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5. 5. 5. 11:25

가야편 제10회

히무카(日向): 고향 땅 가야를 향한 그리움

 

바다 너머 태양의 고향

 

옛적, 동쪽 바다 너머 한반도의 남녘 끝자락에 가야라 불리는 강대한 연맹이 있었다. 금관가야의 중심지 김해는 철의 불꽃과 바다의 숨결로 번영을 누렸다. 그곳 백성들은 태양을 신성한 존재로 섬기며, 매일 아침 동쪽 지평선에서 솟아오르는 빛을 향해 기도했다. 그들에게 태양신은 생명의 근원이었고, 권력과 번영의 상징이었다. 가야의 강줄기는 이 신앙을 품고 멀리 일본열도까지 뻗어 나갔다. 파도 위로 실린 배들은 철과 토기, 그리고 태양신에 대한 믿음을 싣고 규슈의 남쪽 해안으로 향했다.

 

대한해협을 건너는 가야의 배들은 그저 흔하디흔한 상선이 아니었다. 그들은 문명을 전파하는 전사이자, 고향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시인이었다. 그들의 항해는 평범한 이동이 아니라, 새로운 땅에 가야의 불씨를 심고, 태양신의 빛을 퍼뜨리는 여정이었다. 이 도래 개척자들은 규슈 남동부에 자리한 히무카(日向), 그 중 다카치호(高千穂)라는 신성한 언덕을 목적지로 삼았다.

 

일본열도 남단, 오늘날의 미야자키현(宮崎県)에 해당하는 고토 히무카는 고대 일본 신화에서 천손강림(天孫降臨)’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의 이름 日向(히무카)’를 단지 신화의 무대로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태양() 숭배의 땅을 향한() 그리움의 다른 이름, 히무카. 태양 숭배의 땅은 그들의 고향 가야다. 히무카라는 지명 속에는 가야의 후예들이 품었던 정서와 세계관, 그리고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겹쳐 있다. 히무카(日向)는 『 일본서기』에서 신들의 자손이 내려와 나라를 세운 성역으로 칭송되지만, 그것은 곧 '외부에서 온 존재'가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서사의 중심 무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외부에서 온 존재'라는 개념은, 고대에 일본 열도로 이주한 다수의 한반도계 도래 개척자들, 특히 가야계 도래인들의 정체성과 겹친다. 태양을 숭배하며 바다를 건너온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고 새로운 땅에서 해를 향한신념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의 회한을 지명으로 새겼다.

 

다카치호는 하늘이 땅과 맞닿은 곳, 가야의 고향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이는 규슈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고향의 태양신을 기리며 새로운 서사를 썼다. 바다를 건너온 이들은 고향의 황금빛 들판을 떠올리며, 태양신의 축복 아래 새로운 터전을 일구었다.

 

히무카(日向)의 위치 @구글 지도

 

다카치호(高千穂), 신의 강림지

 

다카치호의 가파른 언덕은 태양신의 숨결이 깃든 성지였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의 손자 니니기노미코토(邇邇芸命)가 하늘에서 그 땅으로 내려왔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신화의 뿌리에는 가야 도래 개척자들의 신앙이 깊이 얽혀 있다. 그들은 다카치호에 정착하며 고향 가야의 태양 숭배를 이곳에 뿌리내렸다. 그들의 기도는 바다 너머 북쪽, 김해의 신성한 언덕 구지봉을 향했다.

 

매일 아침, 그들은 다카치호의 언덕 위에서 태양을 향하여 기도했다. 그리고 고향 김해의 신어산(神漁山)과 두 마리 물고기를 상징하는 쌍어 문양(雙魚文)을 떠올렸다. 쌍어 문양은 허황옥이 김수로왕에게 시집오면서 인도로부터 가져온 신앙의 상징이다. 그들의 마음은 고향과 새로운 땅 사이를 오가며, 두 세계를 잇는 영혼의 다리를 놓았다. 이들은 다카치호와 그 일대를 히무카(日向)라 불렀다. ()는 태양신의 축복을, 무카()는 고향 가야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을 담았다. , 태양신을 숭배하는 고향, 가야를 그리는 마음이 히무카인 것이다.

 

'태양()'은 단지 천체로서의 해가 아니다. 가야의 무속 · 제례 문화, 특히 수로왕계의 태양 숭배 전통은 일본 초기 신사 신앙의 구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이 붉은 해를 상징하는 붉은 천에 이끌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전승이 있고, 일본 열도에 도착한 한반도계 집단이 태양 숭배와 제사 규범을 동시에 전수했다는 기록도 다수 존재한다. 가야의 여러 고분군에서 출토된 청동 거울의 존재 역시 태양의 빛(숭배)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청동 거울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 곳곳의 고분에서도 상당량이 출토되었다.

 

그렇다. 히무카는 그저 평범한 지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야의 태양신을 숭배하는 성소를 바라보는 시선, 바다를 건넌 이주민의 가슴에 깃든 고향의 메아리였다. 히무카는 그들의 정체성이자, 고향과 새로운 땅을 잇는 영혼의 다리였다. 이 이름은 가야의 불씨가 타오르는 규슈의 언덕에서, 태양신의 빛 아래 영원히 빛났다.

 

다카치호에는 아마노이와토(天岩戸, 천암굴) 신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일본 건국 신화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동굴에 숨어 버리며 세상에서 태양이 사라졌고, 신들이 춤과 노래로 그녀를 불러냈다. 이 동굴 신화는 가야 도래 개척자들의 태양 숭배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들은 아마노이와토에서 태양신의 부활을 기리며, 가야의 빛을 다카치호에 새겼다. 신사의 바위 동굴은 고향의 기억과 새로운 땅의 희망을 속삭이는 성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태양신의 부활을 축하하며, 고향 가야를 향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태양의 융합, 신화의 탄생

 

가야의 도래 개척자들은 다카치호에서 토착민들과 손을 맞잡았다. 그들의 철은 농기구와 무기로, 토기는 제사 그릇과 일상 도구로 변모했다. 가야의 태양 숭배는 규슈의 토착 신앙과 융합되며 새로운 서사를 낳았다. 태양신은 아마테라스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고, 히무카는 일본 왕가의 기원지로 우뚝 섰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이 위대한 융합을 기록하며, 히무카를 일본의 신성한 발상지로 찬양했다.

 

히무카의 백성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고향을 떠올렸다. 그들의 노래는 김해의 고분, 가야의 황금빛 들녘을 그리워하는 선율로 가득했다. 그들은 새로운 땅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들의 철은 농지를 일구었고, 토기는 신앙과 생활을 담았다. 히무카는 가야의 영혼과 다카치호의 희망이 만나는 성지였다. 이곳에서 태양신은 더 큰 빛으로 타올랐다.

 

가야 도래 개척자들은 고향을 떠난 한낱 이주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문명을 심는 개척자였다. 그들의 기술과 신앙은 규슈의 토착 문화와 어우러져 독특한 융합 문화를 창조했다. 예를 들어, 가야의 경질토기는 미야자키의 고고학 유적에서 발견되며, 그들의 철기 기술은 농업과 전쟁의 도구로 지역 사회를 변화시켰다. 이 융합은 단순한 물질적 교류를 넘어, 신화와 정체성의 재구성을 낳았다. 히무카는 가야의 태양신과 규슈의 토착 신앙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화의 용광로였다.

 

히무카의 메아리, 『만엽집』 의 노래

 

히무카의 서사시는 일본 고대 시집 『만엽집萬葉集』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에 걸쳐 편찬된 이 시집은 일본 고대문학의 거대한 집합체로, 고대 일본의 시와 노래를 모은 중요한 문헌이다.

 

4,500수의 와카(和歌)를 담고 있으며, 히무카의 신성한 풍경과 신화적 상징성을 노래한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日向なる 高千穂の峯を 仰ぎ見て 天津神の 御代を思ふ”
“히무카의 다카치호 봉우리를 우러러보며,
천상의 신들의 치세를 떠올린다.”

 

이 시에서 언급된 '천상의 신의 치세'는 일본의 신화적인 전통을 넘어서,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들의 기억과 정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다. '천상의 신들의 치세'를 회상하며, 고대 일본 신화의 세계를 떠올리지만,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떠나온 고향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미개척의 새로운 땅을 향해 걸어온 이들이 품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향수를 엿볼 수 있다.

 

이때의 '천상의 신'은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가야인들이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던 자연 신앙 속 신()의 일종이자, 가야 사회의 신적 세계관을 반영한 정신적 흔적이다. 일본의 신화 속 '천손강림' 이야기는 사실, 외부에서 온 존재들이 새로운 땅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의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 이는 고대 가야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이들이 겪었을 정신적 여정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바다를 잇는 영원의 다리

 

히무카의 서사시는 고고학의 흔적과 신화의 메아리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미야자키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가야의 경질토기는 그들의 존재를 증언한다. 『일본서기』는 가야와 규슈의 끈끈한 인연을 기록하며, 바다를 통한 고대 동아시아의 해상 교류를 보여준다. 이 기록들은 히무카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가야와 일본을 잇는 문화적 다리였음을 말해준다.

 

히무카의 의미는 한자 그대로 태양을 향한 곳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태양을 숭배하는 곳, 가야를 향한 그리움이다. 히무카는 지리적 방향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니라 심적 방향을 드러내는 말이다. 히무카는 가야의 도래 개척자들이 바다를 건너며 품은 꿈, 고향을 향한 간절한 마음,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 피운 희망의 상징이다. 다카치호의 언덕에서 태양은 여전히 떠오른다. 아마노이와토의 바위 동굴은 태양신의 부활을 속삭이고, 신사는 가야와 일본의 융합을 기념한다. 히무카는 가야의 태양신을 다카치호의 아마테라스로 잇는 영원의 다리다.

 

히무카라는 지명은 실제 일본 각지에 분포한다. 규슈 남부 미야자키 지역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같은 이름의 유사 지명(日向村, 日向山, 日向谷 )이 혼슈, 시코쿠, 큐슈 전역에 존재한다. 고대 도래 개척자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와 정착할 때, 그들이 가져온 정신적 표식이 '히무카'라는 이름에 담겼다.

 

히무카는 그런 전통의 연장선이자, 태양을 향한 땅에 자신의 정체성을 새기려는 도래 개척자들의 언어적 기억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히무카는 새로 정착한 땅이면서도, 잃어버린 뿌리를 재생산하는 정신적 거점이었다. 이 서사시는 고대 동아시아의 해상 교류, 이주민의 용기, 그리고 태양 아래 하나 된 문명의 찬가로 빛난다. 가야의 도래 개척자들은 그저 새로운 땅에 정착한 이주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향의 불씨를 품고, 태양신의 빛을 따라 문명을 창조한 개척자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바다를 건너, 세대를 이어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쉰다.

 

히무카의 빛, 우리의 유산

 

히무카는 한낱 과거의 전설에만 그치지 않는다. 가야에서 건너온 이들이 자신의 영성과 정체성을 투영하여 붙인 이름, 그 언어의 기억이 일본 곳곳에 히무카日向라는 글씨로 새겨졌다. 그것은 가야와 일본, 바다와 육지, 신앙과 정체성을 이어주는 살아 있는 유산이다. 오늘날 미야자키의 다카치호를 방문하는 이들은 여전히 태양신의 숨결을 느낀다. 아마노이와토 신사의 고요한 숲길, 고봉 다카치호 협곡의 맑은 물줄기는 고대 도래 개척자들의 발자취를 떠올리게 한다. 이곳에서 태양은 여전히 하늘을 밝히며, 가야와 히무카의 이야기를 속삭인다.

 

히무카는 가야 도래 개척자들의 고향 사랑, 다카치호의 신성한 언덕, 그리고 태양의 영광을 노래하는 불멸의 찬가다. 그 이름은 단순한 지명을 넘어,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적 융합과 이주민의 용기를 상징한다. 『만엽집』 의 시들은 히무카의 신화적 풍경을 영원히 기록하며, 가야의 태양신과 일본의 아마테라스가 하나 되는 순간을 노래한다. 히무카의 서사시는 우리의 뿌리 깊은 이야기를 하늘 높이 띄우며, 태양신의 빛 아래 영원히 빛난다.

 

이 이야기는 역사로써의 과거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히무카는 우리에게 정체성과 문화의 융합,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의 희망을 말해준다. 가야의 도래 개척자들이 바다를 건너며 품은 꿈은 오늘날에도 우리 안에 살아 있다. 히무카, 그 이름은 태양신의 축복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어우러진 영원의 노래다. 이 서사시는 고대 동아시아의 해상 교류, 이주민의 용기, 그리고 태양 아래 하나 된 문명의 찬가로, 우리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울려 퍼진다.

 

히무카(日向)- 고향을 향한 그리움

 

바다를 건너온 저녁 빛,
가야 땅 김해의 해가 이마에 머물고,
나는 아직 고향의 흙냄새를 기억한다.

 

한 줌의 흙을 가슴에 품고
규슈의 최고봉 다카치호에 첫발 디딜 때,
바다는 등 뒤에서 끝없이 밀려왔다.

 

히무카(日向)라 이름 붙인 이곳,
그 이름은 빛이 아닌
그리움이었다.

 

태양을 본다.
그러나 나는
태양 아래 있던 고향을 생각한다.

 

언덕 위 바람이 분다.
어머니의 숨결처럼 따뜻하고
형제의 울음처럼 깊다.

 

우리는 정착한 자,
그러나 마음은 매일 떠도는 자.
돌아갈 수 없는
그 옛집의 기억을 품은 나그네.

 

히무카,
너는 떠나온 고향의 그림자.
그리고
새로이 살아갈 아침의 이름이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가야편 제9

가야의 속삭임: 사이토바루 고분군과 일본 왕실 서사에 남은 가야의 유산

 

낙동강의 잔잔한 물결이 남해의 푸른 파도와 포옹하고, 그 파도가 규슈의 해안에 부드럽게 속삭이던 시절, 고대 동아시아의 바다는 문명과 신화, 사람과 꿈을 잇는 거대한 다리였다.

 

한반도의 가야 연맹은 철의 날로 강인함을, 토기의 곡선으로 섬세함을 새기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 이야기는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의 고분 속에 고요히 잠들었다.

 

미야자키현의 사이토바루 고분군(西都原古墳群)은 그 이야기의 살아 있는 심장이다. 이곳의 흙은 가야 장인들의 손길을 기억하고, 고분에서 나온 유물은 바다를 항해한 가야 개척자들의 숨결을 간직한다.

 

일본 왕실은 일본서기의 신화적 서술에 따라 사이토바루가 위치한 이 땅 히무카(日向)를 진무천황(神武天皇)의 출발지로 기념하며, 그의 궁궐 자리였다는 야자키 신궁(宮崎神宮)을 신성시하고 이곳을 왕실의 상징적 발상지로 삼는다. 신화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자신들의 기원을 이곳에 심었다.

 

그러나 고고학의 삽과 붓은 신화의 안개를 걷어내고, 가야와의 깊은 연관성을 드러낸다. 사이토바루의 토기는 가야의 뿔잔과 닮았고, 철기는 가야 대장간의 망치 소리를 담고 있다. 이 유사성은 흔한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두 문명이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채 손을 맞잡고, 문화와 기술, 그리고 어쩌면 혈맥까지 공유한 증거다. 가야의 장인들은 규슈의 언덕에서 불을 피웠고, 그 불꽃은 일본 왕실의 초기 서사를 따뜻하게 비추었다.

 

일본 왕실이 황실의 발상지라고 부르는 사이토바루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적 · 유물과 가야의 유적 · 유물을 비교하며, 일본 왕실과 가야가 맺은 깊은 갈증의 흔적을 추적한다. 우리는 시간의 강을 거슬러 두 문명이 나눈 대화의 메아리를 찾는다. 이 여정은 단지 과거의 유물을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바다를 건넌 사람들의 열망, 그들이 일본 왕실의 뿌리에 남긴 영감, 그리고 낙동강의 바람이 규슈의 바다와 만나며 울린 노래를 되새기는 일이다. 우리는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가야의 울림이 왕실의 신화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그리고 그 울림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지 탐구한다.

 

낙동강과 규슈의 파도가 서로를 끌어안는 순간, 우리는 역사의 심연에서 고대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이토바루 고분군과 삼각연신수경의 출토: 권력 중심지였다는 증거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일본 미야자키현(宮崎県) 사이토시(西都市)의 드넓은 평야와 완만한 언덕에 자리 잡은 고대 무덤들이다.

 

3~6세기에 걸쳐 조성된 고분군으로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31, 원형분(円墳) 286, 방분(方墳) 2기 등 총 319기가 현존하고 있는 대규모 고분군이다.

 

일본 규슈 남부의 대표적 고고학 유적으로, 지역 수장층의 정치적 ·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며, 고대 일본의 사회 구조와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전방후원분은 마치 옛날 열쇠 구멍 모양으로 생겼다. 후원부(원형 부분)에는 시신을 안치하고, 전방부(사다리꼴 부분)에는 제단을 만든 독특한 구조다. 대규모의 고분 조성을 위해 투입된 노동력의 규모 등을 고려할 때, 일본 고분 시대의 계층 사회와 권력 상징성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300여 기의 많은 고분 중에 특히 오사호즈카 고분(男狭穂塚)과 메사호즈카 고분(女狭穂塚)으로 유명하다. 오사호즈카 고분은 일본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 니니기노 미코토의 무덤으로, 메사호즈카 고분은 역시 일본 신화 속 여성 신 고노하사노 사쿠야히메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남북 4.2km, 동서 2.6km, 175천 평에 걸쳐 펼쳐져 있는 이 고분군은 일본 내에서도 보기 드문 규모와 보존 상태를 자랑하며, 1952년 일본 국가 특별사적지로 지정되었다.

 

고분군은 농경지와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경관 속에 위치하며, 고분의 배치와 크기는 고대 일본 국가 형성 과정에 있어 이 지역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에서 주목할 유물 중 하나는 바로 삼각연신수경(三角縁神獸鏡)이다. 이 거울은 주로 일본 열도의 전방후원분에서 발견되며, 4세기 초 야마토 정권이 중국 후한 및 위진남북조와 교류하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삼각연신수경은 통치자의 권위, 신성성을 상징하는 정무적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그 출토 자체가 해당 지역이 당시 중앙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이토바루에서 이 거울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이 단지 변방이 아니라, 규슈 야마토 정치체제의 핵심부이자 전략적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 권력의 중심에 가야계 세력이 관여했다면, 일본 황실의 뿌리에도 그 영향이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이토바루 고분군과 가야 유적: 가야와 일본 왕실의 교차점

 

일본서기에서는 진무 천황과 관련된 무덤으로 전해지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는 신화적 내러티브로 간주한다. 하지만 실재했던 인물이라면 이는 가야의 도래 개척자 집단 중 일부일 수 있다.

 

최근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한반도 남부의 고대 국가 가야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면서, 이곳이 그저 일본 고유의 시원지가 아닌, 가야계 도래인의 거점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 왕실의 발상지인 곳이,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의 생활 거점이었다면, 그 의미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 철제 무구, 금동 장신구, 청동거울, 옥구슬 등이다. 일본 고분 시대의 물질문화를 생생히 증언하며, 특히 한반도 가야와의 뚜렷한 유사성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가야는 1~6세기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번성한 연맹체 국가로,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 등의 고분은 널무덤(목관묘), 덧널무덤(목곽묘),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순으로 형식이 변했다.

 

합천 옥전 고분, 김해 대성동 고분, 고령 지산동 고분 등에서 상형토기, 철기, 금동관, 청동거울이 무수하게 출토되었으며, 가야는 철기 생산과 해상 무역의 허브로서 동아시아 교류를 주도했다.


사이토바루 고분과 가야의 유물들은 일본 왕실의 초기 형성에 가야의 깊은 관여를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다.

 

먼저, 토기는 두 문명의 가장 선명한 연결고리다. 가야의 회청색 경질토기는 뿔잔, 삼족기, 장군 등의 상형토기로 독특한 미학을 뽐내며,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의례용 토기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뿔잔은 곡선적 형태와 섬세한 표면 처리에서 사이토바루 46호분에서 출토된 토기 복합구연호, 111호분에서 출토된 스에키 및 하지키와 상당한 수준의 공통점을 보인다.

 

토기의 문양예를 들어 물결무늬와 격자무늬는 사이토바루 고분에서도 확인되며, 이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 기술 전수의 증거 가능성을 말해준다.

 

이는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이 해상로를 통해 규슈로 전파되었으며, 일본 왕실의 의례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학계에서는 사이토바루 고분의 토기가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에 의한 현지 제작의 흔적을 보이며, 왕실의 제사나 권력 과시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논의된다.

 

철기는 가야의 선진 기술이 일본 왕실의 군사적 기반에 기여했음을 증명한다.

 

합천 옥전고분의 말투구(마면)와 판갑옷(마갑)5세기 가야의 철기 문화를 상징하며, 와카야마현(和歌山縣) 오타니 고분(大谷古墳)의 유사한 말갑옷과 비교된다. 가야의 철기 유물은 일본의 유물보다 50~100년 앞서며, 제작 기술의 정교함에서도 우위를 보인다.

 

사이토바루의 철기가 가야의 대장간 기술을 반영하며, 야마토 정권의 군사적 통합에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이 관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남원 월산리 고분에서 발굴된 화살촉인 철촉 역시 야마토와의 연관성을 드러내며, 가야가 철기 무역의 중심지였음을 입증한다.

 

장신구와 의례용품은 가야의 미적 감각이 왕실의 상징 체계에 스며들었음을 보여준다. 가야의 금동관과 금제 귀걸이는 김해와 고령에서 다수 출토되었으며, 사이토바루에서도 유사한 금동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가야의 장신구는 세공 기술과 화려한 문양에서 더 정교하며, 일본의 유물은 이를 모방한 흔적이 엿보인다.

 

가야의 청동거울은 백제-신라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독자적 양식을 유지하였다. 사이토바루 고분의 동경(銅鏡)과 유사한 원형 문양을 공유하지만, 가야 거울의 제작 연대가 더 이르다.

 

일본 학계에서는 사이토바루 고분의 장신구가 가야계 도래인의 공방에서 제작되었으며,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데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러한 유물들은 가야의 선진 문물이 일본 열도로 전파되며 왕실의 초기 문화 형성에 기여했음을 증언한다.

 

유적의 구조와 일본 왕실의 지리적 뿌리


유적의 비교는 가야의 묘제가 일본 왕실의 초기 무덤 문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드러낸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전방후원분은 일본 고분 문화의 상징으로, 후원부의 원형 구조와 전방부의 사다리꼴 형태가 수장층의 권위를 강조한다.

 

가야의 횡혈식 석실묘는 입구와 석실의 정교한 설계를 통해 역시 권력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고령 지산동 고분의 석실은 사이토바루 고분의 후원부와 유사한 평면 구조를 가지며, 적석 방식에서도 공통점이 확인된다.

 

가야의 묘제는 부장품의 다양성과 석실 장식의 복잡성에서 더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며, 이는 일본 왕실의 초기 무덤 설계에 간접적 영감을 주었을 수 있다.

 

사이토바루 고분의 전방후원분이 가야의 석실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이며 정치적 상징성을 발전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지리적으로, 가야 유적은 낙동강과 남해안에 밀집해 해상 무역의 전략적 요충지를 형성했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규슈 남동부에 위치하며, 가야와의 해상로로 연결되었다.

 

국립 가야 문화유산연구소와 국립 김해박물관의 최신 지리정보시스템(GIS) 기반 해상로 분석은 4세기 후반 가야와 규슈 간의 교류가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며, 이는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조성 시기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이 해상 네트워크는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이 규슈를 거쳐 야마토 정권에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하며, 왕실의 발상지신화에 가야의 지리적 흔적이 투영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분포와 규모는 가야의 해상 교류망과 연계된 지역적 중요성을 보여주며, 왕실의 신화적 기원에 가야의 현실적 기여가 겹쳤음을 시사한다.

 

왕실과 가야의 연관성: 한반도 도래 개척자와 신화의 교차


일본 왕실은 사이토바루 고분군이 자리한 미야자키현을, 진무천황 신화에 기대어 자신들의 발상지로 기념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가야와의 연관성을 더 선명히 드러낸다.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은 5~6세기 일본 야마토 정권의 문화 형성에 깊이 관여했다. 속일본기에 기록된 야마토노아야씨(東漢氏)는 가야계 집단으로, 철기 제작과 토기 기술을 전파하며 왕실을 포함한 귀족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사이토바루 고분의 철제 무구는 가야의 대장간 기법을 반영하며, 이는 도래 개척자들의 기술적 기여를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야마토노아야씨가 사이토바루를 거점으로 야마토에 기술과 문화를 전파하며, 왕실의 초기 정치 구조 형성에 기여했을 가능성을 논의한다.

 

가야와 백제의 동맹도 왕실과의 간접적 연계를 시사한다. 백제의 왕인 박사는 일본 왕실에 한문학과 행정 기술을 전파했으며, 가야와 백제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하면 가야의 문화적 요소가 왕실 형성에 스며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야 귀족층과 야마토 왕실 간의 혼인 가능성을 제기하는 주장도 있지만, 문헌 증거가 부족해 추정에 그친다. 그러나 사이토바루 고분의 유물은 가야의 물질문화가 왕실의 초기 서사에 녹아들었음을 강력히 증언한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이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이 창조한 다양한 문화와 문물의 집약지이자 집단 거주지이며, 일본 왕실의 신화적 기원에 가야의 현실적 기여가 중첩되었다고 직설적으로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예를 들어, 사이토바루 고분의 토기와 철기는 가야계 도래인이 현지에서 직접 제작한 것으로 보이며, 이를 일본 왕실의 권위와 상징에 사용했을 것이라는 점에서다. 왕실은 자신들 고유의 정체성을 고집하며 외래의 문물 수용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가야계 개척자들이 만든 의례 용품으로 제례를 올리고 제사를 지냈다면, 그들 또한 가야계일 가능성이 크다.

 

왕실의 발상지주장은 신화적 색채가 강하지만, 그 신화의 뿌리에는 가야의 문화적 흔적이 잠재해 있다. 일본 학계는 이러한 연관성을 문화적 융합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가야가 왕실의 초기 정체성 형성에 다층적 역할을 했을 것이란 점을 배제하지 않는다.

 

결론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흙은 가야의 장인들이 남긴 따뜻한 손길을 품고 있다. 낙동강의 바람이 규슈의 언덕을 어루만지며, 가야의 대장간에서 피운 불꽃은 일본 왕실의 초기 서사를 환히 밝혔다.

 

뿔잔에 담긴 가야의 의례는 사이토바루의 고분에서 숨을 되찾았고, 말투구의 단단한 철은 왕실의 권위를 지탱했을지 모른다. 일본 왕실은 미야자키를 발상지라 노래하지만, 그 노래의 깊은 선율에는 가야의 음색이 아로새겨져 있다.

 

고고학의 삽은 신화의 안개를 걷어내고, 부드러운 솔질은 두 문명이 바다를 건너 맺은 깊은 연관성을 선명히 드러낸다.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발굴과 학문적 대화는 잊혀진 서사의 장을 하나씩 열어젖힐 것이다. 사이토바루의 고분과 가야의 유적은 단순한 돌과 흙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바다를 항해한 사람들의 열망이 새겨진 캔버스이자, 일본 왕실의 신화 속에서 가야의 영혼이 숨 쉬는 생생한 증거다.

 

가야의 울림은 왕실의 서사에 영원히 얽혀, 역사의 심연에서 조용히, 그러나 힘 있게 노래한다. 우리는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과거가 미래에 전하는 메시지를 포착한다.

 

낙동강의 물결과 규슈의 파도가 서로를 끌어안는 그 지점에서, 가야와 일본 왕실의 갈증은 시간을 초월해 찬란히 빛난다. 이 빛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하나로 이어주며, 우리의 마음속에 새로운 이야기를 짓는다.

 

가야의 손길이 사이토바루의 흙에 남긴 흔적은, 왕실의 신화가 품은 깊은 갈증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고대인의 꿈과 그 꿈이 건너온 바다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가야와 일본 왕실이 함께 써 내려간 서사의 다음 페이지를 상상한다.

 

 

 

바람에 새긴 이름 가야에서 히무카(日向)

 

한때,

바람보다 먼저 이 땅을 지나간 이들이 있었다.
물결보다 빠르게,

별빛보다 깊게.


가야.


강과 산이 서로를 끌어안고,

바다가 하늘을 닮던 시절,
그들은 땅을 일구고 철을 다루었으며,
뜨겁게 피고 지는 생애를 노래했다.

 

그러나 모든 빛나는 것들이 그러하듯,
가야 또한 서서히 저물어갔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어떤 이들은 무너진 제단 위에 남았고,
어떤 이들은 마지막 불꽃을 품고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저 멀리,

규슈의 남단,

미야자키의 사이토시에 이르렀다.


그들이 잠든 곳.
사이토바루 고분군.

 

이곳은 마치,

잃어버린 고향을 대지 위에 다시 그린 듯하다.


수십, 수백 개의 봉분과 봉분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끝없이 펼쳐진다.


전방후원분 고분은,

마치 하늘을 향해 비밀스러운 열쇠를 들이미는 듯하다.


고분을 감싸는 초록의 바람,

푸른 하늘,

멀리 흐르는 강줄기.


모든 것은, 말없이 과거를 노래한다.

 

그들의 손길은 이곳에서도 섬세했다.


흙을 다지고, 돌을 골라 쌓고,

한 줌 부장품에도 이야기를 담았다.


봉분의 높이와 비율, 매장의 순서,

토기와 장신구의 모양까지,
모든 것이 가야의 숨결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와 혼, 눈물과 희망이 엮인 새로운 서사였다.


바다를 건너온 이들은 단지 도래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땅의 숨결이 되어, 시간을 새롭게 빚어냈다.


개척자이자 창조자.
낯선 땅에 고향을 심은 이들.

 

일본서기는 이 땅을 '히무카(日向)'라 불렀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고국, 가야를 바라볼 수 있는 곳,
신화의 장막 아래, 새로이 깃발을 세운 땅.


그러나 신화는 늘 현실의 눈물을 감춘다.


왕권의 욕망과 권력의 설계는,

과거를 왜곡하고 기억을 짓눌렀다.

 

한때 일본 학계는 이 서사를 무기로 삼았다.


사이토바루 고분군과 한반도 남부를

'지배''식민'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들었다.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이름 아래,

진실은 왜곡되고,

기억은 가려졌다.

 

그러나

흙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오늘, 고고학은 말한다.
칼이 아닌 손으로, 불꽃이 아닌 씨앗으로.


가야의 개척자들은 바다를 건넜고,

스스로 삶을 일구었다고.

 

사이토바루의 봉토 아래,

그들의 땀과 숨결은 여전히 뜨겁다.

 

사라진 제국. 잊힌 왕국.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대지 아래에, 별빛 어린 고분군 사이에,

미세한 토기 조각 하나하나 속에,
여전히 그들의 노래는 흐른다.

 

우리는 들을 수 있다.
바람을 타고 오는, 그 옛날의 속삭임을.
물결에 실려 오는, 사라진 이들의 발걸음 소리를.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