 다카치호노 미네(高千穂峰, 고천수봉) - 한국악(韓國岳)의 옆 봉우리 - 가 아니라, 그곳으로부터 약 90km 떨어진, 미야자키현의 북단부 다카치호쵸(高千穂町)의 니조산(二上山)이라는 설이 존재하게 되었다.

 

물론, 다카치호쵸에는 다카치호신사(高千穂神社)를 비롯해서 쿠시후루신사(槵觸神社, 환촉신사)가 있어, 이곳이 천손강림의 땅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천손 니니기노 미코토가 다카치호의 쿠지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에 강림했다고 하니, 신화 속 지명 두 곳과 관련한 신사가 바로 이곳에 있는 셈이다. 또한 쿠지후루다케에 강림했다는 일본의 건국 신화는 가야의 김수로왕이 김해 구지봉(龜旨峯)에 강림한 신화와 지명조차도 비슷하여 가야인들의 영향력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예로 거론된다.

 

이렇듯 여러가지로 혼란한 상황일 때, 히미코는 가락국의 샤먼 전통을 품고 규슈에 상륙했다. 그녀의 귀신도는 고조선의 복골점에서 기원한 점술로, 소의 넓적다리뼈를 태워 갈라진 자국으로 길흉을 점쳤다. 태양을 상징하는 바람개비 모양의 청동기인 파형동기(巴形銅器)를 높이 들고 천신의 뜻을 전하며 그녀는 29개의 부족 연합을 결속시켰다. 왕자 선은 가락국의 해상 교역 경험을 바탕으로 위나라와의 외교를 이끌었고, 히미코는 238년 금인자수(金印紫綬) - 제후에게 내리는 금으로 만든 도장과 자주색 동장끈 - 를 받으며 친위왜왕(親魏倭王)에 책봉되었다.

 

히미코의 통치는 신비로운 은둔과 신탁에 뿌리를 두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단 한 명의 남성(왕자 선으로 추정) 그녀의 신탁을 전달했다(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語). 요시노가리 유적의 제사 시설과 청동거울, 파형동기는 가락국의 샤먼 전통이 이식되었음을 보여준다. 히미코의 신탁은 부족들의 신앙을 하나로 묶었고, 선은 외교를 통해 야마타이국의 권위를 높였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魏志倭人伝)에는 히미코(卑弥呼)가 다스린 야마타이국(邪馬台国)에 대해 "호수 7만여 호"(戶數七萬餘) 규모의 국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247년경 히미코의 사망은 왜국을 또 다시 혼란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토시마 지역의 히라바루 유적(平原遺跡)에서 발견된 야타노카가미(八咫鏡, 팔지경. 일본 국보로 이세신궁 보관), 태양을 상징하는 대형 청동거울은 그녀의 신적 권위를 기리는 신물이었다.

 

그녀의 죽음으로 연맹체는 흔들렸고, 남성 왕의 즉위는 부족 간 내전을 낳았다. 그러나 열세 살의 종녀(從女, 조카) 이요(壹與)가 파형동기를 들고 신탁을 계승하며 나라를 다시 안정시켰다. 이요는 248년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등 대외관계를 이어가며 가락국의 샤먼 전통을 규슈에 꽃 피웠다.

 

거북의 항해: 구지가와 묘견공주의 다리

 

거북, 하늘의 뜻을 전하는 신성한 사자는 가락국과 야쓰시로의 신화를 잇는다. 삼국유사의 구지가는 거북이 수로왕의 탄생을 예고하며 바다에서 나온다. 이 거북은 가락국의 해양 문화를 상징하며, 신성한 명령을 전달한다.

 

야쓰시로에서는 묘견공주가 뱀의 머리와 거북 모양의 몸을 한 배를 타고 상륙했다는 민담이 전해진다. 쿠마가와 강의 카메바네(거북나루)는 그녀의 배가 닿은 신성한 나루로, 장수와 보호의 상징이다.

 

쿠마가와 강에서 바다로 연결되는 초입에 큰 비석이 하나 서 있다. 하동도래비(河童渡来之碑)라고 하는 이 비석은 고대 도래인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야쓰시로에 정착했음을 알리는 비석이다.

 

비문에는 천오 육백 년 전, 하동이 중국 방면에서 바다를 건너와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는 장소이고, 삼백오십 년 된 다리의 석재로 만든 비석이며, 가랏파(ガラッパ)의 돌이라고 부른다. 어느 날 장난꾸러기 요괴(갓파)가 주민들에게 붙잡혔다. 이 돌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장난을 치지 않는 조건으로, 대신 1년에 한 번 축제를 열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매년 518일 축제를 여는데, ‘오레오레데 라이다(オレオレデーライタ)‘ 축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가랏파라는 단어와 오레오레데 라이다라는 표현이다. 일본에서는 하동(河童)을 가랏파 또는 갓파라고 읽으며,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요괴 중 하나를 가리킨다. 우리의 도깨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가랏파의 의미가 하동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다. 묘견공주 일행이 야쓰시로 지역에 상륙하여 그곳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현지 토착민들이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을 가랏파라고 했으며, 이는 가라의 무리라는 뜻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오레오레데 라이다라는 표현 역시 고대 한반도의 사투리로 오래오래 되어지이다라는 의미로 비문의 이 돌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와 같은 의미로 해석한다.

 

히미코 연구가 故 이종기 선생은 히미코가 김수로왕의 딸로, 오빠 선견(선의 변형)과 함께 거북 배를 타고 규슈로 항해했다고 주장한다. 히미코, 곧 묘견공주의 거북 항해는 가락국과 야마타이국을 연결하는 문화적 다리였다.

 

구지가의 거북과 묘견공주의 거북 배는 공유된 신화적 원형을 암시한다. 가락국에서 거북은 왕을 낳고, 야쓰시로에서는 공주를 전달한다. 이 대칭은 해양 교류에 뿌리를 두며, 히미코가 가락의 공주로서 이 모티프를 규슈로 가져가 묘견신앙과 융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북두칠성과 샤먼: 묘견신앙의 천상적 뿌리

 

묘견신앙은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중심으로 신토, 불교, 고대 한반도인들의 무속 행위가 융합된 신앙이다. 묘견신은 질서와 운명을 관장하며, 황실과 항해자를 수호한다. 히미코의 샤먼적 권위는 이 천상적 상징성과 조화를 이룬다. 그녀의 귀신도는 별의 인도를 받아 신들의 뜻을 점치는 황홀 상태의 의식을 포함했을 것이다. 묘견제의 별빛 행렬과 바다 의식은 이 무속적 유산을 반영하며, 묘견공주가 히미코의 신화적 재창조임을 암시한다.

 

한반도의 고대 민속 신앙에서 북두칠성은 하늘의 중심축으로, 운명과 권위를 상징했다. 일본 규슈, 특히 쿠마가와 강 유역의 해양 공동체는 히미코와 같은 통치자가 촉진한 문화적 융합을 통해 이 신앙을 받아들였다. 묘견공주의 전설은 이러한 천상 상징을 담아내며, 그녀를 북두칠성의 인도 아래 쿠마가와 강을 통해 바다를 항해한 신성한 인물로 재창조했다.

 

일본 신도의 뿌리: 가락국의 불꽃

 

히미코와 이요의 신탁통치는 가락국의 샤먼 전통이 규슈에 뿌리내린 증거다. 사가현 칸자키시(神埼市)의 히미코 동상은 파형동기를 든 모습으로, 가야의 제사 전통이 왜국에 이식되었음을 상징한다.

 

요시노가리와 히라바루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거울은 가야와 왜국의 물질문화가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히미코의 귀신도는 고조선의 복골점에서 영향을 받아 천신과 조상을 연결하는 의식을 형성했으며, 이는 일본 신도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鳴尊, 일본 건국 신화 속의 신)의 신라 기원설은 한반도계 도래 개척자들이 가야의 제례 전통을 야마토에 전파했음을 시사한다. 스사노오 신사의 바다 숭배, 오미와 신사의 산 숭배는 가락국의 샤먼 전통과 맥을 같이한다. 일본 신사의 시메나와(しめ, 금줄)는 가야의 서낭당 금줄과 신성한 경계를 공유한다.

 

연대적 도전과 신화의 힘

 

이 가설에는 연대적 불일치가 있다. 편년가락국기는 왕자 선과 신녀가 199년 떠났다고 기록하며, 삼국지는 히미코가 180~248년 활동했다고 전한다. 이는 고대 사서의 구전 의존과 후대 편찬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파형동기, 복골점, 청동거울은 가락국의 샤먼 전통이 왜국에 뿌리내린 강력한 증거다.

 

신화는 역사적 사실보다 문화적 상상력과 상징성을 우선한다. 묘견공주, 히미코, 가락국의 신녀는 한일 교류의 신화적 융합을 상징하며, 그 이야기는 낙동강과 아리아케 해를 잇는다.

 

영원의 제단 위, 천년의 서사

 

고령의 고분에서 피어오른 제사의 향은 낙동강을 타고 하늘로 솟구쳤다. 그 연기는 구름이 되어 대한해협을 건너, 야쓰시로의 해안과 이즈모의 신목 속으로 스며들었다. 묘견공주, 히미코, 가락의 신녀는 파형동기를 들고 복골점으로 길흉을 점치며 야마타이국의 심장을 일으켰다. 왕자 선은 그녀의 신탁을 전하며 가락국의 해양 문화를 규슈의 제단에 심었다.

 

그들의 발자취는 요시노가리 유적의 제사 시설, 히라바루의 청동거울, 야쓰시로의 묘견제에 새겨져 천년을 넘어 빛난다. 가락국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그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낙동강의 바람은 구지가의 거북과 승운이거의 구름을 실어 바다를 건넜다. 스사노오 신사의 파도 소리, 오미와 신사의 산바람, 이세신궁의 청동거울은 가락국의 축원을 되살린다.

 

야쓰시로의 해안에 서서 별빛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는 파도 속에서 속삭이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묘견공주, 히미코, 가락의 신녀는 한반도의 축원을 일본 열도의 심장에 심었다. 그 씨앗은 신도 문화의 맥박으로 고동치며, 낙동강에서 이즈모까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영원한 다리가 되어 흐른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