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4회

기마민족설과 가야계 개척자: 에가미 나미오가 열어준 일본 고대사의 또 다른 문

 

일본 열도의 고대국가 성립 과정을 이해할 때, 우리는 보통 일본 내 자생적 발전, 즉 점진적 권력 통합과 지역 엘리트 간 연맹으로 야마토(왜) 정권이 탄생했다는 주류 인식을 떠올린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 통설에 균열을 일으킨 이론이 등장한다. 도쿄대학교의 동양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교수가 제시한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騎馬民族日本征服説)’이다. 이 학설은 단순히 외래인으로서 한반도인이 유입되었다는 차원을 넘어, 일본 열도의 권력 구조와 문화 양식 전반을 뒤바꾼 ‘체계적 충격’이 한반도를 통해 유입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에가미 교수는 동북아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고고학적 증거, 인류학적 비교, 민속학적 자료를 아우르며 당시로선 획기적인 통합적 접근을 시도한 학자였다. 기마민족설은 일본 고대국가의 기원을 외래 문명에서 찾으려는 급진적인 주장 이상이었다. 그것은 고대 동아시아의 인적 · 물적 흐름 속에서 일본이라는 정치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민족사적 관점에서 조명한 하나의 해석 방식이었다.

 

이 이론을 정립한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일본이 패전의 폐허 속에서 민족 정체성을 재구성하던 시기에, “일본은 원래부터 단일하고 순수한 문명의 연속체였다”는 보수세력들의 내재적 발전론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전후 일본 지식계에 만연한 천황 중심 사관, 문화적 자생론, 일본문화 우월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에가미 교수는 4세기 중엽 이후 즉, 일본 고분시대 중기에 갑작스레 등장한 기마 전사 문화, 철제 무기, 대규모 전방후원분, 그리고 말을 탄 지배계층의 출현에 주목했다. 이 변화를 자연스러운 내부 발전의 결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 이전의 유물 · 유적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고등 문화가 갑자기 발견(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열도에서 급격하게 나타나는 고고학적 변화는 자생적으로 설명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특히 대형 전방후원분의 출현, 철제 무기의 대량 사용, 마구와 기마 장비의 급속한 확산, 무사 계층의 성립, 그리고 집권적 권력 구조의 등장 등이 모두 새로운 외래 세력의 유입에 의해 촉발되지 않았다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시기부터 일본의 지배층은 단순한 부족장 연합체를 넘어서 중앙집권적 군사 권력을 바탕으로 하는 정권 형태, 즉 야마토왜 정권의 형태로 발전해 간다. 에가미 교수는 이 변화를 주도한 집단이 바로 한반도 남부, 특히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마민족 집단이라고 보았다.

 

에가미 교수는 이 기마민족의 기원을 동북아시아의 스텝 지역-풀만 무성한 평원 지역으로 몽골과 만주 일대-으로 봤다. 기원전 수세기부터 이 지역에선 말을 이용한 마상 기술이 뛰어났다. 이동성과 전투 능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부족 연맹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서서히 남하하며 중국 북부, 만주, 한반도로 문화적 압력을 가했다. 이 중 일부 집단이 삼한(마한·변한·진한)사회 내부로 흡수되거나 연맹체를 이루어 가야라는 정치적 단위로 발전했다. 그 중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던 세력이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기마민족의 특징은 그저 말을 탈 줄 아는 민족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마상 전투에 특화된 군사 문화를 바탕으로 한 정복 지향적 사회구조를 지닌 민족이라는 점에 있다. 이들은 기마술과 철제 무기를 기반으로 한 우수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으며, 동시에 제사 체계, 건축 기술, 정치 행정 조직 등 선진적인 국가 형성 능력도 함께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이 일본 열도에 이주했을 때, 일개 피난민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주체였다는 것이 에가미 이론의 핵심이다. 즉, 야마토왜 왕권의 핵심 엘리트는 외래 기마 귀족이며, 이들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에 정착하면서 지배 이데올로기와 물리적 권력 기반을 동시에 이식했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도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 가야 지역의 적석 목곽묘와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묘제 구조, 부장품 구성, 축조 방식, 순장 풍습 등에서 강한 유사성을 보이며, 특히 가야의 지배층 무덤에서 출토된 마구, 철기 무기, 장신구 등은 일본 열도의 동일 시기 고분에서 거의 동일한 양식으로 출현한다. 이는 일반적인 문화의 전파 정도가 아니라 실제 사람의 이동, 더 나아가 지배 구조의 교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문헌 사료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 일본의 고대 문헌에는 한반도계 귀화인(개척자)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많으며, 이들 중 일부는 야마토 정권 초기의 핵심 권력층으로 활동했다. 일본 천황가 역시 내부 혈통의 연속이 아니라, 복합적 융합의 산물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제15대 오진천황(応神天皇)은 모계가 백제 혹은 가야계라는 주장 - 일본 역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郎) 처럼, 그가 백제 21대 개로왕의 동생 즉, 왕자 곤지왕이라고 해석하는 국내외 학자도 꽤 있다 - 이 강하게 제기되며, 일본 내 일부 고대 귀족 가문도 한반도 출신 개척자 혈통임을 자랑스레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일본 고대 씨족 일람 서적인 『신찬성씨록』에는 백제, 신라, 가야 등지에서 건너온 수많은 성씨가 일본의 귀족 가문으로 편입된 내력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들 중 대표적인 하타씨(秦氏), 스가와라씨(菅原氏), 오토모씨(大伴氏) 등은 소위 말하는 이주민 가문이 아니라 왜나라의 정치, 경제, 종교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한 주체였다.

 

에가미 교수는 기마민족이 보통의 외래 세력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고대 국가의 형성 주체라고 주장했다. 즉, 야마토 왕권의 실질적 건국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온 기마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들의 영향이 행정 제도, 군사 조직, 고분 양식, 무기 체계, 제사 문화, 농경 기술, 심지어 왕위 계승 제도에까지 미쳤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초기 야마토왜 정권의 행정 체계는 읍성 단위의 가야 지역 행정 모델과 유사하며, 기병 중심의 군사 편제도 가야의 집단 전투 방식과 상당히 닮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일본 사회에서 상당한 지지와 동시에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전후 일본은 천황제의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했고, ‘기마민족이 정복하여 야마토 정권을 세웠다’라는 주장은 곧 천황의 기원을 외래로 본다는 점에서 민감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일본 우익 진영은 에가미를 반일학자, 외세 사주자 등으로 몰아붙였고, 일부 언론은 에가미 교수의 주장을 마치 천황제 부정 혹은 공산주의 세력의 역사 왜곡에 동조하는 발언으로 마녀사냥 하기도 했다. 그를 ‘일본의 뿌리를 부정하는 자’로 비난했다.

 

가야나 백제, 심지어 중국의 동북방 기마민족과의 연관성을 언급한 그의 발언을 트집 잡은 것이다. 학계 내부에서도 에가미 교수의 주장은 고고학적 사실을 과잉 해석한 ‘음모론적 역사관’으로 폄하되었으며, 실제로 에가미는 연구비 지원 중단, 논문 발표 기회 박탈, 학회 초청 제외 등 실질적인 탄압을 경험했다. 그 당시의 일본 사회에서 '외래 기원'이라는 단어는 거의 금기어와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역사는 민족의 자존심이 아니라, 사실의 탐구 대상이어야 한다”라고 일갈하며, 역사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에가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일본은 과연 외부 세계로부터 독립적으로 형성된 문명인가, 아니면 한반도와 대륙으로부터의 수많은 자극과 영향을 통해 진화해 온 ‘융합적 국가’인가. 안타깝게도 에가미 교수와 같은 양심적 지식인의 목소리는 1990년대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일본 내 보수우익들의 탄압과 압력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왜곡 역사론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기마민족설은 단지 군사 정복의 역사 해석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정치학, 국경을 넘는 역사 서사, 그리고 정체성의 열린 해석에 대한 도전이자, 민족이동과 문화 전파, 기술 이전과 정치권력의 재편이라는 복합적 역동성 속에서 동아시아 고대사의 본질을 되묻는 시도였다. 한반도의 가야가 단순히 세력 다툼의 와중에서 패배한 후 사라진 지역연맹체가 아니라,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문화적 기틀에 기여한 동력이었다면, 이는 한국사와 일본사가 단절된 두 개의 다른 역사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가미 교수는 일본이 스스로를 바라 보는 거울에 '다문화적 기원'이라는 균열을 냈고,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 또한 다시 보게 된다.

 

기마민족설은 오늘날 한일 양국이 공유하는 고대사의 공동 기반을 탐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우리는 역사를 민족 중심 서사로 환원하는 데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그 역사를 움직인 것은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교류했던 사람들, 즉 도래인, 정복자, 장인, 제사장, 무사 등 개척자들이다.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기마민족설은 바로 그 사람들의 발자취를 통해 국가의 기원을 추적하고, 민족이라는 개념조차 초월한, 보다 넓은 역사 인식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에가미 교수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도전적인 유산이다.

 

에가미 교수는 일본을 고립된 섬나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동북아 전체의 인류 이동과 문화 융합 속에서 일본을 바라 보았다. 한반도와 대륙, 열도는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공간이었으며, 일본의 고대사도 그 흐름 속에서 복합적으로 형성된 결과물이라는 것이 그의 기본 관점이다. 그는 야마토 정권 초기의 문화적 DNA에는 확실히 한반도의 유전자가 섞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 지적은 지금도 많은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계속 지지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이론을 한편의 정복 내러티브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거국적 인구 이동과 정치 융합의 상징적 모델로 볼 수 있다. 고대 가야계 도래 개척자들은 일본 열도의 주변인으로서가 아니라 권력의 중심에서 국가 형성의 실질적 동력이었던 '이방의 창조자'였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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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편 제3

고령에서 건너간 장인들, 야마토왜에 금속을 심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소리 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그 침묵의 저편에서 우리는 금속의 불꽃과 망치 소리, 그리고 땀과 기술로 새겨진 이주의 흔적을 포착할 수 있다. 가야, 특히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고령 지역에서 야마토로 건너간 장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술 이주의 차원을 넘어서, 한반도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일본 열도로 스며들었던 실질적 증거이자, 고대 동아시아 해양 교류의 중심축을 이룬 이야기다.

 

일본 열도에 철의 불꽃을 일으킨 이들이 누구였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단연 ‘가야’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남부, 특히 오늘날의 경상북도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했던 대가야는 비단 정치와 제사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고도의 금속 가공 기술을 가진 장인집단의 본산지였다.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토 정치체제의 물리적 기초, 다시 말해 철기 기반의 제도와 건축, 무기 생산의 토대를 놓았다는 주장은 이제 단순한 가설을 넘어서는 실증적 증거로 하나씩 뒷받침되고 있다.

 

야마토(왜) 시대 전기 무렵, 일본은 급격한 정체성 형성의 시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철제 무기, 제련로 유적, 금속 공예품, 그리고 고분 내 금속 장신구들은 일본 자체의 고유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도성을 띤다. 바로 여기서 가야계 도래 장인의 존재가 부상하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이주민이 아닌, 제사와 건축, 장례와 군사까지 포함하는 '기술-정치 복합체'의 일원이었으며,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에 있어 실질적 기반을 구축한 장본인들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오사카 가시와라시(柏原市)의 ‘오오가타 유적(大県遺跡)’이다. 대규모 제철 유적으로, 일본 고분시대로 알려진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에 걸쳐 이곳에서 활발한 제철 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유적에서 발굴된 다양한 철기 제작 도구와 제련로 흔적이 그것을 입증하는데, 이는 가야의 선진 제철 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된 사례로 보인다. 유적에서 출토된 철기 제작 도구와 기술이 가야 지역의 그것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역시, 오사카의 가타노시(交野市)에 자리한 ‘모리 유적(森遺跡)’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데, 고대 제철 유적으로 6세기 전후에 대규모의 활발한 제철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한다. 모리 유적은 고대 왜나라의 중심부였던 오사카와 나라의 중간부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자, 경제적 번성을 누리던 지역이다. 특히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부뚜막 형태의 건조물이나, 시루형 토기의 발굴 등을 이유로 이곳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개척자들의 집단 거주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부엌에 설치된 부뚜막이나, 시루솥 위에 올려 놓고 음식물을 찌는 데 사용하는 시루는 전형적으로 한반도에서만 보이는 생활 시설이자 생활 용기이기 때문이다. 모리 유적 주변에는 많은 고분들이 산재해 있는데, 아마도 이 지역에서 제철 산업에 종사하던 가야계 개척자들의 고분일 것으로 짐작한다.

 

모리 유적지에서 발굴된 시루와 부뚜막 설명문-오사카 카타노시 시립도서관(交野市立倉治図書館) 고고학 강좌 자료-

 

나라현 덴리시(天理市)의 ‘후루 유적(布留遺跡)’ 또한 고대 제철 유적으로 높이 평가되며, 철기 제작과 관련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지역도 야마토 왕권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당시 철기 제작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야마토 정권은 이와 같은 제철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본 열도 통일에 성공한다. 이곳의 유적과 유물이 증언하는 바는, 여전한 가야의 뚜렷한 영향이라 하겠다. 실제로 이들 유적과 주변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와 도구들, 특히 철제 검과 쇠못, 마구(馬具)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거의 동일한 기법과 양식을 보여준다.

 

가야 장인들의 이주는 우연적인 사적 이주라기보다, 정치 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이주로 보아야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속일본기(續日本紀)』는 이러한 교류의 자취를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그 가운데 특히 신공황후(神功皇后) 시기와 응신천황(應神天皇)기의 기록, 그리고 백제 · 가야계 귀화인(개척자)에 관한 기술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공황후(神功皇后) 시기부터 대가야와 야마토 간의 관계는 단순한 외교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인 기술과 인력의 이동을 동반한 정치적 동맹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5세기 중반, 가야 지역이 백제-신라 양강구도 속에서 점차 세력 위축의 위기에 놓이자, 많은 기술자와 장인들이 ‘개척자’로 일본에 이주했고, 이들은 야마토 왕실에 의해 귀화가 허락되며 국가적 기반 기술자로 배치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이동이 자발적 개인의 이주가 아니라, 정치 권력에 의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라는 점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원문 중 관련 구절:

原文:

「是歲、遣荒田別・鹿我別、以問新羅之罪焉。卽以、譬大加羅國主、令來貢職。」

「又遣阿知使主・都加使主、以求良工百濟・高麗・新羅。」

해석:

"이 해에 아라타와케와 카가와케를 보내 신라의 죄를 물었다. 그리고 대가야국의 왕에게 명하여 조공을 하게 하였다."

"또한 아치노오미와 츠카노오미를 보내 백제, 고구려, 신라에서 우수한 기술자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위의 부분이 한반도와 왜나라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인데, 이런 사례가 여럿 있지만 일부러 이 원문을 가져온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이전의 양국 간 교류 기록이 있기는 하나 이 기록이 그나마 조직적이고 실질적인 기술과 인력의 이동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가장 이른 시기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서라는 『일본서기』의 왜곡 문제도 함께 거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이 발생하는 근본적 이유는 한반도로부터의 문화 유입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왜나라 우위의 역사를 기술하고 싶은 그들의 심리 즉, 콤플렉스 때문이다. 기술력이나 문화적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이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기술과 문화의 전파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우수한 문화가 널리 향유된다. 어찌 되었든 여기서 『일본서기』가 주장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었을 거다.

 

"당시 일본은 문화나 기술 면에서 아직 미발전 단계였고, 가야는 철기 문명과 공예 기술을 보유한 우수한 나라였다. 일본은 이를 배우기 위해 가야와 동맹관계를 맺고 가야의 기술자와 문화를 수용했다."

 

문화 전파의 중개자로서, 고령을 비롯한 가야 지역 출신 장인들의 역할은 단순한 조역이 아닌, 역사 창조의 주체였다. 앞의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 설화와 그 이후 기록들은 실제로는 가야계 기술자 및 장인층의 집단적 이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신공황후의 명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가야에서 인재를 데려왔다"는 표현은 실질적으로 당시 왜나라가 고도로 조직된 기술 이주 정책을 수행했음을 뜻한다. 여기엔 왜나라의 정치적 야심뿐 아니라, 가야 지역 내의 정세 변화와 정치적 압박 속에서 이주를 택한 이들의 현실적 선택도 반영되어 있다.

 

가야는 삼국에 비해 영토는 작았지만, 해상 교역과 제철 기술에서 탁월한 위상을 자랑하던 나라였다.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은 대가야는 철 생산과 무기 제조, 특히 철제 무기와 갑옷, 말 투구, 철솥 제작 등에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수의 철기 유물과 금속 공예품들은 이러한 가야 장인의 기술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철기 문화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금속 도구와 무기의 질적 향상이 나타나는 시점이, 바로 가야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4세기 이후와 겹친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야마토(왜) 정권은 이러한 기술력을 필요로 했고, 그 필요는 단순한 경제적 교역을 넘어 인재의 이주를 동반했다. 이 과정에서 고령 출신 장인들이 주축을 이루는 가야계 기술자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 궁궐 건축, 무기 제작, 제례 도구 제조, 불상 주조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 고대 사원 건축에서 보이는, 기둥 상부에만 공포를 배치하는 주심포 양식이나 금속제 제례 기구, 초기 불상 제작 기술 등은 가야와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 중 다수의 전통은 ‘야마토노 아야씨(東漢氏)’와 ‘다카무쿠씨(高向氏)’ 등 한반도계 개척자 가문들을 통해 계승되었다. 이들은 단순한 기능공이 아니라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의 문화 · 정치계의 중심에 있었던 집단이었다.

 

특히 주목할 씨족 중 하나가 ‘야마토노 아야씨’이다. 『일본서기』 및 『속일본기』에 ‘조정의 금속 제례와 건축에 관여한 개척자 가문’으로 등장하며, 그 출신이 한반도라는 점, 특히 가야계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일본 고대 사회 내 가야계 기술자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일본서기』 – 응신기(應神紀)

原文:
「是歲、百濟人阿知使主、率其徒黨、來歸化焉。仍居倭漢之地、故號曰倭漢氏。」

해석:
"이 해에 백제인 아치노오미(阿知使主. 한반도 출신 개척자로 그 출신이 백제인지 가야인지는 불분명하다)가 그 무리를 이끌고 귀화하였다. 그들은 야마토의 한 지역에 거주하였으므로, '야마토노 아야씨(倭漢氏)'라 불리게 되었다."

 

『속일본기』 – 덴표호지(天平寶字) 6년(762년) 6월 조

原文:
「東漢氏之先、阿知使主也。奉詔而渡來、始仕天朝。因居倭郡、是以號曰倭漢。」

해석:
"동한씨(東漢氏)의 선조는 아치노오미(阿知使主)이다. 조정의 명을 받고 건너와 천황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야마토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으므로, '야마토노 아야씨(倭漢)'라 칭하였다."

 

‘야마토노 아야씨’는 궁궐 및 신전 건축뿐만 아니라 제사의 집행과 관장, 국가 의례의 관리 등에도 관여하며, 단순한 외래인 기술자라기 보다는 문명 이식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장인들의 기술이 단지 ‘이전’ 및 '도입'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착’과 ‘변용’을 거쳐 일본 고유의 기술 체계로 흡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가야계 기술자의 이주를 하나의 문명적 충격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듯 금속 제련 기술의 이식을 통한 문화의 전수는 단순히 무기나 농기구 제작에만 그치지 않았다. 고대 일본의 무덤양식인 고분의 형성에도 가야의 영향이 깊이 스며있다. 일본 고분시대 전기의 주요 무덤에서 보이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형식은 가야의 계단식 석실고분이나 봉토형 고분에서 유래한 구조적 특성을 보여주며, 축조 기술 역시 한반도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나아가 고분 내부에서 발견되는 금속 무기나 갑옷, 장식품 등의 출토품은 가야계 기술의 직접적 유입을 입증하는 물적 증거가 된다.

 

고분 축조 기술, 특히 석실형 고분의 양식이나 석관의 배치방식에서도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유사한 구조가 일본 각지에서 발견된다. 나라현 이코마시(生駒市)에 자리잡고 있는 ‘이코마 고분군(生駒古墳群)’ 등에서 출토된 일부 고분은 내벽 석재 처리 방식, 봉토 구조 등에서 한반도 양식이 명확히 드러나며, 이는 단지 묘제만이 아닌 장례 의식 자체의 이식 가능성까지 보여준다.

 

한반도 남부는 삼국 통일 전야의 전쟁과 연맹, 분열이 끊이지 않았고, 대가야 역시 이러한 격랑 속에서 세력의 부침을 겪었다. 정치적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또는 야마토 정권과의 동맹 강화를 위한 정치적 교섭의 일환으로, 가야 왕실과 귀족들은 기술자와 장인을 인재로 삼아 보내거나 이주시키는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자들은 일본에서 ‘도래인(渡來人)’이라는 명칭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그 정체성은 결코 단절되지 않았다. 야마토노 아야씨를 비롯한 도래인 계열 가문들은 자신들의 출신 지역과 문화를 기억하고 계승하며, 그것을 일본 속에 뿌리내리게 했다. 도래인으로 갔으나 개척자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문화의 전파나 식민적 지배가 아닌 주체적 이동이었으며, 오히려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뿌리’ 중 하나가 가야였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실마리가 된다. 우리는 지금껏 ‘일본의 영향’이라는 말에는 익숙하지만 ‘일본을 만든 한반도’라는 관점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왔다. 그러나 고고학 유물, 문헌 기록, 도래인 가계도, 그리고 지역 전승을 종합할 때,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일본을 만든 다리 중 하나는, 고령에서 시작된 가야의 철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령은 단순한 변한의 일개 거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아시아 제철 기술의 중심이었으며, 해상 무역의 허브였다. 그곳에서 자란 기술자들은 단순히 쇠를 두드린 것이 아니라, 문명을 단련했다. 그리고 그 문명은 일본 열도에 전파되어 야마토 정권의 기초를 다졌다. 이는 침략이나 정복의 역사가 아니라, 기술과 문화의 이동이며, 주체적 이주의 역사이다. 한민족의 기술력과 문화력이 국경을 넘어 또 하나의 문명을 꽃피운 사례인 것이다.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경상도 고령이 속한 변한에서 철을 생산하여 왜와 낙랑 등에 수출한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오환선비동이전)

原文: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해석:

”이 나라에서는 철이 나며, 한(韓), 예(濊), 왜(倭)가 모두 와서 사 갔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모두 철을 사용하니, 이는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한 변진은 철을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 고대 문화 속에 숨겨진 가야의 흔적을 재발견함으로써, 한반도의 역사적 위상과 기술적 역량을 재조명해야 한다. 이는 ‘침탈당한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건너가 문명을 전한 과거’를 회복하는 일이다. 가야의 기술자들은 결코 일본에 의해 끌려간 피지배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선택했고, 그들의 기술은 일본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변화의 불씨는 지금도 일본의 고대 유적과 유물, 제례와 전통 속에 찬란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고령에서 출발한 장인의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곳은 열도를 가로질러 문화의 축을 세웠고, 철의 열기 속에서 두 민족의 역사적 접점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그 금속의 불꽃 속에서, 묻혀 있던 우리의 역사를 다시 꺼내어야 한다. 가야 장인들의 일본 이주는 곧 고대 일본의 국가 형성과 문화적 기반을 이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철의 길’로 연결된 고령과 야마토, 그 중심에는 정치적 연맹의 이면에 존재했던 기술자(개척자) 집단이 있었으며, 그들이 남긴 유산은 일본 곳곳의 유적과 고분, 유물 속에서 오늘날까지도 생생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