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2006년/시 사2010. 6. 18. 15:36

상실의 시대. 사람들의 시선이 불확실한 미래로 향하기 보다는 풍유로웠던 과거로 향하고 그 시절을 회상하고 그리워함은 너 나 할 것 없이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때가 좋았지! 그러나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 임을 인정은 하면서도 그런 것이 결코 개인 및 국가를 위한 발전적인 사고가 아님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다.

4·15 총선이 끝나고 새정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높은 지금, 그러나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이렇듯 도도한 시대적 물주기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벽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특히, 그것을 단전으로 보여준 이번 총선 결과는 새정치를 향한 그 길이 결코 녹록치만은 않을 것임을 말해준다.

싹쓸이로 대표되는 망국적 지역주의와 지역 패권주의,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수구 반동이라는 벽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가로막고 서 있는 저 높은 벽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일본 사회를 떠올려봄은 너무도 비슷하게 닮아있는 개인적·지역적 상실감에 바탕을 둔 그 폐단의 유사함 때문이다.

그때가 좋았지! 구시대의 특혜와 이권, 특권의 달콤함은 현실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무시로 과거로 향한다. 자고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과거로 향하는 향수야 뉘라서 뭐랄 수 있겠는가마는 뒤로 가도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이 문제다.

눈물샘을 자극하며 퍼져오는 아련한 향수는 무덤 속의 죽은 독재자를 불러내는 주술이 되어 의회쿠데타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비민주적 작태와 썩고 문드러져 버려도 시원찮을 부정 부패마저도 망령의 품 속으로 가두어버린다.

일본의 어느 중견학자는 오늘의 일본사회를 ‘전전(戰前)의 제국주의와 닮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국가의 정책에 반대하는 국민은 보호받을 가치도 없는 역적과도 같다는 논리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이라크에서 납치되었다가 석방된 3명의 일본 젊은이들을 향한 일본정부로 부터 시작된 집단적 이지매(따돌림)가 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텔레비젼 카메라 앞서 선 일본수상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석방과 무사귀환을 위해 많은 국민들과 여러 국가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석방되자 마자 그래도 이라크에 남아 계속 활동하고 싶다니 참 한심하다"

백번 양보를 한다고 해도 이는 일국의 수상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국가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수상으로서 그와 그의 정부는 아주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또한 그 젊은들은 자기 자신들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 나라의 평화와 재건을 위해서 온갖 어려움과 죽음의 공포도 무릅쓰고 숭고한 인간애를 몸소 실천한 사람들이다.

이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칭찬받아 마땅하고 오히려 권장하고 장려해야만 할 일이며, 또한 그들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국 헌법13조가 보장하고 있는 당연한 자신의 권리를 말했을 뿐이다.

국가 정책에 반하는 행동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오만과 국민을 단지 통치의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듯한 이러한 발언은 누가봐도 전전(戰前)의 제국주의 냄새가 물씬 풍김을 알 수 있다.

또한 요즘 일본사회에서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배심원제도라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나마 일본의회에서 여야당이 합의한 내용은 이것 저것 많이 보완된 구석이 있다지만 여전히 얼떨떨함은 남는다.

일본정부는 사법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두 가지의 새로운 제도를 도입 중이거나 앞으로 도입을 목표로 법률보완 작업 중에 있다. 첫째는 로스쿨(전문법과대학원) 제도의 도입이고(이는 올 해 첫 시험을 치르고 현재 시행 중에 있다), 둘째는 미국식 배심원제도의 도입이다.

그런데 문제는 배심원제도에 있다. 어떻게 배심원을 선발하느냐는 문제가 그것이다. 약 1개월쯤 전에 처음 선보인 정부안은 선거권을 갖고 있는 국민은 누구라도 배심원에 선정될 수 있고 또한 배심원에 선정되었다는 통고를 받으면 절대 이를 거부해서는 안되며, 무단으로 거부하거나 또한 활동중에 얻은 정보에 대해서는 반드시 비밀을 엄수해야 하며 이를 어길시에는 징역형까지도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전전(戰前)의 징병제도와도 흡사하다고 보여진다.

국가의 이익과 정책, 새로운 제도의 도입과 시행이라는 명분하에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함을 너무도 당연시하는 이런 일련의 사태를 접하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역시 뒤로 가도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이다.

그때가 좋았지! 그러나 향수로 떠올려도 되는 그때는 독재자의 딸이 흘리는 눈물에 자극받은 감성적 판단에 의한 선택이 죽은 독재자의 무덤 속까지여서는 정말 곤란하며, 세계를 전쟁과 죽음의 공포로 몰아 넣고 야스쿠니에 잠들어 있는 전쟁 범죄자들의 망령의 품 속까지여서는 절대 안된다.

상실의 시대는 그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희망의 미래로 풀어야 한다. 자칫 상실의 시대가 절망의 시대로 전도된다면 전자는 다시는 극복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불행이 될 것이요, 후자는 종말을 예고하는 세계의 불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