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되기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것은 광활한 대지에 각인된 삶의 치열한 흔적, 바다를 건너 전해진 이름 없는 자들의 쇳내 나는 목소리, 그리고 바람에 실려 퍼져나간 인간과 자연에 얽힌 생존의 서사였다. 우리가 신화라 부르는 것들은 그러한 무명의 역사가 세월 속에서 형태를 갖추고, 공동체가 기억하는 방식으로 체계화한 사유의 산물이다. 그러나 신화는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수동적 매체가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미래를 형성하는 도구가 되며, 정체성과 권력을 정당화하는 서사로 재구성된다.
우리는 신화를 종교적 이야기, 민속적 전승으로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는 그저 흔한 일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국가를 잇는 신성한 권위의 줄기이자, 신화 속 낱말 하나하나가 제도와 권력, 지리와 혈통, 이름과 정체성을 정교하게 조율하는 장치였다. 그래서 신화를 읽는다는 것은 정치의 기원을 해독하는 일이며, 감춰진 ‘권력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험난한 여정이다.
역사는 기억을 기록하는 일이자, 때론 기억을 지우는 일이다. 그리고 신화는 그런 기억의 가장 오래된 틀이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과거를 들여다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신화를 만든 자의 의도와 권력,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기억의 조각들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건국신화는 단편적인 민속 전승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기원의 설계도이자, 정체성의 가장 깊은 뿌리를 관장하는 기억의 장치다.
일본의 건국신화도 그러하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서술된 아마테라스의 이야기는 단지 고대의 풍속이나 전설을 담은 문헌이 아니다. 그것은 8세기 야마토 왕권이 자신들의 기원을 신성화하고, 왕권을 영속화하며, 외래의 흔적을 ‘자국화’하려는 시도였다. 그 신화의 깊은 구조 속에는 놀랍게도, 열도 바깥에서 건너온 또 다른 기억의 파편들이 숨어 있다.
그 기억은 한반도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고조선의 단군신화, 부여·고구려의 하늘 제의, 가야·백제의 왕계 서사와 제사 체계는 일본 고대 왕권 신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일본은 이 영향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 대신, 한반도에서 받아들인 사상과 전통, 의례와 이름들을 철저히 재조립하고, 야마토 중심의 신성 서사로 전유(轉有)했다. 일본 건국신화는 그렇게, 거울처럼 타자의 얼굴을 비추되 왜곡된 상으로 되돌려주는 기제가 되었다.
왜 일본은 8세기에 들어와 고대 한반도의 신화 구조를 모방하거나 재편입했는가? 왜 신화를 문서화했는가? 왜 그것은 정치적인 기획이어야 했는가? 이는 평범한 고대사의 기술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정체성을 구축하고 정당성을 설계하는지를 묻는 작업이다. 신화는 언제나 ‘말해진 것’일 뿐 아니라, ‘누가 말하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정치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명확하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자생적 창작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유입된 고대 왕조 신화를 모방하고 변형하여, ‘자국화’한 서사 체계다. 아마테라스는 단군의 그림자를 반사하는 거울이다. 스사노오의 분노는 부여와 고구려의 왕위 다툼을 연상시키며, 닛폰(日本)의 ‘동방 기원’ 담론—일본이 외래 문명을 수입해 만들어진 나라임에도, 이를 감추고 스스로를 동방 문명의 기원 및 중심으로 재서술한 정치적 서사론— 은 문명의 수여자인 가야와 백제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그 수혜자인 일본이 이를 철저하게 자기화한 기억의 정치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한반도 신화를 받아들이되,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자기화’했는가? 답은 권력에 있다. 고대 일본은 한반도 도래인의 지식과 기술,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이며 문명을 형성했다. 하지만 ‘외래 기원’이라는 사실은 왕권의 신성성과 자족성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따라서 일본은 문명적 종속을 감추기 위해 신화를 창작해야 했다. 그것도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왜곡이자, 신화의 정치이다.
신화는 반영의 장치다. 그러나 그 반영은 언제나 선택적이며 왜곡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거울 속에 비친 타자의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다시 그 반사된 상을 ‘진실’로 제도화했다. 그리고 이 왜곡된 거울은 근대 국가 형성과 식민주의 담론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천황 중심의 역사, 대동아공영권, 정통성 있는 신성 군주국이라는 서사는 모두 이 신화적 기원의 정치에서 파생된 산물이었다.
이 책은 바로 이 ‘거울의 구조’를 해부하려 한다. 일본 건국신화에 담긴 모방과 왜곡, 차용과 자기화의 흔적을 추적하며, 신화가 어떻게 정치권력을 정당화하고 역사적 타자를 지워왔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단군과 아마테라스의 비교는 단순한 문화사적 흥미를 넘어서, 문명의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지배당하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다.
거울은 빛을 반사하지만,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스스로를 비추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지워진 타자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왜곡된 상을 바로잡고, 감춰진 흔적을 복원하는 일은 단지 과거의 회복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역사적 책임을 묻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일본 건국신화의 거울』은 그 작업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이제 그 왜곡된 반사의 구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들이 감추고 싶었던 원형의 서사, 지워진 기억의 주체들, 거울 밖의 진짜 얼굴을 복원해 내야 한다.
신화는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쓰이고 있는 이야기다. 이제, 우리는 일본 건국신화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 이면에 숨겨진 기억의 정치와 역사적 욕망의 흔적을 직시해야 할 때다.
“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3회
“고령에서 건너간 장인들, 야마토왜에 금속을 심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소리 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그 침묵의 저편에서 우리는 금속의 불꽃과 망치 소리, 그리고 땀과 기술로 새겨진 이주의 흔적을 포착할 수 있다. 가야, 특히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고령 지역에서 야마토로 건너간 장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술 이주의 차원을 넘어서, 한반도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일본 열도로 스며들었던 실질적 증거이자, 고대 동아시아 해양 교류의 중심축을 이룬 이야기다.
일본 열도에 철의 불꽃을 일으킨 이들이 누구였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단연 ‘가야’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남부, 특히 오늘날의 경상북도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했던 대가야는 비단 정치와 제사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고도의 금속 가공 기술을 가진 장인집단의 본산지였다.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토 정치체제의 물리적 기초, 다시 말해 철기 기반의 제도와 건축, 무기 생산의 토대를 놓았다는 주장은 이제 단순한 가설을 넘어서는 실증적 증거로 하나씩 뒷받침되고 있다.
야마토(왜) 시대 전기 무렵, 일본은 급격한 정체성 형성의 시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철제 무기, 제련로 유적, 금속 공예품, 그리고 고분 내 금속 장신구들은 일본 자체의 고유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도성을 띤다. 바로 여기서 가야계 도래 장인의 존재가 부상하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이주민이 아닌, 제사와 건축, 장례와 군사까지 포함하는 '기술-정치 복합체'의 일원이었으며,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에 있어 실질적 기반을 구축한 장본인들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오사카 가시와라시(柏原市)의 ‘오오가타 유적(大県遺跡)’이다. 대규모 제철 유적으로, 일본 고분시대로 알려진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에 걸쳐 이곳에서 활발한 제철 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유적에서 발굴된 다양한 철기 제작 도구와 제련로 흔적이 그것을 입증하는데, 이는 가야의 선진 제철 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된 사례로 보인다. 유적에서 출토된 철기 제작 도구와 기술이 가야 지역의 그것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역시, 오사카의 가타노시(交野市)에 자리한 ‘모리 유적(森遺跡)’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데, 고대 제철 유적으로 6세기 전후에 대규모의 활발한 제철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한다. 모리 유적은 고대 왜나라의 중심부였던 오사카와 나라의 중간부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자, 경제적 번성을 누리던 지역이다. 특히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부뚜막 형태의 건조물이나, 시루형 토기의 발굴 등을 이유로 이곳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개척자들의 집단 거주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부엌에 설치된 부뚜막이나, 시루솥 위에 올려 놓고 음식물을 찌는 데 사용하는 시루는 전형적으로 한반도에서만 보이는 생활 시설이자 생활 용기이기 때문이다. 모리 유적 주변에는 많은 고분들이 산재해 있는데, 아마도 이 지역에서 제철 산업에 종사하던 가야계 개척자들의 고분일 것으로 짐작한다.
나라현 덴리시(天理市)의 ‘후루 유적(布留遺跡)’ 또한 고대 제철 유적으로 높이 평가되며, 철기 제작과 관련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지역도 야마토 왕권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당시 철기 제작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야마토 정권은 이와 같은 제철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본 열도 통일에 성공한다. 이곳의 유적과 유물이 증언하는 바는, 여전한 가야의 뚜렷한 영향이라 하겠다. 실제로 이들 유적과 주변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와 도구들, 특히 철제 검과 쇠못, 마구(馬具)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거의 동일한 기법과 양식을 보여준다.
가야 장인들의 이주는 우연적인 사적 이주라기보다, 정치 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이주로 보아야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속일본기(續日本紀)』는 이러한 교류의 자취를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그 가운데 특히 신공황후(神功皇后) 시기와 응신천황(應神天皇)기의 기록, 그리고 백제 · 가야계 귀화인(개척자)에 관한 기술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공황후(神功皇后) 시기부터 대가야와 야마토 간의 관계는 단순한 외교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인 기술과 인력의 이동을 동반한 정치적 동맹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5세기 중반, 가야 지역이 백제-신라 양강구도 속에서 점차 세력 위축의 위기에 놓이자, 많은 기술자와 장인들이 ‘개척자’로 일본에 이주했고, 이들은 야마토 왕실에 의해 귀화가 허락되며 국가적 기반 기술자로 배치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이동이 자발적 개인의 이주가 아니라, 정치 권력에 의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라는 점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원문 중 관련 구절:
原文:
「是歲、遣荒田別・鹿我別、以問新羅之罪焉。卽以、譬大加羅國主、令來貢職。」
「又遣阿知使主・都加使主、以求良工百濟・高麗・新羅。」
해석:
"이 해에 아라타와케와 카가와케를 보내 신라의 죄를 물었다. 그리고 대가야국의 왕에게 명하여 조공을 하게 하였다."
"또한 아치노오미와 츠카노오미를 보내 백제, 고구려, 신라에서 우수한 기술자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위의 부분이 한반도와 왜나라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인데, 이런 사례가 여럿 있지만 일부러 이 원문을 가져온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이전의 양국 간 교류 기록이 있기는 하나 이 기록이 그나마 조직적이고 실질적인 기술과 인력의 이동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가장 이른 시기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서라는 『일본서기』의 왜곡 문제도 함께 거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이 발생하는 근본적 이유는 한반도로부터의 문화 유입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왜나라 우위의 역사를 기술하고 싶은 그들의 심리 즉, 콤플렉스 때문이다. 기술력이나 문화적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이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기술과 문화의 전파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우수한 문화가 널리 향유된다. 어찌 되었든 여기서 『일본서기』가 주장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었을 거다.
"당시 일본은 문화나 기술 면에서 아직 미발전 단계였고, 가야는 철기 문명과 공예 기술을 보유한 우수한 나라였다. 일본은 이를 배우기 위해 가야와 동맹관계를 맺고 가야의 기술자와 문화를 수용했다."
문화 전파의 중개자로서, 고령을 비롯한 가야 지역 출신 장인들의 역할은 단순한 조역이 아닌, 역사 창조의 주체였다. 앞의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 설화와 그 이후 기록들은 실제로는 가야계 기술자 및 장인층의 집단적 이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신공황후의 명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가야에서 인재를 데려왔다"는 표현은 실질적으로 당시 왜나라가 고도로 조직된 기술 이주 정책을 수행했음을 뜻한다. 여기엔 왜나라의 정치적 야심뿐 아니라, 가야 지역 내의 정세 변화와 정치적 압박 속에서 이주를 택한 이들의 현실적 선택도 반영되어 있다.
가야는 삼국에 비해 영토는 작았지만, 해상 교역과 제철 기술에서 탁월한 위상을 자랑하던 나라였다.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은 대가야는 철 생산과 무기 제조, 특히 철제 무기와 갑옷, 말 투구, 철솥 제작 등에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수의 철기 유물과 금속 공예품들은 이러한 가야 장인의 기술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철기 문화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금속 도구와 무기의 질적 향상이 나타나는 시점이, 바로 가야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4세기 이후와 겹친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야마토(왜) 정권은 이러한 기술력을 필요로 했고, 그 필요는 단순한 경제적 교역을 넘어 인재의 이주를 동반했다. 이 과정에서 고령 출신 장인들이 주축을 이루는 가야계 기술자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 궁궐 건축, 무기 제작, 제례 도구 제조, 불상 주조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 고대 사원 건축에서 보이는, 기둥 상부에만 공포를 배치하는 주심포 양식이나 금속제 제례 기구, 초기 불상 제작 기술 등은 가야와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 중 다수의 전통은 ‘야마토노 아야씨(東漢氏)’와 ‘다카무쿠씨(高向氏)’ 등 한반도계 개척자 가문들을 통해 계승되었다. 이들은 단순한 기능공이 아니라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의 문화 · 정치계의 중심에 있었던 집단이었다.
특히 주목할 씨족 중 하나가 ‘야마토노 아야씨’이다. 『일본서기』 및 『속일본기』에 ‘조정의 금속 제례와 건축에 관여한 개척자 가문’으로 등장하며, 그 출신이 한반도라는 점, 특히 가야계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일본 고대 사회 내 가야계 기술자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일본서기』 – 응신기(應神紀)
原文: 「是歲、百濟人阿知使主、率其徒黨、來歸化焉。仍居倭漢之地、故號曰倭漢氏。」
해석: "이 해에 백제인 아치노오미(阿知使主. 한반도 출신 개척자로 그 출신이 백제인지 가야인지는 불분명하다)가 그 무리를 이끌고 귀화하였다. 그들은 야마토의 한 지역에 거주하였으므로, '야마토노 아야씨(倭漢氏)'라 불리게 되었다."
『속일본기』 – 덴표호지(天平寶字) 6년(762년) 6월 조
原文: 「東漢氏之先、阿知使主也。奉詔而渡來、始仕天朝。因居倭郡、是以號曰倭漢。」
해석: "동한씨(東漢氏)의 선조는 아치노오미(阿知使主)이다. 조정의 명을 받고 건너와 천황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야마토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으므로, '야마토노 아야씨(倭漢)'라 칭하였다."
‘야마토노 아야씨’는 궁궐 및 신전 건축뿐만 아니라 제사의 집행과 관장, 국가 의례의 관리 등에도 관여하며, 단순한 외래인 기술자라기 보다는 문명 이식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장인들의 기술이 단지 ‘이전’ 및 '도입'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착’과 ‘변용’을 거쳐 일본 고유의 기술 체계로 흡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가야계 기술자의 이주를 하나의 문명적 충격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듯 금속 제련 기술의 이식을 통한 문화의 전수는 단순히 무기나 농기구 제작에만 그치지 않았다. 고대 일본의 무덤양식인 고분의 형성에도 가야의 영향이 깊이 스며있다. 일본 고분시대 전기의 주요 무덤에서 보이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형식은 가야의 계단식 석실고분이나 봉토형 고분에서 유래한 구조적 특성을 보여주며, 축조 기술 역시 한반도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나아가 고분 내부에서 발견되는 금속 무기나 갑옷, 장식품 등의 출토품은 가야계 기술의 직접적 유입을 입증하는 물적 증거가 된다.
고분 축조 기술, 특히 석실형 고분의 양식이나 석관의 배치방식에서도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유사한 구조가 일본 각지에서 발견된다. 나라현 이코마시(生駒市)에 자리잡고 있는 ‘이코마 고분군(生駒古墳群)’ 등에서 출토된 일부 고분은 내벽 석재 처리 방식, 봉토 구조 등에서 한반도 양식이 명확히 드러나며, 이는 단지 묘제만이 아닌 장례 의식 자체의 이식 가능성까지 보여준다.
한반도 남부는 삼국 통일 전야의 전쟁과 연맹, 분열이 끊이지 않았고, 대가야 역시 이러한 격랑 속에서 세력의 부침을 겪었다. 정치적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또는 야마토 정권과의 동맹 강화를 위한 정치적 교섭의 일환으로, 가야 왕실과 귀족들은 기술자와 장인을 인재로 삼아 보내거나 이주시키는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자들은 일본에서 ‘도래인(渡來人)’이라는 명칭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그 정체성은 결코 단절되지 않았다. 야마토노 아야씨를 비롯한 도래인 계열 가문들은 자신들의 출신 지역과 문화를 기억하고 계승하며, 그것을 일본 속에 뿌리내리게 했다. 도래인으로 갔으나 개척자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문화의 전파나 식민적 지배가 아닌 주체적 이동이었으며, 오히려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뿌리’ 중 하나가 가야였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실마리가 된다. 우리는 지금껏 ‘일본의 영향’이라는 말에는 익숙하지만 ‘일본을 만든 한반도’라는 관점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왔다. 그러나 고고학 유물, 문헌 기록, 도래인 가계도, 그리고 지역 전승을 종합할 때,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일본을 만든 다리 중 하나는, 고령에서 시작된 가야의 철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령은 단순한 변한의 일개 거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아시아 제철 기술의 중심이었으며, 해상 무역의 허브였다. 그곳에서 자란 기술자들은 단순히 쇠를 두드린 것이 아니라, 문명을 단련했다. 그리고 그 문명은 일본 열도에 전파되어 야마토 정권의 기초를 다졌다. 이는 침략이나 정복의 역사가 아니라, 기술과 문화의 이동이며, 주체적 이주의 역사이다. 한민족의 기술력과 문화력이 국경을 넘어 또 하나의 문명을 꽃피운 사례인 것이다.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경상도 고령이 속한 변한에서 철을 생산하여 왜와 낙랑 등에 수출한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오환선비동이전)
原文: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해석:
”이 나라에서는 철이 나며, 한(韓), 예(濊), 왜(倭)가 모두 와서 사 갔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모두 철을 사용하니, 이는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한 변진은 철을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 고대 문화 속에 숨겨진 가야의 흔적을 재발견함으로써, 한반도의 역사적 위상과 기술적 역량을 재조명해야 한다. 이는 ‘침탈당한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건너가 문명을 전한 과거’를 회복하는 일이다. 가야의 기술자들은 결코 일본에 의해 끌려간 피지배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선택했고, 그들의 기술은 일본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변화의 불씨는 지금도 일본의 고대 유적과 유물, 제례와 전통 속에 찬란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고령에서 출발한 장인의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곳은 열도를 가로질러 문화의 축을 세웠고, 철의 열기 속에서 두 민족의 역사적 접점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그 금속의 불꽃 속에서, 묻혀 있던 우리의 역사를 다시 꺼내어야 한다. 가야 장인들의 일본 이주는 곧 고대 일본의 국가 형성과 문화적 기반을 이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철의 길’로 연결된 고령과 야마토, 그 중심에는 정치적 연맹의 이면에 존재했던 기술자(개척자) 집단이 있었으며, 그들이 남긴 유산은 일본 곳곳의 유적과 고분, 유물 속에서 오늘날까지도 생생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일본 여행 사전 지식-아는 만큼 보인다”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고대사 대장정입니다. 한반도 문화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주제로, 대략 6개월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각 10편씩 총 40편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은 갖고 일본 여행을 가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선정해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일본 땅에 깃들어 있는 한반도 개척자들의 혼과 열정을 기대해 주십시오.
가야편 제2회
대가야의 흔적을 따라가다―고령에서 일본까지, 왕권과 제사의 계승
한반도 고대사에서 가야, 특히 대가야는 오랫동안 주체적인 고대 문명으로 재조명되지 못했다. 삼국 중심의 사관 아래에서 ‘가야’는 신라의 부속적 존재로 격하되었고, 일제강점기의 식민사관은 가야를 왜(倭)의 영향을 받은 주변부 국가로 왜곡했다. 그러나 새롭게 드러나고 있는 여러 유물들은 대가야가 단순히 ‘신라에 병합된 고대 연맹’이 아니라, 독자적인 왕권과 종교적 권위를 지닌 고등 문화국가였으며, 그 문화적 영향은 일본 열도에까지 미쳤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오늘날의 경상북도 고령군 일대, 낙동강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대가야는 그 지리적 조건과 특유의 문화권 형성으로 인해 일본열도에 깊은 족적을 남긴 세력 중 하나로 평가된다. 흔히 ‘후기 가야연맹’의 주도세력으로 불리는 대가야는 5세기 중반 이후 강력한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며 백제 및 신라, 그리고 일본 열도 야마토 정권과도 밀접한 외교 및 인적 교류를 전개했다. 그러나 대가야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단순한 외교적 수준을 넘어서 정치 · 종교 · 장례문화 등 일본 고대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적 구조에까지 스며들어 있었음을 고고학적, 문헌사료적, 그리고 제례문화적 분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본 회차에서는 특히 대가야의 제사 문화와 왕권 체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일본의 신사 제도 및 신관계 통치 시스템-일본 고대 국가가 신(神)을 중심으로 구축한 정치적 통치 체계-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면밀히 추적하고자 한다.
대가야는 고령 지역을 기반으로 발전하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42년~117년) 가문에 의한 정치적 통일 구조를 구축했다. 이 중심에 있었던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은 단순한 묘역이 아닌 종교적 · 정치적 상징공간이었다. 특히 지산리 44호분은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과 유사한 원형의 전방후원분 구조를 보이며, 한반도식 봉토분과 일본식 왕릉구조가 교차하는 상징적 지점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를 단서로 우리는 대가야 왕권 체계가 단순한 족장연합이 아닌, 왕을 중심으로 한 신권 중심의 통치 체계를 확립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고분 내부에서 출토된 다양한 청동 제기류와 순장된 인골, 철제 무기류는 제례와 군사, 그리고 통치 권위의 일체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와 유사한 구조의 고분들이 일본열도 특히 간사이(関西) 지역과 규슈(九州) 북부를 중심으로 다수 발견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고분이 구마모토현(熊本県)에 위치한 ‘에타후나야마 고분(江田船山古墳)’, 오사카의 '모즈 · 후루이치 고분군(百舌鳥・古市古墳群)'이다.
특히, 모즈 · 후루이치 고분군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다이센 고분(大仙陵古墳, 세계 3대 고분 중 하나이며, 일본 16대 인덕천황릉으로 추정하나 정확하지 않다)’을 포함한 44기의 고분들이 밀집해 있다. 규슈 지역에는 대마도 옆에 있는 이키섬의 ‘이키 고분군(壱岐古墳群)’으로 이곳에는 현재 전방후원분 2기-쓰시마즈카 고분(対馬塚古墳), 소우로쿠 고분(双六古墳)-, 원형 고분 4기-사사즈카 고분(笹塚古墳), 효우제 고분(兵瀬古墳), 카케기 고분(掛木古墳), 오니노이와야 고분(鬼の窟古墳)- 등 총 6기의 고분이 밀집해 있다. 이 고분들에서는 대가야의 유물과 매우 유사한 기법의 철제 무기, 갑옷, 심지어 동일계통의 청동 제기류까지 발견되며, 이는 단순한 문화적 영향이라기보다 고도의 기술 이주와 제례체계의 전수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다이센 고분 ( 大仙陵古墳)
일본 고대의 신사 제도 역시 대가야의 중교적 풍습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오사카나 나라현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한 고대 신사들 중 일부는 대가야계 이주민 집단과 연계되어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예가 나라현 사쿠라이시의 ‘오오미와 신사(大神神社)’이다. 오오미와 신사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이다. 이 신사는 미와산(三輪山)을 신체(神体)로 삼아 본전을 두지 않고 산 자체를 숭배하는 독특한 제례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제례 방식은 대가야의 제사 문화와 유사한 형태라는 분석이 있다. 대가야는 자연물, 특히 산이나 고분을 신성시하여 제사의 중심지로 삼는 전통이 있었으며, 이는 오오미와 신사의 산악 숭배와 유사한 신앙 형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역사서인 『고사기』나 『일본서기』 신대기 편에는 오오미와 신사의 주제신인 오오모노누시(大物主神)를 외래계 도래신으로 간주하는데, 이를 토대로 일부 학자들은 이 신의 기원이 한반도, 특히 대가야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는 대가야계 이주민들이 일본 열도에 정착하면서 자신들의 신앙과 제례 문화를 전파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교토 야와타시에 자리한 ‘이와시미즈 하치만구(石清水八幡宮)’ 신사 역시 대가야의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와시미즈 하치만구는 859년에 창건되어, 일본 3대 하치만구(八幡宮)중 하나로 꼽힌다. 하치만신(八幡神)은 전쟁과 국가 수호의 신으로, 이 신사는 헤이안 시대부터 국가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미쓰 등 일본 역사상 중요한 인물들이 이 신사의 복원과 확장에 관여하였으며, 현재 본전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하치만신(八幡神)은 일반적으로 일본 제15대 응신천황(應神天皇)이 신격화된 존재로 여겨지는데,-일본 역사서 『속일본기(續日本記)』 기사 중 “八幡大菩薩ハ、 應神天皇ノ御神靈ナリ(하치만 대보살은 응신천황의 신령이시다.)”- 응신천황은 한반도계 혈통과 연관된 인물로 보는 학설이 많다. 대가야는 강력한 제사 문화를 통해 왕권을 신성화한 국가였다. 하치만 신앙 역시 단순한 무사의 수호신이라기 보다는 왕권의 정당성과 연결된 종교 이념으로 작동했고 이러한 구조는 대가야적 제사 문화의 영향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본 열도에 존재하는 이들 신사의 공통점은 단지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 아니라 왕실과 귀족, 그리고 특정 씨족 집단의 신권을 대행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기능하였다는 점이다.
일본 신사 전경
이 과정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씨족 집단이 바로 '아야계(漢氏, 東漢氏)' 집단이다. 『속일본기』와 『일본서기』에는 ‘한인(漢人)’ 혹은 ‘(東漢. 야마토노 아야)’라는 명칭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이들이 신사 제례와 국가의 제천의례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아야씨는 대체로 5세기 전후 한반도에서 건너온 집단으로, 이 중에서도 특히 대가야계 귀족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본서기』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 14년조:
是歲, 初令西文氏, 東漢氏等, 掌典籍焉.
이 해에 처음으로 서문씨(西文氏, 한반도계 성씨)와 동한씨(東漢氏, 한반도계 성씨)등에게 전적(典籍, 문헌과 기록물 관리를 의미하나, 보다 포괄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당시 왜나라에는 글을 읽고 쓰는 이가 많지 않았음을 고려해야 하므로 이는 국가 기록물 전체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관리로 해석해야 한다)을 맡기도록 하였다.
『일본서기』 유랴쿠천황기(雄略天皇紀) 2년 5월조:
是月,詔曰:「使東漢直駒等造呉服。」
이달에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동한직구마(東漢直駒)등으로 하여금 오복(吳服, 오나라 계통의 의복으로 제례복이었을 것이다. 고대에는 실을 짜고 의복을 제작하는 기술은 대단한 노하우가 요구되는, 장인에 의한 하이테크산업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 역할의 막중함을 짐작할 수 있다)을 만들게 하라.” 하셨다.
『일본서기』 진구 황후기(神功皇后紀) 보주 3년조:
是歲,百濟人阿直岐、王仁等來朝。於是、阿直岐獻書、并進千字文。由是、始置史部、東漢氏是也。
이 해에 백제인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등이 입조하였다. 이때 아직기가 책을 바치고, 천자문을 올렸다. 이로 인해 사부(史部, 제례 기록 및 역사를 기술하는 부서로 당시 최고의 지식인 집단이었다)가 설치되었으니, 곧 동한씨(東漢氏)이다.
『속일본기』덴무천황(天武天皇)기에는 동한인(東漢人)이 제사행정에 종사한 기록이 나오며, 이는 단순한 외래 기술자가 아닌 고도의 제례 지식을 전수받은 신관계 귀족 집단이었음을 시사한다.
『속일본기』 덴무천황기 제9년(681년) 3월조:
三月壬申,詔曰:「自今已後,造神祇官。祭事,令東漢人所知之。」
3월 임신일에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지금부터 이후로는 신기관(神祇官, 제사 관련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당시의 왕과 제사장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이 역시 막중한 자리임을 알 수 있다)을 설치하고, 제사 업무에 있어서는 동한인(東漢人)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라." 하셨다.
『일본서기』
이러한 한반도계 도래 문화 의존 구조는 일본의 신사 제도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남겼다. 첫째, 가계에 기반한 신관 세습 구조이다. 대가야에서는 제사를 맡는 사람이 특정 가문이나 왕족에게 세습되었다. 이 전통이 일본에도 전해져서 일본 신사에서도 신을 모시는 사람으로 신관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이들은 특정 귀족 가문에서 세습되는 구조로 고착되었다. 이세신궁에서는 황족 여성이 신을 모시는 역할을 했다.
둘째, 신관의 정치적 기능 확대이다. 대가야에서는 제사장이 단지 종교인에 머무르지 않고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면서 신의 뜻을 받는 사람이라는 정치적 권위에 무게를 더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천황이 직접 신을 모시는 제사를 주관하면서 정치적인 정당성을 만들었다.
셋째, 철제 무기와 제기(祭器)를 통한 신의 강림 표현 방식 등이다. 대가야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철로 만든 무기나 도구를 사용했다. 이런 물건들은 그저 무기가 아니라, 신이 머무는 용기, 혹은 신이 깃든 상징물 같은 것이 된다. 일본 신사에서도 비슷하게 검, 거울, 구슬 같은 신물을 사용하는데 이는 신이 깃든 물건이라 여겼다. 천황의 상징인 삼종신기(三種神器)역시 같다. 일본 천황가는 신화 속의 신기한 보물이라 여겨지는 거울‘야타노카가미(八咫鏡, 팔지경)’, 검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天叢雲劍, 천총운검)’, 곡옥 ‘야사카니노마가타마(八尺瓊勾玉, 팔척경구옥)’를 천황이 지닌 종교적 ·권위적 증거로 숭배한다. 신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특별한 존재로서 왕의 권위를 부각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두 대가야 후기의 정치적 · 종교적 제도와 직결된다. 특히 대가야의 국왕은 동시에 ‘제사장’의 역할을 하며 신령과의 중개자였다. 이 중개자의 위상은 일본의 고대 천황제 및 신궁 체계에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이는 훗날 미에현 이세시에 위치한 ‘이세신궁(伊勢神宮)’이나 교토 우지시의 ‘우지신사(宇治神社)’등의 제도적 기반이 된다. 이세신궁의 경우 천황가의 신령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곳으로 천황이 제사장이 된다. 우지신사는 우지 가문이 세습적으로 신관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 신사의 특징은 제사장은 가문의 혈통과 정치권력의 보유자라는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이는 대가야 후기의 제사장은 곧 왕이라는 구조와 일치한다.
고고학적 유물로 보자면, 야마토 지역의 일부 고분에서는 대가야식 갑옷과 비슷한 철제 무기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오사카 ‘히라노 · 오오가타 고분군(平野 ·大県古墳群)’ 등지에서는 대가야계 양식의 철제 모루나 제기류가 다수 확인되었다. 또 일본의 일부 제기에는 한반도 남부산 계통의 청동제 기술이 응용된 흔적이 발견되며, 이 기술은 대가야 특유의 금속공예 전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전통은 단순히 기술적 전수가 아니라, 왕권과 신권의 일체화라는 정신적 전통의 계승이기도 하다. 대가야는 자신들의 정치 권위와 신성성을 철기와 제례, 그리고 거대한 묘역 구조를 통해 표현했으며, 이러한 상징 체계가 그대로 일본의 신사 건축, 고분 건조 방식, 그리고 왕실 제례 제도에 이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철제 제기류가 신사의 핵심 유물로 전시되고, 신사가 단지 ‘제사의 공간’이 아닌 ‘권위의 중심’으로 기능하게 된 배경에는 대가야계 신관 집단의 문화 전수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대가야는 단순히 가야연맹의 말기 국가가 아니라, 신권과 철기의 복합체를 통해 야마토 정권의 정신적 기초를 제공한 고대 한반도 세력이었다. 우리가 일본의 고대 신사 제도, 고분 구조, 제사 의식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대 한반도의 흔적은 대개 대가야와의 관련성 속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이는 동아시아 고대사의 재구성이라는 측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