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되기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것은 광활한 대지에 각인된 삶의 치열한 흔적, 바다를 건너 전해진 이름 없는 자들의 쇳내 나는 목소리, 그리고 바람에 실려 퍼져나간 인간과 자연에 얽힌 생존의 서사였다. 우리가 신화라 부르는 것들은 그러한 무명의 역사가 세월 속에서 형태를 갖추고, 공동체가 기억하는 방식으로 체계화한 사유의 산물이다. 그러나 신화는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수동적 매체가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미래를 형성하는 도구가 되며, 정체성과 권력을 정당화하는 서사로 재구성된다.
우리는 신화를 종교적 이야기, 민속적 전승으로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는 그저 흔한 일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국가를 잇는 신성한 권위의 줄기이자, 신화 속 낱말 하나하나가 제도와 권력, 지리와 혈통, 이름과 정체성을 정교하게 조율하는 장치였다. 그래서 신화를 읽는다는 것은 정치의 기원을 해독하는 일이며, 감춰진 ‘권력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험난한 여정이다.
역사는 기억을 기록하는 일이자, 때론 기억을 지우는 일이다. 그리고 신화는 그런 기억의 가장 오래된 틀이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과거를 들여다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신화를 만든 자의 의도와 권력,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기억의 조각들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건국신화는 단편적인 민속 전승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기원의 설계도이자, 정체성의 가장 깊은 뿌리를 관장하는 기억의 장치다.
일본의 건국신화도 그러하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서술된 아마테라스의 이야기는 단지 고대의 풍속이나 전설을 담은 문헌이 아니다. 그것은 8세기 야마토 왕권이 자신들의 기원을 신성화하고, 왕권을 영속화하며, 외래의 흔적을 ‘자국화’하려는 시도였다. 그 신화의 깊은 구조 속에는 놀랍게도, 열도 바깥에서 건너온 또 다른 기억의 파편들이 숨어 있다.
그 기억은 한반도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고조선의 단군신화, 부여·고구려의 하늘 제의, 가야·백제의 왕계 서사와 제사 체계는 일본 고대 왕권 신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일본은 이 영향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 대신, 한반도에서 받아들인 사상과 전통, 의례와 이름들을 철저히 재조립하고, 야마토 중심의 신성 서사로 전유(轉有)했다. 일본 건국신화는 그렇게, 거울처럼 타자의 얼굴을 비추되 왜곡된 상으로 되돌려주는 기제가 되었다.
왜 일본은 8세기에 들어와 고대 한반도의 신화 구조를 모방하거나 재편입했는가? 왜 신화를 문서화했는가? 왜 그것은 정치적인 기획이어야 했는가? 이는 평범한 고대사의 기술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정체성을 구축하고 정당성을 설계하는지를 묻는 작업이다. 신화는 언제나 ‘말해진 것’일 뿐 아니라, ‘누가 말하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정치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명확하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자생적 창작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유입된 고대 왕조 신화를 모방하고 변형하여, ‘자국화’한 서사 체계다. 아마테라스는 단군의 그림자를 반사하는 거울이다. 스사노오의 분노는 부여와 고구려의 왕위 다툼을 연상시키며, 닛폰(日本)의 ‘동방 기원’ 담론—일본이 외래 문명을 수입해 만들어진 나라임에도, 이를 감추고 스스로를 동방 문명의 기원 및 중심으로 재서술한 정치적 서사론— 은 문명의 수여자인 가야와 백제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그 수혜자인 일본이 이를 철저하게 자기화한 기억의 정치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한반도 신화를 받아들이되,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자기화’했는가? 답은 권력에 있다. 고대 일본은 한반도 도래인의 지식과 기술,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이며 문명을 형성했다. 하지만 ‘외래 기원’이라는 사실은 왕권의 신성성과 자족성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따라서 일본은 문명적 종속을 감추기 위해 신화를 창작해야 했다. 그것도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왜곡이자, 신화의 정치이다.
신화는 반영의 장치다. 그러나 그 반영은 언제나 선택적이며 왜곡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거울 속에 비친 타자의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다시 그 반사된 상을 ‘진실’로 제도화했다. 그리고 이 왜곡된 거울은 근대 국가 형성과 식민주의 담론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천황 중심의 역사, 대동아공영권, 정통성 있는 신성 군주국이라는 서사는 모두 이 신화적 기원의 정치에서 파생된 산물이었다.
이 책은 바로 이 ‘거울의 구조’를 해부하려 한다. 일본 건국신화에 담긴 모방과 왜곡, 차용과 자기화의 흔적을 추적하며, 신화가 어떻게 정치권력을 정당화하고 역사적 타자를 지워왔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단군과 아마테라스의 비교는 단순한 문화사적 흥미를 넘어서, 문명의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지배당하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다.
거울은 빛을 반사하지만,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스스로를 비추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지워진 타자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왜곡된 상을 바로잡고, 감춰진 흔적을 복원하는 일은 단지 과거의 회복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역사적 책임을 묻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일본 건국신화의 거울』은 그 작업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이제 그 왜곡된 반사의 구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들이 감추고 싶었던 원형의 서사, 지워진 기억의 주체들, 거울 밖의 진짜 얼굴을 복원해 내야 한다.
신화는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쓰이고 있는 이야기다. 이제, 우리는 일본 건국신화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 이면에 숨겨진 기억의 정치와 역사적 욕망의 흔적을 직시해야 할 때다.
고대 가야는 한반도 남부,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 일대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은 작지만 강한 나라였다. 기원후 1세기경부터 6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던 독특하고 역동적인 문명으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나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그 존재 자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가야에 대한 연구가 현대 고고학적으로 본격화된 것은 불과 4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추론하건대, 가야가 초기 일본 국가 형성에 기여한 여러 문화적 유산이 고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연구의 걸림돌로 작용했던 듯싶다. 한반도를 강점했던 자들의 ‘임나일본부설’ 등 식민지적 발상 때문이었으리라.
가야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를 비롯해 고령, 창원 등지에 흩어진 여러 소규모 부족 국가들이 느슨한 연맹체를 형성하며 성장했다. 이 연맹체는 중앙집권적 왕국 체제와 달리 각 소국이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하면서도 상호 협력과 경쟁을 병행하는 독특한 정치 구조를 특징으로 했다.
이러한 유연한 구조는 가야가 백제, 신라, 왜(일본) 등 주변 세력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성을 지킬 수 있게 했다. 김해의 금관가야는 연맹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 기능하며 다른 소국들을 통합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지역은 풍부한 철광석과 해상 무역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 덕분에 경제적, 문화적 발전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가야의 경제는 철기 생산과 해상 무역에 크게 의존했다. 낙동강 유역의 풍부한 철광석과 뛰어난 제철 기술은 가야를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금속 가공 문명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들은 철제 무기, 농기구, 장신구, 옥구슬 등을 대량 생산해 한반도 내의 백제와 신라뿐 아니라 낙랑, 중국, 왜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교역망을 통해 거래했다.
특히 왜와의 해상 무역은 가야 경제의 주요한 무역 축 중 하나였다. 철기 제품과 공예품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교역 활동은 가야를 동아시아 교역 네트워크의 중요한 허브로 자리 잡게 했으며, 경제적 번영은 사회 전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가야의 항구 도시들은 무역선과 상인들로 북적였고, 이를 통해 다양한 문화적 요소가 유입되어 가야의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
가야 사회는 명확한 계층 구조를 바탕으로 조직되었다. 왕족과 귀족이 사회의 최상층을 구성했고, 그 아래로 장인, 농민, 노비 계층이 존재했다. 특히 장인 계층은 뛰어난 철기 생산과 공예 기술로 인해 다른 고대 국가들에 비해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이들의 기술력은 가야의 경제적 성공뿐 아니라 문화적 세련됨을 뒷받침했다. 농민 계층은 농업과 어업을 통해 가야의 식량 기반을 책임졌으며, 노비 계층은 노동력을 제공해 사회의 하부 구조를 유지했다. 이러한 계층적 질서는 가야 연맹체의 안정성과 효율적인 운영을 가능하게 했으며, 각 계층의 역할 분담은 사회적 통합을 강화했다.
문화적으로 가야는 독창성과 개방성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그들의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과 섬세한 문양으로 유명하며, 금속 공예는 장신구, 무기, 의례용품 등에서 높은 예술성과 기술력을 드러냈다.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가야의 공예 기술이 당시 동아시아에서 손꼽힐 만큼 정교했음을 증명한다. 전통 현악기 가야금으로 대표되는 음악 분야와 건축에서도 가야는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특히 일본과의 밀접한 문화 교류는 가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가야의 토기와 철기 제품은 일본 규슈 지역의 고대 유적지에서 다수 발견되며, 이는 양 지역 간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준다. 가야는 외부 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융합하는 유연성을 통해 다원적이고 역동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종교와 신앙 체계는 가야 사회의 중요한 축이었다. 태양신 숭배와 조상 제사, 자연 숭배가 중심을 이루었으며,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례 의식은 농경과 어업에 기반을 둔 가야 사회의 단합을 강화했다. 이러한 의식은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고, 계층 간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제례에 사용된 정교한 금속 공예품과 토기는 가야의 종교적 세계관과 예술적 감각을 동시에 보여준다.
정치적으로 가야는 왕과 귀족 집단 간(干, 촌장 등)이 의사결정을 주도했다. 왕은 대외 교섭과 군사 전략 수립에서 절대적 권한을 행사했으며, 소국 간 관계를 조정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귀족 집단은 내정, 경제, 군사 정책을 포괄적으로 관리하며 연맹체의 운영을 뒷받침했다. 이러한 정치 구조는 소국 간의 경쟁과 협력을 균형 있게 유지하며 가야 연맹의 지속성을 보장했다. 그러나 내부적 갈등과 외부의 압박은 가야의 발전에 끊임없는 도전 과제였다. 백제와 신라의 점진적인 세력 확장은 가야의 독립성을 위협했고, 내부적으로는 소국 간의 이익 충돌이 종종 발생했다.
고고학적 증거는 가야의 복잡하고 세련된 사회를 생생히 보여준다. 김해, 고령, 함안 등지의 고분에서 발굴된 철기 제품, 금속 공예품, 토기는 가야의 높은 기술력과 문화적 수준을 입증한다. 특히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과 고령의 지산동 고분은 가야 귀족의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풍부한 유물을 남겼다. 이 유물들은 가야가 단순한 지역 문명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음을 보여준다.
가야의 발전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5세기부터 신라와 백제의 압박이 심화되면서 가야 연맹은 점차 분열되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 소국 간의 갈등과 자원 경쟁은 연맹의 단결을 약화시켰고, 외부적으로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 신라의 군사적 공세가 가야의 독립성을 위협했다. 6세기 중반, 신라에 의해 점진적으로 통합되면서 가야는 독자적인 문명으로서의 역사에 조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결국, 562년 가야 연맹의 마지막 중심국이었던 대가야의 멸망으로 가야의 독자적 역사는 종식되었다.
그럼에도 가야의 유산은 한국 역사와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뛰어난 철기 기술은 신라와 백제의 금속 가공 기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해상 무역을 통한 경제적 네트워크는 후대 한반도의 대외 교류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가야의 개방적인 정치 구조와 다원적인 문화는 고대 한국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 남아 있다. 오늘날 가야 유적지와 유물은 한국의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가야가 단순한 지역 문명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독특하고 혁신적인 역할을 했음을 증명한다. 가야의 이야기는 고대 한반도의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며, 그 유산은 현대 한국의 역사적 정체성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가야인들의 일본 개척 경로도
가야의 철기 기술과 일본으로의 전파
고대 가야의 철기 문화는 한반도 남부 지역의 기술적 혁신을 상징하며,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야는 낙동강 유역의 풍부한 철광석과 고도로 발달한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철기 생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김해와 창원 지역의 제철 유적에서 발견된 고온 용광로와 제련 도구는 가야의 선진적인 금속 가공 기술을 보여준다. 초기에는 단순한 제련 방식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고온에서 철광석을 정제하고 반복적인 단조와 가열로 철의 순도와 강도를 높이는 복합적인 기술을 개발했다. 이러한 기술은 농기구, 무기, 장신구 제작으로 이어져 가야 사회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강화했다.
가야의 철기 기술은 정교한 가공 능력과 고품질 철 생산으로 특징지어진다. 장인들은 철광석을 고온 용광로에서 정제한 뒤, 단조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철제 제품을 제작했다. 특히 쟁기, 괭이, 낫 같은 농기구는 농업 생산성을 높였고, 검, 창, 화살촉 등의 무기는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와 함께 장신구와 의례용품은 가야의 예술적 감각과 기술적 세련됨을 드러냈다. 고분에서 발굴된 일부 유물은 가야의 철기 기술이 청동기 시대의 금속 가공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더욱 복잡하고 정밀한 수준으로 발전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기술적 성취는 가야가 백제, 신라, 낙랑, 일본 등 주변 지역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가야의 철기 기술은 특히 일본 열도로의 전파를 통해 동아시아 문명 교류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다. 해상 무역로를 통한 기술 교류는 가야 장인들이 일본에 직접 건너가 철기 제작 기술을 전수하거나, 교역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기술이 유입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북부 규슈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초기 철기 문화는 가야의 제철로 구조와 철제 제품 양식을 강하게 반영한다. 나가사키와 후쿠오카 이토시마 지역에서 발견된 노천 제련로(반지하식 제철로)는 가야식 제철로와 유사한 시설 형태를 보인다. 두 지역 간의 계획적이고 구조적인 기술 교류를 보여준다. 5~6세기 일본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식 철기 유물(예: 쿠마모토 후나야마 고분 출토 철제 창, 후쿠오카 요시노가리 유적의 제철 잔재 등)은 양 문명 간의 긴밀한 접촉을 입증하며, 이는 단순한 기술 이전을 넘어 문화적, 사회적 변화를 동반했다.
일본으로 전파된 가야의 철기 기술은 농업과 군사 분야에서 혁신을 가져왔다. 철제 농기구의 도입은 일본 농경 사회의 생산력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이는 식량 생산 증가와 인구 성장으로 이어졌다. 군사적으로는 가야의 주조 기술로 제작된 철제 무기가 일본의 무기 체계를 강화하며 군사력과 정치권력 구조의 변화를 촉진했다. 또한 가야의 철기 기술은 일본 사회의 계층적 생활양식과 문화적 가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야 기술자들은 일본 내에서 기술 엘리트로 기능하며, 철기 생산을 통해 귀족 계층의 권위를 뒷받침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제철 기술은 가야의 기술을 수용하고 재구성하며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나, 그 뿌리에는 가야의 영향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가야의 철기 문화는 단순한 기술적 성취를 넘어 사회 전반의 발전을 이끈 동력이었다. 경제적 번영, 군사적 우위, 문화적 교류의 기반을 제공하며 가야를 한반도 남부의 강력한 세력으로 만들었고, 일본으로의 기술 전파는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가야의 독창성과 영향력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가 되었다.
가야의 고분 문화와 일본으로의 전파
고대 가야의 고분 문화는 한반도 남동부 지역의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특성을 생생히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산으로, 가야 문명의 정체성과 복잡한 계층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자료이다. 가야 고분은 주로 김해, 창원, 고령, 함안 등 낙동강 유역의 구릉지나 평지에 조성되었으며,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와 석관묘(돌널무덤) 형태가 주를 이룬다. 이 고분들은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직경 10미터 미만의 소형부터 40미터 이상의 대형까지 다양하며, 대형 고분은 지배층의 권력과 부를 상징했다. 고분의 위치는 지형적 우월성, 수로 접근성, 상징적 조망성을 고려해 선정되었으며, 이는 가야인들의 자연과의 조화 및 실용적 공간 활용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가야 고분 문화의 대표적 사례로, 세심한 설계와 정교한 축조 기술을 보여준다.
가야 고분의 내부 구조는 고도의 토목 기술과 예술적 감각을 드러낸다. 석곽묘는 돌로 쌓은 매장 공간에 목재나 점토로 보강된 구조를 갖추었고, 석관묘는 거대한 돌판으로 만든 석제 관을 사용했다. 고분 내부에는 청동거울, 철제 무기, 농기구, 금·은 장신구, 옥구슬, 토기 등 다양한 부장품이 안치되었으며, 이들의 종류, 품질, 배치는 피장자의 신분과 위상을 명확히 나타낸다. 예컨대,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정교한 철제 무기는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며, 다호리 고분의 세밀한 토기는 가야의 공예 기술과 심미적 수준을 보여준다. 이러한 부장품은 가야의 경제적 번영, 선진적인 금속 가공 기술, 활발한 교역 활동을 증명하며, 일본, 낙랑, 백제 등과의 문화 교류를 반영한다. 고분 축조는 대규모 인력과 자원을 동원한 복잡한 과정으로, 이는 가야 사회의 조직력, 기술적 숙련도, 공동체 결속을 드러낸다.
고분은 단순한 매장 공간을 넘어 종교적 · 우주론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매장 의례와 부장품 배치는 사후 세계에 대한 가야인들의 신념, 즉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다음 세계로 안내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했다. 예를 들어, 고분에 안치된 청동거울은 태양신 숭배와 관련된 상징성을 가지며, 철제 무기는 사후 세계에서의 신변 보호를 상징했다. 이러한 의례는 공동체의 단합을 강화하고 지배층의 권위를 과시하는 사회적 행위로, 가야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정체성 유지에 기여했다. 고분의 배치와 구조는 또한 천문학적 지식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일부 고분은 특정 방향이나 별자리와 연계해 정렬된 것으로 추정한다.
가야의 고분 문화는 동아시아 문명 교류, 특히 일본 열도의 고분 시대(3세기~7세기 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야 고분은 타원형 또는 장방형 봉분, 정밀한 석곽·석관 배치, 배수로와 통기 구조로 체계적인 설계를 자랑하며, 이러한 축조 기술은 일본 규슈와 서부 혼슈 지역의 고분에 직접 전파되었다. 예를 들어, 오카야마 쓰쿠라야마 고분(造山古墳)과 후쿠오카의 대형 석실 고분은 평면 구조, 석재 조합, 축조 방식에서 가야 고분의 영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고고학적 증거는 가야 장인들이 일본으로 이주해 기술을 전수했음을 시사하며,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닌 계획적인 문화 교류의 결과였다. 일본 고분에서 발견된 가야식 철제 무기, 금동 장신구, 토기는 두 지역 간의 물질적, 기술적 교류를 입증하며, 사회 제도와 의례 문화의 전파를 동반했다.
가야와 일본 고분은 여러 측면에서 공통점을 가지나, 규모와 장식에서 차이도 존재한다. 가야 고분은 10~30미터 내외의 실용적 구조로, 기하학적 문양과 소박한 토기 장식이 특징이다. 반면,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100미터 이상의 거대 봉분에 해자, 하니와(토기 인형), 석재 조각으로 장식되며, 중앙집권적 권력과 왕권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예컨대, 오사카의 다이센 고분(大仙陵古墳)은 일본 최대 규모의 전방후원분으로, 정치적 선전과 권위 과시를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입지 선정에서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가야는 주변 산이나 하천 등과의 풍수적 조화를 중시해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위치를 선호했으나, 일본은 정치 중심지나 왕권의 영향력 아래에 고분을 배치하고, 축선을 따라 여러 고분을 정렬해 상징적 공간을 구성했다.
부장품에서도 유사성과 차별성이 공존한다. 가야의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일본 나라현 후지와라쿄(藤原京)인근 고분의 금구는 장식 기법과 형태에서 유사성을 보이는데, 이는공통된 장인 기술이나 기술자의 이동을 시사한다. 그러나 일본 고분은 하니와와 같은 독특한 장식 요소와 대규모 토우를 추가해 신화적 · 의례적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러한 차이는 일본의 중앙집권화 과정과 가야의 연맹체 구조라는 정치적 배경의 차이를 반영한다.
가야의 고분 문화는 일본의 사회적 위계질서와 정치 체계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은 축조 기술뿐 아니라 불교, 금속 공예, 무기 제작 기술을 전파하며 야마토 정권의 중앙집권화를 뒷받침했다. 4세기~6세기 규슈와 오카야마 지역 고분에서 확인되는 가야식 요소는 두 문명 간의 정치적 연계, 종교적 의례, 기술 교류를 보여준다. 특히 가야 장인들의 이주는 일본 고분 축조의 기술적 기반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귀족 계층의 생활양식과 권력 상징 체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규슈 지역 고분의 가야식 석실과 부장품은 가야계 이주민이 일본 사회에서 기술 엘리트로 기능했음을 나타낸다.
가야 고분 문화의 전파는 단순한 기술 이전을 넘어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동반했다. 일본 고분 시대의 전방후원분은 가야의 축조 기술과 권력 상징 방식을 수용해 지역 통치자들의 위엄을 강화했으며, 이는 일본 초기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야의 고분 문화는 동아시아 문명 교류의 복합성을 이해하는 핵심 단서로, 가야가 일본 고대사의 기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을 보여준다. 고분을 통해 드러나는 가야와 일본의 연결고리는 정치적 상호작용, 기술 전파, 의례와 세계관의 공유를 포괄하며, 고대 한일 관계의 깊이와 다층성을 증명한다. 가야 고분 문화는 한반도 남부의 지역 문명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역할을 한 가야의 위상을 재조명하는 중요한 유산이다.
가야의 제례 문화와 일본으로의 전파
가야 사회에서 제례는 종교적 의식을 넘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역할을 수행하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고 왕권의 신성성을 강화하는 핵심 장치였다. 제사장과 왕족은 제례를 통해 신성한 권위를 부여받아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했으며, 이는 가야 사회의 위계 구조와 통합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특히 농경과 깊이 연관된 제례는 풍작과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중요한 의식으로, 생존과 직결된 행위였다. 봄의 파종기와 가을의 수확기에 맞춰 진행된 대규모 제례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공동체 구성원들의 집단적 참여를 유도했다. 이러한 의식은 단순히 종교적 행위를 넘어 사회적 유대감을 강화하고, 공동체의 단결을 도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례에 사용된 도구들은 가야의 뛰어난 기술력과 문화적 세련미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청동기와 철기로 제작된 정교한 제례용 그릇, 칼, 장신구 등은 의식적 기능뿐 아니라 지배 계층의 사회적 위신과 권력을 상징하는 문화적 자산으로도 기능했다. 이러한 도구들은 가야의 금속 가공 기술의 높은 수준을 드러내며, 고고학적 유물로서 그들의 문화적 성취를 입증한다.
조상 숭배는 가야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로, 씨족과 가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세대 간 전통을 전승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상에 대한 제례는 특히 왕족과 귀족 집단에서 정치적 정통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가문의 역사와 연속성을 보장하며 사회적 안정성을 뒷받침했다. 제례는 또한 외교적 기능도 수행했다. 주변 국가들과의 제례 교류는 평화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통로였으며, 특히 가야와 일본 간의 문화 교류에서 제례 관습은 문화 전파의 하나로 작용했다. 이는 상호 존중과 문화적 융합의 기반을 마련하며 후대에 이르는 정치적, 문화적 교류의 토대를 형성했다. 가야의 제례 문화는 일본 열도, 특히 규슈 지역의 고분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자연과 조상을 동시에 숭배하는 가야의 독특한 의식은 일본의 초기 신도 문화 형성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일본 유적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철기 도구, 그리고 제단의 구조는 가야 제례 방식의 직접적인 흔적을 보여준다. 제물을 바치는 방식, 의식의 순서, 그리고 사용된 도구들에서 가야 문화의 영향 및 그 유사성이 발견되며, 이는 가야 제례가 일본의 종교적 관습에 뿌리내렸음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가야 제례는 단순히 종교적 의식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일본 초기 사회에 전수했다. 농경과 계절 변화에 맞춘 제례 의식은 일본 사회의 구조와 가치관에 스며들어, 공동체적 정체성과 화합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가야와 일본의 문화 교류는 단방향이 아니었다. 양측은 제례에 사용된 음악, 춤, 의복, 그리고 의식의 세부 요소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점진적으로 융합된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두 문명 간의 깊은 문화적 연결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가야 제례의 자연과 조상 숭배는 일본의 토착 신앙 체계와 융합하며 독특한 종교적 세계관을 형성했다. 특히 규슈 지역의 고분 유적에서 발견된 가야식 제례 도구, 예를 들어 청동제 칼, 토기, 정교한 장신구 등은 두 지역 간의 긴밀한 문화적 연결을 입증한다. 일본의 초기 제례 의식은 가야의 조상 제사, 자연신 숭배, 그리고 풍요와 번영을 기원하는 의식을 상당 부분 차용했으며, 이러한 요소들은 일본 사회의 종교적,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례는 공동체의 화합과 계층 간 연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일본 사회의 공동체적 가치관과 사회적 질서 형성에 기여했다. 가야 제례 문화는 단순한 종교적 전파를 넘어 일본 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는 일상적인 문화 교류를 넘어 두 문명 간의 깊은 상호작용과 융합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연구는 가야 제례 문화가 일본 문화에 미친 영향의 깊이와 광범위함을 지속적으로 밝혀내고 있으며, 이는 가야의 제례가 단순한 지역적 관습을 넘어 동아시아 문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입증한다.
가야의 토기와 일본으로의 전파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은 고대 동아시아 도공 문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뛰어난 문화유산으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드러난 토기는 가야 문명의 고도로 발달한 기술력과 예술성을 입증한다. 가야 도공들은 점토를 정교하게 다루는 고도의 기술을 보유했으며, 점토를 고르게 다져 기포 없는 매끄러운 표면을 만들고 800~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안정적으로 구워내는 전문적 요업 기술을 통해 실용적 용기뿐 아니라 예술적 가치를 지닌 토기를 제작했다. 이들은 점토의 입자와 점성을 정확히 이해해 불순물을 제거하고, 손으로 빚거나 회전판을 활용해 균형 잡힌 형태를 만들어냈다. 건조 후 고온 소성 과정을 거쳐 완성된 토기는 내구성과 세련된 외관을 자랑했다.
가야 토기의 형태는 곡선미와 균형감이 두드러졌으며, 기하학적 문양, 자연을 모방한 섬세한 장식, 특히 나선형 소용돌이 문양은 가야의 독특한 미학을 반영했다. 붉은색과 회청색 계열의 색조는 도공들의 뛰어난 색상 조절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일부 토기는 표면에 장식을 추가해 예술성을 극대화했다. 가야 토기는 용도에 따라 일상용 취사 및 저장 용기, 제사와 장례를 위한 의례용 토기, 무덤에 부장되는 장송용 토기로 구분되었다. 각 토기는 용도에 맞는 크기, 형태, 문양을 지니며, 당시 가야 사회의 복잡한 문화와 사회적 계층을 반영했다.
예를 들어, 의례용 토기는 정교한 문양과 장식으로 신성함을 강조했으며, 장송용 토기는 무덤의 주인공의 지위를 상징했다. 제작 과정은 체계적이고 전문화되어, 점토 채취부터 소성까지 모든 단계가 세심하게 관리되었다. 이러한 기술적 우수성은 가야 토기의 균일한 두께, 높은 내구성, 세련된 디자인에서 드러나며, 이는 당시 다른 지역의 토기와 비교해도 탁월한 수준이었다.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은 후대 한반도와 일본의 도자기 문화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경질토기 제작 기술은 동아시아 도공 문화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가야의 토기 문화는 일본 열도, 특히 규슈 지역에 전파되며 현지 토기 제작 기술에 혁신을 가져왔다. 고고학적 유적에서 발견된 가야식 토기는 단순한 물류 교류를 넘어 기술과 문화의 전파를 입증한다. 가야 도공들은 점토 선택과 소성 과정에서 뛰어난 기술을 보유했으며, 고온에서 구워내는 경질토기 제작 기술은 일본 도공들에게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다.
특히 4~6세기 사이,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은 일본의 토기 문화에 깊이 뿌리내렸으며, 이는 규슈 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식 토기(스에키 도기와 유사한 경질 회청색 토기)를 통해 확인된다. 가야 토기의 문양, 형태, 제작 기법은 일본 문화에 스며들어 예술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담은 용기로 발전했다. 가야 토기의 적갈색과 회청색 색상, 기하학적 무늬, 나선형 소용돌이 문양은 일본 초기 토기에서도 나타나며, 이는 문화적 상징의 전파를 보여준다. 규슈 고분에서 발견된 토기는 가야의 곡선 처리, 소성 기술, 표면 처리 방식과 거의 동일한 특징을 보이며, 이는 장인과 기술의 직접적 이동을 시사한다. 가야의 고온 소성법은 일본 토기의 내구성과 품질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균일한 기벽과 세련된 디자인은 일본 도공들에게 새로운 기술적 기준을 제공했다.
토기의 용도에서도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가야와 일본 모두 의식용, 실용용, 부장용 토기를 제작했으며, 특히 의례용 토기의 정교한 장식과 부장용 토기의 상징성은 두 문화의 공통된 가치관을 반영한다. 가야의 토기 문화는 단순한 기술 전달을 넘어 문화적 교류의 중요한 통로로 작용했으며, 토기의 문양과 형태는 가야와 일본의 미학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매개체였다. 고고학적 증거와 문헌 연구는 가야와 일본 간 토기 문화 교류의 광범위함과 깊이를 밝히며, 이는 동아시아 고대 문명 간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가야의 우수한 토기 제작 기술과 독창적 문화 요소는 일본 토기 문화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두 문명 간의 깊은 문화적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가야의 불교와 일본으로의 전파
가야 사회는 4세기 중반 이후 중국 남조를 통해 전파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변혁을 경험했다.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야의 주요 세력은 불교를 단순한 종교가 아닌 통치 이데올로기와 국제 교류의 도구로 활용했다. 특히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과 그녀의 오빠 장유화상이 48년 인도 아유타국(오늘날 아요디아)에서 파사석탑을 가져와 불교를 전파했다는 전승은 가야의 불교 수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4세기 중반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파사석탑은 불교의 상징적 유물로, 가야가 국제적 교류의 일환으로 불교를 조기에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불교는 주로 왕족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수용되었으며, 그들은 불교의 사상과 의례를 통해 왕권의 신성성을 강화하고, 중국 및 한반도와의 외교적, 문화적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불교는 기존의 샤머니즘적 토착 신앙과 혼합되어 독특한 종교 실천 방식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가야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과 개방성을 드러낸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김해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 불상, 범자(梵字) 명문이 새겨진 금속 공예품, 불경 파편 등은 가야의 불교문화가 얼마나 세련되고 복합적이었는지를 증명한다. 파사석탑과 관련된 전승은 이러한 유물의 역사적 맥락을 더욱 풍부하게 하며, 가야가 불교를 단순한 종교적 실천을 넘어 사회적 통합과 정치적 정당성을 위한 도구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가야의 장인과 지식인은 중국과 한반도 불교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재해석하여 불상 제작, 사찰 건축, 불교 의례에서 가야 특유의 미적 감각과 기술력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불상 제작에서는 섬세한 조각 기법과 금속 가공 기술이 돋보였으며, 사찰 건축에서는 목조 구조와 장식이 가야의 건축적 창의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불교문화의 발전은 가야 사회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며, 후대 일본 불교문화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야는 바닷길을 통해 일본 열도에 불교문화를 전파하며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핵심적 매개체로 활동했다. 가야의 상인과 승려는 불교 교리뿐 아니라 예술, 건축, 사상, 문자, 과학 등 다양한 지식을 일본에 전달했다. 일본의 초기 사찰 건축 양식은 가야의 목조 건축 기술과 장식 기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불상 제작에서는 가야의 금속 공예 기술이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불교는 일본 귀족층에 새로운 세계관과 통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고, 민중에게는 정신적 가치를 제시하며 사회 구조와 사상에 변화를 불러왔다. 가야 승려들은 일본에서 문화 전달자로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불경 번역에서 한자 해석 능력을 갖춘 가야 학자들은 불교의 일본 내 내면화를 가능케 했다.
6세기 중반부터 가야는 백제와의 밀접한 교류를 통해 중국 불교문화를 일본에 중계하며 경전, 의례, 복식, 악기, 건축 양식을 전파했다. 김해 대성동 고분 근처에서 발견된 청동 불상과 범자 명문 유물은 가야의 초기 불교문화를 보여주며, 백제를 통해 일본에 영향을 미친 가야의 기술적 기여를 시사한다. 일본 아스카 지역의 호류지 사찰은 주로 백제 양식을 반영하지만, 가야의 금속 공예와 조각 기술이 불상과 장식품 제작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가야의 불교문화는 4세기 이후 대승불교를 중심으로 발전하며, 일본의 종교 실천과 의례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불교는 동아시아 국가 간 외교적 소통의 통로로 기능했으며, 가야는 백제와 왜를 연결하는 문화 네트워크의 중요한 고리였다. 고고학적 자료(예: 고령 지산동 고분의 연꽃 무늬)와 일본서기(720년)에 기록된 백제의 불교 전파(538년 또는 552년)에서 가야계 인물의 중개 역할이 암시되며, 이는 가야가 왜에 불교와 함께 금속 공예, 도기 기술을 전파했음을 뒷받침한다. 가야 불교는 일본 고대 불교의 정신적 · 문화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는 동아시아 문명의 상호 연결성과 역동성을 증명하는 강력한 사례다.
가야의 장인, 왜나라(일본)를 변모시키다
고대 가야의 장인과 기술자들은 뛰어난 기술력과 창의력으로 동아시아 문명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철기 생산, 도자기 제작, 목공, 금속 세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은 가야 문명의 핵심 동력으로, 단순한 노동자가 아닌 혁신과 예술성을 겸비한 전문가였다.
제철 기술은 동아시아 최고 수준으로, 고도로 발달한 제련 기술을 통해 정교한 철제 무기, 농기구, 장신구를 제작했다. 이는 가야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며, 주변 국가와의 교역에서 경제적 자원으로 기능했다.
도공들은 점토를 섬세하게 다루어 기하학적 문양과 자연을 모방한 장식이 돋보이는 토기를 제작했으며, 붉은색과 회청색 계열의 세련된 토기는 예술성과 실용성을 결합해 가야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건축 기술자들은 고분, 성벽, 주거지를 설계하고 건설하며 가야의 도시 기반을 다졌고, 정교한 목조와 석조 기술로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뒷받침했다. 금속 세공 기술자들은 주조와 세공 기술로 장신구, 의례 용품, 무기를 만들어 지배층의 위신을 상징했다.
이들 장인은 사회적 존경을 받으며 기술을 세습했고, 뛰어난 장인 가문은 가문의 명예와 연결되어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했다. 가야의 장인들은 단순한 생산자가 아니라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혁신가로, 그들의 기술은 가야 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성취를 이끌며 문명의 독창성과 선진성을 증명했다.
가야 장인들은 일본 열도로 이주하며 왜국 정권에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전파해 일본 사회를 변모시켰다. 이주는 주로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가야의 기술자들은 일본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기도 했다.
철기 기술자들은 정교한 제련과 단조 기술로 무기와 농기구를 제작해 일본의 군사력과 농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특히 철제 농기구는 농업 효율성을 높여 식량 생산을 증대시켰고, 이는 일본 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했다.
도공들은 새로운 성형 기법, 고온 소성법, 섬세한 장식 기술을 도입해 규슈 지역의 토기 품질과 예술성을 끌어올렸다. 가야식 토기의 곡선미와 나선형 문양은 일본 고유의 도자기 문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규슈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계 토기는 이러한 기술 전파의 증거다.
건축 기술자들은 목공과 석조 기술로 대형 목조 건축물, 사찰, 고분을 축조하며 일본 건축 양식의 기초를 닦았다. 이들의 기술은 일본의 도시와 종교 시설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고분 축조 기술은 야마토 정권의 권위를 상징하는 데 활용되었다.
금속 세공 기술자들은 정교한 장신구, 의례 용품, 무기를 제작해 일본 귀족 사회의 미적 감각과 문화적 세련미를 고양시켰다. 가야 장인들은 기술뿐 아니라 생활 방식, 예술 감각, 사회적 관습을 전달하며 일본 고대문화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들은 일본의 기술과 문화를 학습하며 쌍방향적 교류를 이끌었고, 이는 단순한 기술 이전을 넘어 심층적인 문화 융합으로 이어졌다.
고고학적 유물, 특히 규슈와 혼슈에서 발견된 가야계 철기, 토기, 금속 공예품은 이들의 활발한 활동과 영향력을 입증하며, 일본 유적지의 가야식 문양과 제작 기법은 장인들의 직접적 기여를 보여준다. 가야의 장인과 기술자는 일본 사회의 기술적, 문화적, 사회적 성장을 촉진하며 동아시아 문명 간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증명하는 연결고리였다. 이들의 유산은 한일 문화 교류의 초석으로, 가야 문명의 선진성과 독창성을 동아시아 전역에 알렸다.
왕족과 귀족의 일본 방문: 정치적, 문화적 영향
고대 가야의 귀족과 왕족은 일본 열도로의 이동을 통해 한반도와 일본 간의 정치적, 문화적 교류를 심화하며 동아시아 문명사에 중대한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들의 이동은 단순한 개인적 여정이 아니라 두 문명 간의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상호작용을 상징했다. 5세기와 6세기, 가야 귀족들은 외교적 동맹과 문화 교류를 위해 일본을 방문하며 야마토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특히 왕족 간 통혼은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는 핵심 전략으로, 가야 왕족의 혈통이 일본 왕실에 스며들며 일본의 정치 체제와 문화 형성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혼인은 양국 간 전략적 동맹을 상징하며, 가야의 정치적 노하우와 사회 조직 체계가 일본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고학적 유물은 가야 귀족들이 규슈와 혼슈 지역에 정착해 사회 엘리트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철기 제작, 금속 가공, 토기 제작, 선진 농업 기술을 전파하며 일본 사회의 기술적, 경제적 발전을 촉진했다. 철제 농기구와 무기는 농업 생산성과 군사력을 향상시켰고, 가야식 토기의 문양과 제작 기법은 일본 도자기 문화의 예술성을 높였다. 불교와 제례 문화, 사회 조직 방식도 함께 전달되어 일본의 종교적, 문화적 지형을 확장시켰다. 불교는 새로운 세계관과 사회 위계를 제공하며 일본 귀족층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강화했다.
가야 왕족과 귀족의 일본 방문은 외교 사절을 넘어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 협력을 강화하는 핵심 메커니즘이었다. 당시 동아시아는 백제, 신라, 고구려, 중국, 일본 간의 유동적인 국제 정세 속에서 복잡한 외교 관계를 형성했다. 가야 귀족들은 군사적 지원, 기술 교류, 외교적 조율을 통해 양국의 상호 이익을 도모하며 야마토 정권의 국제적 입지를 강화했다.
고분 문화와 장송 의례에서도 가야의 영향은 뚜렷하다. 가야의 토목 기술과 장묘 문화는 일본 고분의 구조, 매장 방식, 부장품 제작에 반영되었으며, 규슈 지역 고분에서 발견된 가야계 토기와 금속 공예품은 이러한 영향을 입증한다. 정치적으로 가야 귀족들은 야마토 정권의 국가 운영과 대외 전략 수립에 자문역이나 정책 결정자로 활동하며 일본의 중앙집권적 통치 체계 발전에 기여했다.
일부 가야 출신 인물은 일본 정치 체계 내에서 높은 지위를 얻어 외교와 내정을 조율했고, 이는 일본이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입지를 넓히는 데 실질적인 기반이 되었다. 문화적으로 그들은 철기와 금속 공예 기술을 통해 일본의 군사력과 경제 구조를 혁신했으며, 불교는 종교적 실천뿐 아니라 사회적 계층과 정치적 위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가야의 제례 문화는 일본의 토착 신앙과 융합되어 새로운 의례 체계를 낳았고, 이는 일본 사회의 문화적 복잡성을 더했다.
고고학적 자료, 특히 규슈와 혼슈 유적에서 출토된 가야계 유물은 이들의 활발한 활동을 보여준다. 가야식 철기, 토기, 장신구의 제작 기법은 일본 장인들에게 전수되어 현지 기술 수준을 끌어올렸다. 가야의 왕족과 귀족은 단순한 이주민이 아닌, 새로운 문명 질서를 정착시킨 문화 촉진자였다. 그들은 한일 양국 간 최초이자 핵심적인 교류의 연결고리로서, 기술, 문화, 정치, 사회 전반에 걸친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가능케 했다. 이는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상호 연결성과 역동성을 증명하는 역사적 다리로서, 가야 문명의 선진성과 개방성을 동아시아 전역에 알렸다.
옛적, 동쪽 바다 너머 한반도의 남녘 끝자락에 가야라 불리는 강대한 연맹이 있었다. 금관가야의 중심지 김해는 철의 불꽃과 바다의 숨결로 번영을 누렸다. 그곳 백성들은 태양을 신성한 존재로 섬기며, 매일 아침 동쪽 지평선에서 솟아오르는 빛을 향해 기도했다. 그들에게 태양신은 생명의 근원이었고, 권력과 번영의 상징이었다. 가야의 강줄기는 이 신앙을 품고 멀리 일본열도까지 뻗어 나갔다. 파도 위로 실린 배들은 철과 토기, 그리고 태양신에 대한 믿음을 싣고 규슈의 남쪽 해안으로 향했다.
대한해협을 건너는 가야의 배들은 그저 흔하디흔한 상선이 아니었다. 그들은 문명을 전파하는 전사이자, 고향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시인이었다. 그들의 항해는 평범한 이동이 아니라, 새로운 땅에 가야의 불씨를 심고, 태양신의 빛을 퍼뜨리는 여정이었다. 이 도래 개척자들은 규슈 남동부에 자리한 히무카(日向), 그 중 다카치호(高千穂)라는 신성한 언덕을 목적지로 삼았다.
일본열도 남단, 오늘날의 미야자키현(宮崎県)에 해당하는 고토 히무카는 고대 일본 신화에서 ‘천손강림(天孫降臨)’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의 이름 ‘日向(히무카)’를 단지 신화의 무대로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태양(日) 숭배의 땅을 향한(向) 그리움의 다른 이름, 히무카. 태양 숭배의 땅은 그들의 고향 가야다. 히무카라는 지명 속에는 가야의 후예들이 품었던 정서와 세계관, 그리고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겹쳐 있다. 히무카(日向)는 『 일본서기』에서 신들의 자손이 내려와 나라를 세운 성역으로 칭송되지만, 그것은 곧 '외부에서 온 존재'가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서사의 중심 무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외부에서 온 존재'라는 개념은, 고대에 일본 열도로 이주한 다수의 한반도계 도래 개척자들, 특히 가야계 도래인들의 정체성과 겹친다. 태양을 숭배하며 바다를 건너온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고 새로운 땅에서 ‘해를 향한’ 신념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의 회한을 지명으로 새겼다.
다카치호는 하늘이 땅과 맞닿은 곳, 가야의 고향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이는 규슈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고향의 태양신을 기리며 새로운 서사를 썼다. 바다를 건너온 이들은 고향의 황금빛 들판을 떠올리며, 태양신의 축복 아래 새로운 터전을 일구었다.
히무카(日向)의 위치 @구글 지도
다카치호(高千穂), 신의 강림지
다카치호의 가파른 언덕은 태양신의 숨결이 깃든 성지였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의 손자 니니기노미코토(邇邇芸命)가 하늘에서 그 땅으로 내려왔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신화의 뿌리에는 가야 도래 개척자들의 신앙이 깊이 얽혀 있다. 그들은 다카치호에 정착하며 고향 가야의 태양 숭배를 이곳에 뿌리내렸다. 그들의 기도는 바다 너머 북쪽, 김해의 신성한 언덕 구지봉을 향했다.
매일 아침, 그들은 다카치호의 언덕 위에서 태양을 향하여 기도했다. 그리고 고향 김해의 신어산(神漁山)과 두 마리 물고기를 상징하는 ‘쌍어 문양(雙魚文)을 떠올렸다. 쌍어 문양은 허황옥이 김수로왕에게 시집오면서 인도로부터 가져온 신앙의 상징이다. 그들의 마음은 고향과 새로운 땅 사이를 오가며, 두 세계를 잇는 영혼의 다리를 놓았다. 이들은 다카치호와 그 일대를 히무카(日向)라 불렀다. 히(日)는 태양신의 축복을, 무카(向)는 고향 가야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을 담았다. 즉, 태양신을 숭배하는 고향, 가야를 그리는 마음이 히무카인 것이다.
'태양(日)'은 단지 천체로서의 해가 아니다. 가야의 무속 · 제례 문화, 특히 수로왕계의 태양 숭배 전통은 일본 초기 신사 신앙의 구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이 붉은 해를 상징하는 붉은 천에 이끌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전승이 있고, 일본 열도에 도착한 한반도계 집단이 태양 숭배와 제사 규범을 동시에 전수했다는 기록도 다수 존재한다. 가야의 여러 고분군에서 출토된 청동 거울의 존재 역시 태양의 빛(숭배)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청동 거울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 곳곳의 고분에서도 상당량이 출토되었다.
그렇다. 히무카는 그저 평범한 지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야의 태양신을 숭배하는 성소를 바라보는 시선, 바다를 건넌 이주민의 가슴에 깃든 고향의 메아리였다. 히무카는 그들의 정체성이자, 고향과 새로운 땅을 잇는 영혼의 다리였다. 이 이름은 가야의 불씨가 타오르는 규슈의 언덕에서, 태양신의 빛 아래 영원히 빛났다.
다카치호에는 아마노이와토(天岩戸, 천암굴) 신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일본 건국 신화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동굴에 숨어 버리며 세상에서 태양이 사라졌고, 신들이 춤과 노래로 그녀를 불러냈다. 이 동굴 신화는 가야 도래 개척자들의 태양 숭배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들은 아마노이와토에서 태양신의 부활을 기리며, 가야의 빛을 다카치호에 새겼다. 신사의 바위 동굴은 고향의 기억과 새로운 땅의 희망을 속삭이는 성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태양신의 부활을 축하하며, 고향 가야를 향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태양의 융합, 신화의 탄생
가야의 도래 개척자들은 다카치호에서 토착민들과 손을 맞잡았다. 그들의 철은 농기구와 무기로, 토기는 제사 그릇과 일상 도구로 변모했다. 가야의 태양 숭배는 규슈의 토착 신앙과 융합되며 새로운 서사를 낳았다. 태양신은 아마테라스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고, 히무카는 일본 왕가의 기원지로 우뚝 섰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이 위대한 융합을 기록하며, 히무카를 일본의 신성한 발상지로 찬양했다.
히무카의 백성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고향을 떠올렸다. 그들의 노래는 김해의 고분, 가야의 황금빛 들녘을 그리워하는 선율로 가득했다. 그들은 새로운 땅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들의 철은 농지를 일구었고, 토기는 신앙과 생활을 담았다. 히무카는 가야의 영혼과 다카치호의 희망이 만나는 성지였다. 이곳에서 태양신은 더 큰 빛으로 타올랐다.
가야 도래 개척자들은 고향을 떠난 한낱 이주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문명을 심는 개척자였다. 그들의 기술과 신앙은 규슈의 토착 문화와 어우러져 독특한 융합 문화를 창조했다. 예를 들어, 가야의 경질토기는 미야자키의 고고학 유적에서 발견되며, 그들의 철기 기술은 농업과 전쟁의 도구로 지역 사회를 변화시켰다. 이 융합은 단순한 물질적 교류를 넘어, 신화와 정체성의 재구성을 낳았다. 히무카는 가야의 태양신과 규슈의 토착 신앙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화의 용광로였다.
히무카의 메아리, 『만엽집』 의 노래
히무카의 서사시는 일본 고대 시집 『만엽집萬葉集』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에 걸쳐 편찬된 이 시집은 일본 고대문학의 거대한 집합체로, 고대 일본의 시와 노래를 모은 중요한 문헌이다.
약 4,500수의 와카(和歌)를 담고 있으며, 히무카의 신성한 풍경과 신화적 상징성을 노래한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日向なる 高千穂の峯を 仰ぎ見て 天津神の 御代を思ふ”
“히무카의 다카치호 봉우리를 우러러보며, 천상의 신들의 치세를 떠올린다.”
이 시에서 언급된 '천상의 신의 치세'는 일본의 신화적인 전통을 넘어서,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들의 기억과 정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다. '천상의 신들의 치세'를 회상하며, 고대 일본 신화의 세계를 떠올리지만,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떠나온고향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미개척의 새로운 땅을 향해 걸어온 이들이 품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향수를 엿볼 수 있다.
이때의 '천상의 신'은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가야인들이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던 자연 신앙 속 신(神)의 일종이자, 가야 사회의 신적 세계관을 반영한 정신적 흔적이다. 일본의 신화 속 '천손강림' 이야기는 사실, 외부에서 온 존재들이 새로운 땅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의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 이는 고대 가야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이들이 겪었을 정신적 여정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바다를 잇는 영원의 다리
히무카의 서사시는 고고학의 흔적과 신화의 메아리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미야자키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가야의 경질토기는 그들의 존재를 증언한다. 『일본서기』는 가야와 규슈의 끈끈한 인연을 기록하며, 바다를 통한 고대 동아시아의 해상 교류를 보여준다. 이 기록들은 히무카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가야와 일본을 잇는 문화적 다리였음을 말해준다.
히무카의 의미는 한자 그대로 “태양을 향한 곳”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태양을 숭배하는 곳, 가야를 향한 그리움”이다. 히무카는 “지리적 방향”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니라 “심적 방향”을 드러내는 말이다. 히무카는 가야의 도래 개척자들이 바다를 건너며 품은 꿈, 고향을 향한 간절한 마음,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 피운 희망의 상징이다. 다카치호의 언덕에서 태양은 여전히 떠오른다. 아마노이와토의 바위 동굴은 태양신의 부활을 속삭이고, 신사는 가야와 일본의 융합을 기념한다. 히무카는 가야의 태양신을 다카치호의 아마테라스로 잇는 영원의 다리다.
히무카라는 지명은 실제 일본 각지에 분포한다. 규슈 남부 미야자키 지역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같은 이름의 유사 지명(日向村, 日向山, 日向谷 등)이 혼슈, 시코쿠, 큐슈 전역에 존재한다. 고대 도래 개척자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와 정착할 때, 그들이 가져온 정신적 표식이 '히무카'라는 이름에 담겼다.
히무카는 그런 전통의 연장선이자, 태양을 향한 땅에 자신의 정체성을 새기려는 도래 개척자들의 언어적 기억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히무카는 새로 정착한 땅이면서도, 잃어버린 뿌리를 재생산하는 정신적 거점이었다. 이 서사시는 고대 동아시아의 해상 교류, 이주민의 용기, 그리고 태양 아래 하나 된 문명의 찬가로 빛난다. 가야의 도래 개척자들은 그저 새로운 땅에 정착한 이주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향의 불씨를 품고, 태양신의 빛을 따라 문명을 창조한 개척자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바다를 건너, 세대를 이어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쉰다.
히무카의 빛, 우리의 유산
히무카는 한낱 과거의 전설에만 그치지 않는다. 가야에서 건너온 이들이 자신의 영성과 정체성을 투영하여 붙인 이름, 그 언어의 기억이 일본 곳곳에 ‘히무카日向’라는 글씨로 새겨졌다. 그것은 가야와 일본, 바다와 육지, 신앙과 정체성을 이어주는 살아 있는 유산이다. 오늘날 미야자키의 다카치호를 방문하는 이들은 여전히 태양신의 숨결을 느낀다. 아마노이와토 신사의 고요한 숲길, 고봉 다카치호 협곡의 맑은 물줄기는 고대 도래 개척자들의 발자취를 떠올리게 한다. 이곳에서 태양은 여전히 하늘을 밝히며, 가야와 히무카의 이야기를 속삭인다.
히무카는 가야 도래 개척자들의 고향 사랑, 다카치호의 신성한 언덕, 그리고 태양의 영광을 노래하는 불멸의 찬가다. 그 이름은 단순한 지명을 넘어,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적 융합과 이주민의 용기를 상징한다. 『만엽집』 의 시들은 히무카의 신화적 풍경을 영원히 기록하며, 가야의 태양신과 일본의 아마테라스가 하나 되는 순간을 노래한다. 히무카의 서사시는 우리의 뿌리 깊은 이야기를 하늘 높이 띄우며, 태양신의 빛 아래 영원히 빛난다.
이 이야기는 역사로써의 과거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히무카는 우리에게 정체성과 문화의 융합,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의 희망을 말해준다. 가야의 도래 개척자들이 바다를 건너며 품은 꿈은 오늘날에도 우리 안에 살아 있다. 히무카, 그 이름은 태양신의 축복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어우러진 영원의 노래다. 이 서사시는 고대 동아시아의 해상 교류, 이주민의 용기, 그리고 태양 아래 하나 된 문명의 찬가로, 우리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울려 퍼진다.
히무카(日向)- 고향을 향한 그리움
바다를 건너온 저녁 빛, 가야 땅 김해의 해가 이마에 머물고, 나는 아직 고향의 흙냄새를 기억한다.
한 줌의 흙을 가슴에 품고 규슈의 최고봉 다카치호에 첫발 디딜 때, 바다는 등 뒤에서 끝없이 밀려왔다.
히무카(日向)라 이름 붙인 이곳, 그 이름은 빛이 아닌 그리움이었다.
태양을 본다. 그러나 나는 태양 아래 있던 고향을 생각한다.
언덕 위 바람이 분다. 어머니의 숨결처럼 따뜻하고 형제의 울음처럼 깊다.
우리는 정착한 자, 그러나 마음은 매일 떠도는 자. 돌아갈 수 없는 그 옛집의 기억을 품은 나그네.
낙동강의 잔잔한 물결이 남해의 푸른 파도와 포옹하고, 그 파도가 규슈의 해안에 부드럽게 속삭이던 시절, 고대 동아시아의 바다는 문명과 신화, 사람과 꿈을 잇는 거대한 다리였다.
한반도의 가야 연맹은 철의 날로 강인함을, 토기의 곡선으로 섬세함을 새기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 이야기는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의 고분 속에 고요히 잠들었다.
미야자키현의 사이토바루 고분군(西都原古墳群)은 그 이야기의 살아 있는 심장이다. 이곳의 흙은 가야 장인들의 손길을 기억하고, 고분에서 나온 유물은 바다를 항해한 가야 개척자들의 숨결을 간직한다.
일본 왕실은 『일본서기』의 신화적 서술에 따라 사이토바루가 위치한 이 땅 히무카(日向)를 진무천황(神武天皇)의 출발지로 기념하며, 그의 궁궐 자리였다는 미야자키 신궁(宮崎神宮)을 신성시하고 이곳을 왕실의 상징적 발상지로 삼는다. 신화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자신들의 기원을 이곳에 심었다.
그러나 고고학의 삽과 붓은 신화의 안개를 걷어내고, 가야와의 깊은 연관성을 드러낸다. 사이토바루의 토기는 가야의 뿔잔과 닮았고, 철기는 가야 대장간의 망치 소리를 담고 있다. 이 유사성은 흔한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두 문명이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채 손을 맞잡고, 문화와 기술, 그리고 어쩌면 혈맥까지 공유한 증거다. 가야의 장인들은 규슈의 언덕에서 불을 피웠고, 그 불꽃은 일본 왕실의 초기 서사를 따뜻하게 비추었다.
일본 왕실이 ‘황실의 발상지’라고 부르는 사이토바루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적 · 유물과 가야의 유적 · 유물을 비교하며, 일본 왕실과 가야가 맺은 깊은 갈증의 흔적을 추적한다. 우리는 시간의 강을 거슬러 두 문명이 나눈 대화의 메아리를 찾는다. 이 여정은 단지 과거의 유물을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바다를 건넌 사람들의 열망, 그들이 일본 왕실의 뿌리에 남긴 영감, 그리고 낙동강의 바람이 규슈의 바다와 만나며 울린 노래를 되새기는 일이다. 우리는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가야의 울림이 왕실의 신화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그리고 그 울림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지 탐구한다.
낙동강과 규슈의 파도가 서로를 끌어안는 순간, 우리는 역사의 심연에서 고대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이토바루 고분군과 삼각연신수경의 출토: 권력 중심지였다는 증거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일본 미야자키현(宮崎県) 사이토시(西都市)의 드넓은 평야와 완만한 언덕에 자리 잡은 고대 무덤들이다.
3~6세기에 걸쳐 조성된 고분군으로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31기, 원형분(円墳) 286기, 방분(方墳) 2기 등 총 319기가 현존하고 있는 대규모 고분군이다.
일본 규슈 남부의 대표적 고고학 유적으로, 지역 수장층의 정치적 ·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며, 고대 일본의 사회 구조와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전방후원분은 마치 옛날 열쇠 구멍 모양으로 생겼다. 후원부(원형 부분)에는 시신을 안치하고, 전방부(사다리꼴 부분)에는 제단을 만든 독특한 구조다. 대규모의 고분 조성을 위해 투입된 노동력의 규모 등을 고려할 때, 일본 고분 시대의 계층 사회와 권력 상징성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300여 기의 많은 고분 중에 특히 오사호즈카 고분(男狭穂塚)과 메사호즈카 고분(女狭穂塚)으로 유명하다. 오사호즈카 고분은 일본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 ‘니니기노 미코토’의 무덤으로, 메사호즈카 고분은 역시 일본 신화 속 여성 신 ‘고노하사노 사쿠야히메’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남북 4.2km, 동서 2.6km, 약 17만 5천 평에 걸쳐 펼쳐져 있는 이 고분군은 일본 내에서도 보기 드문 규모와 보존 상태를 자랑하며, 1952년 일본 국가 특별사적지로 지정되었다.
고분군은 농경지와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경관 속에 위치하며, 고분의 배치와 크기는 고대 일본 국가 형성 과정에 있어 이 지역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에서 주목할 유물 중 하나는 바로 삼각연신수경(三角縁神獸鏡)이다. 이 거울은 주로 일본 열도의 전방후원분에서 발견되며, 4세기 초 야마토 정권이 중국 후한 및 위진남북조와 교류하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삼각연신수경은 통치자의 권위, 신성성을 상징하는 정무적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그 출토 자체가 해당 지역이 당시 중앙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이토바루에서 이 거울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이 단지 변방이 아니라, 규슈 야마토 정치체제의 핵심부이자 전략적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 권력의 중심에 가야계 세력이 관여했다면, 일본 황실의 뿌리에도 그 영향이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이토바루 고분군과 가야 유적: 가야와 일본 왕실의 교차점
『일본서기』에서는 진무 천황과 관련된 무덤으로 전해지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는 신화적 내러티브로 간주한다. 하지만 실재했던 인물이라면 이는 가야의 도래 개척자 집단 중 일부일 수 있다.
최근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한반도 남부의 고대 국가 가야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면서, 이곳이 그저 ‘일본 고유의 시원지’가 아닌, 가야계 도래인의 거점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 왕실의 발상지인 곳이,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의 생활 거점이었다면, 그 의미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 철제 무구, 금동 장신구, 청동거울, 옥구슬 등이다. 일본 고분 시대의 물질문화를 생생히 증언하며, 특히 한반도 가야와의 뚜렷한 유사성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가야는 1~6세기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번성한 연맹체 국가로,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 등의 고분은 널무덤(목관묘), 덧널무덤(목곽묘),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순으로 형식이 변했다.
합천 옥전 고분, 김해 대성동 고분, 고령 지산동 고분 등에서 상형토기, 철기, 금동관, 청동거울이 무수하게 출토되었으며, 가야는 철기 생산과 해상 무역의 허브로서 동아시아 교류를 주도했다.
사이토바루 고분과 가야의 유물들은 일본 왕실의 초기 형성에 가야의 깊은 관여를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다.
먼저, 토기는 두 문명의 가장 선명한 연결고리다. 가야의 회청색 경질토기는 뿔잔, 삼족기, 장군 등의 상형토기로 독특한 미학을 뽐내며,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의례용 토기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뿔잔은 곡선적 형태와 섬세한 표면 처리에서 사이토바루 46호분에서 출토된 토기 복합구연호, 111호분에서 출토된 스에키 및 하지키와 상당한 수준의 공통점을 보인다.
토기의 문양—예를 들어 물결무늬와 격자무늬—는 사이토바루 고분에서도 확인되며, 이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 기술 전수의 증거 가능성을 말해준다.
이는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이 해상로를 통해 규슈로 전파되었으며, 일본 왕실의 의례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학계에서는 사이토바루 고분의 토기가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에 의한 현지 제작의 흔적을 보이며, 왕실의 제사나 권력 과시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논의된다.
철기는 가야의 선진 기술이 일본 왕실의 군사적 기반에 기여했음을 증명한다.
합천 옥전고분의 말투구(마면)와 판갑옷(마갑)은 5세기 가야의 철기 문화를 상징하며, 와카야마현(和歌山縣) 오타니 고분(大谷古墳)의 유사한 말갑옷과 비교된다. 가야의 철기 유물은 일본의 유물보다 50~100년 앞서며, 제작 기술의 정교함에서도 우위를 보인다.
사이토바루의 철기가 가야의 대장간 기술을 반영하며, 야마토 정권의 군사적 통합에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이 관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남원 월산리 고분에서 발굴된 화살촉인 철촉 역시 야마토와의 연관성을 드러내며, 가야가 철기 무역의 중심지였음을 입증한다.
장신구와 의례용품은 가야의 미적 감각이 왕실의 상징 체계에 스며들었음을 보여준다. 가야의 금동관과 금제 귀걸이는 김해와 고령에서 다수 출토되었으며, 사이토바루에서도 유사한 금동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가야의 장신구는 세공 기술과 화려한 문양에서 더 정교하며, 일본의 유물은 이를 모방한 흔적이 엿보인다.
가야의 청동거울은 백제-신라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독자적 양식을 유지하였다. 사이토바루 고분의 동경(銅鏡)과 유사한 원형 문양을 공유하지만, 가야 거울의 제작 연대가 더 이르다.
일본 학계에서는 사이토바루 고분의 장신구가 가야계 도래인의 공방에서 제작되었으며,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데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러한 유물들은 가야의 선진 문물이 일본 열도로 전파되며 왕실의 초기 문화 형성에 기여했음을 증언한다.
유적의 구조와 일본 왕실의 지리적 뿌리
유적의 비교는 가야의 묘제가 일본 왕실의 초기 무덤 문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드러낸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전방후원분은 일본 고분 문화의 상징으로, 후원부의 원형 구조와 전방부의 사다리꼴 형태가 수장층의 권위를 강조한다.
가야의 횡혈식 석실묘는 입구와 석실의 정교한 설계를 통해 역시 권력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고령 지산동 고분의 석실은 사이토바루 고분의 후원부와 유사한 평면 구조를 가지며, 적석 방식에서도 공통점이 확인된다.
가야의 묘제는 부장품의 다양성과 석실 장식의 복잡성에서 더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며, 이는 일본 왕실의 초기 무덤 설계에 간접적 영감을 주었을 수 있다.
사이토바루 고분의 전방후원분이 가야의 석실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이며 정치적 상징성을 발전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지리적으로, 가야 유적은 낙동강과 남해안에 밀집해 해상 무역의 전략적 요충지를 형성했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규슈 남동부에 위치하며, 가야와의 해상로로 연결되었다.
국립 가야 문화유산연구소와 국립 김해박물관의 최신 지리정보시스템(GIS) 기반 해상로 분석은 4세기 후반 가야와 규슈 간의 교류가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며, 이는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조성 시기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이 해상 네트워크는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이 규슈를 거쳐 야마토 정권에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하며, 왕실의 ‘발상지’ 신화에 가야의 지리적 흔적이 투영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분포와 규모는 가야의 해상 교류망과 연계된 지역적 중요성을 보여주며, 왕실의 신화적 기원에 가야의 현실적 기여가 겹쳤음을 시사한다.
왕실과 가야의 연관성: 한반도 도래 개척자와 신화의 교차
일본 왕실은 사이토바루 고분군이 자리한 미야자키현을, 진무천황 신화에 기대어 자신들의 발상지로 기념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가야와의 연관성을 더 선명히 드러낸다.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은 5~6세기 일본 야마토 정권의 문화 형성에 깊이 관여했다. 『속일본기』에 기록된 야마토노아야씨(東漢氏)는 가야계 집단으로, 철기 제작과 토기 기술을 전파하며 왕실을 포함한 귀족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사이토바루 고분의 철제 무구는 가야의 대장간 기법을 반영하며, 이는 도래 개척자들의 기술적 기여를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야마토노아야씨가 사이토바루를 거점으로 야마토에 기술과 문화를 전파하며, 왕실의 초기 정치 구조 형성에 기여했을 가능성을 논의한다.
가야와 백제의 동맹도 왕실과의 간접적 연계를 시사한다. 백제의 왕인 박사는 일본 왕실에 한문학과 행정 기술을 전파했으며, 가야와 백제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하면 가야의 문화적 요소가 왕실 형성에 스며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야 귀족층과 야마토 왕실 간의 혼인 가능성을 제기하는 주장도 있지만, 문헌 증거가 부족해 추정에 그친다. 그러나 사이토바루 고분의 유물은 가야의 물질문화가 왕실의 초기 서사에 녹아들었음을 강력히 증언한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이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이 창조한 다양한 문화와 문물의 집약지이자 집단 거주지이며, 일본 왕실의 신화적 기원에 가야의 현실적 기여가 중첩되었다고 직설적으로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예를 들어, 사이토바루 고분의 토기와 철기는 가야계 도래인이 현지에서 직접 제작한 것으로 보이며, 이를 일본 왕실의 권위와 상징에 사용했을 것이라는 점에서다. 왕실은 자신들 고유의 정체성을 고집하며 외래의 문물 수용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가야계 개척자들이 만든 의례 용품으로 제례를 올리고 제사를 지냈다면, 그들 또한 가야계일 가능성이 크다.
왕실의 ‘발상지’ 주장은 신화적 색채가 강하지만, 그 신화의 뿌리에는 가야의 문화적 흔적이 잠재해 있다. 일본 학계는 이러한 연관성을 ‘문화적 융합’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가야가 왕실의 초기 정체성 형성에 다층적 역할을 했을 것이란 점을 배제하지 않는다.
결론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흙은 가야의 장인들이 남긴 따뜻한 손길을 품고 있다. 낙동강의 바람이 규슈의 언덕을 어루만지며, 가야의 대장간에서 피운 불꽃은 일본 왕실의 초기 서사를 환히 밝혔다.
뿔잔에 담긴 가야의 의례는 사이토바루의 고분에서 숨을 되찾았고, 말투구의 단단한 철은 왕실의 권위를 지탱했을지 모른다. 일본 왕실은 미야자키를 발상지라 노래하지만, 그 노래의 깊은 선율에는 가야의 음색이 아로새겨져 있다.
고고학의 삽은 신화의 안개를 걷어내고, 부드러운 솔질은 두 문명이 바다를 건너 맺은 깊은 연관성을 선명히 드러낸다.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발굴과 학문적 대화는 잊혀진 서사의 장을 하나씩 열어젖힐 것이다. 사이토바루의 고분과 가야의 유적은 단순한 돌과 흙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바다를 항해한 사람들의 열망이 새겨진 캔버스이자, 일본 왕실의 신화 속에서 가야의 영혼이 숨 쉬는 생생한 증거다.
가야의 울림은 왕실의 서사에 영원히 얽혀, 역사의 심연에서 조용히, 그러나 힘 있게 노래한다. 우리는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과거가 미래에 전하는 메시지를 포착한다.
낙동강의 물결과 규슈의 파도가 서로를 끌어안는 그 지점에서, 가야와 일본 왕실의 갈증은 시간을 초월해 찬란히 빛난다. 이 빛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하나로 이어주며, 우리의 마음속에 새로운 이야기를 짓는다.
가야의 손길이 사이토바루의 흙에 남긴 흔적은, 왕실의 신화가 품은 깊은 갈증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고대인의 꿈과 그 꿈이 건너온 바다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가야와 일본 왕실이 함께 써 내려간 서사의 다음 페이지를 상상한다.
바람에 새긴 이름 – 가야에서 히무카(日向)로
한때,
바람보다 먼저 이 땅을 지나간 이들이 있었다. 물결보다 빠르게,
별빛보다 깊게.
가야.
강과 산이 서로를 끌어안고,
바다가 하늘을 닮던 시절, 그들은 땅을 일구고 철을 다루었으며, 뜨겁게 피고 지는 생애를 노래했다.
그러나 모든 빛나는 것들이 그러하듯, 가야 또한 서서히 저물어갔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어떤 이들은 무너진 제단 위에 남았고, 어떤 이들은 마지막 불꽃을 품고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저 멀리,
규슈의 남단,
미야자키의 사이토시에 이르렀다.
그들이 잠든 곳. 사이토바루 고분군.
이곳은 마치,
잃어버린 고향을 대지 위에 다시 그린 듯하다.
수십, 수백 개의 봉분과 봉분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끝없이 펼쳐진다.
전방후원분 고분은,
마치 하늘을 향해 비밀스러운 열쇠를 들이미는 듯하다.
고분을 감싸는 초록의 바람,
푸른 하늘,
멀리 흐르는 강줄기.
모든 것은, 말없이 과거를 노래한다.
그들의 손길은 이곳에서도 섬세했다.
흙을 다지고, 돌을 골라 쌓고,
한 줌 부장품에도 이야기를 담았다.
봉분의 높이와 비율, 매장의 순서,
토기와 장신구의 모양까지, 모든 것이 가야의 숨결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와 혼, 눈물과 희망이 엮인 새로운 서사였다.
바다를 건너온 이들은 단지 도래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땅의 숨결이 되어, 시간을 새롭게 빚어냈다.
개척자이자 창조자. 낯선 땅에 고향을 심은 이들.
『일본서기』는 이 땅을 '히무카(日向)'라 불렀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고국, 가야를 바라볼 수 있는 곳, 신화의 장막 아래, 새로이 깃발을 세운 땅.
그러나 신화는 늘 현실의 눈물을 감춘다.
왕권의 욕망과 권력의 설계는,
과거를 왜곡하고 기억을 짓눌렀다.
한때 일본 학계는 이 서사를 무기로 삼았다.
사이토바루 고분군과 한반도 남부를
'지배'와 '식민'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들었다.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이름 아래,
진실은 왜곡되고,
기억은 가려졌다.
그러나
흙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오늘, 고고학은 말한다. 칼이 아닌 손으로, 불꽃이 아닌 씨앗으로.
가야의 개척자들은 바다를 건넜고,
스스로 삶을 일구었다고.
사이토바루의 봉토 아래,
그들의 땀과 숨결은 여전히 뜨겁다.
사라진 제국. 잊힌 왕국.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대지 아래에, 별빛 어린 고분군 사이에,
미세한 토기 조각 하나하나 속에, 여전히 그들의 노래는 흐른다.
우리는 들을 수 있다. 바람을 타고 오는, 그 옛날의 속삭임을. 물결에 실려 오는, 사라진 이들의 발걸음 소리를.
“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8회
낙동강의 축원, 바다를 건너다: 신녀와 묘견공주, 히미코 전설
새벽녘, 낙동강의 은빛 물결이 고령의 언덕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안개가 지산동 고분군을 감싸고, 첫 햇살이 금동관의 찬란한 문양을 비추는 순간, 천 년 전 가락국의 제사 행렬이 되살아난다. 철의 불꽃이 제단에서 타오르고, 청동거울이 신령의 빛을 반사하며 신성과 권력이 하나 되던 그곳, 가야의 심장에서 성스러운 숨결이 시작되었다. 이 숨결은 낙동강의 메아리를 따라 바다를 건너, 규슈의 푸른 해안과 이즈모의 신성한 숲속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멀리 아리아케해(有明海)의 잔잔한 파도 속에서 별빛이 춤춘다. 구마모토의 야쓰시로 신사(八代神社), 묘견궁(妙見宮, 795년)의 신성한 경내에서 북극성의 신, 묘견신(妙見神)이 고요히 빛난다. 이곳으로 한 여인이 바다를 건너온다. 거북의 등에 실려, 구름을 타고, 그녀는 천상의 빛을 품은 묘견(妙見)공주다. 그녀의 이야기는 낙동강의 바람과 규슈의 파도가 만나 엮어낸 신화적 유물, 고대 한일 교류의 장대한 서사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가락국의 신녀(神女)이자 야마타이국(邪馬台国)의 여왕 히미코(卑弥呼)일까? 그녀의 동반자, 왕자 선(仙)은 낙동강의 축원을 규슈의 제단에 심은 이일까? 그리고 거북, 하늘의 뜻을 전하는 신성한 사자는 가락의 구지가와 묘견공주의 배를 하나로 잇는가?
가락국의 샤먼 전통과 야쓰시로 신사의 묘견신앙, 히미코의 신탁과 거북의 항해를 엮으며, 별빛 아래 펼쳐진 영원의 서사를 그려낸다.
낙동강의 축원: 가락국의 샤먼 씨앗
김해의 푸른 평야, 낙동강 하구에서 가락국은 1세기부터 6세기까지 꽃피웠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초대 왕 김수로(재위 42~199년)는 금알(金卵)에서 태어나 하늘의 명을 받아 왕국을 세웠다.
그의 부인 왕비 허황옥,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신령한 여성은 가락국이 해양 교류를 통해 외부 문화를 포용한 강국이었음을 보여준다. 건국 설화의 중심에는 구지가(龜旨歌)가 있다. 거북이 하늘의 뜻을 전하며 왕의 탄생을 예고하는 이 노래는 가락국의 샤먼 전통이 천신과 인간을 연결했음을 암시한다.
수로왕은 아홉 간(干, 촌장)의 지지를 받아 연맹적 통치를 구축했다. 대성동 고분군의 웅장한 무덤과 청동거울, 파형동기는 왕권의 권위가 점차 강화되었음을 증언한다.
파형동기(巴形銅器), 천신과 교감하는 독특한 이 제사 도구는 가락국 샤먼의 상징이었다. 2대 거등왕(199년경)에 이르러 가락국은 철기 생산과 해상 교역을 활성화하며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학계 일각에서는 거등왕이 연맹 체제를 넘어 중앙집권적 왕권을 시도했을 것으로 본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은 가락국이 주변국 및 왜국과 활발히 교류했음을 암시하며, 철의 수출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왕권에 의한 철기의 관리를 통해 외교와 권력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략을 썼을 가능성있다. 당시에 철은 매우 귀중한 자산이었기에, 이의 생산과 분배는 아주 중요하고, 한편으로는 미묘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의 중앙화는 부족 촌장(干, 간)들과의 사이에 갈등을 낳았을 개연성이 크다. 《편년가락국기》 「초선대」편은 거등왕의 아들 왕자 선(仙)이 세상의 혼란함과 세상사의 허망함을 탄식하며 신녀와 함께 구름을 타고 떠났다고 기록한다.
이 “승운이거(乘雲離去)” 설화는 정치적 갈등과 왕위 계승의 상징적 메타포로 해석된다. 일국의 왕자 신분인 이가 단지 인생무상을 이유로 나라를 떠나 타지로 간다는 것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 여러 의문을 남긴다. 혼란스러운 세상에 대한 왕자 선의 탄식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왕자 선을 둘러싼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듯싶다. 어찌되었든, 왕자 선과 신녀의 여정은 가락국의 샤먼 전통을 품고 새로운 터전을 찾는 항해, 곧 규슈의 묘견공주, 즉 히미코 전설로 이어진다.
김해의 민담은 이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초선대 바위, 낙동강 지류가 흐르는 신성한 경계에 서서, 선과 신녀의 천상 여정을 기린다. 한 민담은 선이 안개 낀 언덕에서 빛나는 신녀를 만나 북두칠성이 이끄는 먼 땅의 운명을 들었다고 전한다.
그들은 구름을 타고 일본으로 떠났으며, 신녀는 그곳에서 여왕이 되어 새 왕국을 형성했다. 이 신녀가 묘견공주요, 히미코다. 가락국의 샤먼 씨앗이 규슈의 제단에 뿌려진 순간이다.
야쓰시로 신사: 북극성의 신성한 항구
아리아케 해의 잔잔한 파도 속, 야쓰시로 신사(묘견궁)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신, 묘견신을 모시는 천상의 성소다. 이곳에서 묘견공주의 전설이 살아 숨 쉰다. 지역 민담은 그녀를 바다에서 나온 천상의 처녀로 그린다. 귀사(龜蛇) 즉, 뱀의 머리에 거북의 몸을 한 배를 타고 상륙한 그녀는 별빛으로 반짝이는 옷을 입고, 야쓰시로 사람들에게 북두칠성의 인도에 따라 바다를 항해하는 법을 가르쳤다. 어떤 전승은 그녀를 묘견신의 화신으로,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다리로 묘사한다. 다른 전승은 그녀를 씨족을 통합한 여왕이나 여사제로 본다.
매년 11월 22일~23일 늦가을, 야쓰시로 일대에서 열리는 묘견제(妙見祭)는 묘견신의 은혜를 기리는 유서 깊은 축제다. 규슈지역을 대표하는 3대 마츠리 중 하나다. 북극성을 상징하는 화려한 카사호코(笠鉾)와 묘견공주를 태운 거북뱀(亀蛇)이 이끄는, 신을 모신 임행 행렬(神幸行列)이 쿠마가와(球磨川) 강변을 따라 펼쳐지며, 사자춤과 제례 음악이 묘견신의 보호를 소원하는 찬가로 울려 퍼진다. 야쓰시로 신사의 사제들은 이 행렬이 북두칠성과 연결된 묘견신의 천상 기원을 기념한다고 전한다. 쿠마가와 강 근처의 카메바네(亀津, 거북나루)는 거북뱀의 신성한 상징과 연결된 장소로, 지역 전승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묘견공주가 히미코라면, 야쓰시로 신사는 그녀의 신탁이 규슈에 뿌리내린 성소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에 따르면, 히미코는 사람을 홀리는 귀신도(鬼神道, 무속행위)를 통해 영적 권위를 행사하며 야마타이국을 통치했다.
그녀의 주술적 역할은 묘견신의 천상적 상징과 조화를 이룬다. 북극성은 묘견신의 신성한 빛으로, 질서와 운명을 관장한다. 히미코의 예언은 이 빛 아래 여러 부족을 하나로 묶었다. 묘견제에서는 그녀의 이러한 주술적 유산을 기린다. 묘견제의 화려한 신코 행렬과 쿠마가와 강변의 거북뱀 의식은 이 무속적 전통을 계승하며, 묘견공주가 히미코의 신화적 후계자임을 암시한다.
히미코와 왕자 선: 가락의 신녀, 야마타이의 여왕
2~3세기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는 중국 사서 《후한서》나 《삼국지》에 “귀신도를 써서 무리를 현혹(事鬼神道、能以妖惑衆)”하는 무녀(혹은 제사장)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서사는 그녀를 가락국 왕자 선과 함께 구름을 타고 떠난 신녀로 비정한다. 선은 히미코의 신탁을 전달하며 야마타이국을 보좌한 남동생, 가락국의 샤먼 전통을 규슈에 심은 이로 해석된다.
그들의 여정은 192~194년 동북아시아를 휩쓴 대기근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시작되었다. 《후한서》는 192년 후한의 극심한 기근을 묘사하며, 이 재앙이 해상 교역을 통해 가락국과 규슈로 파급되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193년 굶주린 왜인들이 신라로 식량을 구하러 온 사건을 기록하며, 규슈 북부의 불안을 증언한다. 규슈 북부 요시노가리 유적(吉野ヶ里遺跡)의 깊은 환호(고랑)와 목책은 기근으로 촉발된 갈등을 반영한다.
일본 신화 속 천손강림을 전하는 고대 역사 기록 중에 당시 사회의 혼란상을 암시하는 듯한 기술이 눈에 띄는 게 있다. 일본 천손강림의 무대로 알려진 히무카(日向, 지금의 미야자키현 일대) 지역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술한 《일향국풍토기(日向国風土記)》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니니기노 미코토가 천손강림할 당시 세상이 캄캄했는데, 호하시(大鉏)와 오하시(小鉏)라는 두 사람이 니니기에게 치호(千穂)의 벼에서 얻은 쌀을 뿌리면 좋겠다고 아뢰었고, 그렇게 하자 하늘이 맑아지며 밝아졌다. 이런 연유로 천손 니니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선 장소를 “히무카 다카치호의 이중의 봉우리(日向の高千穂の二上の峰)”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니조산(二上山)으로 여겨진다."
위 내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치호의 벼에서 얻은 쌀을 뿌리자 캄캄했던 세상이 밝아졌다라는 구절이다. 치호(千穂)란 니니기노 미코토가 천상으로부터 강림할 때 가져온 천상의 벼이삭을 뜻한다. 즉, 본격적인 농경문화의 시작을 알리는 표현이며, 또한 그 지역에 새로운 세력에 의해 비로소 신성한 물질인 쌀 생산이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 표현이다. 그래서 니니기노 미코토가 천손강림한 땅을 '다카치호(高千穂)'라 부르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참고로 위 기록을 근거로 천손강림의 땅이 흔히 알려져 있는,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기리시마산(霧島山)의 다카치호노 미네(高千穂峰, 고천수봉) - 한국악(韓國岳)의 옆 봉우리 - 가 아니라, 그곳으로부터 약 90km 떨어진, 미야자키현의 북단부 다카치호쵸(高千穂町)의 니조산(二上山)이라는 설이 존재하게 되었다.
물론, 다카치호쵸에는 다카치호신사(高千穂神社)를 비롯해서 쿠시후루신사(槵觸神社, 환촉신사)가 있어, 이곳이 천손강림의 땅임을 이야기하고 있다.일본 신화에 따르면, 천손 니니기노 미코토가 다카치호의 쿠지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에 강림했다고 하니, 신화 속 지명 두 곳과 관련한 신사가 바로 이곳에 있는 셈이다. 또한 쿠지후루다케에 강림했다는 일본의 건국 신화는 가야의 김수로왕이 김해 구지봉(龜旨峯)에 강림한 신화와 지명조차도 비슷하여 가야인들의 영향력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예로 거론된다.
이렇듯 여러가지로 혼란한 상황일 때,히미코는 가락국의 샤먼 전통을 품고 규슈에 상륙했다. 그녀의 귀신도는 고조선의 복골점에서 기원한 점술로, 소의 넓적다리뼈를 태워 갈라진 자국으로 길흉을 점쳤다. 태양을 상징하는 바람개비 모양의 청동기인 파형동기(巴形銅器)를 높이 들고 천신의 뜻을 전하며 그녀는 29개의 부족 연합을 결속시켰다. 왕자 선은 가락국의 해상 교역 경험을 바탕으로 위나라와의 외교를 이끌었고, 히미코는 238년 금인자수(金印紫綬) - 제후에게 내리는 금으로 만든 도장과 자주색 동장끈 - 를 받으며 친위왜왕(親魏倭王)에 책봉되었다.
히미코의 통치는 신비로운 은둔과 신탁에 뿌리를 두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단 한 명의 남성(왕자 선으로 추정)이 그녀의 신탁을 전달했다(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語). 요시노가리 유적의 제사 시설과 청동거울, 파형동기는 가락국의 샤먼 전통이 이식되었음을 보여준다. 히미코의 신탁은 부족들의 신앙을 하나로 묶었고, 선은 외교를 통해 야마타이국의 권위를 높였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魏志倭人伝)에는 히미코(卑弥呼)가 다스린 야마타이국(邪馬台国)에 대해 "호수 7만여 호"(戶數七萬餘) 규모의 국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247년경 히미코의 사망은 왜국을 또 다시 혼란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토시마 지역의 히라바루 유적(平原遺跡)에서 발견된 야타노카가미(八咫鏡, 팔지경. 일본 국보로 이세신궁 보관), 태양을 상징하는 대형 청동거울은 그녀의 신적 권위를 기리는 신물이었다.
그녀의 죽음으로 연맹체는 흔들렸고, 남성 왕의 즉위는 부족 간 내전을 낳았다. 그러나 열세 살의 종녀(從女, 조카) 이요(壹與)가 파형동기를 들고 신탁을 계승하며 나라를 다시 안정시켰다. 이요는 248년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등 대외관계를 이어가며 가락국의 샤먼 전통을 규슈에 꽃 피웠다.
거북의 항해: 구지가와 묘견공주의 다리
거북, 하늘의 뜻을 전하는 신성한 사자는 가락국과 야쓰시로의 신화를 잇는다. 《삼국유사》의 구지가는 거북이 수로왕의 탄생을 예고하며 바다에서 나온다. 이 거북은 가락국의 해양 문화를 상징하며, 신성한 명령을 전달한다.
야쓰시로에서는 묘견공주가 뱀의 머리와 거북 모양의 몸을 한 배를 타고 상륙했다는 민담이 전해진다. 쿠마가와 강의 카메바네(거북나루)는 그녀의 배가 닿은 신성한 나루로, 장수와 보호의 상징이다.
쿠마가와 강에서 바다로 연결되는 초입에 큰 비석이 하나 서 있다. 하동도래비(河童渡来之碑)라고 하는 이 비석은 고대 도래인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야쓰시로에 정착했음을 알리는 비석이다.
비문에는 “천오 육백 년 전, 하동이 중국 방면에서 바다를 건너와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는 장소이고, 삼백오십 년 된 다리의 석재로 만든 비석이며, 가랏파(ガラッパ)의 돌이라고 부른다. 어느 날 장난꾸러기 요괴(갓파)가 주민들에게 붙잡혔다. 이 돌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장난을 치지 않는 조건으로, 대신 1년에 한 번 축제를 열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매년 5월 18일 축제를 여는데, ‘오레오레데 라이다(オレオレデーライタ)‘ 축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가랏파‘라는 단어와 ’오레오레데 라이다‘라는 표현이다. 일본에서는 하동(河童)을 가랏파 또는 갓파라고 읽으며,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요괴 중 하나를 가리킨다. 우리의 도깨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가랏파의 의미가 하동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다. 묘견공주 일행이 야쓰시로 지역에 상륙하여 그곳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현지 토착민들이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을 ’가랏파‘라고 했으며, 이는 ’가라의 무리‘라는 뜻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오레오레데 라이다’라는 표현 역시 고대 한반도의 사투리로 ‘오래오래 되어지이다’라는 의미로 비문의 ‘이 돌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와 같은 의미로 해석한다.
히미코 연구가 故 이종기 선생은 히미코가 김수로왕의 딸로, 오빠 선견(선의 변형)과 함께 거북 배를 타고 규슈로 항해했다고 주장한다. 히미코, 곧 묘견공주의 거북 항해는 가락국과 야마타이국을 연결하는 문화적 다리였다.
구지가의 거북과 묘견공주의 거북 배는 공유된 신화적 원형을 암시한다. 가락국에서 거북은 왕을 낳고, 야쓰시로에서는 공주를 전달한다. 이 대칭은 해양 교류에 뿌리를 두며, 히미코가 가락의 공주로서 이 모티프를 규슈로 가져가 묘견신앙과 융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북두칠성과 샤먼: 묘견신앙의 천상적 뿌리
묘견신앙은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중심으로 신토, 불교, 고대 한반도인들의 무속 행위가 융합된 신앙이다. 묘견신은 질서와 운명을 관장하며, 황실과 항해자를 수호한다. 히미코의 샤먼적 권위는 이 천상적 상징성과 조화를 이룬다. 그녀의 귀신도는 별의 인도를 받아 신들의 뜻을 점치는 황홀 상태의 의식을 포함했을 것이다. 묘견제의 별빛 행렬과 바다 의식은 이 무속적 유산을 반영하며, 묘견공주가 히미코의 신화적 재창조임을 암시한다.
한반도의 고대 민속 신앙에서 북두칠성은 하늘의 중심축으로, 운명과 권위를 상징했다. 일본 규슈, 특히 쿠마가와 강 유역의 해양 공동체는 히미코와 같은 통치자가 촉진한 문화적 융합을 통해 이 신앙을 받아들였다. 묘견공주의 전설은 이러한 천상 상징을 담아내며, 그녀를 북두칠성의 인도 아래 쿠마가와 강을 통해 바다를 항해한 신성한 인물로 재창조했다.
일본 신도의 뿌리: 가락국의 불꽃
히미코와 이요의 신탁통치는 가락국의 샤먼 전통이 규슈에 뿌리내린 증거다. 사가현 칸자키시(神埼市)의 히미코 동상은 파형동기를 든 모습으로, 가야의 제사 전통이 왜국에 이식되었음을 상징한다.
요시노가리와 히라바루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거울은 가야와 왜국의 물질문화가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히미코의 귀신도는 고조선의 복골점에서 영향을 받아 천신과 조상을 연결하는 의식을 형성했으며, 이는 일본 신도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鳴尊, 일본 건국 신화 속의 신)의 신라 기원설은 한반도계 도래 개척자들이 가야의 제례 전통을 야마토에 전파했음을 시사한다. 스사노오 신사의 바다 숭배, 오미와 신사의 산 숭배는 가락국의 샤먼 전통과 맥을 같이한다. 일본 신사의 시메나와(しめ縄, 금줄)는 가야의 서낭당 금줄과 신성한 경계를 공유한다.
연대적 도전과 신화의 힘
이 가설에는 연대적 불일치가 있다. 《편년가락국기》는 왕자 선과 신녀가 199년 떠났다고 기록하며, 《삼국지》는 히미코가 180~248년 활동했다고 전한다. 이는 고대 사서의 구전 의존과 후대 편찬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파형동기, 복골점, 청동거울은 가락국의 샤먼 전통이 왜국에 뿌리내린 강력한 증거다.
신화는 역사적 사실보다 문화적 상상력과 상징성을 우선한다. 묘견공주, 히미코, 가락국의 신녀는 한일 교류의 신화적 융합을 상징하며, 그 이야기는 낙동강과 아리아케 해를 잇는다.
영원의 제단 위, 천년의 서사
고령의 고분에서 피어오른 제사의 향은 낙동강을 타고 하늘로 솟구쳤다. 그 연기는 구름이 되어 대한해협을 건너, 야쓰시로의 해안과 이즈모의 신목 속으로 스며들었다. 묘견공주, 히미코, 가락의 신녀는 파형동기를 들고 복골점으로 길흉을 점치며 야마타이국의 심장을 일으켰다. 왕자 선은 그녀의 신탁을 전하며 가락국의 해양 문화를 규슈의 제단에 심었다.
그들의 발자취는 요시노가리 유적의 제사 시설, 히라바루의 청동거울, 야쓰시로의 묘견제에 새겨져 천년을 넘어 빛난다. 가락국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그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낙동강의 바람은 구지가의 거북과 승운이거의 구름을 실어 바다를 건넜다. 스사노오 신사의 파도 소리, 오미와 신사의 산바람, 이세신궁의 청동거울은 가락국의 축원을 되살린다.
야쓰시로의 해안에 서서 별빛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는 파도 속에서 속삭이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묘견공주, 히미코, 가락의 신녀는 한반도의 축원을 일본 열도의 심장에 심었다. 그 씨앗은 신도 문화의 맥박으로 고동치며, 낙동강에서 이즈모까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영원한 다리가 되어 흐른다.
“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7회
스에키의 뿌리를 찾아서: 가야 토기의 기술과 일본 토기의 진화
낙동강의 잔잔한 물결이 철광석 깃든 흙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그곳, 가야의 고토. 해 질 녘, 산비탈에 길게 뻗은 터널형 가마의 입구에서, 도공들은 땀과 열망으로 혼이 깃든 점토를 빚었다. 그들의 손끝에서 태어난 회청색 토기는 그저 한낱 그릇이 아니었다. 그것은 흙과 불의 연금술, 세대를 이어온 기술의 서사, 그리고 바다를 건너 새로운 땅에 뿌리 내릴 문명의 씨앗이었다.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가마의 불꽃은 가야의 혼을 담아 타올랐고, 그 빛은 멀리 대한해협의 거친 파도를 너머, 일본 열도의 해안까지 닿았다.
김해의 고분 사이로 바람이 속삭이고, 함안의 들판에 고령의 산등성이가 그림자를 드리우던 시대. 가야 도공들은 철분이 스민 점토를 정제하고, 1,200℃의 뜨거운 가마 속에서 자연유의 광택을 불러냈다. 이 토기는 제사의 제기로, 일상의 항아리로, 그리고 신성한 상징으로 가야인의 삶에 깃들었다.
그러나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고구려군의 날카로운 칼끝이 가야의 가슴팍을 향해 파고들었다. 신라와 백제의 갈등이 낙동강 유역을 뒤덮자 지역 정세는 급속하게 불안해졌다. 일신의 위협을 느낀 가야의 도공들 또한 불씨를 품고 바닷길로 나섰다.
그들은 가야의 기술과 꿈을 돛단배에 싣고, 규슈의 사이토바루(西都原) 고분과 오사카의 스에무라(陶村) 가마터로 향했다. 스에키(須惠器)는 그렇게 태어났다. 가야의 흙에서 뿌리 내린 불꽃이 열도의 땅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순간이었다. 이 회청색 경질토기는 평범한 도구를 넘어,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문화의 다리, 고대 동아시아 교류의 살아 있는 증언으로 거듭났다.
스에키의 기원: 가야와의 기술적 연계
스에키는 일본 고분시대(4세기 말~7세기)에 등장한 경질토기로, 단단함과 은은한 광택으로 고급 토기로 여겨졌다. 그 뿌리는 한반도 가야의 도질토기에 있다. 낙동강 유역 - 김해, 함안, 고령 - 에서 발전한 가야 토기는 원삼국시대 와질토기의 전통을 계승하며, 지역 점토와 고온 소성 기술로 독창적 도예 문화를 꽃피웠다. 중국 한나라의 도기 기술이 간접적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있지만, 가야 토기는 영남 지역의 독자성을 바탕으로 체계화되었다.
가야 토기는 낙동강 유역의 철분 함유 점토를 정제해, 약 1,000~1,200℃의 터널형 가마(등요, 登窯)에서 주로 환원 소성으로 빚어졌다. 환원 소성은 산소 공급을 줄여 가마 속 철분이 산화되지 않도록 하여, 점토가 청회색을 띠고 표면에 유리질 광택(자연유)을 형성하게 했다. 이 과정은 도공의 숙련된 불 관리와 점토의 화학적 반응이 어우러진 결과로, 단단하고 은은한 광택의 토기를 완성했다.
이러한 기술은 5세기 오사카 스에무라 가마터에서 출토된 스에키와 뚜렷한 공통점을 보인다. 예를 들어, 스에키의 고배(높은 굽의 의례용 그릇)와 항아리는 가야 토기의 우아한 곡선과 매끄러운 표면을 공유하며, 일본 고분시대의 제사와 실용적 수요에 맞게 재해석되었다.
함안 우거리 토기 가마터와 스에무라 가마는 경사진 터널형 구조로 열을 효율적으로 순환시키는 설계를 공유하며, 연기가 빠져나가는 연도의 구조와 내부 공간 배치에서도 유사성을 드러낸다. 이는 가야의 고온 소성 기술이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에 뿌리내렸음을 증명한다.
AI가 생성한 가야토기(좌)와 일본 스에키(우) 이미지
가야 도공의 이주와 스에키의 탄생
스에키의 발전은 가야 도공의 이주와 밀접하다.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은 가야 지역에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고구려의 위협과 신라의 팽창, 백제와의 갈등, 그리고 경제적 요인으로 가야는 큰 혼란을 겪었고, 일부 도공이 일본 열도로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언덕의 경사면을 활용해 10° 이상의 경사도로 축조된 스에무라 가마의 등요 구조와 점토 정제 방식은 가야의 기술 전파를 뒷받침하며, 5세기경 일본에 뿌리내렸다.
스에키는 가야의 기술을 기반으로 일본의 토질과 수요에 맞춰 독자적으로 진화했다. 6세기 이후 간토, 도호쿠 지방으로 확산되며 고분 제사용 고배부터 일상용 저장 용기까지 다양한 기종을 낳았다. 이는 헤이안 시대(8~12세기) 도기 전통으로 이어졌으나, 12세기 이후 오카야마현의 비젠 지역에서 생산된 비젠야키(備前燒)와 같은 중세 도기와는 별개의 경로를 걸었다.
가야, 흙과 불의 정수
가야의 도질토기는 낙동강 유역의 독창적 도예 전통을 대표하며, 고대 동아시아에서 빼어난 기술로 빛났다. 김해, 함안, 고령의 찰진 점토는 도공의 손끝에서 정교히 빚어져 단단한 토기로 거듭났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가야의 철이 삼한, 왜, 낙랑으로 퍼졌다고 전하며, 철기 기술은 점토 가공 도구나 가마 건설용 내화재료 준비에 간접적으로 기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가야의 등요는 산비탈의 경사를 활용해 열을 균일하게 순환시키는 설계로, 연도와 긴 터널 구조를 통해 고온을 유지하며 청회색의 미학을 완성했다.
가야 토기는 실용성과 예술성을 조화시켰다. 장경호(긴 목 항아리), 시루(찜기), 기대(굽다리 접시)는 일상생활을 풍요롭게 했고, 고배(높은 굽의 의례용 그릇)는 제사에서 신성함을 더했다. 타날문(두드려 새긴 문양)과 투창(굽에 뚫린 구멍 장식)은 토기의 미학적 가치를 높였으며, 투창은 주로 장식과 의례적 상징성을 띠고 있다. 이 정교한 기술은 5세기경 가야 도공의 이주를 통해 오사카 스에무라 가마로 전파되었다. 스에키는 가야의 고온 소성과 자연유를 계승하면서 일본의 토질과 의례적 수요에 맞춰 독자적으로 발전하며, 일본 도예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일본의 갈망과 스에키 혁명
4세기 말 일본은 하지키(土師器)라는 연질토기를 사용했다. 600~900℃의 노천 소성으로 제작된 하지키는 내구성과 방수성이 떨어져 고급 용도에 한계가 있었다. 한반도에서 유입된 철기, 마구, 금동 장신구는 일본 지배층의 기술적 열망을 자극했다. 가야의 도질토기는 단단함과 광택으로 이 열망을 충족하며, 도공 이주와 함께 스에키로 구현되었다. 스에키는 하지키와 병행 사용되다가 점차 고분 제사와 고급 용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AI가 생성한 가야식 터널형 가마 등요(좌)와 초기 일본의 노천 가마(우) 도해 이미지
가야 각국의 유산
가야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다양한 토기로 스에키에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기술과 미학은 스에무라와 사이토바루에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다.
금관가야(김해): 고배와 장경호의 곡선미와 자연유는 초기 스에키의 토대가 되었다. 양동리 고분군 유물은 고온 소성의 정교함을 보여준다.
아라가야(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굽다리 접시는 투창 장식으로 독창성을 띠며, 스에키의 문양 다양성에 영향을 미쳤다.
대가야(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균일한 소성과 타날문 토기는 스에키 중기 형태에 기여했다.
소가야(고성): 송학동 고분군의 간결한 토기는 규슈 스에키에 간접적 영향을 주었다.
스에키의 종교적 상징성
스에키는 일본의 고대 종교적 의례에서 점차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담당하며, 불교 사찰과 신토 신사라는 두 가지 주요 종교적 맥락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6세기 불교의 일본 전파 이후, 스에키는 사찰 내에서 공양물을 담는 용기로서 점차 그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특히 헤이안 시대(794-1185)에 이르러 사찰 유적지에서 출토된 스에키 항아리와 고배(高杯)는 불교 의례에서 공양물, 특히 곡물이나 액체 제물을 담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용기는 단순한 실용적 도구를 넘어, 불교의 엄숙한 의례적 분위기를 뒷받침하는 상징적 매개체로 기능하였다.
신토 의례에서도 스에키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크다. 신토의 전통에서는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나 정화 의식에 사용되는 용기가 필요했으며, 스에키는 그 내구성과 세련된 외관 덕분에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선택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신사에서 행해지는 목욕재계의 종교 행위인 정화 의례(禊, 미소기)나 신에게 바치는 공양물(供物, 쿠모츠)을 담는 데 스에키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스에키가 일상생활의 물리적 용기를 넘어,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영적 매개체로서의 상징성을 띠었음을 시사한다.
스에키의 이러한 종교적 활용은 그 물질적 특성과 미학적 가치에서 기인한다. 스에키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져 견고한 내구성을 자랑하며, 회청색의 단아한 표면은 종교적 공간에서 요구되는 엄숙함과 조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특성은 스에키가 가야 토기의 제작 기법과 다기능성을 계승한 결과로, 일본 고대 사회의 기술적 · 문화적 연속성을 보여준다. 또한, 스에키의 형태적 다양성—항아리, 고배, 접시 등—은 다양한 의례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연성을 제공하였으며, 이는 스에키가 종교적 맥락에서 널리 수용된 이유 중 하나로 평가된다.
더 나아가, 스에키는 일본 고대 사회에서 종교와 일상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불교와 신토라는 서로 다른 종교 전통 속에서 공통으로 사용된 스에키는, 이 두 종교가 초기 일본 사회에서 상호작용을 하며 공존했던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스에키는 일상적인 도자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일본의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체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에키는 고대 일본의 물질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연구 대상으로, 그 상징성과 기능성은 오늘날에도 학술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스에키의 지역적 변이와 사회적 역할
6세기 이후 스에키는 지역별로 다양화되었다. 간토 지역은 실용적이고 간소한 형태를 특징으로 주로 일상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규슈는 가야의 곡선미를 일부 반영하여 보다 유려하고 장식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스에키는 평범한 도자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일본 사회의 계층 구조와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오사카의 스에무라 가마는 야마토왜 정권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이는 정치적 권위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정교한 스에키는 지배층의 제사와 같은 제례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는 권력과 신성함을 결합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단순하고 일반적인 스에키는 일반 대중의 일상생활에 사용되었으며, 이는 사회적 계층화를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이러한 계층화는 도자기의 형태와 사용 방식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었으며, 이는 일본 사회의 복잡한 구조와 문화적 맥락을 반영한다.
가야 토기의 미학적 영향
가야 토기의 유려한 곡선과 자연유는 스에키를 통해 일본 도기의 미학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스에키의 소박한 광택은 신토와 불교 의례의 정갈함과 조화를 이루었다. 비젠야키와 라쿠야키(楽焼, 주로 다례용으로 쓰이는 일본 전통 도자기)는 스에키의 기술과 질감을 간접적으로 계승했다.
와비사비(侘寂, 차적) 철학은 15~16세기 다도 문화에서 형성되었지만, 스에키의 자연스러운 광택과 질감이 그 초기 영감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와비사비 철학이란, 일본의 미학 개념 중 하나이다. 불완전함과 일시성, 그리고 소박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철학이다. 와비(侘)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아름다움을 뜻하며, 寂(사비)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생기는 고요함과 쓸쓸함 속에서 느껴지는 깊은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일본 전통 차도(茶道)나 정원, 건축, 문학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깊게 반영되어 있다.
학계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가야 토기의 실용성과 장식성의 균형이 스에키를 통해 일본 도기의 독창적 미학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스에키, 시간의 불 속에서 영원히 타오르다
스에키는 낙동강의 흙에서 태어나 태평양의 파도를 넘어 일본 열도에 뿌리내린 가야의 불씨다. 스에키는 그들의 땀과 꿈이 일본의 흙과 융합된 결실이었다. 회청색 도질토기는 그저 평범한 흙 그릇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대 동아시아의 교류를 품은 시간의 대서사였다.
호류지(法隆寺)의 불빛 아래,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신성한 숲속에서 스에키는 신과 인간을 잇는 신성한 용기로 거듭났다. 그 단단한 표면은 신토의 정화수를, 불교의 공양물을 담았고, 유려한 곡선은 가야 도공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미학을 속삭였다. 간토 지방의 농부 손에 들린 소박한 항아리에서, 규슈의 제단에 놓인 정교한 고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스에키는 가야의 숨결을 간직했다.
그 불꽃은 비젠도자기의 자연유로, 라쿠야키의 소박한 질감으로, 다도의 찻잔으로 이어졌다. 와비사비의 철학은 스에키의 불완전한 광택에서 싹텄고, 현대 마시코야키(益子焼, 19세기 초부터 만들어진 일본 전통 도자기)의 그릇에서 가야의 미학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스에키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가야와 일본,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손을 맞잡고 빚어낸 문화의 다리다. 낙동강의 바람이 김해의 고분을 스치고, 태평양의 파도가 규슈 사이토바루의 해안을 어루만지는 곳에서, 스에키는 고대 동아시아의 이야기를 속삭인다.
그 회청색 표면에 반사된 것은 도공들의 열망, 바다를 건넌 기술, 그리고 시간을 초월한 교류의 대서사다. 스에키를 손에 쥐는 순간, 우리는 가야의 불꽃과 일본의 흙이 함께 그린 꿈을 만난다. 그 불씨는 지금도 열도 곳곳의 도자기 가마 속, 신사와 신궁의 제단 위, 그리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영원히 타오르고 있다.
“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6회
김해에서 아스카로, 금관가야 불교의 길 – 일본 불교의 새벽에 드리운 남해의 그림자
저 너른 김해의 대지는 그저 산재한 고고학적 유적의 집합체가 아니다. 그곳은 시간의 층위를 따라 숨 쉬는 문화의 바다이며,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문명의 잔향이 겹겹이 쌓인 역사적 고도이다. 낙동강 하구의 너른 물줄기가 굽이치며 품어 안은 고대 금관가야는 바다와 내륙을 잇는 해상 교역의 중심이자, 동아시아 해양 문명이 교차하던 결정적인 지점이었다.
그곳에 불교의 기운이 스며든 것 역시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비록, 공식적 기록으로는 신라나 백제보다 늦었을지 모르나, 단편적인 전래를 넘어 일본 열도로 향하는 문화의 혈관, 중계 문화의 핵심 축으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다. 백제와는 또 다른 궤적 위에서, 금관가야는 그 조용한 파문으로 일본 불교의 새벽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과정은 네 나라—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서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사료의 기록상, 가장 먼저 불교를 수용한 국가는 고구려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소수림왕조에 따르면 372년(소수림왕 2년),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고구려에 도착하였고, 이듬해 승려 아도(阿道)가 초청되며 본격적인 전파가 이루어졌다.
백제는 384년(침류왕 원년), 동진(東晉)에서 온 마라난타(摩羅難陀)라는 승려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백제는 불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고 왕실 차원에서 사찰과 승단을 조성하며 신앙을 장려하였다.
신라는 비교적 늦은 527년(법흥왕 14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 사건을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다. 『삼국유사』 「흥법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존 신앙 체계와의 충돌 속에서도 불교가 제도권 종교로 자리 잡는 데 상징적 계기를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렇듯 불교의 공인과는 무관하게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때는, 신라 제2대 남해왕 원년으로 서기 4년의 일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 때의 문신 민지(閔漬:1248~1326)라는 이가 『신라고기』를 인용하여 저술한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金剛山楡岾寺事蹟記)』 기록에 그렇다.
가야의 경우 공식적인 불교 수용에 관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불교적 문화 요소와의 접촉은 매우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전승이 존재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건너왔다는 설화가 등장한다. 그녀의 오빠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함께 도래했다는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장유화상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파사석탑(婆娑石塔)을 가져왔으며, 이 탑은 오늘날까지 김해 수로왕릉 앞에 세워져 있는 파사탑으로 현존한다. 장유화상이 건립했다는 여러 사찰들이 연기 설화로 전승되고 있다. 이 전승은 가야가 단지 중국 중심의 불교 전래 경로만이 아닌, 인도-동남아-한반도를 잇는 해양 네트워크를 통해 불교 문화와 조우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다층적 배경 속에서 금관가야는 일본 열도로 향하는 교류의 중계지로 기능하며 불교문화의 확산에 기여하게 된다. 특히 금관가야계 이주민이 일본의 초기 불교 사찰과 교단 형성에 미친 영향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분야다. 금관가야는 철의 왕국으로 불리며, 낙동강 유역의 철광 자원을 기반으로 뛰어난 금속 가공 기술을 발전시켰고, 이는 일본 열도에까지 이식되었다. 금관가야계 기술자들이 건너가 아스카 지역의 사찰 건축과 불상 제작에 참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그간 축적된 연구를 통해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아스카 지역(지금의 나라현 일대)에 위치한 아스카데라(飛鳥寺, 비조사)이다.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불교 사찰로, 『일본서기』에 따르면 588년에 착공되어 596년에 완공되었다. 전통적으로 아스카데라는 백제의 건축 양식과 기술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예를 들어, 『일본서기』는 백제 기술자들이 사찰 건립에 참여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 조사에서는 가야계 요소가 확인되고 있다. 기단부를 구성하는 석재의 맞춤 방식은 가야 지역, 특히 금관가야 고분의 석실 축조 기법과 유사성이 관찰된다. 이는 가야 지역의 기술이 직접 또는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청동 불상의 금속 성분 분석 결과, 한반도 남부에서 채취된 광물과 유사한 성분이 확인되었다. 이는 가야를 포함한 한반도 남부 지역과의 물질적 교류를 뒷받침한다.
또 한곳의 중요한 사찰은 나라현 이카루가 지역의 호류지(法隆寺, 법륭사)이다. 이 사찰은 쇼토쿠 태자(聖徳太子)가 건립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지며, 일본 불교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호류지는 전통적으로 백제계 불교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례로 여겨졌다. 그러나 초기 건축물과 유물에서는 가야계 양식의 흔적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와의 문양과 제작 기법은 대가야 지역의 토기 양식과 유사성을 보이며, 기단 배치 방식은 고령 지역 고분의 축조 기법과 비교될 수 있다. 금속 공예에서도 금관가야의 세부 기술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러한 유사성은 가야 지역의 장인이나 기술이 백제를 통해, 혹은 독자적으로 일본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나, 호류지의 사찰 유래 및 재산 목록을 기록한 『法隆寺伽藍縁起并流記資財帳, 법륭사 가람 연기 및 류기 자산장』 같은 문헌 사료에서는 가야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며, 백제와의 교류가 주로 강조되는 한계는 있다.
결론적으로, 아스카데라와 호류지의 건립에는 백제뿐 아니라 가야를 포함한 한반도 남부 지역의 문화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백제 중심의 일방적 전파가 아닌, 한반도 여러 지역의 문화가 융합되어 일본 초기 불교를 형성했음을 시사한다.
호류지(法隆寺, 법륭사)의 금당, 중문, 오중탑(좌로부터)
불교가 일본에 전래한 공식 기록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이 사서는 720년에 완성된 일본의 정사로, 일본 천황가의 기원을 서술하며 외래 문물의 전래 또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13년(552년) 10월 조에는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전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흠명천황 13년 겨울 10월, 백제 성명왕(성왕)이 서부 희씨, 달솔, 노리사치계 등을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 불교 행사에 쓰이는 깃발과 우산을 일컫는 번개 여러 점, 몇 권의 경론을 헌상하였다”
이 기록은 552년에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상과 경전을 전달한 사건을 묘사하며, 일본 불교 전래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중요한 자료이다.
『속일본기』는 797년에 완성된 일본의 역사서로, 도래인(개척자)들의 활동과 불교 전파에 대한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속일본기(続日本紀)』 – 도래인과 불교 관련 기술(684년)
원문:
『続日本紀』 卷第五, 天武天皇 十三年條(속일본기, 제5권, 천문천황 13년조)
是歳、百濟人、任那人等、來歸者多、皆習工藝、或為佛師、或為瓦匠、或為鍛冶。
해석:
"이 해에 백제인과 임나인 등이 많이 와서 귀화하였으며, 모두 공예를 익혔고, 어떤 이는 불상을 만드는 장인이 되었으며, 어떤 이는 기와 장인, 어떤 이는 대장장이가 되었다."
이 기록은 백제와 가야 출신의 도래인들이 일본에서 불교 관련 기술과 예술을 전파하는 데 이바지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약간 부연 설명이 필요한데, 이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때가 684년이다. 이때는 이미 백제가 멸망(663년)한 한참 이후의 일이다. 가야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가야는 562년(대가야) 신라에 흡수되며 역사에서 사라진 뒤였다.
그런데도 본문에서는 백제인과 임나인이 귀화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백제인과 임나인은 백제와 가야의 멸망으로 일본 열도로 이주하여 일본 땅 어딘가에 살고 있던 백성들 중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재일교포 출신으로 북한의 대표적 가야사 학자인 조희승은 『임나일본부 해부』를 통해 임나일본부는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열도에 있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역시 북한 학자인 김석형은 ‘삼한 삼국의 일본 열도 분국설’을 발표하여 지금의 오카야마현(岡山県)일대가 임나이며 이 지역에 백제, 신라, 가야의 분국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는 한반도식 고분과 유적이 그것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포함한 일본의 사서들은 천황 중심의 통치 이념을 반영하고 있어, 항상 천황을 주체적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문체가 거슬리는 경우가 많다. 백제나 신라, 가야, 고구려 등의 사신이 와서 세금이나 공물 혹은 선물을 ‘헌상했다’거나 ‘바쳤다’라는 예가 그러하다.
물론, 여기서 등장하는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는 앞서도 설명했듯이 한반도 땅에 자리했던 나라가 아니라 일본 열도, 지금의 오카야마나 규슈 일대의 지역에 거주했던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등의 분국 · 소국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군사력이나 기술력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일본서기』 및 『신찬성씨록』과 같은 고대 사료에는 한반도 출신 도래인들이 일본 초기 불교 사찰의 건립과 의례 물품 제작에 기여한 기록이 등장한다. 특히 금속 공예와 건축 기술에서 가야 지역과의 유사성이 확인되며, 이는 가야계 도래인의 영향을 시사한다.
한반도로부터 도래한 대표적인 개척자 씨족으로는 아야노 아타이(漢直), 다지히노 오미(多治比臣), 야마시로노 오미(山背臣)가 있다. 이들은 백제 또는 가야 출신으로 추정되며, 향로, 불상 등 불교 의례용 기구 제작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예를 들어, 아야노 아타이 씨족은 금속 공예 기술에서 금관가야와의 연관성이 학계에서 논의되지만, 명확한 문헌 증거는 다소 부족한 편이기는 하다. 이들의 기여는 주로 기술적, 문화적 영역에 국한되며, 한반도 남부 지역(백제, 가야 포함)의 복합적 문화 교류가 일본 불교 형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특히, 쇼토쿠 태자(聖徳太子, 574~622)는 일본 초기 불교를 정착시킨 핵심 인물로, 한반도 도래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아스카 시대(6~7세기) 사찰 건립을 주도했다. 백제와 가야 출신 장인들은 건축 기술, 금속 공예, 불교 의례 전파에 기여하며 일본 불교의 기틀을 형성했다.
쇼토쿠 태자는 반도와 열도 사이, 그 복합적 교류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을 불러 불경과 건축의 기틀을 세웠고,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의 정교한 금속 공예를 받아들여 불교의 형상을 빚었다. 아야노 아타이의 망치 소리, 다지히노 오미의 섬세한 손길은 향로와 불상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야마토왜의 새 신앙을 단단히 뿌리내리게 했다. 이들의 협업은 평범한 사찰 건립이 아니었다. 그것은 낙동강에서 야마토왜까지 이어진 문화의 혈관, 바다를 건넌 사람들의 열망이 얽히고설켜 빚어낸 문명의 대화였다.
어떤 이는 말한다. 금관가야의 불교는 백제나 고구려의 것과 달랐다고. 더 오래되고, 더 남쪽의 바다 냄새가 났다고. 그것은 당대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사찰의 양식이나 불상 하나하나에 그 그림자가 어렴풋이 스며 있다. 그것은 마치 사라진 도시의 흔적을 모래 속에서 찾듯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로소 드러나는 숨은 진실 같은 것이다.
김해의 너른 대지 위, 낙동강의 잔잔한 물결은 천년의 세월을 품고 흐른다. 그렇다. 이곳은 그저, 널린 고분과 유물의 집합체가 아니다. 금관가야의 심장이 뛰던 곳, 바다와 대륙을 잇는 해양 문명의 교차로, 그리고 불교의 씨앗이 조용히 뿌리내린 신앙의 고도다. 낙동강 하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철의 왕국 금관가야의 숨결을 실어, 멀리 일본 열도 아스카의 들판까지 그 정교한 공예와 깊은 신앙을 전했다. 이곳에서 피어난 문화의 파문은 백제의 웅장한 불탑과 어우러져, 일본 불교의 새벽을 은은한 빛으로 물들였다.
아스카데라의 기단에 새겨진 석재는 금관가야 고분의 석실묘를 닮아 있다. 그 하나하나의 맞춤은 단순한 돌의 조합이 아니라, 김해의 장인들이 바다를 건너 새긴 시간의 서사다. 호류지 기와에 스민 대가야의 문양은 고령의 흙에서 빚어진 토기의 메아리이며, 청동 불상의 금속은 낙동강 유역의 광맥에서 채취된 영혼의 울림이다. 이 유물들은 기술의 전파를 넘어, 한반도 남부의 사람들이 일본의 땅에 심은 신앙과 꿈의 증거다. 백제의 손길이 야마토왜의 하늘을 장엄하게 수놓았다면, 가야의 손길은 그 아래 조용히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금관가야는 백제나 신라처럼 공식적 불교 공인의 기록을 남기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김해의 파사석탑에 얽힌 장유화상의 전승, 인도와 동남아를 잇는 해양 네트워크의 흔적은 가야가 단지 중계자가 아닌, 독자적 문화의 창조자였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철의 기술로 바다를 열었고, 불교의 빛으로 아스카의 새벽을 밝혔다. 백제의 장엄한 불탑이 일본 불교의 뼈대를 세웠다면, 금관가야의 섬세한 공예는 그 뼈대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오늘, 아스카데라의 기단 위를 스치는 바람은 여전히 김해의 숨결을 간직한다. 호류지의 오래된 기와는 대가야의 흙냄새를 품고, 금동 불상의 빛은 낙동강의 물빛을 되새긴다. 이 교류의 잔향은 시간의 층위를 넘어, 바다와 대지를 가로지르며 영원히 울려 퍼진다. 금관가야의 그림자는 아스카의 사찰에 길게 드리워져, 일본 불교의 뿌리 깊은 곳에서 조용히 속삭인다. 그것은 한반도 남부의 사람들이 바다 너머 새 땅에 심은 신앙의 나무, 그리고 그 나무가 드리운 끝없는 그늘의 이야기다.
역사는 강물처럼 흘러가지만, 그 강물 밑바닥에는 언젠가의 이야기들이 가라앉아 있다. 우리는 가끔 그것을 다시 퍼 올려야 한다. 김해에서 규슈로, 그리고 다시 아스카로, 그 길을 따라 불빛이 이어졌고, 그 불빛은 오늘날 일본 불교의 아침을 열었다. 남해의 작은 나라가, 그렇게 커다란 문명의 여명을 비추었다.
지금, 다시 그 길을 걷는다. 낙동강 끝자락에서, 파도에 실려 왔을 그때의 숨결을 느끼며. 그리고 마음속에 묻는다. 우리가 잊은 건 단지 역사였는가, 아니면 우리가 아직도 찾고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다시 꺼내야 하는 것이다. 고요한 바다 아래, 여전히 숨 쉬는 그 옛날의 목소리들을 듣기 위해.
“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5회
김해 구지봉에서 규슈 한국악으로: 신의 강림을 갈구하는 소리의 계보
신화는 단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이전의 역사이며, 한 민족의 기억이고,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이다. 우리는 신화를 텍스트로 기억하지만, 그것이 처음 발생했던 자리는 소리였다. 제사장의 노래, 공동체의 외침, 북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 무용수의 리듬 속에서 신화는 태어났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김해의 구지봉에서 울려 퍼진 ‘구지가(龜旨歌)’와 일본 규슈 지역에 전승된 제의무악 ‘가구라(神楽)’ 사이의 문화적 연결고리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 이 두 제의 전통은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지리에서 탄생했지만, 그 형식과 기능, 세계관의 구조에서 놀라운 공통점을 드러낸다.
먼저 김해의 구지봉을 살펴보자. 구지봉은 경상남도 김해시 중심부에 위치한 해발 200미터 남짓의 낮은 구릉이다. 언뜻 보면 평범한 동산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탄생한 성역으로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아홉 명의 간(干, 촌장이나 부족장의 의미이며, 징기즈칸의 '칸'과 같은 어원으로 본다)들이 수로왕의 강림을 기다리며 이 언덕에서 제를 올리고, 그를 호출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그 노래가 바로 ‘구지가’다. 지금도 구지봉 언덕 아래에는 ‘수로왕릉’이 있고, 구지봉 정상에는 김수로왕의 난생신화를 기리는 비석과 사적 안내가 자리 잡고 있다. 이렇듯 구지봉은 단순한 역사 유적이 아니라, 신화와 의례, 제정일치의 기억이 아로새겨진 한국 고대문화의 출발점 중 하나이다.
고고학적 발굴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김해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금관가야가 단순한 지역 부족국가가 아니라, 해상 교역과 기술 문화를 주도한 강력한 문명권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수로왕릉 주변에서 출토된 청동기 및 철기 유물, 그리고 제단 형식의 석조 구조물은 이곳이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고대 의례와 제사가 이루어진 복합적인 신성 공간이었음을 시사한다.
반면, 규슈 남부에 위치한 한국악(韓国岳. 한국산)은 고도 1,700미터에 이르는 활화산 지대의 중심 봉우리다. 일본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 경계에 위치한 이 산은 기리시마 화산군 중 하나로, 그 자체가 일본 고대 신화 속 '천손강림'의 무대로 간주된다. 『일본서기』에는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노미코토가 하늘에서 내려와 일본 땅을 다스리기 시작한 장소가 바로 이 일대라고 기록돼 있다.
한국악이라는 명칭도 이 지역이 고대 한반도 도래 개척자들의 활동 무대였음을 암시한다. 즉, ‘한국’이라는 지명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한반도계 이주민들의 흔적이 지형의 이름에까지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한국악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그것은 땅의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는 불기둥과, 하늘과 지하 세계를 잇는 상징적 기둥 같은 존재다. 실제로 한국악이 속한 기리시마 화산군은 지금도 활발한 화산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달 초에는 신모에다케 화산이 분화해 현재까지 입산 금지 조처가 내려진 상태다.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와 유황의 냄새는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살아있는 대지의 호흡을 간직한 장소임을 일깨운다. 이러한 지질학적 특성은 한국악이 신화적 무대로 기능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고대인들에게 화산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신의 분노이자 음양의 전환점이며, 새로운 질서의 시작을 상징하는 초자연적 공간이었다.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올 만한 성스러운 대지가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들에게 이 높은 산은 고향을 그리며 바라볼 수 있는, 그리움을 녹여 내리는 장소로도 적당했다. 일본 역사서 『고사기』에도 “여기는 좋은 곳이다. 왜냐하면 가라쿠니(韓國)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김해 구지봉과 규슈의 한국악 위치 (구글 지도)
『고사기』의 신대편에 따르면, 천상의 세계인 타카마가하라(고천원)에서 내려온 니니기노미코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가 말했다. 이곳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구나. 아침 해가 바로 드는 나라, 석양이 비치는 나라, 참으로 좋은 곳이로다.
게다가 이곳은 가라쿠니(韓國, 한국)를 향하고 있어 더욱 아름답다.
허니, 이곳을 히무카(日向, 일향)라 부르겠다.”
본문에서 말하는 가라쿠니(韓國)란 당연히 한반도의 김해 지역일 것이며, 히무카(日向)는 그 뜻을 풀이하면 ‘고향을 향하는 곳’이 적절할 듯싶다. 여기서 한자 일(日) 자는 태양을 의미하며, 의역하면 모든 것의 근본이다. 인간의 뿌리는 고향이다. 고향을 떠난 이들의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 이후에 일본 정부가 한국악의 지명을 바꾸려고 하다가,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과 저항으로 무산된 바 있다. 한국악의 한(韓)이라는 글자를 일본어 발음이 똑같은 공(空)으로 교체하려다가 실패한 것이다.
이때 일본 내에 있는 한반도 관련 지명, 사찰과 신사 이름 등이 많이 개명되었다. 일본 내에 산재해 있던, 한반도와 관련한 한자인 한(韓) 자를 빼고 다른 한자로 교체해 버렸다. 한(韓)이라는 글자를 대체한 대표적인 한자가 당(唐), 신(辛), 한(漢) 등이다. 일본어에서는 한(韓), 공(空), 당(唐), 신(辛), 한(漢)이 모두 ‘카라’라고도 발음하기에, 본래 이름에서 한자를 한 글자 바꾸더라도 의미는 달라지나 발음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한 꼼수다. 한반도의 색채를 지우려는 일본 보수세력들의 얄팍한 역사관이다.
『일본서기』에는 니니기노미코토가 아마테라스의 명을 받아 다카마가하라(高天原)에서 내려와 이 땅을 다스리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된다. 그는 일본 천황가가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의 상징으로 모시는 삼종신기 – 거울, 검, 곡옥 - 와 곡물을 가지고 이 땅에 강림하였으며, 그가 처음 발을 디딘 산이 바로 기리시마, 곧 한국악 일대이다. 이후 일본 천황가는 이 신화를 자신들의 조상 신화로 내세워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이곳은 단순한 자연경관이 아닌, 신의 족적이 시작된 거점이었다. 그 신화적 무게는 오늘날에도 제례와 공연 예술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구지가’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수록된 한국 고대의 대표적인 제의가요다.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아홉 간(干)이 그를 맞이하며 부른 노래가 바로 이것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이 짧은 가사는 단순한 민요가 아니다. 이는 신적 존재를 소환하는 집단적 의례의 핵심이었으며, 그 안에는 고대 공동체의 정치적 상징성과 주술적 신앙이 짙게 녹아 있다. 특히 ‘거북이’라는 동물은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장수를 상징하거나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존재로 여겨졌기에, 단순한 동물 명칭이 아니라 상징적 코드로 읽어야 한다.
이와 유사한 구조는 일본의 ‘가구라(神楽)’에서도 발견된다. 가구라는 본래 일본 신도(神道)에서 신을 맞이하기 위해 연주되는 노래와 춤의 종합 예술로, 일본 전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규슈 지역, 특히 한국악이 위치한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 일대에서 전승된 고전 가구라는, 타카치호 요가구라와 기리시마 가구라가 있다. 이 중에 기리시마 가구라의 경우 가사가 구지가와 유사한 천손강림의 내용이다.
“기리시마의 신이여, 내려오소서
산의 정기, 우리를 지키소서
검을 들고, 악을 물리치리
풍요의 들판, 영원하리라”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이식한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지역의 가구라는 신을 모시고, 신의 강림을 기원하며, 신의 힘을 통해 공동체의 안녕을 빌고, 의례를 통해 신을 다시 보내는, 정교한 의식 구조를 갖추고 있다.
가야의 구지봉과 규슈의 한국악은 단순한 지리적 상징이 아니다. 두 장소는 각기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서 ‘신의 강림’을 둘러싼 고대 제의의 중심지였다. 구지봉은 김수로왕이 황금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신화를 품은 장소이자, 아홉 간이 머리를 조아리며 왕의 강림을 노래한 성역이다. 반면 한국악은 고대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에서 니니기노미코토가 하늘에서 내려온 장소로 여겨진다. 이 두 산은 각각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가 인간 세상에 첫 발을 디딘 신화적 지점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즉, 구지봉은 가야 건국의 신화를 열었고, 한국악은 일본 왕실의 신화를 연 무대였다.
이러한 지리적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 구지봉에서 불린 구지가는, 공동체가 하늘에서 내려올 존재를 맞이하기 위해 부른 제의적 합창이었다. 그리고 한국악에서 연행된 가구라는, 하늘의 신이 인간 세계에 내려와 이 땅의 신으로 자리 잡는 의례의 핵심 요소였다. 이 두 제례의 구조는 거의 동일하다. 하늘의 존재를 노래로 불러내고, 그 존재가 강림한 뒤 공동체는 새로운 질서 속에 들어선다.
구지가는 김수로왕이라는 난생(卵生)의 신화를 가진 왕의 출현을 요구했고, 가구라는 천손강림 신화를 기반으로 한 신의 등장을 요청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구지가의 상징인 ‘거북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라는 노래는 수로왕의 강림을 요청하는 집단적 의례의 목소리였지만, 여기서 거북이를 실제 동물로만 해석할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주류 해석에서는 거북이를 수로왕이 들어 있는 알 또는 그가 탄 상징적 매개체로 보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거북(龜)'이라는 존재가 수로왕의 도래 자체를 상징하는 상징적 동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구지’라는 말이 '거북(龜)'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지역 방언이나 고대어에서 왕을 부르는 존칭어 혹은 신성한 존재를 의미하는 고유명사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구지봉은 큰 사람 즉, 대왕의 봉우리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시각은 구지가의 해석을 단순한 동물과의 상징적 연결 이상으로, 보다 복합적이고 깊이 있는 의례 구조로 바라보게 만든다.
두 전통 고전의 음악적 구조 또한 비교할 만하다. 구지가는 반복과 리듬을 통해 집단의 일체감을 유도하며, 일종의 주술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원시적 형태의 노래다. 이는 선율보다 운율이 강조되는 형태로, 특정 음계를 따르기보다 상황과 목적에 따른 즉흥성과 상징성에 중점을 둔다. 가구라 역시 반복적인 리듬, 단조로운 선율 속에서 상징적 동작과 가사가 중심이 되는 제의 음악이다. 양자는 모두 ‘음악’이라기보다는 ‘의례적 성음 즉,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이며, 그것을 통해 인간과 신, 땅과 하늘, 현세와 초월 세계를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다.
더 흥미로운 것은 두 노래가 모두 ‘신의 현현’ 이후 새로운 질서의 정착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구지가는 김수로왕의 출현과 금관가야의 개국으로 이어지고, 가구라는 신의 하강 이후 지역 공동체의 결속과 풍요를 기원한다. 즉, 이들은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고대국가 형성기의 권력 정당화, 사회 통합, 민족 정체성 구축이라는 정치 · 사회적 함의를 내포한 복합 코드이다.
결론 삼아 몇 자 덧붙이자면, 구지봉과 한국악의 연결고리는 신화 이상의 현실적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특히, 천손강림 신화에 등장하는 니니기노미코토와 가야 김수로왕의 사라진 '7 왕자(七王子)'와의 관련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수로왕에게는 10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가 있었다. 그중 7명의 왕자가 하동 칠불사에서 수도한 후 구름을 타고 떠났다는 승운이거(乘雲離去) 기록이 김해 김씨 족보에 남아 있다고 한다. 왕권의 장자 승계 구조에 의해 왕위 계승에서 멀어진 이들 7 왕자의 이후 행적에 관한 구체적인 사료는 없다. 추론컨대, 이들이 도착한 곳이 지금의 일본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鹿児島) 지역이지 않았을까?
김해에서 구름을 타고 떠났던 이들 7 왕자는 신화적 존재로 화하여, 규슈 한국악에 천손 니니기노미코토가 되어 구름을 타고 내려왔을 법하지 않은가. 물론, 믿을 만한 사료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그렇게 추론하는 주장은 많다. 7 왕자를 기념하는 7 신사(七神社)를 포함해, 이들이 쌓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7개의 산성터, 고대 남규슈에 있었던 구노국(狗奴國)의 존재 등 이런저런 관련한 유적들이 그 근방에 산재해 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그리고 그곳과 멀지 않은 곳에 한반도 김해 지역을 연상케 하는 한국악이 있다.
한일 양국의 고대 신화와 의례 전통은 단절된 두 개의 상이한 문화가 아니다. 특히 규슈 지역은 한반도 도래 개척자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는 공간으로, 가야와 백제, 심지어 신라 출신의 기술자, 예인, 샤먼들이 건너가 뿌리를 내린 곳이다. 이들이 가져간 것은 단지 철기 기술이나 토기 양식만이 아니라, 하늘을 부르는 노래,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춤, 그리고 세계의 질서를 설명하는 신화였다. 구지봉과 한국악은 그 연결 지점이자, 문화적 다리의 양 끝이었다.
우리가 오늘날 구지봉의 전설을 다시 불러내고, 한국악 산기슭의 가구라를 다시 바라보는 이유는 그저 하나의 유사성을 찾기 위함이 다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이름을 지녔지만,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는 우리의 과거를 마주하기 위함이다. 구지가는 한국 고대의 목소리였고, 가구라는 일본 땅에 새겨진 그 메아리였다. 우리는 이 소리의 계보를 따라 걸으며, 다시금 묻는다. 신을 부른 자는 누구이며, 신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애쓴 이들은 누구인가. 그 질문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옛 이야기의 조각들을 찾게 될 것이다.
“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4회
기마민족설과 가야계 개척자: 에가미 나미오가 열어준 일본 고대사의 또 다른 문
일본 열도의 고대국가 성립 과정을 이해할 때, 우리는 보통 일본 내 자생적 발전, 즉 점진적 권력 통합과 지역 엘리트 간 연맹으로 야마토(왜) 정권이 탄생했다는 주류 인식을 떠올린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 통설에 균열을 일으킨 이론이 등장한다. 도쿄대학교의 동양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교수가 제시한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騎馬民族日本征服説)’이다. 이 학설은 단순히 외래인으로서 한반도인이 유입되었다는 차원을 넘어, 일본 열도의 권력 구조와 문화 양식 전반을 뒤바꾼 ‘체계적 충격’이 한반도를 통해 유입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에가미 교수는 동북아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고고학적 증거, 인류학적 비교, 민속학적 자료를 아우르며 당시로선 획기적인 통합적 접근을 시도한 학자였다. 기마민족설은 일본 고대국가의 기원을 외래 문명에서 찾으려는 급진적인 주장 이상이었다. 그것은 고대 동아시아의 인적 · 물적 흐름 속에서 일본이라는 정치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민족사적 관점에서 조명한 하나의 해석 방식이었다.
이 이론을 정립한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일본이 패전의 폐허 속에서 민족 정체성을 재구성하던 시기에, “일본은 원래부터 단일하고 순수한 문명의 연속체였다”는 보수세력들의 내재적 발전론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전후 일본 지식계에 만연한 천황 중심 사관, 문화적 자생론, 일본문화 우월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에가미 교수는 4세기 중엽 이후 즉, 일본 고분시대 중기에 갑작스레 등장한 기마 전사 문화, 철제 무기, 대규모 전방후원분, 그리고 말을 탄 지배계층의 출현에 주목했다. 이 변화를 자연스러운 내부 발전의 결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 이전의 유물 · 유적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고등 문화가 갑자기 발견(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열도에서 급격하게 나타나는 고고학적 변화는 자생적으로 설명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특히 대형 전방후원분의 출현, 철제 무기의 대량 사용, 마구와 기마 장비의 급속한 확산, 무사 계층의 성립, 그리고 집권적 권력 구조의 등장 등이 모두 새로운 외래 세력의 유입에 의해 촉발되지 않았다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시기부터 일본의 지배층은 단순한 부족장 연합체를 넘어서 중앙집권적 군사 권력을 바탕으로 하는 정권 형태, 즉 야마토왜 정권의 형태로 발전해 간다. 에가미 교수는 이 변화를 주도한 집단이 바로 한반도 남부, 특히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마민족 집단이라고 보았다.
에가미 교수는 이 기마민족의 기원을 동북아시아의 스텝 지역-풀만 무성한 평원 지역으로 몽골과 만주 일대-으로 봤다. 기원전 수세기부터 이 지역에선 말을 이용한 마상 기술이 뛰어났다. 이동성과 전투 능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부족 연맹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서서히 남하하며 중국 북부, 만주, 한반도로 문화적 압력을 가했다. 이 중 일부 집단이 삼한(마한·변한·진한)사회 내부로 흡수되거나 연맹체를 이루어 가야라는 정치적 단위로 발전했다. 그 중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던 세력이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기마민족의 특징은 그저 말을 탈 줄 아는 민족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마상 전투에 특화된 군사 문화를 바탕으로 한 정복 지향적 사회구조를 지닌 민족이라는 점에 있다. 이들은 기마술과 철제 무기를 기반으로 한 우수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으며, 동시에 제사 체계, 건축 기술, 정치 행정 조직 등 선진적인 국가 형성 능력도 함께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이 일본 열도에 이주했을 때, 일개 피난민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주체였다는 것이 에가미 이론의 핵심이다. 즉, 야마토왜 왕권의 핵심 엘리트는 외래 기마 귀족이며, 이들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에 정착하면서 지배 이데올로기와 물리적 권력 기반을 동시에 이식했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도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 가야 지역의 적석 목곽묘와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묘제 구조, 부장품 구성, 축조 방식, 순장 풍습 등에서 강한 유사성을 보이며, 특히 가야의 지배층 무덤에서 출토된 마구, 철기 무기, 장신구 등은 일본 열도의 동일 시기 고분에서 거의 동일한 양식으로 출현한다. 이는 일반적인 문화의 전파 정도가 아니라 실제 사람의 이동, 더 나아가 지배 구조의 교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문헌 사료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 일본의 고대 문헌에는 한반도계 귀화인(개척자)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많으며, 이들 중 일부는 야마토 정권 초기의 핵심 권력층으로 활동했다. 일본 천황가 역시 내부 혈통의 연속이 아니라, 복합적 융합의 산물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제15대 오진천황(応神天皇)은 모계가 백제 혹은 가야계라는 주장 - 일본 역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郎) 처럼, 그가 백제 21대 개로왕의 동생 즉, 왕자 곤지왕이라고 해석하는 국내외 학자들도 꽤 있다 - 이 강하게 제기되며, 일본 내 일부 고대 귀족 가문도 한반도 출신 개척자 혈통임을 자랑스레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일본 고대 씨족 일람 서적인 『신찬성씨록』에는 백제, 신라, 가야 등지에서 건너온 수많은 성씨가 일본의 귀족 가문으로 편입된 내력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들 중 대표적인 하타씨(秦氏), 스가와라씨(菅原氏), 오토모씨(大伴氏) 등은 소위 말하는 이주민 가문이 아니라 왜나라의 정치, 경제, 종교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한 주체였다.
에가미 교수는 기마민족이 보통의 외래 세력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고대 국가의 형성 주체라고 주장했다. 즉, 야마토 왕권의 실질적 건국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온 기마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들의 영향이 행정 제도, 군사 조직, 고분 양식, 무기 체계, 제사 문화, 농경 기술, 심지어 왕위 계승 제도에까지 미쳤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초기 야마토왜 정권의 행정 체계는 읍성 단위의 가야 지역 행정 모델과 유사하며, 기병 중심의 군사 편제도 가야의 집단 전투 방식과 상당히 닮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일본 사회에서 상당한 지지와 동시에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전후 일본은 천황제의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했고, ‘기마민족이 정복하여 야마토 정권을 세웠다’라는 주장은 곧 천황의 기원을 외래로 본다는 점에서 민감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일본 우익 진영은 에가미를 반일학자, 외세 사주자 등으로 몰아붙였고, 일부 언론은 에가미 교수의 주장을 마치 천황제 부정 혹은 공산주의 세력의 역사 왜곡에 동조하는 발언으로 마녀사냥 하기도 했다. 그를 ‘일본의 뿌리를 부정하는 자’로 비난했다.
가야나 백제, 심지어 중국의 동북방 기마민족과의 연관성을 언급한 그의 발언을 트집 잡은 것이다. 학계 내부에서도 에가미 교수의 주장은 고고학적 사실을 과잉 해석한 ‘음모론적 역사관’으로 폄하되었으며, 실제로 에가미는 연구비 지원 중단, 논문 발표 기회 박탈, 학회 초청 제외 등 실질적인 탄압을 경험했다. 그 당시의 일본 사회에서 '외래 기원'이라는 단어는 거의 금기어와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역사는 민족의 자존심이 아니라, 사실의 탐구 대상이어야 한다”라고 일갈하며, 역사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에가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일본은 과연 외부 세계로부터 독립적으로 형성된 문명인가, 아니면 한반도와 대륙으로부터의 수많은 자극과 영향을 통해 진화해 온 ‘융합적 국가’인가. 안타깝게도 에가미 교수와 같은 양심적 지식인의 목소리는 1990년대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일본 내 보수우익들의 탄압과 압력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왜곡 역사론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기마민족설은 단지 군사 정복의 역사 해석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정치학, 국경을 넘는 역사 서사, 그리고 정체성의 열린 해석에 대한 도전이자, 민족이동과 문화 전파, 기술 이전과 정치권력의 재편이라는 복합적 역동성 속에서 동아시아 고대사의 본질을 되묻는 시도였다. 한반도의 가야가 단순히 세력 다툼의 와중에서 패배한 후 사라진 지역연맹체가 아니라,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문화적 기틀에 기여한 동력이었다면, 이는 한국사와 일본사가 단절된 두 개의 다른 역사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가미 교수는 일본이 스스로를 바라 보는 거울에 '다문화적 기원'이라는 균열을 냈고,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 또한 다시 보게 된다.
기마민족설은 오늘날 한일 양국이 공유하는 고대사의 공동 기반을 탐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우리는 역사를 민족 중심 서사로 환원하는 데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그 역사를 움직인 것은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교류했던 사람들, 즉 도래인, 정복자, 장인, 제사장, 무사 등 개척자들이다.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기마민족설은 바로 그 사람들의 발자취를 통해 국가의 기원을 추적하고, 민족이라는 개념조차 초월한, 보다 넓은 역사 인식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에가미 교수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도전적인 유산이다.
에가미 교수는 일본을 고립된 섬나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동북아 전체의 인류 이동과 문화 융합 속에서 일본을 바라 보았다. 한반도와 대륙, 열도는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공간이었으며, 일본의 고대사도 그 흐름 속에서 복합적으로 형성된 결과물이라는 것이 그의 기본 관점이다. 그는 야마토 정권 초기의 문화적 DNA에는 확실히 한반도의 유전자가 섞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 지적은 지금도 많은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계속 지지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이론을 한편의 정복 내러티브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거국적 인구 이동과 정치 융합의 상징적 모델로 볼 수 있다. 고대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은 일본 열도의 주변인으로서가 아니라 권력의 중심에서 국가 형성의 실질적 동력이었던 '이방의 창조자'였다.
“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3회
“고령에서 건너간 장인들, 야마토왜에 금속을 심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소리 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그 침묵의 저편에서 우리는 금속의 불꽃과 망치 소리, 그리고 땀과 기술로 새겨진 이주의 흔적을 포착할 수 있다. 가야, 특히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고령 지역에서 야마토로 건너간 장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술 이주의 차원을 넘어서, 한반도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일본 열도로 스며들었던 실질적 증거이자, 고대 동아시아 해양 교류의 중심축을 이룬 이야기다.
일본 열도에 철의 불꽃을 일으킨 이들이 누구였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단연 ‘가야’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남부, 특히 오늘날의 경상북도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했던 대가야는 비단 정치와 제사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고도의 금속 가공 기술을 가진 장인집단의 본산지였다.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토 정치체제의 물리적 기초, 다시 말해 철기 기반의 제도와 건축, 무기 생산의 토대를 놓았다는 주장은 이제 단순한 가설을 넘어서는 실증적 증거로 하나씩 뒷받침되고 있다.
야마토(왜) 시대 전기 무렵, 일본은 급격한 정체성 형성의 시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철제 무기, 제련로 유적, 금속 공예품, 그리고 고분 내 금속 장신구들은 일본 자체의 고유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도성을 띤다. 바로 여기서 가야계 도래 장인의 존재가 부상하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이주민이 아닌, 제사와 건축, 장례와 군사까지 포함하는 '기술-정치 복합체'의 일원이었으며,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에 있어 실질적 기반을 구축한 장본인들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오사카 가시와라시(柏原市)의 ‘오오가타 유적(大県遺跡)’이다. 대규모 제철 유적으로, 일본 고분시대로 알려진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에 걸쳐 이곳에서 활발한 제철 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유적에서 발굴된 다양한 철기 제작 도구와 제련로 흔적이 그것을 입증하는데, 이는 가야의 선진 제철 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된 사례로 보인다. 유적에서 출토된 철기 제작 도구와 기술이 가야 지역의 그것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역시, 오사카의 가타노시(交野市)에 자리한 ‘모리 유적(森遺跡)’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데, 고대 제철 유적으로 6세기 전후에 대규모의 활발한 제철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한다. 모리 유적은 고대 왜나라의 중심부였던 오사카와 나라의 중간부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자, 경제적 번성을 누리던 지역이다. 특히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부뚜막 형태의 건조물이나, 시루형 토기의 발굴 등을 이유로 이곳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개척자들의 집단 거주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부엌에 설치된 부뚜막이나, 시루솥 위에 올려 놓고 음식물을 찌는 데 사용하는 시루는 전형적으로 한반도에서만 보이는 생활 시설이자 생활 용기이기 때문이다. 모리 유적 주변에는 많은 고분들이 산재해 있는데, 아마도 이 지역에서 제철 산업에 종사하던 가야계 개척자들의 고분일 것으로 짐작한다.
나라현 덴리시(天理市)의 ‘후루 유적(布留遺跡)’ 또한 고대 제철 유적으로 높이 평가되며, 철기 제작과 관련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지역도 야마토 왕권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당시 철기 제작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야마토 정권은 이와 같은 제철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본 열도 통일에 성공한다. 이곳의 유적과 유물이 증언하는 바는, 여전한 가야의 뚜렷한 영향이라 하겠다. 실제로 이들 유적과 주변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와 도구들, 특히 철제 검과 쇠못, 마구(馬具)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거의 동일한 기법과 양식을 보여준다.
가야 장인들의 이주는 우연적인 사적 이주라기보다, 정치 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이주로 보아야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속일본기(續日本紀)』는 이러한 교류의 자취를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그 가운데 특히 신공황후(神功皇后) 시기와 응신천황(應神天皇)기의 기록, 그리고 백제 · 가야계 귀화인(개척자)에 관한 기술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공황후(神功皇后) 시기부터 대가야와 야마토 간의 관계는 단순한 외교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인 기술과 인력의 이동을 동반한 정치적 동맹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5세기 중반, 가야 지역이 백제-신라 양강구도 속에서 점차 세력 위축의 위기에 놓이자, 많은 기술자와 장인들이 ‘개척자’로 일본에 이주했고, 이들은 야마토 왕실에 의해 귀화가 허락되며 국가적 기반 기술자로 배치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이동이 자발적 개인의 이주가 아니라, 정치 권력에 의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라는 점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원문 중 관련 구절:
原文:
「是歲、遣荒田別・鹿我別、以問新羅之罪焉。卽以、譬大加羅國主、令來貢職。」
「又遣阿知使主・都加使主、以求良工百濟・高麗・新羅。」
해석:
"이 해에 아라타와케와 카가와케를 보내 신라의 죄를 물었다. 그리고 대가야국의 왕에게 명하여 조공을 하게 하였다."
"또한 아치노오미와 츠카노오미를 보내 백제, 고구려, 신라에서 우수한 기술자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위의 부분이 한반도와 왜나라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인데, 이런 사례가 여럿 있지만 일부러 이 원문을 가져온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이전의 양국 간 교류 기록이 있기는 하나 이 기록이 그나마 조직적이고 실질적인 기술과 인력의 이동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가장 이른 시기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서라는 『일본서기』의 왜곡 문제도 함께 거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이 발생하는 근본적 이유는 한반도로부터의 문화 유입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왜나라 우위의 역사를 기술하고 싶은 그들의 심리 즉, 콤플렉스 때문이다. 기술력이나 문화적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이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기술과 문화의 전파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우수한 문화가 널리 향유된다. 어찌 되었든 여기서 『일본서기』가 주장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었을 거다.
"당시 일본은 문화나 기술 면에서 아직 미발전 단계였고, 가야는 철기 문명과 공예 기술을 보유한 우수한 나라였다. 일본은 이를 배우기 위해 가야와 동맹관계를 맺고 가야의 기술자와 문화를 수용했다."
문화 전파의 중개자로서, 고령을 비롯한 가야 지역 출신 장인들의 역할은 단순한 조역이 아닌, 역사 창조의 주체였다. 앞의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 설화와 그 이후 기록들은 실제로는 가야계 기술자 및 장인층의 집단적 이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신공황후의 명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가야에서 인재를 데려왔다"는 표현은 실질적으로 당시 왜나라가 고도로 조직된 기술 이주 정책을 수행했음을 뜻한다. 여기엔 왜나라의 정치적 야심뿐 아니라, 가야 지역 내의 정세 변화와 정치적 압박 속에서 이주를 택한 이들의 현실적 선택도 반영되어 있다.
가야는 삼국에 비해 영토는 작았지만, 해상 교역과 제철 기술에서 탁월한 위상을 자랑하던 나라였다.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은 대가야는 철 생산과 무기 제조, 특히 철제 무기와 갑옷, 말 투구, 철솥 제작 등에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수의 철기 유물과 금속 공예품들은 이러한 가야 장인의 기술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철기 문화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금속 도구와 무기의 질적 향상이 나타나는 시점이, 바로 가야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4세기 이후와 겹친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야마토(왜) 정권은 이러한 기술력을 필요로 했고, 그 필요는 단순한 경제적 교역을 넘어 인재의 이주를 동반했다. 이 과정에서 고령 출신 장인들이 주축을 이루는 가야계 기술자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 궁궐 건축, 무기 제작, 제례 도구 제조, 불상 주조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 고대 사원 건축에서 보이는, 기둥 상부에만 공포를 배치하는 주심포 양식이나 금속제 제례 기구, 초기 불상 제작 기술 등은 가야와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 중 다수의 전통은 ‘야마토노 아야씨(東漢氏)’와 ‘다카무쿠씨(高向氏)’ 등 한반도계 개척자 가문들을 통해 계승되었다. 이들은 단순한 기능공이 아니라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의 문화 · 정치계의 중심에 있었던 집단이었다.
특히 주목할 씨족 중 하나가 ‘야마토노 아야씨’이다. 『일본서기』 및 『속일본기』에 ‘조정의 금속 제례와 건축에 관여한 개척자 가문’으로 등장하며, 그 출신이 한반도라는 점, 특히 가야계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일본 고대 사회 내 가야계 기술자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일본서기』 – 응신기(應神紀)
原文: 「是歲、百濟人阿知使主、率其徒黨、來歸化焉。仍居倭漢之地、故號曰倭漢氏。」
해석: "이 해에 백제인 아치노오미(阿知使主. 한반도 출신 개척자로 그 출신이 백제인지 가야인지는 불분명하다)가 그 무리를 이끌고 귀화하였다. 그들은 야마토의 한 지역에 거주하였으므로, '야마토노 아야씨(倭漢氏)'라 불리게 되었다."
『속일본기』 – 덴표호지(天平寶字) 6년(762년) 6월 조
原文: 「東漢氏之先、阿知使主也。奉詔而渡來、始仕天朝。因居倭郡、是以號曰倭漢。」
해석: "동한씨(東漢氏)의 선조는 아치노오미(阿知使主)이다. 조정의 명을 받고 건너와 천황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야마토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으므로, '야마토노 아야씨(倭漢)'라 칭하였다."
‘야마토노 아야씨’는 궁궐 및 신전 건축뿐만 아니라 제사의 집행과 관장, 국가 의례의 관리 등에도 관여하며, 단순한 외래인 기술자라기 보다는 문명 이식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장인들의 기술이 단지 ‘이전’ 및 '도입'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착’과 ‘변용’을 거쳐 일본 고유의 기술 체계로 흡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가야계 기술자의 이주를 하나의 문명적 충격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듯 금속 제련 기술의 이식을 통한 문화의 전수는 단순히 무기나 농기구 제작에만 그치지 않았다. 고대 일본의 무덤양식인 고분의 형성에도 가야의 영향이 깊이 스며있다. 일본 고분시대 전기의 주요 무덤에서 보이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형식은 가야의 계단식 석실고분이나 봉토형 고분에서 유래한 구조적 특성을 보여주며, 축조 기술 역시 한반도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나아가 고분 내부에서 발견되는 금속 무기나 갑옷, 장식품 등의 출토품은 가야계 기술의 직접적 유입을 입증하는 물적 증거가 된다.
고분 축조 기술, 특히 석실형 고분의 양식이나 석관의 배치방식에서도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유사한 구조가 일본 각지에서 발견된다. 나라현 이코마시(生駒市)에 자리잡고 있는 ‘이코마 고분군(生駒古墳群)’ 등에서 출토된 일부 고분은 내벽 석재 처리 방식, 봉토 구조 등에서 한반도 양식이 명확히 드러나며, 이는 단지 묘제만이 아닌 장례 의식 자체의 이식 가능성까지 보여준다.
한반도 남부는 삼국 통일 전야의 전쟁과 연맹, 분열이 끊이지 않았고, 대가야 역시 이러한 격랑 속에서 세력의 부침을 겪었다. 정치적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또는 야마토 정권과의 동맹 강화를 위한 정치적 교섭의 일환으로, 가야 왕실과 귀족들은 기술자와 장인을 인재로 삼아 보내거나 이주시키는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자들은 일본에서 ‘도래인(渡來人)’이라는 명칭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그 정체성은 결코 단절되지 않았다. 야마토노 아야씨를 비롯한 도래인 계열 가문들은 자신들의 출신 지역과 문화를 기억하고 계승하며, 그것을 일본 속에 뿌리내리게 했다. 도래인으로 갔으나 개척자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문화의 전파나 식민적 지배가 아닌 주체적 이동이었으며, 오히려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뿌리’ 중 하나가 가야였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실마리가 된다. 우리는 지금껏 ‘일본의 영향’이라는 말에는 익숙하지만 ‘일본을 만든 한반도’라는 관점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왔다. 그러나 고고학 유물, 문헌 기록, 도래인 가계도, 그리고 지역 전승을 종합할 때,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일본을 만든 다리 중 하나는, 고령에서 시작된 가야의 철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령은 단순한 변한의 일개 거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아시아 제철 기술의 중심이었으며, 해상 무역의 허브였다. 그곳에서 자란 기술자들은 단순히 쇠를 두드린 것이 아니라, 문명을 단련했다. 그리고 그 문명은 일본 열도에 전파되어 야마토 정권의 기초를 다졌다. 이는 침략이나 정복의 역사가 아니라, 기술과 문화의 이동이며, 주체적 이주의 역사이다. 한민족의 기술력과 문화력이 국경을 넘어 또 하나의 문명을 꽃피운 사례인 것이다.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경상도 고령이 속한 변한에서 철을 생산하여 왜와 낙랑 등에 수출한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오환선비동이전)
原文: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해석:
”이 나라에서는 철이 나며, 한(韓), 예(濊), 왜(倭)가 모두 와서 사 갔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모두 철을 사용하니, 이는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한 변진은 철을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 고대 문화 속에 숨겨진 가야의 흔적을 재발견함으로써, 한반도의 역사적 위상과 기술적 역량을 재조명해야 한다. 이는 ‘침탈당한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건너가 문명을 전한 과거’를 회복하는 일이다. 가야의 기술자들은 결코 일본에 의해 끌려간 피지배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선택했고, 그들의 기술은 일본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변화의 불씨는 지금도 일본의 고대 유적과 유물, 제례와 전통 속에 찬란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고령에서 출발한 장인의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곳은 열도를 가로질러 문화의 축을 세웠고, 철의 열기 속에서 두 민족의 역사적 접점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그 금속의 불꽃 속에서, 묻혀 있던 우리의 역사를 다시 꺼내어야 한다. 가야 장인들의 일본 이주는 곧 고대 일본의 국가 형성과 문화적 기반을 이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철의 길’로 연결된 고령과 야마토, 그 중심에는 정치적 연맹의 이면에 존재했던 기술자(개척자) 집단이 있었으며, 그들이 남긴 유산은 일본 곳곳의 유적과 고분, 유물 속에서 오늘날까지도 생생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2회
대가야의 흔적을 따라가다―고령에서 일본까지, 왕권과 제사의 계승
한반도 고대사에서 가야, 특히 대가야는 오랫동안 주체적인 고대 문명으로 재조명되지 못했다. 삼국 중심의 사관 아래에서 ‘가야’는 신라의 부속적 존재로 격하되었고, 일제강점기의 식민사관은 가야를 왜(倭)의 영향을 받은 주변부 국가로 왜곡했다. 그러나 새롭게 드러나고 있는 여러 유물들은 대가야가 단순히 ‘신라에 병합된 고대 연맹’이 아니라, 독자적인 왕권과 종교적 권위를 지닌 고등 문화국가였으며, 그 문화적 영향은 일본 열도에까지 미쳤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오늘날의 경상북도 고령군 일대, 낙동강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대가야는 그 지리적 조건과 특유의 문화권 형성으로 인해 일본열도에 깊은 족적을 남긴 세력 중 하나로 평가된다. 흔히 ‘후기 가야연맹’의 주도세력으로 불리는 대가야는 5세기 중반 이후 강력한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며 백제 및 신라, 그리고 일본 열도 야마토 정권과도 밀접한 외교 및 인적 교류를 전개했다. 그러나 대가야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단순한 외교적 수준을 넘어서 정치 · 종교 · 장례문화 등 일본 고대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적 구조에까지 스며들어 있었음을 고고학적, 문헌사료적, 그리고 제례문화적 분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본 회차에서는 특히 대가야의 제사 문화와 왕권 체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일본의 신사 제도 및 신관계 통치 시스템-일본 고대 국가가 신(神)을 중심으로 구축한 정치적 통치 체계-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면밀히 추적하고자 한다.
대가야는 고령 지역을 기반으로 발전하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42년~117년) 가문에 의한 정치적 통일 구조를 구축했다. 이 중심에 있었던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은 단순한 묘역이 아닌 종교적 · 정치적 상징공간이었다. 특히 지산리 44호분은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과 유사한 원형의 전방후원분 구조를 보이며, 한반도식 봉토분과 일본식 왕릉구조가 교차하는 상징적 지점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를 단서로 우리는 대가야 왕권 체계가 단순한 족장연합이 아닌, 왕을 중심으로 한 신권 중심의 통치 체계를 확립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고분 내부에서 출토된 다양한 청동 제기류와 순장된 인골, 철제 무기류는 제례와 군사, 그리고 통치 권위의 일체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와 유사한 구조의 고분들이 일본열도 특히 간사이(関西) 지역과 규슈(九州) 북부를 중심으로 다수 발견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고분이 구마모토현(熊本県)에 위치한 ‘에타후나야마 고분(江田船山古墳)’, 오사카의 '모즈 · 후루이치 고분군(百舌鳥・古市古墳群)'이다.
특히, 모즈 · 후루이치 고분군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다이센 고분(大仙陵古墳, 세계 3대 고분 중 하나이며, 일본 16대 인덕천황릉으로 추정하나 정확하지 않다)’을 포함한 44기의 고분들이 밀집해 있다. 규슈 지역에는 대마도 옆에 있는 이키섬의 ‘이키 고분군(壱岐古墳群)’으로 이곳에는 현재 전방후원분 2기-쓰시마즈카 고분(対馬塚古墳), 소우로쿠 고분(双六古墳)-, 원형 고분 4기-사사즈카 고분(笹塚古墳), 효우제 고분(兵瀬古墳), 카케기 고분(掛木古墳), 오니노이와야 고분(鬼の窟古墳)- 등 총 6기의 고분이 밀집해 있다. 이 고분들에서는 대가야의 유물과 매우 유사한 기법의 철제 무기, 갑옷, 심지어 동일계통의 청동 제기류까지 발견되며, 이는 단순한 문화적 영향이라기보다 고도의 기술 이주와 제례체계의 전수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다이센 고분 ( 大仙陵古墳)
일본 고대의 신사 제도 역시 대가야의 중교적 풍습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오사카나 나라현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한 고대 신사들 중 일부는 대가야계 이주민 집단과 연계되어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예가 나라현 사쿠라이시의 ‘오오미와 신사(大神神社)’이다. 오오미와 신사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이다. 이 신사는 미와산(三輪山)을 신체(神体)로 삼아 본전을 두지 않고 산 자체를 숭배하는 독특한 제례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제례 방식은 대가야의 제사 문화와 유사한 형태라는 분석이 있다. 대가야는 자연물, 특히 산이나 고분을 신성시하여 제사의 중심지로 삼는 전통이 있었으며, 이는 오오미와 신사의 산악 숭배와 유사한 신앙 형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역사서인 『고사기』나 『일본서기』 신대기 편에는 오오미와 신사의 주제신인 오오모노누시(大物主神)를 외래계 도래신으로 간주하는데, 이를 토대로 일부 학자들은 이 신의 기원이 한반도, 특히 대가야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는 대가야계 이주민들이 일본 열도에 정착하면서 자신들의 신앙과 제례 문화를 전파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교토 야와타시에 자리한 ‘이와시미즈 하치만구(石清水八幡宮)’ 신사 역시 대가야의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와시미즈 하치만구는 859년에 창건되어, 일본 3대 하치만구(八幡宮)중 하나로 꼽힌다. 하치만신(八幡神)은 전쟁과 국가 수호의 신으로, 이 신사는 헤이안 시대부터 국가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미쓰 등 일본 역사상 중요한 인물들이 이 신사의 복원과 확장에 관여하였으며, 현재 본전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하치만신(八幡神)은 일반적으로 일본 제15대 응신천황(應神天皇)이 신격화된 존재로 여겨지는데,-일본 역사서 『속일본기(續日本記)』 기사 중 “八幡大菩薩ハ、 應神天皇ノ御神靈ナリ(하치만 대보살은 응신천황의 신령이시다.)”- 응신천황은 한반도계 혈통과 연관된 인물로 보는 학설이 많다. 대가야는 강력한 제사 문화를 통해 왕권을 신성화한 국가였다. 하치만 신앙 역시 단순한 무사의 수호신이라기 보다는 왕권의 정당성과 연결된 종교 이념으로 작동했고 이러한 구조는 대가야적 제사 문화의 영향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본 열도에 존재하는 이들 신사의 공통점은 단지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 아니라 왕실과 귀족, 그리고 특정 씨족 집단의 신권을 대행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기능하였다는 점이다.
일본 신사 전경
이 과정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씨족 집단이 바로 '아야계(漢氏, 東漢氏)' 집단이다. 『속일본기』와 『일본서기』에는 ‘한인(漢人)’ 혹은 ‘(東漢. 야마토노 아야)’라는 명칭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이들이 신사 제례와 국가의 제천의례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아야씨는 대체로 5세기 전후 한반도에서 건너온 집단으로, 이 중에서도 특히 대가야계 귀족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본서기』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 14년조:
是歲, 初令西文氏, 東漢氏等, 掌典籍焉.
이 해에 처음으로 서문씨(西文氏, 한반도계 성씨)와 동한씨(東漢氏, 한반도계 성씨)등에게 전적(典籍, 문헌과 기록물 관리를 의미하나, 보다 포괄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당시 왜나라에는 글을 읽고 쓰는 이가 많지 않았음을 고려해야 하므로 이는 국가 기록물 전체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관리로 해석해야 한다)을 맡기도록 하였다.
『일본서기』 유랴쿠천황기(雄略天皇紀) 2년 5월조:
是月,詔曰:「使東漢直駒等造呉服。」
이달에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동한직구마(東漢直駒)등으로 하여금 오복(吳服, 오나라 계통의 의복으로 제례복이었을 것이다. 고대에는 실을 짜고 의복을 제작하는 기술은 대단한 노하우가 요구되는, 장인에 의한 하이테크산업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 역할의 막중함을 짐작할 수 있다)을 만들게 하라.” 하셨다.
『일본서기』 진구 황후기(神功皇后紀) 보주 3년조:
是歲,百濟人阿直岐、王仁等來朝。於是、阿直岐獻書、并進千字文。由是、始置史部、東漢氏是也。
이 해에 백제인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등이 입조하였다. 이때 아직기가 책을 바치고, 천자문을 올렸다. 이로 인해 사부(史部, 제례 기록 및 역사를 기술하는 부서로 당시 최고의 지식인 집단이었다)가 설치되었으니, 곧 동한씨(東漢氏)이다.
『속일본기』덴무천황(天武天皇)기에는 동한인(東漢人)이 제사행정에 종사한 기록이 나오며, 이는 단순한 외래 기술자가 아닌 고도의 제례 지식을 전수받은 신관계 귀족 집단이었음을 시사한다.
『속일본기』 덴무천황기 제9년(681년) 3월조:
三月壬申,詔曰:「自今已後,造神祇官。祭事,令東漢人所知之。」
3월 임신일에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지금부터 이후로는 신기관(神祇官, 제사 관련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당시의 왕과 제사장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이 역시 막중한 자리임을 알 수 있다)을 설치하고, 제사 업무에 있어서는 동한인(東漢人)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라." 하셨다.
『일본서기』
이러한 한반도계 도래 문화 의존 구조는 일본의 신사 제도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남겼다. 첫째, 가계에 기반한 신관 세습 구조이다. 대가야에서는 제사를 맡는 사람이 특정 가문이나 왕족에게 세습되었다. 이 전통이 일본에도 전해져서 일본 신사에서도 신을 모시는 사람으로 신관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이들은 특정 귀족 가문에서 세습되는 구조로 고착되었다. 이세신궁에서는 황족 여성이 신을 모시는 역할을 했다.
둘째, 신관의 정치적 기능 확대이다. 대가야에서는 제사장이 단지 종교인에 머무르지 않고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면서 신의 뜻을 받는 사람이라는 정치적 권위에 무게를 더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천황이 직접 신을 모시는 제사를 주관하면서 정치적인 정당성을 만들었다.
셋째, 철제 무기와 제기(祭器)를 통한 신의 강림 표현 방식 등이다. 대가야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철로 만든 무기나 도구를 사용했다. 이런 물건들은 그저 무기가 아니라, 신이 머무는 용기, 혹은 신이 깃든 상징물 같은 것이 된다. 일본 신사에서도 비슷하게 검, 거울, 구슬 같은 신물을 사용하는데 이는 신이 깃든 물건이라 여겼다. 천황의 상징인 삼종신기(三種神器)역시 같다. 일본 천황가는 신화 속의 신기한 보물이라 여겨지는 거울‘야타노카가미(八咫鏡, 팔지경)’, 검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天叢雲劍, 천총운검)’, 곡옥 ‘야사카니노마가타마(八尺瓊勾玉, 팔척경구옥)’를 천황이 지닌 종교적 ·권위적 증거로 숭배한다. 신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특별한 존재로서 왕의 권위를 부각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두 대가야 후기의 정치적 · 종교적 제도와 직결된다. 특히 대가야의 국왕은 동시에 ‘제사장’의 역할을 하며 신령과의 중개자였다. 이 중개자의 위상은 일본의 고대 천황제 및 신궁 체계에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이는 훗날 미에현 이세시에 위치한 ‘이세신궁(伊勢神宮)’이나 교토 우지시의 ‘우지신사(宇治神社)’등의 제도적 기반이 된다. 이세신궁의 경우 천황가의 신령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곳으로 천황이 제사장이 된다. 우지신사는 우지 가문이 세습적으로 신관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 신사의 특징은 제사장은 가문의 혈통과 정치권력의 보유자라는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이는 대가야 후기의 제사장은 곧 왕이라는 구조와 일치한다.
고고학적 유물로 보자면, 야마토 지역의 일부 고분에서는 대가야식 갑옷과 비슷한 철제 무기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오사카 ‘히라노 · 오오가타 고분군(平野 ·大県古墳群)’ 등지에서는 대가야계 양식의 철제 모루나 제기류가 다수 확인되었다. 또 일본의 일부 제기에는 한반도 남부산 계통의 청동제 기술이 응용된 흔적이 발견되며, 이 기술은 대가야 특유의 금속공예 전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전통은 단순히 기술적 전수가 아니라, 왕권과 신권의 일체화라는 정신적 전통의 계승이기도 하다. 대가야는 자신들의 정치 권위와 신성성을 철기와 제례, 그리고 거대한 묘역 구조를 통해 표현했으며, 이러한 상징 체계가 그대로 일본의 신사 건축, 고분 건조 방식, 그리고 왕실 제례 제도에 이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철제 제기류가 신사의 핵심 유물로 전시되고, 신사가 단지 ‘제사의 공간’이 아닌 ‘권위의 중심’으로 기능하게 된 배경에는 대가야계 신관 집단의 문화 전수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대가야는 단순히 가야연맹의 말기 국가가 아니라, 신권과 철기의 복합체를 통해 야마토 정권의 정신적 기초를 제공한 고대 한반도 세력이었다. 우리가 일본의 고대 신사 제도, 고분 구조, 제사 의식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대 한반도의 흔적은 대개 대가야와의 관련성 속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이는 동아시아 고대사의 재구성이라는 측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1회
"일본 열도에 남겨진 가야의 흔적: 사라지지 않은 기억"
가야는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진 듯하지만, 실은 사라진 적이 없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이 말이 다소 생뚱맞거나 의아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한반도 남부의 여러 소국 연맹이었던 가야는 기원후 6세기 중엽까지 제철 기술과 해상교역을 바탕으로 나름의 세력을 형성했다. 하지만 562년 대가야가 최종적으로 신라에 병합되며 역사의 중심 무대에서는 물러났고, 이후 수백 년 동안 '부록적 존재'로만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서 다시 바라보면, 이 작고 복잡한 나라의 흔적은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깊고, 무엇보다도 지속적이었다.
가야와 일본 열도, 단순한 이주가 아니었다
일본 열도에서 발견되는 다수의 유물, 유적, 문화재, 사찰, 고분군 등을 그저 '한반도 계통'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통칭하곤 한다. 그러나 이 중 상당수가 가야계 개척자들의 자취라는 점은 아직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후쿠오카, 사가, 구마모토 등 규슈 지역과, 야마구치, 오사카, 나라, 교토에 이르기까지 일본 고대 문화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지역들에는 가야계 인물과 집단이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들은 단순히 흘러 들어온 기술자나 유민이 아니라, 체계적인 기술과 제사 지식, 심지어 정치 제도까지도 전달한 '문화 이식자'였다.
예를 들어, 고대에 편찬된 일본 역사서 『속일본기』에는 아야씨(東漢氏), 다카무코씨(高向氏), 사키씨(狭城氏) 등 한반도계 귀족 가문이 신라 · 백제 출신으로 소개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실질적으로는 가야계—특히 대가야나 금관가야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아야씨는 신사 건축과 궁중 제의, 천문과 복식, 금속공예에 이르기까지 조정 핵심 기술을 담당했다. 이는 단지 한 명의 귀화 인물이 아니라, 일종의 전문가 네트워크가 조직적으로 일본 조정과 융합되었음을 시사한다.
고분과 철기, 묻힌 시간 속에서 되살아나는 목소리
후쿠오카현의 이토시마 평야나, 사가현 카라쓰 지역의 고분군은 한반도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과 여러 구조적 유사성을 보인다.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3세기~6세기 일본 고분 시대에 등장하는 대표적 무덤 양식) 형태가 일본 고유의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 중 상당수는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 덧널(목곽)을 짜고 그 위에 냇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봉토를 덮어 쌓는 무덤 양식) 계통과 혼합된 구조를 보이며, 특히 내부 석실의 배열이나 부장품 구성 방식이 가야 고분과 매우 닮았다.
이를 구조적 유사성과 상호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구체화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내부 석실의 형태를 보면, 규슈 지역의 일부 전방후원분 내부에서 가야 돌무지덧널무덤과 유사한 횡혈식 석실 구조가 발견된다. 또한 무덤 속 부장품 역시 장검, 철기류, 토기 등으로 이것들의 배치방식이 서로 유사한데 특히 규슈 고분에서 가야계 토기나 무기가 출토되는 사례도 있다. 봉토 형식에서도 흙만 덮는 일본식 전방후원분과는 이질적이게도 돌을 혼합하여 쌓는 적석식 요소가 규슈 일대의 고분에서 발견된다. 대가야나 금관가야 고분과의 유사성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대표적으로 구마모토현(熊本県)에 위치한 '에타후나야마 고분(江田船山古墳, 5세기 후반)'이다. 전방후원분이기는 하나, 내부 석실은 횡혈식으로 돌을 쌓은 적석구조가 일부 확인이 되고, 대형 철제 무기와 방패, 가야계 장검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전방후원분과 돌무지덧널무덤의 예
가야에서 건너온 이들은 철을 만들 줄 알았고, 철을 다루어 무기를 만들 줄 알았으며, 철제 농기구로 새로운 농업 혁명을 이뤄냈다. 특히 일본 열도의 서북부즉, 규슈 북부와 야마구치, 오카야마 지역에는 지금까지도 대형 제철 유적지가 다수 남아 있다. 그중 일부는 고령 지역의 제철 슬래그(쇳물 찌꺼기)와 동일한 성분 분석 결과를 보였으며, 이는 실제로 고령계 개척자가 해당 지역에 대규모로 정착했음을 시사한다.
야마구치현 히카리시(山口県光市) 지역에서는 탄소연대측정과 고고학적 층위 분석을 통해 5세기 초부터 시작된 고온 제철로 흔적이 확인되었고, 여기에 동반 출토된 철제 농기구와 무기는 고령 대가야 지역에서 확인된 것과 양식이 거의 일치했다. 이는 단지 기술의 전파가 아니라, 기술 집단의 이주를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신사의 구조와 제례 방식에 남겨진 가야의 제사 체계
가야는 그저 철을 다루는 기술자 집단이 아니라, 신관 계급을 포함한 제사 국가이기도 했다. 대가야 왕실은 고대 동아시아에서 드물게 왕권과 제사권이 결합한 정치 구조를 유지했고, 이는 곧 일본의 야마토 왕권 초기의 제사 시스템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컨대, 일본 신사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평가받는 '이즈모 대사 (出雲大社, Izumo Taisha)'는 제사의 주체가 ‘천손강림’이나 황족 중심의 천손 제사 구조에 종속되지 않는 토착의 신관 계층이라는 점에서 대가야와 유사한 이중 권위 체제를 떠올리게 한다. 신사의 운영은 '이즈모 가문(出雲氏),이즈모 신관 가문(出雲臣)'같은 토착 신관 가계가 맡아 왔다. 이즈모 대사는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시에 위치한 일본 최고(最古)의 신사 중 하나로, 오오쿠니누시(大国主神)를 주신(主神)으로 모신다. 오오쿠니누시는지역 공동체와 씨족의 신이다. 중앙과는 별개의 권위체계를 가졌던 지방신이다. 중앙신은 황족신인 아마테라스(天照大神)나 타케미카즈치(武甕槌神) 등으로 이 신들은 일본 황실의 조상신이자 신화 체계의 중심에 있는 신들이다.
대가야 역시 왕과 별도로 존재하는 신관 계급이 제사의 주체였다. 즉, 왕과 제사장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정치체제였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을 포함한 대가야 고분군에서는 '이중 묘역 구조'가 확인되는데, 이는 왕과 제사장의 공간이 구별된 것임을 뜻한다. 즉,왕권과 제사권이 일치하지 않으며, 제의 공간이 지배자 공간과 별도로 구축되어 있다. 제사를 담당하는 별도의 신관 계층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와 열도 간 이러한 유사성은 단순히 제사 형식의 닮은 형태를 넘어서 정치권력과 종교 권위의 구조적 모델의 공유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일본 신사에 남아 있는 영혼을 모시는 전각 '타마야(魂殿)' 개념은 고령에서 출토된 가야식 제의 시설과 구조적 일치를 보인다. 타마야는 고대 일본의 신사나 고분에서 발견되는 영혼을 모시는 구조물을 말한다.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는 공간으로 고분 인근이나 신사의 영역 안에 신전으로 구축된다. 이러한 공간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대형 고분 일부에서도 발견되는데, 고분 본체 외부에 별도로 구성된 제의 시설이다. 이 구조물은 무덤 부속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혼령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 즉, ‘혼의 공간’으로 해석된다. 이 외에도 건축의 고상가옥 구조라든가 제단과 일반 영역의 분리 방식, 제사에 사용된 청동거울과 도검류는 가야식 제사의 틀을 일본에서 구체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타마야(魂殿)의 일종
토기, 언어, 복식—보이지 않는 문명의 확산
가야계 개척자의 영향은 건축이나 철기, 고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문명의 바탕을 이루는 토기에서 그들의 존재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스에키(土師器)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본 고대 회청색 도기는, 본질적으로 가야의 계림식 토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는 김해 및 고령 지역에서 제작되던 고온 소성 토기의 기술적 전승으로, 반지하식 돌가마 구조와 1,000도 이상의 고온 소성 온도 조절 기법, 회청색 점토 처리 방식 등이 고스란히 일본 열도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계림식 토기가 대략 3세기 후반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반면, 스에키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문화의 전이 과정 자체라 할 것이다.
스에키(土師器)
이 외에도 일본 고대 야마토 왜 정권 시기(4~6세기) 궁중 복식에서 보이는 금속 장식의 결합 구조나 허리띠 장신구, 복식 도해 문양은 김해 양식과 유사한 사례가 많으며, 이는 금관가야 중심의 귀족 양식이 일부 왕과 대신 등 귀족층에 수용되었음을 시사한다. 금관가야는 철기와 금속 공예 기술이 뛰어나기로 유명했으며, 귀족 계층의 복식에서도 그 기술력과 화려함이 잘 드러난다. 청동이나 철 또는 금속판으로 만든 허리띠에 여러 개의 금속 장식물을 달아 복식에 위엄과 장식을 더 했는데, 이러한 장신구는 단순한 꾸밈이 아니라 신분과 지위, 혹은 종교적 의미를 지닌 상징물이기도 하였다. 복식 문양에서도 반복적인 기하학무늬나 동물 문양을 새겼으며, 용 ·새 ·해 등의 도상은 제의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복식 문화는 일본 고대 궁중 복식과도 매우 유사함을 보이고 있는데, 궁중 고관의 복식에서 보이는 포(긴 옷)와 띠, 장신구의 조합이 금관가야의 엘리트 복식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등장한다. 장신구 부착 위치나 금속제 고리 장식 등이 대표적이다. 구마모토현 다마나시(熊本県 玉名市)의 '에타후나야마 고분(江田船山古墳)'에서 출토된 허리띠 장신구는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나온 것과 형태, 연결 방식, 장식 기법이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대 복식 형태
기억의 실타래를 다시 잇기 위한 여정
결국, 우리는 이 모든 흔적을 통해 단 하나의 진실을 바라보게 된다. 가야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본 열도로 이동하여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기술, 제례, 예술, 정치적 위상은 일본의 고대 국가 형성과 문화 정착기에 중요한 자산으로 기능했다. 일본이 야마토왜 왕권 체제를 구축해 나가던 시기, 가야계 개척자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동아시아 문명권의 ‘전이자’로서 존재했다.
여기서는 '가야의 일본 정착'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고령계, 김해계, 성산가야계, 대가야계로 구분하여 각 계통이 일본 열도에서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추적할 것이다. 특히, 일본 각지의 유물 · 유적 · 사찰 · 신사 · 고분 · 기술유산 등을 하나씩 짚으며, 그 속에 숨어 있는 가야의 흔적을 밝히는 데에 집중할 예정이다. 가야를 잊지 않고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진관사는 고려 제8대 현종이 1011년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울 근교 4대 명찰로 손꼽혔다. 주변에는 북한산 국립공원, 삼천사, 흥국사 등 많은 볼거리들이 있다.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되었다. 사찰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이다. 또 하나,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誌)」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진다.
건물로는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 칠성각, 독성각, 나가원(那迦院), 홍제루, 동정각(動靜閣), 동별당, 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눈 내리는 설경이 아주 일품이다. 아름다운 서설(瑞雪)이다.
해피ToHappy @tohappy삼각산 진관사 대웅전 앞에 눈이 내리고 있다.진관사 마애불 앞에도 눈이 포근히 내려앉고 있다.눈보라에 휩싸인 진관사 경내석탑의 어깨에도 살포시 자리를 잡는다.
올 2월 시작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군사 충돌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느낌이다. 여러 곳에서 평화 협정과 관련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외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협상 메시지가 젤린스키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미국 정부의 입장도 평화 협상에 긍정적이라는 소식이 있다.
영국의 리시 수낙 신임 총리도 취임 후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키예프(키이우)를 방문했다. 젤린스키를 만난 수낙 총리는 6천만 달러에 달하는 국방 원조를 약속했다. 군사 충돌의 종결이 임박했다는 말이다. 이삭줍기를 위한 발빠른 행보로 보인다. 협상으로 가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을 잘 정리한 국민일보 기사(2022-11-17)를 아래에 인용한다.
“푸틴의 협상 메시지 받았다” 우크라 전쟁 국면 전환 주목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 "정치적 해결책 있을 것"
우크라이나언론인 키이우인디펜던트는 16일(현지시간) 젤렌스키 대통령이 푸틴으로부터 협상을 원한다는 ‘힌트’를 받았음을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키이우에서 기자들과 만나 “푸틴이 직접 협상을 원한다는 신호를 받았다”며 “크렘린궁이 원하는 전형적인 비공개 협상이 아닌 공개 대화를 제안했다”고 말했다.“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은 이날 미 국방부청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러시아군은 심하게 상처를 입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자신들이 강하고 상대가 약한 상황에서 협상하길 원한다”며 “아마도 정치적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군사 작전 초기부터 군사 행동의 시한을 올 연말로 못 박아놨다. 12월 말에 끝내겠다고 했다. 대략 40일 정도가 남았다. 원했던 지역을 얻었고, 수순대로 진행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다. 다행인지 모르겠는데, 미국 중간 선거에서 바이든 정권은 예상외의 선전을 보였다. 민심을 확인했다.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곳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러시아와 미국이 원했던 그림대로 결과가 나와 주었다. 헤르손에서 러시아군이 철수했다고는 하나, 이는 러시아의 패전이라기 보다는 푸틴이 젤린스키에게 건네는 떡고물의 성격이 짙다. 젤린스키에게 협상 테이블로 나올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이번 군사 충돌이 가져온 결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유럽(영국을 제외한)의 시간은 끝났다는 사실이다. 더 강력하게 미국 파워의 나토 체제로 복속하게 될 것이다. 추운 겨울은 감내해야 하는 반성의 시간으로 족하다. 앞으로는 더 많이, 더 혹독하게 털리는 일만 남았다.
다른 하나는 세계가 다시 미러 양극체제를 준비한다는 점이다. 푸틴의 군사 행동이 비단 푸틴만의 의지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미국의 이해를 반영한 군사 행동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번 군사행동으로 정말 이익을 얻은 곳은 미국이다. 손대지 않고 해결했다. 유럽을 무릎 꿇렸고, 세계 경제를 다시 미국이 의도하는 대로, 자국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빨대 꼽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군사 충돌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가 관심사다. 해답은 양안관계에 있다. 세계의 시선은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이동한다. 대만이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될 것인가의 여부에 관심이 집중된다.
사실 상황은 무르익어가고 있다. 중국 내부 사정이 그렇다. 위드 코로나의 혼란과 부동산 등 경기침체, 이로 인한 인민들의 불안과 불만의 폭발은 어딘가로 사회의 관심을 돌리도록 유도하고 있다. 여기에 서방세계의 기름 붓기 작업들이 효과를 발휘한다면 양안 충돌은 가능한 시나리오가 된다.
세상사는 돌고 돈다고 한다. 근현대사의 두 축은 냉전과 화해였다. 지금이 화해의 마지막 국면이다. 다시 냉전으로 돌아간다면 이는 미중 냉전으로의 진입이다. 과연 그렇게 될 것인가. 아니면 미국과 러시아 양강체제의 화해 국면이라는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인가가 초미의 관심거리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가 더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과거 패권적 제국이 휩쓸던 때는 제국의 힘을 가진 국가가 주변 국가들의 역량을 완전히 빨아들이며 생존했다. 주변국은 제국에게 위탁해야 생존할 수 있던 시대다. 이후 시장경제 사회로 변화하면서 위탁은 분업으로 바뀌었고, 이는 또 다른 협력 체제를 낳았다. 내가 만든 빵과 이웃이 만든 옷감을 사고파는 관계로 변화했다. 이는 다시 국제사회로 확대되었다. 이게 지금까지 인류 삶의 보편적 양상으로 이어져 왔다.
앞으로의 세계는 이 둘의 결합일 가능성이 크다. 패권적 제국의 힘이 위세를 떨치는 가운데 각자 도생해야 하는 시대로의 이행이다. 패권적 제국이 과거의 미국이나 소련과는 다른 성격을 갖게 될 것이다. 이기적이되 폭압적이지는 않은 형태의 제국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비슷한 파워를 지닌 몇 개의 강대국이 세계를 경영하는 형태이다. 이기적인 것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행태이고, 폭압적이지 않다는 것은 과거의 식민지배와 같은 형태는 아닐 것이라는 뜻이다.
한반도가 평화체제를 이루어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몇 개의 강력한 국가에 드는 데 필요한 노력이 바로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다. 강대국으로의 조건을 갖추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그 첫걸음이 한반도 평화체제이다.
이태원 참사를 처음 접한 것은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을 통해서였다. 이른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핸드폰을 드니 “아니, 서울에 무슨 일이라냐? 일어나서 TV를 틀었더니, 서울이 아주 난리다.”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전화를 끊고 컴퓨터를 켰다. 내가 곤히 잠들어있던 시간에 어떤 이는 생을 마감했고, 또 어떤 이는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가신 이들의 명복을 빈다.
여러 이야기가 있을 수 있으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애먼 트집잡기다. 확실한 것은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이 몹시 크다는 사실이다. 젊은이들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 책임은 오롯이 기성세대의 몫이다. 설사,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변명이 되지 못한다. 예측 불가능한 그곳, 그 시간에도 안전은 늘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권이든, 정권이든, 기성세대 모두는 반성하고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 소재를 흐리기 위해 공동체의 누군가를 특정해서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특히, 그날 이태원 근처에 있었다는 이들, 즉 구경꾼의 행태에 대한 질타는 그만 멈추어야 한다. 모든 이들이 다 구호작업에 뛰어들기를 바랄 수는 없다. 게다가 그곳은 축제의 현장이었다. 그들은 이번 참사가 이렇듯 엄청나리라는 것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현장에서 조금만 벗어나 있더라도 현장의 분위기를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야 나중에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속속들이 그 당시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니 사태의 심각성을 바로 알 수 있지만, 당시 현장을 벗어난 곳의 분위기는 또 달랐을 것이다.
톡방 여기저기에 구경꾼을 질타하는 글들이 해당 언론 기사와 함께 폭주한다. 그들이 한심하다는 투다. 이런저런 모습들이 있었을 것이나, 이번 사태의 핵심은 구경꾼인 그들이 아니다. 사태의 본질은 우리가, 희생 당한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젊은이들은 놀고 즐길 자유가 있고, 기성세대는 그들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사회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왜 그들이, 그렇게나 많은 숫자가, 좁은 그곳에 몰려갔는지 나무라지 마라. 그곳에 안전망이 전혀 가동되지 않았음을 자책하라. 당신도 나도, 우리 기성세대 모두가 반성할 일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 지역(동부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남부의 자포리자, 헤르손) 주민을 대상으로 러시아와의 합병 찬성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결정했다. 23일부터 닷새간 진행되는데, 출구조사 결과가 나왔다. 러시아 관영 타스 통신에 따르면 주민의 90% 넘는 다수가 러시아와의 합병(편입)에 찬성했다고 한다.
이번 투표 결정과 그 결과가 의도하는 바는 분명하다. 러시아의 이번 특수군사작전은 이제 성공으로 마무리될 것이며, 나름의 절차적 정당성 또한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의도대로 된 셈이다. 거의 작전 정리 절차로 이행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푸틴 대통령의 공언대로 12월 31일 작전이 종료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국지적인 형태의 분쟁조차 완벽하게 종결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크라이나는 어떤 형태로든 러시아에게 빼앗긴 지역을 되찾고자 할 것이고, 러시아는 이를 자국 영토에 대한 침공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격퇴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러시아의 군 동원령 역시 이를 위한 용도로 이해해야 한다. 이들 병력을 동원하여 합병한 지역을 사수하기 위한 전력으로 활용할 것이라 보기에 그렇다.
아직 러시아는 공군을 비롯한 중요한 핵심 전력을 작전에 제대로 투입하지 않은 상태다. 예비 병력으로 항시 주변에 대기해 놓고 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서방세계의 합동 공격으로부터 러시아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의 핵무기 사용 위협 발언도 서방세계를 향한 경고로 읽힌다. 핵 버튼을 누를 준비가 되어 있으니,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엉뚱한 짓 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서방 언론에서는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이 고립무원의 상태라고 여론을 호도한다. 중국과 인도마저도 푸틴의 패배를 예감하고 등을 졌다는 말이 떠돈다. 하지만 중국 신화통신이 전하는 소식은 사뭇 다르다. 지난 15일~16일 이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서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가 열렸다. 참가 국가들의 면면도 만만찮다. 러시아, 중국, 인도, 이란, 튀르키예(터키), 파키스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름을 올렸다. 러시아와 중국 정상회의에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이런 발언을 했다. "중국은 러시아와 협력하여 서로의 핵심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강력한 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신화통신, 2022.09.15.)
중국도 그렇고 인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설사,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이번 작전에서 실패하던, 더 큰 전쟁으로 확전되어 패배하든, 이를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처지에 있다. 러시아를 몰락시킨 이후에 서방세계는 어느 국가를 다음 타깃으로 삼을지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주석도 이를 의식한 듯 "워싱턴은 세계를 둘로 분리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핵전쟁으로까지 확전 된다면 그것은 서방세계와 반대진영(러시아, 중국, 인도, 이란 등) 간 3차 대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를 잘 알기에 서방세계와 서방언론에서는 러시아를 고립시키기 위해 열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러시아와의 친교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나 대만 문제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어떤 형태로든 중국의 대만 침략은 그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물론, 이것이 전쟁 형태를 띤 전면전으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을 테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정도의 강도를 지닌 군사작전으로 진행될 여지는 충분하다. 중국 시진핑 주석에게 이번 러시아의 작전은 마치 타산지석과도 같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목표는 하나다. 대만을 더는 독립 운운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만들어 놓고 마무리하는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 대만이 완전히 타도해 전멸시켜야 할 적국이 아니기에 그렇다. 대만 침략이 시진핑 주석에게 독일지 약일지는 두 번째 문제다. 중요한 판단 기준은 시진핑 주석의 장기집권에 득이냐의 여부다. 상황이 연출되면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국지전 개념의 군사행동이다. 소극적 전투이기는 하나 파괴력이 크기에 유혹이 상당하다. 미중 패권 경쟁의 현실과 중국 내부의 잠재적 요인들이 그런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애초에 이번 군사대결을 전쟁으로 부르지 않았다. 특수군사작전(돈바스 주민 보호를 위한 특수군사작전)이라 명했다. 그 이유는 돈바스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의 안전을 도모하고 지역을 해방하는 임무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돈바스는 친러시아 성향이 강한 지역이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할 때, 돈바스 지역 여론도 러시아로의 합병에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이러한 여론을 우크라이나 정부가 강경 진압으로 막았던 상황이다. 특히 유럽연합의 중재와 이를 통한 상호 협약(민스크 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돈바스 지역을 극우 성향의 ‘아조우 부대’를 통해 관리토록 했다. 아조우 부대는 돈바스의 친러시아 성향 주민들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민병대 조직이다. 신나치 극우 세력으로 우크라이나 정부에 의해 정식 군사 경찰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에 의한 돈바스 지역 주민 사망자만 1만 4천 명에 달했다.
이러한 돈바스 분쟁에 기름을 부은 것이 나토(NATO)의 확대 정책이다. 나토의 현상유지는 미소 간 합의 사항이었다. 이를 조건으로 소련은 독일 통일에 찬성했다. 그런데 1999년 헝가리와 폴란드, 체코를 나토에 가입시켰다. 2004년에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발트 3국이 나토에 가입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러시아와 경계하고 있는 지역이 추가로 나토 가입을 희망하는 사태를 러시아는 그저 수수방관할 수 없다. 군사작전의 두 번째 명분이다.
세 번째의 명분은 미국의 이해와도 합치한다. 냉전의 해체는 서방세계를 무료한 평화로 안착했다. 그러다 보니, 패권의 영향력이 별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미국의 입김이 잘 먹히지 않는 것이다. 특히 유럽지역이 그렇다. 독일은 새롭게 부흥 중이고 유럽의 맹주처럼 군림한다. 미국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패권의 무서움을 보여주어야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다. 에너지 부족 등으로 혹독한 올겨울 추위를 겪고 나면 비로소 힘의 무서움을 다시금 몸소 느끼게 될 것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와 일부 유럽 국가 간의 에너지 및 경제 연대를 차단하는 효과도 있다. 이러한 연대가 향후 안보 연대로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실화하면 미국의 입지는 유럽에서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미리 싹을 잘라야 한다.
중국이 넘버 2 자리를 넘본다고는 하나, 아직은 어설프다. 역시 패권은 미소 패권이 제격이다. 미국과 러시아의 이해가 일치하는 지점이다. 세계 패권 경영도 해본 이들이 잘 안다. 비록 라이벌이라고는 하나 익숙한 파트너가 그래도 상대하기는 수월하다. 갓 성장한 애송이는 어디로 튈지 감을 잡을 수 없어 피곤하다. 손 안 대고 코 풀었고, 싸우지 않고 이긴 미국은 역시 쎈 선수다. 재고 무기들을 소진해서 돈을 왕창 벌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인한 강 달러 전략은 세계의 부를 미국으로 빨아들인다. 미국이든, 러시아이든, 중국이든, 유럽이든, 일본이든 먼저 쓰러진 자가 남은 자들을 위한 성찬의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이후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한정된 평온을 되찾는다.
마지막으로 세계 금융자본의 이해득실도 한몫한다. 자본은 이미 국경을 초월한 상태다. 세계는 지금 거대한 통화량 홍수 상태에 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는 이를 더욱 확장하였으며, 연장하였다. 돈이 너무 많이 풀린 것이다. 거품도 많다. 부풀려진 고무풍선을 터트려야 한다. 예측 가능한 경로를 따라야 터진 고무풍선에서 떨어지는 내용물을 고스란히 받아먹을 수 있다. 이것이 예측 불가능하게 흘러서는 죽 쒀서 남만 좋은 일 시킬 수 있어 낭패를 본다. 자본가나 자산가가 자신의 자산을 두세 배로 불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늘 그렇듯이 호황과 불황은 일정한 사이클을 갖는다.
이렇듯 분명한 명분과 뚜렷한 이해관계가 얽혀있으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분쟁은 피할 수 없는 당연지사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국가 간 외교와 협상이 중요하다. 가능한 한 군사적 분쟁은 피해야 하고, 전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약소국에는 절대적 과제이다. 정치를 제대로 못 한 위정자 탓에 죽어나는 것은 국민이다. 행동(힘을 키우려는 노력)하지 않는, 말뿐인 정의는 전쟁의 고통과 죽음만을 가져온다. 역사가 알려주는 진리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은 이제 서서히 결말을 향해 간다. 이번 작전으로 러시아가 확보한 우크라이나 지역의 면적은 약 9만㎢로 우리나라(남한) 면적보다 조금 작은 규모다. 우크라이나 전체 영토의 약 15%에 해당하는 규모라니 결코 만만치 않은 지역을 확보한 셈이다. 러시아는 합병 지역에 대한 자치권을 확실하게 인정한 후, 이곳을 방어하는 수비형태의 전술로 전환하는 것으로 작전을 종료하려 들 것이다. 우크라이나 역시 그냥 수수방관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과 시설 파괴다. 다시는 우크라이나가 힘을 키우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폐허로 만들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대도시들, 공장시설, 군사시설 등이 목표가 될 것이다.
이제까지 러시아는 무차별 폭격은 피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우크라이나의 거점 지역을 정밀 유도탄을 발사해 집중 타격하는 방식을 취했다. 돈바스를 비롯한 특정지역의 접수·합병이 목표였기에, 전투 못지않게 중요했던 게 점령한 지역의 주민 안전과 시설 보호였다. 이제 그 목표는 달성되었고, 남은 것은 위협 요소의 제거다. 그렇다고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젤린스키 정부를 전복하고 친러 정부로 교체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자칫 아프가니스탄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1978년 시작되어 1988년 끝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에 따른 소모전은 결국 소련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가엽게도 이를 젤린스키 대통령도 이미 눈치채고 있다. 사태 정리에 대한 의지가 안 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
지금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기이다. 일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결코 일국적인 상황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계 도처에, 다방면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때로는 일국의 선택이 타국의 이해를 반영한,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판을 연상시키곤 한다. 이처럼 패권을 휘두르는 강자는 비록 일국이지만 절대 일국적이지 않은 국제적 지위를 갖는다. 국가가 힘을 길러야 하는 이유다.
뭐, 일본 언론들이야 그렇게 쓸 수도 있다 치자. 현재 발표되고 있는 일본 수사기관의 수사 상황 설명이니 그것을 그대로 받아 적어 그렇다 하자. 그런데 우리 언론이 그것을 그대로 베끼듯 받아 쓰는 이유는 뭔가? 아니, 특정 종교에 원한이 있으면 그 특정 종교를 대상으로 범행을 해야 함이 일반적이지. 안 그런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행사(통일교 관련 단체인 천주평화연합이 공동 주최한 '싱크탱크 2022 희망전진대회') 축하 메시지 보낸 것을 핑계로 그 정치인을 테러의 목표로 삼는다? 이게 말이 된다면, 세상의 모든 정치인은 다 테러당했다. ㅋㅋ 바보 아님? 이 진술이 성립을 하고, 말이 되려면, 그런 종교가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놓은 일본 사회에도 잘못(책임)이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마르크스라는 옛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헤겔의 법철학 비판』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대략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1』, 박종철출판사, p. 2)
이 말을 가지고도 종교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많은 비판을 했어. 그래서 사회주의에서, 특히 북한에서는 종교를 반대한다는 등의 얼토당토않은 주장들을 했고, 현재도 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야, 마르크스의 저 말은 종교에 대한 일방적인 반대나 탄압 그런 뜻이 아니야.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아편은 마약으로도 쓰이지만, 병원 등에서 고통을 잊게 해주는 긍정적 용도로도 쓰이지. 합법적으로 말이야. 마르크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본 이유도 같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는 종교를 찾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봤어. 빈부격차와 경쟁, 무한 축적, 물신화 등으로 그 속에 사는 인민들은 정신적·육체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라는 거지. 그래서 종교를 찾게 되는데, 종교를 탄압한다고 해서 종교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왜? 하나의 종교를 없애면 또 다른 종교가 어디에선가 탄생할 게 자명하니, 이는 인력으로 막을 수 없다고 봤어. 해법은,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 즉, 사회주의 사회가 되어야 종교는 자연스레 극복될 것이라고 본 거지. 이런 주장이 나온 배경은 당시 프로이센(現 독일) 사회에서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대한 찬반 논쟁이 한창이었던 시대적 상황 탓인 거지. 이 시대적 화두에 마르크스도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끼어들어 숟가락 하나를 얹게 돼. 그리고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라는 책을 쓰기도 한다. 그러니 요약하면 이렇게 돼. “종교란 불평등한 사회체제가 만들어 놓은 특이한 현상이다. 이는 강제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회체제를 새로운 체제로 전환해야 종교문제도 해결이 된다. 그리고 현재의 인민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종교를 믿는 것은 그것이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아편과도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편은 잠시의 고통만을 잊게 해주지,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해결하지는 못하기에 그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인간 고통의 원인은 자본주의체제에 있는 바, 이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길이 해법이다.”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주장을 했던 것인데, 이러한 마르크스의 본 의도는 싹 사라지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하는 자극적인 문구만이 인구에 회자하기에 이른 거지. 고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종교를 없애야 한다.
맑스의 이러한 사상은 다른 저작에서도 찾아지는데,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중 제4테제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세속적 기초 자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의 모순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 혁명화되어야 한다."(『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1』, 박종철출판사, p. 186)
말이 좀 어려운데, 앞 뒤 문맥을 연결해 풀어서 쓰면 이렇다. 포이에르바하의 종교적 자기 소외는 종교적인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로의 이원화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원화는 종교적 환상으로 인해 하늘의 유령(신=종교)과 세속적 세계를 거꾸로 전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여기서 '전도'의 의미는, 사람으로 치자면 세속은 다리고 종교는 머리인데, 이게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고 보면 이해가 쉽지. 즉, 토대는 세속이고, 종교는 상부구조인데 이게 거꾸로 서 있다고 보면 된다. 맑스가 보기에 이게 현실이라는 거야.
하지만 뭣이 중헌디? 맞아, 하늘 유령의 실체는 중요하지 않아. 왜? 그것은 종교적 환상이 나은 부차적 문제이기 때문이지. 중요한 것은 종교적 환상을 만들어내는(혹은 찾게 되는) 세속적인 제약을 제거하는 거지. 그리되면 자연스레 종교적인 제약도 제거된다고 보는 거지. 그래서 이렇게 종교적인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가 서로 전도된 그 세계를 실천적 혁명을 통해 바로 잡아야 한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종교 문제의 해결은 종교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세속의 삶의 혁명적 변화를 통해 가능하다고 본 거지. 자, 그렇다면 현실로 돌아와서, 저격범이 아베를 향해 총을 쏜 이유가 언론의 주장대로 특정 종교에 대한 원한이라고 치자. 그럼, 그러한 특정 종교가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된 사회 환경이 무엇인지 찾아봐야지. 종교를 필요치 않는 사회에 종교가 침투할 수 있을까? 대부분, 현실이 고달프기 때문이겠지. 종교가 한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이유가 말이야. 특정종교와 아베 저격을 등치시키는 현재와 같은 논리라면, 이제 총탄의 방향은 자명해졌다. 인민의 삶을 아편으로 연명하게끔 만들어 놓은 일본 사회가 그 표적이 돼야 마땅한 것이다. 즉, 제대로 된 논리대로라면 이번 아베 저격과 일본의 사회환경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말이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 저격범은 머리도 꽤나 영특했다고 하던데, 그런 그가 그 정도 판단도 못 했을까? 대다수의 정치인 테러범에게 하듯이 차라리 아베 저격범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었다고 해라. 차라리 그게 더 설득력이 있겠다. 이 바보천치 같은 일본 보수우익(수사기관 관계자)들아. 정리하자면 이렇다. 저격범이 재일한국인이었다면 더없이 좋았을 테지만 그것도 아니다. 어찌되었든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만만한 게 주변국이라고 한국과의 연결고리를 찾다 보니, 끝내는 한국 관련 종교와 연관성을 찾았다. 그렇게 어떻게 해서든 한국을 끌어드리고야 마는 저 일본 보수우익들의 경거망동한 침략주의 행태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탓다’라는 유언비어와 맥을 같이 하는 아주 저열한 동물적 수작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격범의 범행동기가 일본 사회에 대한 불만, 혹은 일본 보수우익 정치에 대한 불만으로 밝혀질 경우, 이제까지 일본 보수우익들이 만들어 왔던 ‘신군국주의적 경향’ 성과들이 한 방에 무너질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격의 원인을 개인적·외부적 문제로 돌리려는 것이다. 정치인 아베 저격과 저격범 모친의 특정 종교가 무슨 관계인가? 본질을 호도하지 말라.
아베 전 일본 총리가 쓰러졌다. 심장에 총알을 맞았다. 총알은 일본 강경보수우익의 심장을 관통했다.
일부 민주주의자들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 국민은 비통할 일이다. 정치인에 대한 테러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대한 도전이다. 그래서다. 대다수 정치인에 대한 테러는 한 인간의 일탈을 넘어서며 막중한 의미를 갖는다. 무게감 또한 상당하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테러 직후 체포된 저격범(山上徹也)은 “집안을 파산에 이르게 한 자신의 어머니가 빠져있는 종교단체와 아베 전 총리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으로 진술했다 한다.
그럴듯하게는 들리지만, 확 다가오지는 않는 뭔가 석연찮은 범행동기다. 종교단체에 불만이 있었다면, 해당 종교단체에 항의하거나 그곳 혹은 그곳의 인물을 범행 대상으로 삼는 게 일반적이다.
게다가 전직 해상자위대의 장교였다고는 하나, 그가 사제총을 그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군대에서 배웠다고 보기도 어렵다. 군의 규율상 그런 종류의 사제총을 개조할만한 분위기였을까도 의문스럽다.
그렇다면 전역 이후에 총을 제작했거나 구매를 했다는 것인데, 일본 치안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사제총 제작은 그렇다 쳐도 실험은 어디서 할 수 있었을까? 글쎄다, 혹 지하세계에서 불법 거래되는 권총이었다면 또 모르겠다.
아무튼 아베家는 일본의 유력 정치 가문이다. 아니, 일본의 유력 가문이다. 천황家에 버금갈 정도의 세도가문이다. 아베가 총리가 된 이후로 심심찮게 일본 언론에 오르내렸던 기사 중 하나가 정치권(아베류)과 천황가와의 갈등설이었다. 아베의 세력은 천황의 말도 듣지 않고 무시할 정도의 힘을 가진 집안이자 힘으로 성장했다.
이들 세력의 범위는 비단 아베 집안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일본 보수세력 중에서 신흥 강경보수세력의 힘의 막강함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일본 보수 본류는 천황의 유지를 받들고자 한다. 천황은 일본의 국체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신흥 강격보수세력의 관심은 전전으로의 회귀 즉, 군사적 대국화에 몰입되어 있다. 아베가 대표적이다. 이들 간 갈등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일찍이 일본의 보수우익화를 경계하며, 일본 사회를 신군국주의로 규정한 바 있다.
(역사 및 방위)수정주의적 해석을 통해 사회 일체가 안보 하나로 연결되고 수렴되는 현상을 ‘신군국주의’라 정의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성이 일본 신군국주의의 실체다.(강동완 지음, 『일본 신군국주의』, 호메로스)
이 말을 약간 풀어서 부연하자면 이렇다. 한 국가(사회)에는 규범과 가치라는 게 있다. 이는 그 사회 일반이 추구하는 이상과도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 ‘사람이 먼저다’, ‘홍익인간’, ‘대동세상’ 그저 말만 들어도 그 사회가 가야 할 방향성이 보인다.
달리하자면, 한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는 현재를 넘는 미래구상이다. 그런데 과거로의 회귀만을 꿈꾸는 집단이 있다면, 사회의 가치체계가 바로 정립되지 못한다. 근대 이후 일본이 그렇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제국’에 혼이 나간 이들이 21세기를 지배하고 있다.
1993년인가 처음으로 정치에 입문한 아베 전 총리가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는 계기가 2000년대 초반 고이즈미 정권부터였다. 이후 일본 보수우익의 아이콘 역할을 하며 근 20여 년 일본 사회를 쥐락펴락했다.
그 시기 아베의 머릿속을 맴돈 것은 오직 ‘평화헌법 개정’, ‘자위대의 군대화’, ‘미일군사동맹 강화’ 뿐이었다. ‘일본제국’의 부활이다. 그 속에 국민이나 인권, 인간의 삶과 같은 고차원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사회 일체(정치·경제·문화)가 안보 하나로 귀결되고 수렴되는 현상을 나는 ‘신군국주의’로 본 것이다.
이 기간, 일본 경제는 철저하게 망가져서 회복 불능 상태로 내몰렸고, 잦은 자연재해 탓에 안전한 사회 일본이라는 안전신화는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으며, 종신고용과 전국민의 중산층화는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이웃나라 한국에게마저 업신여김을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누구의 책임인가?
비슷한 맥락에서 이번 저격 사건도 이해하려 한다. 이는 한 인간의 개인적 원한에 의한 단순한 일탈적 행위가 아니다.일본 보수세력 간의 권력 투쟁으로 파악 중이며, 보다 거대한 흐름 즉, 동아시아의 세력 재편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변화 등이 암묵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읽으려고 한다.
단기적으로는 이번 사건이 일본 보수우익을 결집하는 부정적 효과로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어쩌면 평화헌법이 개정되고 자위대가 군대가 되는 일이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불편한 마음도 있다.
오늘이 일본 참의원 선거일인데, 일본 쿄도통신의 보도로는 지난 선거 때보다 현재 투표율이 다소 높다고 한다. 보수파의 압승이 예상된다. 이번 사건의 영향이 클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일본 사회가 보다 합리적인 국가, 미래지향적이며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탈신군국주의화 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될 것으로 조심스레 낙관해 본다.
일본 평화헌법이 바뀐다고? 자위대가 군대가 된다고? 이미 그런 현실이다. 문맥 상으로만 그렇지 않을 뿐이다. 설사 그리된다고 해서 변하는 것 또한 별로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힘을 기르고,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한반도 평화체제로 대응하는 일이다. 우리가 힘이 있는데, 무엇이 두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