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시 사2013. 7. 9. 19:41

 

丑奴兒, 書博山道中壁 축노아, 박산을 지나는 길에 벽에 쓰다

지은이 : 辛棄疾 (씬치지)

 

少年不識愁滋味 소년불식수자미

愛上層樓 애상층루

愛上層樓 애상층루

爲賦新詞强說愁 위부신사강설수

 

而今識盡愁滋味 이금식진수자미

慾說還休 욕설환휴

慾說還休 욕설환휴

却道天凉好個秋 각도천량호개추

 

어려서는 시름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누각에 오르고 또 올라

시름깨나 아는 것처럼 시를 지었네

 

이제는 시름을 알아도 너무나 잘 알건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서늘한 가을날이 좋다 말할 뿐이네

 

 

중국 남송시대의 시인 씬치지(辛棄疾)의 시 입니다.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세상사 전반을 함축적으로 그려낸 멋진 작품인 것 같아 가슴에 와 닿더군요. 제멋대로의 해석일지는 모르겠으나 이 작품을 처음 만난 후 퍼뜩 떠 오른 생각 하나를 적어보겠습니다.

 

살아가면서,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산다는 것은 어쩌면 비움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는 점입니다. 젊었을 때는 무조건 많이 채우는 게 최고인 줄 알고, 하나라도 더 채우려고 애를 썼고, 그렇게 채워지는 모습에 만족이 지나친 나머지 자만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겪고, 좌충우돌하며 삶이란 날카로운 꼬챙이에 이곳저곳 찔리다보면 비워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몸이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이렇듯 많이 채워야겠다는 욕심 이면에는 '비빌만한 언덕'이라도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현실적 계산이 작용한 때문이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살아보니 알겠더군요.

 

그런데 역시, 세월이 주는 또 하나의 깨달음. 그것은 비빌 언덕이란 게 나를 위해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내가 찾아내야만 하는 그런 것이 아니더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비빌 언덕 역시 내 안, 나 자신에게 있더군요. 그러니 결국 비빌 언덕 하나 만들고 못 만들고는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지요.

 

하지만 사람 누구에게나 개인차는 존재합니다. 또한 주어진 환경 역시 모두가 하나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연유로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곁에다 비빌 언덕 하나를 마련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 살고 있으니까요.

 

몇 번을 실패하더라도 다시 용기를 내어 내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새 출발'의 기회를 제공해 주고,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연속인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직접 비빌 언덕 하나를 만들어 주면 되니까요. 아니, 사회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비빌 언덕의 역할을 해주면 될 테니 말입니다. 그게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지요.

 

물론 그런 사회를 갖느냐 못 갖느냐, 본인이 그런 사회 속에 살고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 역시 그 사회 구성원들 자질의 몫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그런 사회가 아니라면 반성해야 합니다. 반성합시다!

 

자, 이런 과정들을 거치며 여기까지 오다보니 저 아래로 내가 살아온 삶의 족적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곳은 굽이굽이 돌아가는 비탈길이었고, 또 어떤 곳은 천 길 낭떠러진 절벽 같은 길이었으며, 어떤 곳은 꽃향기 가득한 장미정원 같은 곳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이곳이 내 인생 여정의 끝도 아니며 가야할 길 역시 온 것만큼이나 많이 남아있습니다. 뿐인가요? 저 밑으로는 또 어떤 이들이 내가 왔던 그 길을 밟으며 올라오고 있으며 내 앞쪽으로는 이미 먼저 출발하신 분들의 모습이 점점이 수놓아져 있음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역시 이것입니다.

 

그저 "서늘한 가을날이 좋다 말할 뿐이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