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감 상2014. 5. 4. 19:51

자고로 인간사, 사람 사는 땅에서는 인간 상호 간 귀천이 없어야 한다. 세상 어디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땅이 존재하는가? 볼 것 없다. 암수 교미에 의해 세상에 나온 동물 중에 하나가 인간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개천에서 용 나는 게 당연시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게 인간사 당연한 이치이거늘 이런 하늘의 뜻을 거스른 채 신분상 귀천을 두고, 왕의 씨를 따로 점지해 두고자 했으니 분란이 생길 수밖에. 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편법들이다.

 

그렇게 만들어 놓고는 그 자리 뺏기지 않으려고, 아니 그 자리에서 쫓겨날까봐 밤잠까지 설쳐가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동서고금 만고의 진리다. 세습제의 절대군주 하에서 왕위 찬탈과 살해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군주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연하다. 그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통로는 막혀 있고, 그 자리를 탐내는 자들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 그러니 그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위험한 방법을 쓸밖에.

 

이런 절대군주제가 민주적 질서에 의한 통로의 개방으로 인해 즉, 민주주의 제도의 정착과 함께 절대자에 대한 암살 및 살해 위협은 많이 줄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비단, 절대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지금처럼 점점 개천에서 용 나는 게 힘들어지는 시대가 공고하게 되면 될수록 역으로 용으로 승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저항도 그에 못지않게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 영화 <역린>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절대 군주인 정조 임금 또한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항상 자신 옆에 드리워져 있음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고단했던 삶과 비통한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자라야 했던 정조의 인생에 있어 죽음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삶의 일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역린. 이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하나를 고르라면 그것은 죽음이다. 죽이려는 자들과 죽지 않으려는 세력의 싸움이기에 그렇다. 그런 점에서 ‘역린’이라는 제목은 좀 부적절하다 싶기도 하다.

 

역린이란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이다. 인간사에서는 임금의 분노를 뜻하는 말로 쓰이곤 한다. 그래서 역린을 거스르다는 말은 군주의 뜻에 위배되거나 하늘의 노여움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린이 제목이기 위해서는 정조의 자라온 삶과 주변 상황의 묘사가 훨씬 더 절실해 보이기에 그렇다. 즉, 분노하고 노여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조 개인의 개인사와 사회사가 철저하게 정조의 시각으로 그려졌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곁다리들이 많다. 그런 곁다리들이 엮이고 엮인 관계 속에서 영화는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우정도 있으며, 사랑도 있고, 인간애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을 한정된 시간과 한정된 공간 속에 다 그리려 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인물인 정조의 내면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디테일함이 부족하다.

 

그런 정교한 과정들을 거친 후에 폭발하는 임금의 분노가 사실은 역린일 텐데 말이다. 그래서 역린이 용의 목에 달린 비늘이 아니라 뱀의 목에 달린 비늘 정도 밖에 되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별로였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에 별 5개 만점을 주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아주 잘 만들어진 수작이다.

 

나는 제목을 갖고 딴죽을 건 것이고, 영화는 영화로 보면 된다. 아마도 이재규 감독은 그런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 전편을 통해 울려 퍼지는 메시지는 정성을 다하는 삶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상책(정재영 분)의 입을 빌어 이재규 감독은 관객들에게 이 말을 전하는 것으로 자신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를 설명한다(이런 점에서 나는 영화감독들이 너무 부럽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으로 베어 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하게 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의 하나로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저작으로 알려진 ‘중용’ 23장에 나오는 구절이라 한다.

 

그 정성을 다하는 삶에 있어 개개의 객체로 살수와 나인과 노론과 상궁들 즉, 조선의 백성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켰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그렇게 흘러온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당신과 나, 바로 우리의 몫이다. 정성을 다하자. 사람으로,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살기 위한 일에 정성을 다하자. 그럼, 세상은 분명히 변한다.

 

영화는 문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영화는 그 사회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종합 문화다. 그것도 단지 잡탕식 섞임으로써의 종합 문화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자신의 입지를 분명히 갖고 만들어 내는, 마치 화음의 앙상블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멋진 합창곡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 사회를 보려면, 그 나라 영화를 보라는 말은 유효하다 하겠다. 이 영화도, 꼭 보자. 그리고 변화의 대열에 함께 하자. 너와 내가 그리고 당신... 당신이... 그래... 당신이 진정으로 정성을 다했다면 지나간 그 4월이 그렇게 비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기에... 몹시도 한스럽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