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2006년/일 상2010. 6. 18. 20:25

그 해 여름은 정말 잔인했다.

처음 일본을 올 때만 해도 6개월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고 공부만 해야지 했는데, 점점 줄어드는 통장의 잔고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집 도움없이 자립하겠습니다."
큰소리는 치고 왔는데 아무래도 6개월을 버티기가 쉽지 않을 듯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 아는 후배의 소개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해 4월에 일본에 왔고, 6월 부터 했으니까 여름의 시작 무렵 이었다.

일명, 노가다 !

전철역 보수공사 현장에서 하는 막일 이었다.
마지막 전철이 지나가면 공사를 시작해서 첫 전철이 오기 전까지, 그러니까 밤 12시 30분부터 새벽 4시 30분까지다.

어디든 공사 현장은 다 같지 않을까 싶은데, 정말 막일은 막일 이었다. 오래된 지하철역 보수공사는 주로 타일을 새로 깔든가, 아니면 노후된 계단을 새로 만드는 공사가 대부분인데, 그냥 새로 깔거나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노후된 것들을 깨내야 한다.(이게 정말 장난 아니다) 그리고 새 타일을 붙이는 것이다.

그 중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막일 중의 막일' 시멘트를 지상에서 공사 현장까지(주로 지하1, 2층이다) 나르거나, 아니면 타일을 깨고 그 깬 타일들을 다시 지상의 큰 트럭까지 옮기는 일이었다.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 일들이나 덜 힘든 노가다 - 물론 기술은 필요하겠지만 - 예를 들면 타일을 붙이든가, 시멘트를 바르든가 하는 일들은 일본 기술자들의 몫이다.

일당은 하루에 9,000円을 받는다.  물론 4시간 일하고 그 정도 받으면 괜찮은 일 같은데, 중요한 건 받는 만큼 해야 한다는 거다.

4시간 동안 쉬는 시간은 딱 한 번 약 20분 정도. 이때 음료수 하나를 준다. 그게 전부다.

아, 그리고 이 일은 외국인이나 유학생에게는 불법이란다.
하지만 하청 업자가 돈 남겨 먹을려고 값싼 우리들을 쓸 것이다. 어느 나라든 그런 건 있는 것 같다.

드디어 첫날이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막일 이었지만, 사실 그까짓 것 쯤이야 했다.

오늘의 작업은 시멘트를 지하 공사현장까지 옮기는 것이란다. 큰 트럭 한대분이니까 가히 짐작은 갈 거다.


"아, 저걸 전부 지하 2층까지...." 


그리고 남들처럼 머리 뒤통수에 시멘트 2포를 얹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얹혀졌다가 맞을 거다. 다른 동료가 교대로 앞 사람의 머리위에 얹어주니까....

이거, 정말 장난 아닌거다. 간신히 일어섰다. 휘쩡휘쩡 몇 걸음을 옮겼다. 시멘트 2포 참 무겁더라.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가 지하 1층 까지는 왔는데, 더는 도저히 못 가겠는거다.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머리 뒤에서 시멘트 2포가 짓 누르니까 고개는 점점 ㄱ자로 꺾이고, 머리에 쓴 안전모가 얼굴을 반이나 가려서 앞이 제대로 안 보인다.

게다가 한 여름 햇볕에 노출되었던 시멘트는 그 열기가 쉽게 가시지 않고, 그 시간까지 뜨거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정말 뜨겁다.


그 뜨겁고 무거운 것이 목덜미를 짓 누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제기럴, 끝내는 개찰구 기둥에 머리를 들이박고 말았다.
잘못 왔다.
죽었구나.

거기까지 가는 짧은 시간(약 5분) 동안 정말로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순간, 영사기에서 필름이 돌아가듯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님, 어머님....... 가족들.......친구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왜 일본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러웠다. 뭐가 서러웠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서러웠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일본와서 처음이자 마지막 눈물은 그렇게 공사장에 뿌렸다)

다행히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남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게 눈물인지, 땀인지 ......

포기다. 기숙사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갈 방법이 없었다. 마지막 전철도 끊기고, 택시타고 가자니 거기가 어디라고 전철로 20정거장 정도를 왔는데, 그건 주머니 사정이 허락을 않는다.

그래, 씨-벌. 해보지.
그 순간 정말 욕이 먼저 나왔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이다.
시멘트 2포를 패대기를 쳤다. 애꿎은 시멘트가 뭔 잘못이 있다고......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역시 인간은 적응력이 빠른 동물일까? 
그 이후 부터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 일이 끝나고, 기적을 울리며 첫 전철이 온다.
그리고 저 멀리서 붉은 태양이 솟아오른다.

아,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

일이 끝나고 기숙사에 도착하면 아침 6시.
대강 씻고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2시간 자고 8시에 일어나 학교에 간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오후 2시.
라면 하나 끓여서 밥 말아 먹고 동네 도서관으로 간다.
3시 부터 6시30분 까지 비몽사몽간에 공부를 한다.

다시 집에 돌아와 저녁 먹고 밤 11시까지 3시간 정도를 잔다.
그리고 일어나 또 노가다 현장으로 간다.

이런 반복되는 생활을 그 해 여름 약 3개월을 했다.

지금도 나의 가족들은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아마 어머님이 아셨다면, 노발대발 하셨을거다.
당장 짐 싸들고 귀국하라고 .......

이 아들이 유독 잘나서가 아니라, 그게 세상 모든 부모님들의 마음일테니까.

이런 일을 생활로 하시는 분들께는 참 죄송스런 말이지만, 그 해 여름은 정말로 힘들고 잔인한 여름이었다. 나에게는.......

내가 편히 잠들어 있는 늦은 밤, 아마도 또 다른 누군가가 시험대에 서고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 처럼.

건투를 빈다.


ps/ 사실, 이글도 꽤 오래 전에 썼던 겁니다. 아마도 2002~3년쯤 경험담 삼아 썼던 글 아닐까 싶습니다. 그때는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한겨레신문의 코리안네트워크라는 코너에 글을 쓸 때였는데요. 이글을 보시고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어떤 분이 메일로 연락을 주셨어요. 술 한 잔 하자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메요코 시장이 있는 오카치마치에서 만나 시장통에서 한 잔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냥 술 한 잔 사주고 싶어서 연락했다"고 하면서 그때 그렇게 힘들었었냐고 물어 보시더군요. 혹, 이글 보시면 연락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한 잔 대접해 드리게 말입니다. 문득 그때가 생각납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