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감 상2010. 6. 19. 01:31

사랑이란? 이것만큼 진부하고 오래된,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물음도 흔치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이유는 자신이 그 사랑을 받는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한 없이 퍼줄 수 있는 베풂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게 되면 무한히 베풀 수 있을 것이라는 심리적 여유가 행복이라는 엔돌핀을 콸콸 쏟아내는 것은 아닐는지요?


지난 주말, 뮤지컬 돈쥬앙을 관람했습니다. 바람둥이로 살다가 저주를 받아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내 놓게 되는 비운의 인물 돈쥬앙. 이번 뮤지컬에서는 그의 죽음을 이렇듯 비운으로 그렸습니다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아마도 실제 돈쥬앙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 세상 누구 보다도 행복한 모습으로, 이제까지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만의 소중한 사랑을 위해 단 하나뿐인 목숨마저 초연히 버리는 그 행위가 결코 슬픔이나 비운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어야 하고, 엔돌핀이 솟구치는 행복이어야 합니다.


뮤지컬하면 뭐니 뭐니 해도 풍부한 볼거리를 빼 놓을 수 없지요? 화려한 무대, 환상적인 조명, 거기에 백옥 같은 노래와 신나는 춤이 곁들여져 극장 안을 마치 환상의 섬처럼 바꾸어 놓습니다. 한 마디로 스펙터클의 진수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고대연극이 추구했던 무대 환경을 오늘날 가장 충실하게 재현해 내고 있는 분야가 아마도 뮤지컬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주 오랜 옛날, 하나의 제의적 행위에서 출발했던 연극이 보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보여주기 위한 극적 요소들을 추가하기 시작하면서 극장이라는 상연 및 관람 장소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요. 극장은 그리스 시대에 들어서 처음으로 만들어집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극장들이 야외 원형극장식 구조를 갖고 있었지요? 둥글게 원형으로 깎은 비탈에 대리석을 깔아 의자를 만들고 전면에는 무대를 꾸미는 형식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요즘처럼 조명이나 음향 등이 발달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그 곳에 운집해 있는 관객들 모두에게 소리를 전달하고 몸짓을 보여준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배우의 몸짓보다는 대사에 의존하는 형식을 띄었고, 뒤쪽에까지 잘 보이기 위해서는 가면을 써야 했고, 소리 전달을 위해서 가면에는 확성기 비슷한 물건을 설치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코러스의 역할 역시 중요한 것이었는데요, 처음에는 50명으로 구성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숫자는 다소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추측컨대, 대사 전달이나 의미 전달의 용이성을 위해 다수의 코러스가 합창 형식으로 멀리까지 소리를 전달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들이 전해지는 것이 없어서 확인할 길이 없답니다.
또한 당시에 상연되던 작품이라는 것들이 대개가 영웅담이나 전쟁, 신화에 근거한 내용들이었는데요 초창기의 몸짓보다 대사에 의존하던 형태에서 벗어나 점차 스펙터클한 전개를 중요시하는 쪽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돈쥬앙의 내용은 많이 알려져 있고 하니까 여기서 다시 자세히 기술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약술하자면, 진실된 사랑을 알지 못하던 바람둥이 귀족 자제가 참 사랑을 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참 쉽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쉬운 것을 쉽게 처리하지 못한데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중간 휴식시간을 포함해 장장 두 시간 반에 걸친 공연시간은 참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나마 2부에서는 약간의 갈등구조가 형성되면서 극적 긴장감이 생기며 이야기 전개 속도 역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만, 1부 상연 시간 70분은 너무도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1부에서는 돈쥬앙의 여성 편력을, 그리고 2부에서는 사랑에 대한 갈등을 보여주고 싶었던 듯싶으나 이게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기승전결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건의 전개와 발전, 파국과 결말은 거대한 물줄기가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려 바다로 가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 정상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계곡을 타고 넘으며 점차 거세지고 마침내 거대한 폭포가 되어 산줄기를 때린 뒤 고요한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극적 전개 역시 이와 다를 수 없지요. 그게 바로 기승전결 아니겠습니까? 또 이게 있어야 관객은 극에 몰입한 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구요.


돈쥬앙의 여성 편력을 작은 폭포로, 사랑에 대한 갈등을 큰 폭포로 해서 리듬감을 주고 쉬지 않고 이어지는 스페인 무희들의 플라멩고 춤을 곁들여 주었더라면 보다 더 파워풀하며 박진감 넘치는 공연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현재 웬만한 뮤지컬 공연들은 티켓 한 장에 10만원 가까이 하잖아요? 어느 정도의 스케일과 스펙터클한 맛이 따라줘야 보는 사람 입장에서 본전 생각 안 나는 법이거든요.


또 하나, 이 공연은 스페인 춤 플라멩고가 있어 존재할 수 있는 뮤지컬인 듯싶습니다. 참 드물게 주 · 조연 배우들이 춤 한 번 추지 않고 끝나는 아주 이색적인 뮤지컬인데요.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게 스페인 무희들의 정열적이며 뛰어난 춤 솜씨 덕분입니다. 마치 한국 주 · 조연 배우들의 백댄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건데요. 제가 이번 공연의 원작을 보지 못해서 원작이 그런 건지, 아니면 한국 버전에서만 그렇게 간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스페인 무희들과 한국 주 · 조연 배우들의 관계는 물병 속에 섞여 있는 물과 기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병 속에 물과 기름을 섞어 놓고 흔들어 주면 하나로 섞이지는 않으면서도 요란하게 요동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따로 논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렇게 뮤지컬 배우로써의 중요한 한 부분을 다른 곳(스페인 무희)에 의지해 버리다 보니 전체적인 연기에 있어서도 어딘가 한 곳이 비어 버린 듯한 허전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무언가를 선택하기 전에 항상 고민의 흔적이 보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돈쥬앙이 조각가 마리아를 만났을 때, 마리아의 정혼남 라파엘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설사 대본상에는 나와 있지 않더라도 배우는 선택에 앞서 "왜"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돈쥬앙의 고민(바람둥이로서의 본연의 모습과 참사랑에 대한 갈망)과 갈등(사랑이냐 유희냐), 라파엘과의 결투를 뿌리칠 수 없도록 사랑이란 굴레가 만들어 놓은 숙명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의 모습, 이런 게 설득력 있게 제대로 그려져야 비로소 마지막 장면에서 라파엘의 칼을 자신의 가슴에 찌른 채 이제까지의 삶을 후회하며 울부짖는 돈쥬앙의 모습에 관객은 감동을 하게 되고 몰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원작을 볼 수 없어 생기는 궁금증인데요. 돈쥬앙 친구역(이름은 기억이 안남)이 원작에서도 그렇게 그려지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공연을 보면서 친구역이 마치 돈쥬앙의 내면의 다른 한 쪽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 그런 점에서 저는 돈쥬앙 친구역을 돈쥬앙 내면의 선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배역은 현실의 인물이기 보다는 차라리 가상의 인물로 설정을 해서 분신 또는 천사로 그렸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 제기 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끝난 후, 기립 박수로 화답을 해 줬습니다. 그 기립 박수는 공연을 빛내준 14명 스페인 무용수들에게, 제가 보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 표시였습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