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감 상2013. 12. 15. 12:56

영역 확장으로써의 연극

 

흔히들 연극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제의와 만나는 것으로 추측들을 한다. 그래서 연극학개론에도 연극의 기원은 오래 전 제의행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제례 담당자(주술사)의 제의의식 및 절차가 오늘날의 연극형태로 발전했다고 보는 견해다. 하지만 이게 어디 연극뿐이겠는가? 무용과 음악, 미술 역시 원시적 형태의 제의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후 이는 종교라는 이름을 단 것의 합리화를 위한 목적으로 복무해 간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것이, 제의 의식이 갖고 있는 공간 확장의 의미이다. 제의란 현세와 내세의 만남이다. 현실의 공간에서 내세의 공간을 대면하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은 아주 원시적 형태의 생활수준에 머물러 있던 때부터 영역 확장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동물적 본능으로서의 영토 확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이상 즉, 죽음 이후의 사후까지를 염두에 둔 고차원적 세계를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의 세계로 돌아와 보자. 연극 무대는 현실적으로 아무리 커봐야 30~40평 남짓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가상의 공간은 무한대다. 예술가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상상의 크기만큼 그 공간은 확장된다.

 

미술의 화폭은 또 어떠한가? 가로 세로 몇 미터가 되었든 그 화폭에 내재되어 있는 공간의 개념은 화가가 상상한 만큼이다. 그 속에 인류가 그릴 수 있는 우주의 모든 크기를 다 담아낼 수 있음 또한 당연한 것이고 말이다.

 

예술이 그 오랜 시간 동안 도태되지 않고 지속 가능할 수 있었던 여러 조건들 중에 이 '영역 확장' 가능성이 아마 제일 막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인간 누구나가 갖고 있는 그 확장 본능을 간접적으로나마 실현시켜가며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사고의 극단에 위치하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빈 무대'라 할 수 있다. 무대장치 하나 없는 텅 빈 무대 말이다. 오브제의 극한 절제를 통해 관객이 객석에 앉아 바라보고 있는 저 무대 위 공간이 어디일 것이라는 것은 오직 관객의 상상에 맡기면 되는 것이니 그 확장성이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연극예술이 이처럼 무한 확장 개념만을 차용하는가 하면 그 또한 아니다. 때로는 내가 생활하고 있는 작은 공간 - 방이라든가, 거실, 또는 교실 - 만을 무대 위에 재현해 내는 경우도 많다.

 

힐링의 세계로 인도하다

 

연극 「여보 나도 할 말 있어(/연출 김영순, 알과핵 소극장)」는 후자를 재현한 경우다. 이 연극은 찜질방이라는 극도로 제한적이며 한정된 공간을 무대 위에 옮겨 놓은 채, 그곳을 찾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하소연과 푸념을 리얼하게 풀어 놓는다.

 

▲ 연극 <여보 나도 할 말 있어> 포스터, 출처 현장 촬영


 

글쎄다. 비록 눈에 보이는 공간은 찜질방이라는 한정된 장소일지 모르겠으나, 할 말 많은 이들이 쏟아내는 사연 속 공간은 역시 몇 십 년을 왔다 갔다 한다. 연극의 묘미라 할만하다.

 

이 연극은 대한민국 중년 남녀들의 현실을 현미경 위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분석해 본다는 점에서 나의 이야기이자 당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당신의 머리에도 희끗한 세월의 무게가 살포시 내려 앉아 있다면 그 개연성은 한층 커질 것이고 말이다.

 

고부갈등 · 부부관계 · 자식문제 등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때로는 관조적 어조로, 때로는 직설적 화법에 담아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재미있게 풀어낸다. 관객석에서 그래, 그래” “맞아하는 등의 감탄과 웃음이 공연 내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말이다. 배우들의 재치 있는 수다 연기와 무한 파워로 감동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무사히 잡았다고나 할까?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고독한 존재들이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이제는 사회학적 연구 대상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존재하는 일반적 현상이 된지 오래다. 해소할 길 없는 내면의 고립감이 인간세상을 점점 황폐화시키는 가운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써의 울타리 또한 높아만 간다. 그 안에서 인간은 오늘도 몹시 외롭다.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이 시대를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것이. 힐링은 소통을 기본으로 한다. 소통을 통한 교감이 힐링의 원천이고 말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소통과 교감의 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정은 가정대로, 직장은 직장대로, 이웃은 이웃대로 다들 같은 고민들을 안고 살지만 그렇다고 그쪽으로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연극의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군상들이다. 불통과 불교감으로 인해 가슴 가득 응어리 진 사연들을 한 보따리씩 담고 사는 내 이웃이자, 나 자신이다.

 

요즘, 연극의 위기라는 말이 도처에서 들려온다. 하긴 언제 연극이 위기 아닌 시절이 있기는 했는가마는, 근래 들어 제기되는 위기론적 시각은 특히나 이해되는 측면이 크다. 다양한 진단과 처방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뮤지컬의 흥행과 무관치 않다는 점에서 한층 설득력 있게 들린다.

 

뮤지컬이 대세인 시대다. 뮤지컬계의 저인망식 관객 싹쓸이 현상으로 인해 타 무대 예술업계는 죽을 맛이다. 뮤지컬의 성공 요인을 잘 살펴볼 일이다. 이와 무관치 않은, 오히려 상호 연관성이 깊은 문제로 나는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꼽는다.

 

피동적 주변인으로서의 관객에서 적극적 참여자로의 관객으로 위치 설정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라는 얘기다. 관객 없는 연극, 관객 없는 무대예술, 생각할 수 있나?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연극계가 관객을 어찌 대접해 왔는지 이 또한 잘 살펴볼 일이다. 위기는 역으로 기회라고 했다. 지금이 한국 연극계 최고의 위기 상황이라면 적어도 이 보다 더 나빠질 수 없다는 점만은 명백하다.

 

관객과 함께 하는 연극으로써의 진수를 보여준 여보 나도 할 말 있어는 그래서 더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연극의 희망 찾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박수를 보낸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