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감 상2014. 5. 11. 00:40

연결 · 접속 · 구원 · 위안. 만약에 말이다. 만약에 인간 두뇌의 총명함 즉, IQ가 지금의 평균 보다 네다섯 배가 넘는 때가 오더라도 현재의 우리들처럼 타자와의 관계 맺기에 연연하며 살까?

 

아마, 그럴 것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왜? 유일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기를 고민하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무슨 말일까?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예술의 기원이 아주 오래 전, 문명이랄 것도 없던 그 시절 인간과 절대자(신)를 매개해 주던 즉, 관계를 접속해 주던 주술적 제의 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연극이 그렇고, 음악이 그렇고, 회화가 그렇다. 일례로 남프랑스나 북스페인 등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에 그려진 다양한 동물들의 그림이나 그 외의 동굴 벽화에서 발견된 동물 및 기타의 그림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렇다면 등불조차 제대로 없던 당시에 왜 그 어두컴컴한 동굴 벽에다가 그런 그림들을 그려 놓은 것일까? 암흑의 동굴 속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분명 감상용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만은 명확하다. 여러 가설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나는 개인적으로 주술적(종교적) 목적이라는 설에 무게를 둔다.

 

이 가설에 동의를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 또는 샤머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들은 공히 원시공동사회 구성원들이 갖고 있던 종교의 한 형태였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 - 동·식물 포함 - 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들과의 교감을 통한 일체감에서 위안을 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형태적으로 그것과 내가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신성으로서의 교감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기에 그렇다. 즉, 보이지 않는 내면적 세계를 통한 교감 같은 것 말이다.

 

바로, 이런 전제 하에 동굴 속 그림을 보는 게 이해가 빠르다. 원시시대의 그들은 자신들의 주거 공간이었던 동굴 벽에 그들이 믿고 의지하는 매개물을 그려 놓음으로써 위안을 얻고 평온을 찾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부적이나 십자가(성경) 또는 불상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통들이 세월이 흘러 보다 구체적인 형태의 종교로 발전을 하였으며, 나아가 예술의 태동에 공헌하게 되었다.

 

종교와 연극, 종교와 영화, 종교와 음악을,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서 인간과 컴퓨터를 놓고 비교해 보라. 종교는 인간과 신을 연결해 주는 목사나 무당을 매개체나 영매로 한다. 그런데 연극이나 영화, 음악이나 컴퓨터는 배우와 카메라와 뮤지션과 인터넷을 매개로 타자와 타자를 연결해 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 것이었다. 이것을 앞서 말한 원시적 시각으로 본다면, 배우 귀신, 카메라 귀신, 뮤지션 귀신, 인터넷 귀신 등이 될 수 있다. 여기서의 귀신이라 함은 매개물을 의미한다.

 

1970년대. 잘 살아 보자는 새마을 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다니던 그 시절, 산업화와 근대화란 미명 하에 우리의 무속 신앙은 물론이고, 이와 관련한 전통문화들은 미신으로 치부된 채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해야 했다.

 

하지만 말씀의 전달이란 측면에서 보면, 글쎄다 무속과 일반 종교와의 차이를 발견하기란 역시 쉽지 않다. 또한 이 두 영역의 구분 또한 그리 간단치 않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뿐인가? 영화에서도 거론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비과학적이네 미신이네 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던 이들도 가정이나 일신상에 일이 생기거나 하면 절집을 찾고 사주 관상을 본다는 사실이다.

 

큰일을 앞에 둔 정치권 인사들 그리고 재계의 돈 많은 양반들도 그곳을 즐겨 찼거나 심심찮게 굿판을 벌이고 있다는 공공연한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고 말이다.

 

▲ 영화 <만신>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만신. 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박찬경 감독이 김금화 선생의 자서전 ‘비단꽃 넘세’를 기초로 해 메가폰을 잡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무당 또는 굿을 소재로 한 작품이냐고 물어 온다면, 자신 있게 그렇노라고 대답하기도 좀 망설여지긴 한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이미지는 무속의 그것이지만 그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메시지를 보노라면 차라리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처절한 일대기를 그린 영화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기 때문이다. 다만, 부연하자면 그가 무당이며 굿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제목만을 보고 호기심에 극장을 찾은 이들은 상당히 실망할 수도 있을 법한 영화가 바로 이 영화다. 무당 영화에 으레 나올 법한 귀신 얘기나 신의 존재 유무에 관한 언급은 일절 없기에 그렇다. 그저 인간 김금화의 삶과 당시의 시대상을 순행과 역행을 넘나드는 구성을 통해 서사적 이야기구조 형태로 풀어나간다.

 

또한 박찬경 감독은 편한 길(?)을 버리고 굉장히 ‘위험한 도박’을 한다. 바로 다큐드라마라는 영화 포맷을 통한 영상미학의 모색이라는 점 때문이다. 특히나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라고 하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구분 없이 이 두 공간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함은 물론, 심지어는 한 화면에 두 공간(과거와 현재 또는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의 인물들을 같이 배치함으로써 시공간을 넘나드는 공시성을 다반사로 한다.

 

아주 어색할 것 같은 이러한 표현 기법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영화가 무속을 소재로 한 만신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만신 즉, 무당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넘나들며 말씀을 전달하는 샤먼(shaman)적 능력자 말이다. 이는 시대의 상이성이나 물리적인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소구력으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앞서 ‘위험한 도박’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 이러한 표현 양식이 자칫 잘못하면 아주 아마추어적인 실험영화 수준에서 끝나버릴 위험이 매우 크다. 허나 감독의 회화적 감각과 사진작가다운 영상처리에 의해 위험을 상당부분 커버하고 감독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구조를 시종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은 역시 감독의 역량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작품의 수용이란 측면에서 만신 김금화의 이야기 속에 감독 자신이 지나치게 감정이입 되지는 않았었나 하는 점이다. 즉,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감독이 아니라 이야기 주체 속에 함께 동행하는 동지적 입장으로서의 감독이 눈에 많이 띄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좋고 나쁨, 또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이야기 구조의 일관성에 관한 문제요 주제의 명확성에 관한 문제라 하겠다.

 

만신 김금화의 인생 속에 ‘만신’이 가지는 의미가 자막이 오르는 그 순간까지도 희미하게만 느껴진 채, 감독의 메시지만 눈에 아른거린다면 이는 관객인 나의 아둔함 탓인가? 아니면 감독의 표현상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겠는가?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