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감 상2018. 5. 21. 01:05

작가는 이미 고인이 되셨으니 여쭙고자 하나 여쭐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요, 연출의 변 또한 확 와닿지 않으니 그 진의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음이라.


어렵다 한들 헤아리지 못할 바 없고, 헤아려 살피고자 노력조차 아니 함은 나의 태만함일지니 나름의 생각을 아래에 적어 본다.


요한복음 1장에 이르기를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며,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 바 되었다”는 구절을 염두에 두고 작품 해석을 했으나 이는 그저 내 생각일 뿐, 모르겠다. ㅠ


1. 말씀


지난밤 잠결에 말씀이 있었다.


“내일 집 나간 아들이 돌아 올 것이니라.”


가족 모두가 애타게 기다린다.


기다림의 끝자락, 길 잃은 젊은이가 빛으로 찾아온다.


모두가 말씀의 증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자신이 그들의 가족임을 믿지를 않는다.


즉, 자신이 보내심을 받은 자(者)인줄 알지 못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장)


2. 바위


화전을 일구며 살던 이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힘겹게 일궈놓은 화전 한 가운데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버티고 서 있다. 이 바위로 인해 화전으로써 쓸모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바위를 쪼개다가 삶을 마감(?)해 버린 아버지. 허나 가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가져다 주는 존재이시라.


터키에 카파도키아 동굴수도원이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시대 이래 종교적 탄압을 피해 바위를 뚫고 그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신앙생활을 했던 곳이라 한다.


삶에 있어 바위란, 고난의 상징이자 안식의 피난처이다.


3. 쥐가 되다


길을 잃고 찾아온 낯선 젊은이에게 가족들은 그 젊은이를 쥐가 되어 집을 나가버린 자신의 가족이라 한다.


이를 완강히 거부하던 젊은이. 하지만 끝내는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인 채, 그곳을 떠나지 않고 함께 살고자 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 들이니라”(요한복음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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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7년~현재/감 상2015. 8. 15. 13:18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김중배의 다이아반지가 그리도 탐나더란 말이냐? - 이수일과 심순애.'

 

'마음씨 고운 여선생님, 그 선생님의 도움으로 검사가 된 청년의 순애보적 이야기 - 검사와 여선생.'

 

'기생의 한 많은 삶과 사랑 그리고 고단한 결혼생활 - 어머니의 힘.'

 

적당한 코맹맹이 소리의 변사가 변죽을 울리며 들려주던 애절한 이야기.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고, 손수건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치 전설과도 같은 신파극의 명작으로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작품들이다.

 

블랙과 화이트, 그리고 천정에 매달려 있는 홍등의 대비. 검은색 막이 둘러쳐져 있는 무대, 그 위에 흰색으로 치장된 높고 낮은 단들로 무대는 꾸며져 있다. 단출하다.

 

▲ 연극 「홍도」의 무대

 

이와 같은 단출한, 마치 무대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그리고 진짜로 텅 비어있는 그런 연극 방식은 폴란드의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에 의해 ‘가난한 연극’이라 이름 붙여졌다.

 

그로토프스키의 실험극 이론인 가난한 연극은 단지 무대만을 배제한 이론이 아니다. 배우를 제외한 여타의 모든 것을 배제해도 가능한 것, 그게 바로 연극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격한(?) 이론은 당시의 매스미디어(영화나 TV)의 활발한 세 확산과도 관계가 깊다. 영화나 텔레비전이 의존하는 테크닉에 반대하고 조명, 의상, 무대장치로부터도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배우의 몸짓이 미장센이 된다.

 

이제껏 보아온 연극 중에 그래도 개인적으로 명작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89년인가 90년인가 러시아국립극단이 내한해서 문예회관대극장(現 아르코극장)에서 공연했던 「햄릿」이다.

 

그 넓은 대극장 무대 위에 장치라고는 달랑 원통형 기둥 네 개뿐. 그리고 이어서 펼쳐지는 햄릿의 장엄한 의식들. 3시간 반의 공연을 이렇듯 텅 빈 무대 위에 펼쳐 놓는대도 지루할 틈도 없이 긴장감으로 무대를 응시해야 했다. 마치 그때그때 무대가 바뀌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때로는 그 네 개의 기둥이 기준선이 되어 앞쪽은 이승의 세계가 되고 뒤쪽은 저승의 세계가 되며, 또 때로는 궁궐의 안과 밖이 되기도 하고, 네 편과 내편의 경계선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공연의 피날레는 네 개의 기둥이 관객석을 향해 들어 올려지며, 그 기둥들로부터 환한 빛줄기가 어둠에 싸인 객석을 향해 투사된다. 희망이다.

 

희고 검은 단출한 무대를 보며, 이십 여 년 전의 그 무대 「햄릿」을 떠올렸던 이유는 어쩌면 그때와 비슷한 감동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나름의 길한 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다. 고선웅 연출의 「홍도」는 훌륭했다. 배우 예지원씨의 연기도 압권이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예지원에 의한, 예지원을 위한 연극’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연극 「홍도」는 예지원을 돋보이게 했다.

 

▲ 연극 「홍도」의 포스터와 함께 강동완

 

이 연극 「홍도」의 원작은 1936년 임선규 선생이 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다. 이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것이 고선웅 버전의 「홍도」라고 볼 수 있다.

 

내용이야 뭐 이미 다들 아는 것이니 여기서 다시 소개할 필요는 없을 듯 하나 간략히 적어 본다면, 오빠(홍의준 분)의 공부를 위해 기생이 된 홍도(예지원 분)의 기구한 운영 정도가 되겠다. 요즘 우리들 안방을 수놓고 있는 신파형 아침드라마의 원조격이다.

 

연극은 크게 두 개의 스토리로 나눠 볼 수 있다. 이는 고선웅 연출의 의도적인 구분선 긋기로 판단이 된다. 초반부 무대 위를 밝히고 있는 홍등과 중반 이후 홍등이 올라가고 사람 인(人)자 모양의 기와집 지붕이 천정에 내걸리는 부분으로 양분화 된다.

 

홍등의 의미는 홍도의 전반부 인생, 사람 人자 모양의 기와집 지붕은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홍도의 후반부 인생을 상징화한 형상물처럼 보인다.

 

배우들의 연기는 원작의 느낌을 살리고자 했던 이유 때문인지 신파극조의 발성법을 따르고 있는데 홍도의 이미지와도 부합이 되고, 나름 마당극과 현대극을 뒤섞어 놓은 듯한 극의 이미지 상, 그리고 코믹한 극의 전개 등을 고려해 볼 때 의미 있는 선택으로 보인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완전히 비어 있는 텅 빈 무대를 지향한 것이 아니었다면 굳이 조명까지도 배제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백색 계열의 무대장치 위를 좀 더 다양한 조명효과를 통해 구획 지웠더라면 장소의 전환이나 분위기 창조에 한층 기여했을 것이기에 그렇다.

 

특히나,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홍도의 집안일과 관계된 다양한 소품들이 조명 밖에 위치해 있는 탓으로 마치 극과는 동떨어진 화면 밖 어떤 물체를 보는 느낌이 들더라는 점이다. 배우의 움직임이 무대의 생명이듯, 소품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것은 역시 조명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음향의 사용이 간혹 있었는데 이것 역시 마당극의 형식을 빌려 무대 위에서 라이브로 실연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현대음악이든, 고전음악이든, 아니면 음향이 되었든 무대 위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공간에서 충분히 실연 가능하기에 그렇다. 그랬다면 극의 분위기와 한층 조화를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마지막으로 무대(배우)와 관객과의 구분을 그렇듯 철저히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부분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과 어우러져 함께 하는 극으로 만들었더라면 재미와 흥, 웃음과 즐거움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결과가 예측 가능한 뻔한 스토리라는데 보는 관객의 곤혹스러움과 지루함이 있다. 이를 상쇄하기에는 관객의 참여가 절대적일 수 있다.

 

이 연극 「홍도」의 백미는 마지막에 홍도가 자신의 라이벌 혜숙(최주연 분)을 살해하고 경찰이 된 오빠 철수의 손에 체포되어 잡혀가는 대목이다. 하얀색 무대 위로 붉은 꽃잎이 눈처럼 쏟아진다. 울림이 크다.

 

이제까지의 연극이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였다면 고선웅 버전의 연극은 “홍도야 울어라, 오빠는 없다”가 되겠다.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부분이나 시사하는 바는 제법 크다. 전자의 연극이 주는 메시지는 오빠의 존재가 홍도의 어려운 형편을 구해줄 수 있다는 희망적 대사라면, 후자는 그게 가능하지 않은 시대적 상황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다. 더 이상 신분상승의 엘리베이터는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다.

 

그래도 홍도는 꿋꿋하게 대답한다.

 

“오빠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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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7년~현재/감 상2015. 3. 28. 23:30

내 이야기다. 긴 설명이 필요 없이 그저 이렇게만 이야기해도 충분한, 술과 함께 살아온 내 삶의 여정을 나 아닌 다른 이가 들려주는 이야기. 이게 연극 「술꾼」이다.

 

연극이 끝나고 좋은 벗과 '역시나 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술과 맺어온 세월이 내가 살아온 내 일생의 길이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도 내 이마 한 가운데에는 작은 흉터자국이 선명하다. 옛날에는 다들 집에서 막걸리를 담가 드셨다. 특히 제사나 명절에는 아주 의례적인 일이었고 말이다.

 

역시 명절이 머지않았던 어느 날, 서너 살이 갓 넘었을 내가 얼마나 달라고 보채던지 부엌에서 술을 짜고 계시던 큰어머님께서는 바가지에 술을 그득 따라 내게 주셨고, 나는 그걸 벌컥벌컥 들이켰단다.

 

그리고는 채 몇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그만 부엌 옆 장작더미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그때 장작 모서리에 이마를 찌었고 지금껏 훈장처럼 내겐 그 자국이 짙게 남아있다.

 

그리고 초등학교 입학 무렵부터는 과수원이 많은 동네에서 살게 되었다. 지금이야 미성년자들에게는 술과 담배를 팔지 않는 게 당연시 되는 시대가 되었지만, 내가 어릴 때만해도 누구랄 것도 없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하면서부터는 부모님 술 · 담배 심부름을 도맡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빼 놓지 않고, 찌그러진 한 되짜리 양은 주전자를 들고 터덜터덜 먼 길을 걸어 술 받으러(사러) 동네 구멍가게(점방)까지 왕복해야 했다.

 

과수원 길을 돌고 돌아 돌아오는 길에는 무료함에 주전자 주둥이를 입에 대고 한 모금 또 한 모금 홀짝이며 오다 보면 - 특히나, 무더운 여름날은 - 적당히 취기가 오르기도 했다.

 

어린 내가 설마 그걸 마시며 왔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신 어른들은 매번 “조심해서 들고 오라고 그렇게나 일렀는데, 이 아까운 걸 또 다 흘리고 왔네.” 하시며 내 엉덩이를 툭툭 치시곤 했다. 어떤 날은 내가 봐도 좀 과하게 마셨다 싶기도 했다.

 

원인 없는 결과 없다지 않던가! 돌이켜 보건데, 이런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의 40대 이상 중년들은 자연스레 술을 밥 삼아 마시는 술고래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이르게도 된다.

 

▲ 연극 「술꾼」 포스터

▲ 공연 관람 후의 뒷풀이는 항상 즐겁다

 

연극 「술꾼」은 최송림 작가의 작품으로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아주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최송림 선생 최초의 국제 무대 진출작이 되는 셈이다.

 

최송림 선생과 나의 인연 또한 아주 각별하다. 내게 특히 그러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예술을 하겠노라며 거친 대학로 밥을 먹던 어느 날, 드디어 연극 연출로 데뷔하는 기회를 잡았는데 그 작품이 최송림 선생의 신작 희곡이었다.

 

그게 내 나이 29살 때였으니 무려 20여 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나는 공부를 하러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이후 서로 다른 밥을 먹는 처지가 되었으나 소중한 인연으로 내 기억 속에는 각인되어 있다.

 

연출은 유승희 선생이 맡았고, 배우 김재훈이 출연하는 1인 모노드라마이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배우란 고독한 존재다. 그의 곁에 동료 배우 누군가 서 있고 아니고, 무대 위에 배우의 숫자가 많고 적고는 그 고독감 해소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어둠과 정적에 휩싸인 객석. 그곳에서 무대를 주시하고 있는 무수한 시선들. 배우의 몸짓 하나라도 놓칠세라, 대사 한 토막, 무대 위를 휘감고 흐르는 공기 한 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꼿꼿이 앉아 있는 관객의 존재는 배우에게는 형언키 어려운 두려움이자 고독감의 원천이다. 때로 관객은 배우와 동일체로서, 또 때로는 배우의 대립자(비판자)로서 존재하기에 그렇다.

 

이런 점에서 모노드라마란 중견 배우에게조차도 쉽지 않은 도전이다. 글쎄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추송웅(빨간 피터의 고백) 선생, 그리고 윤석화(딸에게 보낸 편지)와 손숙, 정규수(품바) 선생 정도가 기억에 남아 있는 1인극의 대가들이다.

 

연극 「술꾼」은 최명수(김재훈 분)의 일대기를 그린 성장극이다. 한쪽 다리를 저는 아버지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그런 가정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명수는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충무로로 상경한다.

 

이곳에서 영화배우 지망생 봉자를 만났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녀는 술집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명수는 노발대발하나 그 이후 봉자의 행방은 묘연해 진다.

 

이 일을 계기로 충무로 생활을 청산한 명수는 봉자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술집을 전전하나 끝내는 찾지를 못하고 나이트클럽 웨이터가 된다. 그리고 개(웨이터) 같이 벌어 정승(영화감독) 같이 쓰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돈을 모아 마침내는 나이트클럽의 사장이 된다.

 

하지만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하지 않던가. 미성년자 고용 등으로 사업의 위기를 맞은 명수는 빚더미에 올라 앉게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간암 선고까지 받게 되자 아버지의 길을 따라 자살을 결심하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그리고는 포장마차를 끌고 길거리로 나선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그러던 어느 날, 애타게 그리던 봉자의 연락을 받고 둘만의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된다는 내용의 해피엔딩이다.

 

명수의 이런 고단한 인생 여정 곳곳에서 마주친 다양한 인물들을 1인 다역하며 배우 김재훈은 특유의 익살과 재주로 맛깔나게 표현해 낸다. 관객들과 진짜 소주 한잔을 나누어 마시며 말이다.

 

내 이야기이자 당신의 이야기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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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7년~현재/감 상2015. 3. 16. 16:36

셰익스피어, 안톤 체홉, 헨릭 입센. 이들은 연극에 입문하는 이들에겐 마치 고전극의 교과서와도 같은 인물들이다. 연극을 하겠다면 반드시 한번은 거치고 가야하는 난관 비슷한 성역이다. 우선, 어렵다. 그리고 지루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들을 사실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연극계의 속성상, 입문작으로써의 작품은 원작에 충실한 공연들을 주로 하다 보니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정서와 부합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 우리말로 듣는 연극이었음에도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알 수 없어 실망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 기억 또한 적지 않다.

 

어찌되었든, 극예술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극작가 중 한명이라는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홉. 그의 갈매기(김소희 연출, 연희단거리패 공연, 대학로 게릴라극장)를 보고 왔다.

 

▲ 갈매기 프로그램 촬영

 

역시 작가도 인간인지라 본인이 살던 시대의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게다. 안톤 체홉 역시 예외는 아니고 말이다. 안톤 체홉이 활동하던 당시의 러시아는 19세기 말이다.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침략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저지당하며, 러시아는 패배의 쓴 맛을 보게 된다. 귀족들의 사치, 수탈과 수난으로 배를 곯는 농민들, 더욱 비참해져 가는 농노들의 처참한 생활.

 

전쟁에서 패한 뒤 러시아 사회는 극도의 불안과 뒤숭숭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며, 절망이 일상인 사회로 변해버린 채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불만은 점점 고조되어 간다.

 

그는 이렇듯 10월 혁명의 씨앗이 하나 둘 잉태되고 있던, 혁명 전야 러시아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예리한 그만의 특유한 감각과 시선으로 주시했다. 희망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세기말적 증상에 대한 체홉의 처방은 있는 그대로의 서술이었다. 이는 라캉의 ‘승화(sublimation)’와도 맞닿아 있는 개념이다.

 

라캉은 정신적 외상이나 충격과 같은 ‘증상(symptom)‘이 ‘승화’의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것이라 말한다. 즉, 승화의 단계란 그런 외상과 충격을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아픔이 있었음을 본인 스스로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그래서였을까? 체홉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오히려 지나치게 평범하기까지 한 자신 주변의 인물들과 그들의 삶을 극 속에 여과 없이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내 이웃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듣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내 이웃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그 얘기를 듣는 시간이 잠깐에 지나지 않을 때이다. 무려 3시간에 걸쳐 그저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얼마나 곤욕이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역으로 바로 이게 안톤 체홉 극의 장점이다. 내 이웃이 전하는 또 다른 이웃 누군가에 관한 장황한 이야기는 그 뒷담화를 전하는 이의 기억에 남은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뒷담화의 주인공이 되는 내 이웃은, 그 이야기 속에 그의 삶의 역사가 녹아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안톤 체홉의 희곡을 연극화 하는 과정 속에는 그 역사를 살려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이 제대로 묘사되지 못하면 우리가 늘 듣는 지루한 뒷담화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모사(Hyperrealism적)를 놓고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철학과 미학의 사상적 고리를 연결하는 작업이라 할만도 하다.

 

하지만 이게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그의 작품을 책임진 연출에게는 대사와 대사 사이의 여백과 그 속에 들어갈 동작들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며, 배우에게는 일상의 평범함 속에 들어차 있는 인간 욕망의 허물을 벗겨내도록 만들기에 그렇다.

 

연극배우 김소희의 처녀 연출작 「갈매기」는 심심함과 짜증, 광기와 온순,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이 된 인간 군상들이 만들어 내는 용광로와도 같았다. 그래서일까? 이들이 표방하고 있는 부제 역시 ‘우울한 희극-현실과 꿈 사이에서 부유하는 인간들의 웃픈 이야기‘이다.

 

관객들이 하나 둘 들어서는 소극장 무대 위, 한 남자가 마치 진행자(스텝)이기라도 하듯 의자의 배열도 살피고, 의자 상태도 확인하고, 위치도 이동시켜 가며 열심히(?) 작업 중이다.

 

관객들은 공연 시간이 다 되어서야 그가 배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극작가를 꿈꾸는 야망 가득한 청년 뜨레쁠레프(윤정섭 분)가 바로 그다.

 

또한 관객들이 입장하는, 객석에 위치한 출입문을 통해 소오린(도창선 분)이 등장하며 극은 시작이 된다. 연극 「갈매기」의 도입부가 극중극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배우의 관객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이후 무대장치는 배우들에 의해 움직여지며, 1막(소오린家의 정원), 2막(조그만 운동장), 3막(식당), 4막(응접실)의 장소를 연출해 낸다. 무대장치라고 해야 큰 테이블 두 개와 긴 의자 4개, 그리고 1인용 의자 열댓 개가 전부이기는 하다.

 

성공한 여배우이자 뜨레쁠레프의 어머니인 아르까디나(황혜림 분)와 그녀의 남자이자 성공한 극작가 뜨리고린(이원희 분). 성공하고픈 여배우 지망생인 니이나(조우현 분)와 그녀의 연인이자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극작가 지망생 뜨레쁠레프.

 

그리고 그 외 러시아의 외딴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연극 「갈매기」의 등장인물들이다. 또한 이들이 만들어 내는 갈등구조도 아주 간단명료하다. 크게 본다면, 두 개 정도로 압축해서 설명 가능하다.

 

앞서 거론했던 성공하고픈 두 청춘남녀와 이미 성공한 두 중년남녀가 갖고 있는 현실 인식에서 기인하는 갈등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니이나와 뜨린고린이 부적절한(?)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인물들 간 좌충우돌식 갈등이 그것이다.

 

전자는 주로 예술(연극)을 바라보는 신·구세대 간의 인식차로 단순화해 나타나나, 이는 활자화된 의미로써의 예술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  예술이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 전반에 가하는 체홉의 비판의 메시지이자 변혁의 염원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후자는 우선, 뒤돌아선 자와 버림받은 자로서의 니이나와 뜨레쁠레프의 갈등, 역시 같은 구조인 뜨리고린과 아르까디나의 갈등, 어머니의 남자에게 연인을 빼앗긴 뜨레쁠레프와 어머니 아르까디나의 갈등, 마지막으로 연인을 빼앗긴 자와 가로챈 자로서의 뜨레쁠레프와 뜨리고린의 갈등, 그리고 여기에 더해 그 주변부 인물들이 얽히고 설키며 만들어 내는 사랑과 애정의 갈등구조가 있다.

 

결국, 갈매기가 되고 싶었던 여인 니이나는 박제된 갈매기의 모습으로 남고, 갈매기를 쏘아 죽인 극작가 지망생인 청년 뜨레쁠레프는 자살하는 것으로 극은 막을 내린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 부분이 체홉 갈매기의 모티브가 되는 중심 사상으로 생각한다. 그 외의 갈등 구조는 그저 외피에 입힌 장식품 정도랄까?

 

그래서다. 앞서 소개했던 부제처럼 웃픈(웃기다+슬프다의 합성어) 형식이 아니면 몹시도 지루해 보이는,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희곡이 갈매기이다.

 

그 사이 사이에 어떤 웃픈 옷을 입힐 것이며, 그 옷의 색깔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의 선택은 전적으로 연출과 배우들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김소희의 갈매기에 뜨거운 박수로 화답한다. 수고들 하셨다.

 

단, 이것만은 기억해 두자.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면 그가 던진 대사는 극장 허공을 날아 다니는 죽은 언어가 된다. 그렇지만 무대 위에 삶의 터전을 구축해 놓으면 그의 대사는 살아 숨쉬며 관객의 가슴을 파고든다. 몇몇 배우들에게 드리는 Tip이다. 고민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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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7년~현재/감 상2013. 12. 15. 12:56

영역 확장으로써의 연극

 

흔히들 연극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제의와 만나는 것으로 추측들을 한다. 그래서 연극학개론에도 연극의 기원은 오래 전 제의행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제례 담당자(주술사)의 제의의식 및 절차가 오늘날의 연극형태로 발전했다고 보는 견해다. 하지만 이게 어디 연극뿐이겠는가? 무용과 음악, 미술 역시 원시적 형태의 제의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후 이는 종교라는 이름을 단 것의 합리화를 위한 목적으로 복무해 간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것이, 제의 의식이 갖고 있는 공간 확장의 의미이다. 제의란 현세와 내세의 만남이다. 현실의 공간에서 내세의 공간을 대면하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은 아주 원시적 형태의 생활수준에 머물러 있던 때부터 영역 확장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동물적 본능으로서의 영토 확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이상 즉, 죽음 이후의 사후까지를 염두에 둔 고차원적 세계를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의 세계로 돌아와 보자. 연극 무대는 현실적으로 아무리 커봐야 30~40평 남짓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가상의 공간은 무한대다. 예술가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상상의 크기만큼 그 공간은 확장된다.

 

미술의 화폭은 또 어떠한가? 가로 세로 몇 미터가 되었든 그 화폭에 내재되어 있는 공간의 개념은 화가가 상상한 만큼이다. 그 속에 인류가 그릴 수 있는 우주의 모든 크기를 다 담아낼 수 있음 또한 당연한 것이고 말이다.

 

예술이 그 오랜 시간 동안 도태되지 않고 지속 가능할 수 있었던 여러 조건들 중에 이 '영역 확장' 가능성이 아마 제일 막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인간 누구나가 갖고 있는 그 확장 본능을 간접적으로나마 실현시켜가며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사고의 극단에 위치하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빈 무대'라 할 수 있다. 무대장치 하나 없는 텅 빈 무대 말이다. 오브제의 극한 절제를 통해 관객이 객석에 앉아 바라보고 있는 저 무대 위 공간이 어디일 것이라는 것은 오직 관객의 상상에 맡기면 되는 것이니 그 확장성이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연극예술이 이처럼 무한 확장 개념만을 차용하는가 하면 그 또한 아니다. 때로는 내가 생활하고 있는 작은 공간 - 방이라든가, 거실, 또는 교실 - 만을 무대 위에 재현해 내는 경우도 많다.

 

힐링의 세계로 인도하다

 

연극 「여보 나도 할 말 있어(/연출 김영순, 알과핵 소극장)」는 후자를 재현한 경우다. 이 연극은 찜질방이라는 극도로 제한적이며 한정된 공간을 무대 위에 옮겨 놓은 채, 그곳을 찾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하소연과 푸념을 리얼하게 풀어 놓는다.

 

▲ 연극 <여보 나도 할 말 있어> 포스터, 출처 현장 촬영


 

글쎄다. 비록 눈에 보이는 공간은 찜질방이라는 한정된 장소일지 모르겠으나, 할 말 많은 이들이 쏟아내는 사연 속 공간은 역시 몇 십 년을 왔다 갔다 한다. 연극의 묘미라 할만하다.

 

이 연극은 대한민국 중년 남녀들의 현실을 현미경 위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분석해 본다는 점에서 나의 이야기이자 당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당신의 머리에도 희끗한 세월의 무게가 살포시 내려 앉아 있다면 그 개연성은 한층 커질 것이고 말이다.

 

고부갈등 · 부부관계 · 자식문제 등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때로는 관조적 어조로, 때로는 직설적 화법에 담아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재미있게 풀어낸다. 관객석에서 그래, 그래” “맞아하는 등의 감탄과 웃음이 공연 내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말이다. 배우들의 재치 있는 수다 연기와 무한 파워로 감동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무사히 잡았다고나 할까?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고독한 존재들이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이제는 사회학적 연구 대상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존재하는 일반적 현상이 된지 오래다. 해소할 길 없는 내면의 고립감이 인간세상을 점점 황폐화시키는 가운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써의 울타리 또한 높아만 간다. 그 안에서 인간은 오늘도 몹시 외롭다.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이 시대를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것이. 힐링은 소통을 기본으로 한다. 소통을 통한 교감이 힐링의 원천이고 말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소통과 교감의 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정은 가정대로, 직장은 직장대로, 이웃은 이웃대로 다들 같은 고민들을 안고 살지만 그렇다고 그쪽으로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연극의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군상들이다. 불통과 불교감으로 인해 가슴 가득 응어리 진 사연들을 한 보따리씩 담고 사는 내 이웃이자, 나 자신이다.

 

요즘, 연극의 위기라는 말이 도처에서 들려온다. 하긴 언제 연극이 위기 아닌 시절이 있기는 했는가마는, 근래 들어 제기되는 위기론적 시각은 특히나 이해되는 측면이 크다. 다양한 진단과 처방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뮤지컬의 흥행과 무관치 않다는 점에서 한층 설득력 있게 들린다.

 

뮤지컬이 대세인 시대다. 뮤지컬계의 저인망식 관객 싹쓸이 현상으로 인해 타 무대 예술업계는 죽을 맛이다. 뮤지컬의 성공 요인을 잘 살펴볼 일이다. 이와 무관치 않은, 오히려 상호 연관성이 깊은 문제로 나는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꼽는다.

 

피동적 주변인으로서의 관객에서 적극적 참여자로의 관객으로 위치 설정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라는 얘기다. 관객 없는 연극, 관객 없는 무대예술, 생각할 수 있나?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연극계가 관객을 어찌 대접해 왔는지 이 또한 잘 살펴볼 일이다. 위기는 역으로 기회라고 했다. 지금이 한국 연극계 최고의 위기 상황이라면 적어도 이 보다 더 나빠질 수 없다는 점만은 명백하다.

 

관객과 함께 하는 연극으로써의 진수를 보여준 여보 나도 할 말 있어는 그래서 더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연극의 희망 찾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박수를 보낸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7년~현재/감 상2013. 11. 11. 21:17

세상에 첫사랑이라는 말만큼 극과극의 반응을 만들어 내는 단어도 별반 없지 싶다. 세상의 다수에게는 여전한 설렘과 가슴 두근거림의 근원적 자극제인 그것이 또 다른 다수에게는 실망과 허망함의 몽상에 불과한 것이기에 그렇다.

 

오죽하면 당신의 첫사랑은 안녕하신가 묻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생각해본다면 변함없는 사춘기적 순수성을 간직한 아침 이슬 같은 존재로서의 첫사랑을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는 너무도 명백해진다.

 

그렇다면 전과 같이 "나는 그렇게 순수한가?" 라는 물음에 답을 해야 하기에 그렇다. 시간이 흐르는 만큼 나는 변한다. 마찬가지로 그도 변한다. 고로, 몇 십 년 전의 순진무구했던 첫사랑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가 정답이 되겠다.

 

하지만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고도 했다. 가슴 두근거림 그 아련함으로써의 추억이든, 깨지고 망가진 허망한 몽상으로써의 추억이 되었든 그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소중한 이유는 그래서다. 평생을 먹고 살아야 하니 말이다.

 

청주에 활동 기반을 둔 극단 '시민극장'이 서울 대학로 한복판에 연극 「살다보면(극본 장남수·연출 장경민)」을 들고 와 한바탕 첫사랑 놀이를 즐기고 있다.

 


▲ 연극 <살다보면> 포스터,   출처 네이버 연극

 

 

70대 초반인 순심과 만복은 도심의 공원을 벗하며 평범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가끔 공원 벤치에서 만나 티격태격 하기도 하지만 상대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찮은 기회에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게 된 두 사람은 상대가 50년 전 자신의 첫사랑임을 눈치 채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그때의 그 사람임을 밝히지는 못하고 서로의 아련한 여운만을 남긴 채 무대는 막을 내린다.

 

첫사랑과의 만남, 그 이후를 상상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여전한 설레임일까? 아니면 허망한 몽상이었을까?

 

이 작품은 소극(Farce)임을 전제로 시작한다. 소극이란 말 그대로 가벼운 대화와 즐거움으로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연극을 일컫는다. 주로, 소극장에서 관객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형식으로 무대화 된다.

 

그만큼 발랄, 유쾌, 유머가 핵심 요소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작품 역시 극 중간 중간에 그 시대를 풍미했던 대중가요를 삽입해 관객의 마음을 풀어 놓고, 재치 있는 대사와 몸짓으로 관객들을 웃음 짓게 만든다.

 

이런 류의 소극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바로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과 연출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다.

 

이 두 요소 중에 적어도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 바로 이 연극 「살다보면」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후학들의 연기를 지도하며 직접 무대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는 배우 정인숙(순심 역)과 드라마와 연극을 넘나들며 연기의 내공을 쌓아온 정종준(만복 역)의 맛깔스러운 연기는 마치 무르익은 홍시의 달콤한 그 맛이라 할만하다. 짬짬이 출연하는 장칠군과 김영란 두 배우의 코믹한 연기는 양념이고 말이다.

 

 

 

깊어 가는 가을, 가족들의 주말 나들이 행선지로 대학로 '아름다운극장'을 추천한다. 세대를 뛰어 넘는 재미와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 여행이 가족 모두를 행복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7년~현재/감 상2010. 6. 19. 01:31

사랑이란? 이것만큼 진부하고 오래된,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물음도 흔치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이유는 자신이 그 사랑을 받는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한 없이 퍼줄 수 있는 베풂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게 되면 무한히 베풀 수 있을 것이라는 심리적 여유가 행복이라는 엔돌핀을 콸콸 쏟아내는 것은 아닐는지요?


지난 주말, 뮤지컬 돈쥬앙을 관람했습니다. 바람둥이로 살다가 저주를 받아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내 놓게 되는 비운의 인물 돈쥬앙. 이번 뮤지컬에서는 그의 죽음을 이렇듯 비운으로 그렸습니다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아마도 실제 돈쥬앙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 세상 누구 보다도 행복한 모습으로, 이제까지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만의 소중한 사랑을 위해 단 하나뿐인 목숨마저 초연히 버리는 그 행위가 결코 슬픔이나 비운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어야 하고, 엔돌핀이 솟구치는 행복이어야 합니다.


뮤지컬하면 뭐니 뭐니 해도 풍부한 볼거리를 빼 놓을 수 없지요? 화려한 무대, 환상적인 조명, 거기에 백옥 같은 노래와 신나는 춤이 곁들여져 극장 안을 마치 환상의 섬처럼 바꾸어 놓습니다. 한 마디로 스펙터클의 진수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고대연극이 추구했던 무대 환경을 오늘날 가장 충실하게 재현해 내고 있는 분야가 아마도 뮤지컬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주 오랜 옛날, 하나의 제의적 행위에서 출발했던 연극이 보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보여주기 위한 극적 요소들을 추가하기 시작하면서 극장이라는 상연 및 관람 장소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요. 극장은 그리스 시대에 들어서 처음으로 만들어집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극장들이 야외 원형극장식 구조를 갖고 있었지요? 둥글게 원형으로 깎은 비탈에 대리석을 깔아 의자를 만들고 전면에는 무대를 꾸미는 형식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요즘처럼 조명이나 음향 등이 발달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그 곳에 운집해 있는 관객들 모두에게 소리를 전달하고 몸짓을 보여준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배우의 몸짓보다는 대사에 의존하는 형식을 띄었고, 뒤쪽에까지 잘 보이기 위해서는 가면을 써야 했고, 소리 전달을 위해서 가면에는 확성기 비슷한 물건을 설치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코러스의 역할 역시 중요한 것이었는데요, 처음에는 50명으로 구성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숫자는 다소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추측컨대, 대사 전달이나 의미 전달의 용이성을 위해 다수의 코러스가 합창 형식으로 멀리까지 소리를 전달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들이 전해지는 것이 없어서 확인할 길이 없답니다.
또한 당시에 상연되던 작품이라는 것들이 대개가 영웅담이나 전쟁, 신화에 근거한 내용들이었는데요 초창기의 몸짓보다 대사에 의존하던 형태에서 벗어나 점차 스펙터클한 전개를 중요시하는 쪽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돈쥬앙의 내용은 많이 알려져 있고 하니까 여기서 다시 자세히 기술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약술하자면, 진실된 사랑을 알지 못하던 바람둥이 귀족 자제가 참 사랑을 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참 쉽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쉬운 것을 쉽게 처리하지 못한데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중간 휴식시간을 포함해 장장 두 시간 반에 걸친 공연시간은 참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나마 2부에서는 약간의 갈등구조가 형성되면서 극적 긴장감이 생기며 이야기 전개 속도 역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만, 1부 상연 시간 70분은 너무도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1부에서는 돈쥬앙의 여성 편력을, 그리고 2부에서는 사랑에 대한 갈등을 보여주고 싶었던 듯싶으나 이게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기승전결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건의 전개와 발전, 파국과 결말은 거대한 물줄기가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려 바다로 가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 정상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계곡을 타고 넘으며 점차 거세지고 마침내 거대한 폭포가 되어 산줄기를 때린 뒤 고요한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극적 전개 역시 이와 다를 수 없지요. 그게 바로 기승전결 아니겠습니까? 또 이게 있어야 관객은 극에 몰입한 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구요.


돈쥬앙의 여성 편력을 작은 폭포로, 사랑에 대한 갈등을 큰 폭포로 해서 리듬감을 주고 쉬지 않고 이어지는 스페인 무희들의 플라멩고 춤을 곁들여 주었더라면 보다 더 파워풀하며 박진감 넘치는 공연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현재 웬만한 뮤지컬 공연들은 티켓 한 장에 10만원 가까이 하잖아요? 어느 정도의 스케일과 스펙터클한 맛이 따라줘야 보는 사람 입장에서 본전 생각 안 나는 법이거든요.


또 하나, 이 공연은 스페인 춤 플라멩고가 있어 존재할 수 있는 뮤지컬인 듯싶습니다. 참 드물게 주 · 조연 배우들이 춤 한 번 추지 않고 끝나는 아주 이색적인 뮤지컬인데요.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게 스페인 무희들의 정열적이며 뛰어난 춤 솜씨 덕분입니다. 마치 한국 주 · 조연 배우들의 백댄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건데요. 제가 이번 공연의 원작을 보지 못해서 원작이 그런 건지, 아니면 한국 버전에서만 그렇게 간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스페인 무희들과 한국 주 · 조연 배우들의 관계는 물병 속에 섞여 있는 물과 기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병 속에 물과 기름을 섞어 놓고 흔들어 주면 하나로 섞이지는 않으면서도 요란하게 요동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따로 논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렇게 뮤지컬 배우로써의 중요한 한 부분을 다른 곳(스페인 무희)에 의지해 버리다 보니 전체적인 연기에 있어서도 어딘가 한 곳이 비어 버린 듯한 허전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무언가를 선택하기 전에 항상 고민의 흔적이 보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돈쥬앙이 조각가 마리아를 만났을 때, 마리아의 정혼남 라파엘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설사 대본상에는 나와 있지 않더라도 배우는 선택에 앞서 "왜"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돈쥬앙의 고민(바람둥이로서의 본연의 모습과 참사랑에 대한 갈망)과 갈등(사랑이냐 유희냐), 라파엘과의 결투를 뿌리칠 수 없도록 사랑이란 굴레가 만들어 놓은 숙명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의 모습, 이런 게 설득력 있게 제대로 그려져야 비로소 마지막 장면에서 라파엘의 칼을 자신의 가슴에 찌른 채 이제까지의 삶을 후회하며 울부짖는 돈쥬앙의 모습에 관객은 감동을 하게 되고 몰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원작을 볼 수 없어 생기는 궁금증인데요. 돈쥬앙 친구역(이름은 기억이 안남)이 원작에서도 그렇게 그려지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공연을 보면서 친구역이 마치 돈쥬앙의 내면의 다른 한 쪽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 그런 점에서 저는 돈쥬앙 친구역을 돈쥬앙 내면의 선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배역은 현실의 인물이기 보다는 차라리 가상의 인물로 설정을 해서 분신 또는 천사로 그렸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 제기 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끝난 후, 기립 박수로 화답을 해 줬습니다. 그 기립 박수는 공연을 빛내준 14명 스페인 무용수들에게, 제가 보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 표시였습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