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2006년/여 행2010. 6. 18. 15:28

2002년인가, 2003년인가 기억마저 희미한 어느 무덥던 일요일 목원대학교 김정동 교수와 재일코리안 30여 명은 '일본 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 답사' 첫번째 프로그램으로 히다카 시(日高市)에 위치한 고마진자(高麗神社)를 방문했다. 35도, 숨이 헉헉 막히는 듯한 불볕 더위 속의 아스팔트 길을 따라 30여 분 걸어서 찾아간 고마진자(高麗神社).

그러나 아쉽게도 그 곳에는 고구려인의 기백에 찬 모습은 없었다. 시대적 풍파에 휩쓸려 변할 대로 변한 모습으로, 변절과 오욕의 역사만을 간직한 채 그렇게 그곳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 현장 답사의 스케치 사진과 김정동 교수의 고마진자(高麗神社) 안내글을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  고마역(高麗驛) & 고마진자(高麗神社)                       © 강동완



고마진자(高麗神社), 내선융화 위해 이용됐다. 
 
글: 김정동(목원대, 교수) 

고려역에 내리다

어느 겨울 날 나는 전철 세이부이케부쿠로 선을 타고 히다카 시(日高市)에 갔다. 도쿄로부터 서북쪽으로 40여km 떨어진 곳이다. 가는 길에는 옛날 비행장으로 유명했던 고코로 자와가 있었다. 고마에키에서 내렸다. 한자로는 ‘高麗驛’이다.

역 앞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두 개의 빨간 장승이 서 있었다. 한국인 관광객을 맞으려 새로 세워 놓은 것 같았다. 

히다카 시의 중심으로는 고려천이 흐르고 있었다. 지명들에 보이는 한자가 왠지 반가웠다. 이곳으로 나 있는 오래된 길은 옛날 닛코(日光)로 가는 길이었다. 지금도 닛코가도라고 부른다. 아마 우리 통신사들도 이 길을 걸어갔으리라 생각해 봤다. 내가 걷는 길 변에는 우리 나라 문인석으로 보이는 석상이 이름 없이 서 있었다. 아무 설명도 없는 것을 보면 아마 우리 것인가 보다. 무척 쓸쓸해 보였다.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들 사이에 이 마을은 일종의 마음의 고향같이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려향(高麗鄕)이란 장소만 해도 그렇다. 고려의 마을, 고려의 고향 ?여러 이미지가 떠오르기 떄문일 것이다. 일본 신문들은 가끔 이곳의 고려신사를 다루고 있다. 일본에서는 한겨울이라 해도 눈을 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마침 고려신사에 갔을 떄 눈이 왔다. 서설(瑞雪)일까. 

관동 지역의 첫 개척지 

고려신사에 대해서 처음 글을 쓴 한국인은 홍순혁이었다. 잡지 <청년>에 ‘일본 무사시노 개척자인 우리 상대인(上代人)-특히 고구려 유민에 대하여’이다(1928.3) 그 뒤를 이어 박상희도 ‘무사시노 고려촌의 유래’라는 글을 <조광>(1939.8)지에 발표한다. 

고려신사에 대해서 쓴 글들의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모두 이곳이 고구려의 땅이라는 개연성에 감복하는 내용이다. 또한 고려신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글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한 사학자(白石實三)가 1930년대에 밝혀 놓은 글을 보면. 

고려신사는 고려촌에 있다. 그곳에는 고려씨가 살았다. 이곳은 원래 무시시노로 4-500년전부터 우리 고려씨들이 개척해 놓은 땅이었다. 메이지 초기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오랜 역사를 되새겨 보면, 나라(奈良)시대 도쿄 주변 즉, 무사시노 벌판일대는 일본 수도 나라의 변방에 불과했다. 이곳은 사람이 거의 안 사는 광막한 땅이었다. 이 도쿄 주변에 고구려인이 나타난다. 그는 고구려의 왕족 약광(잣코,若光)이었다.(졸저, <일본을 걷는다>, 1권,133쪽) 그는 오이소 지방을 거쳐 이곳으로 오게된다. 

무사시노 국은 현재의 도쿄와 사이타마 일대에 있던 지방 국명이었는데 그들은 사이타마 쪽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716년 도쿄 주변 일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망명객 혹은 유민 1,799명을 모아 황무지를 개척해 나간다. 신라의 수도 경주 불국사에 석가탑, 다보탑(715년), 황룡사에 9층탑(720년) 등이 세워질 무렵이었다. 

지금의 지명으로는 시스오카 현, 야마나시, 가나카와, 치바, 이바라키, 도치기 등 7개 지역에 흩어져서 살던 고구려인들이었다.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에 각각 신라에 멸망당한다. 멸망 후 40-5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후 이곳이 고려군(高麗郡)이 된 것이다. 우리의 일본 관동지방 내 첫 ‘코리아타운’이었던 셈이다. 고려군은 고려촌과 고려천촌(高麗川村)으로 이뤄졌다. 일본인들은 고려를 ‘고마’라고 읽고 고려촌을 ‘고마 무라’라고 했다. 이 지명들은 사실 고려와는 상관이 없고 고구려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고구려를 고려라 했던 것이다. 

한편 이 부근에 신라군(新羅郡)도 생겨난다. 고려군이 설치된 지 42년이 지나서였다. 신라 스님 33명, 보살 2인 그리고 일반인 남자 19명, 여자 21명이 왔다. 사실 신라군은 고려군보다 뒤늦었지만 원래는 신라 사람들이 687년부터 이곳에 와서 살고 있었다. 고려군보다 29년 전이었다. 

신라 사람들과 고구려 사람들은 서로의 경험을 주고 받으며 이곳을 개척해 나갔다. 고국에서는 원수지간이었으나 이 먼 이역에서는 한 동포간이었다. 신라군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시점에 세워졌는데 신라인들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는 잘 모른다. 

일본은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인을 우대해 받아들이고 있었다.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고구려인들은 특히 말타기, 싸움 그리고 농업을 가르쳐 주었다. 신라인들은 건축과 미술을 그들에게 전수해 주었다. 이 유민들은 언제나 환대를 받았다. 관직에 주어 학자와 기술자는 수도 나라에 머물게 했다. 그 외 평민들은 지방에 살게 해 그 지역 토지 개간을 하게 했고 원岺琯湧?지도케 했다. 

일본 <만엽집> 14권 ‘동가(東歌)에는 이 망명객들이 ‘무사시노 풀밭에 불을 질러 개간하던 정경’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실려 있다. 

이곳은 이후 쌀의 곡창지대가 되었다. 메이지 시대만 해도 일본쌀의 반을 공급할 정도였다. 

이 고려군과 신라군은 에도(江戶)가 급성장하며 함께 발전해 나간다. 에도가 도쿄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곳 고려군, 신라군은 그 이름의 진가를 더 하게됐다. 도쿄는 우리 유민들에 의해 기틀이 놓여졌던 것이다. 

1896년 이후 버려지는 이름, 고려 

우리가 일제 침략을 받게 되며 이곳은 새로운 유민 즉, 유학생, 노동자 등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1896년 일제는 한국과 관련된 지명이 기분 나쁘다고 없애버리기로 한다. 고려군은 이루마군(入間郡)에 편입시켜 고려군이란 이름을 짓는다. 그리고 1955년에는 또다시 고려촌, 고려천촌이란 명칭을 없애 히다카 정(日高町)으로 만든다. 1991년 사이타마 현 히다카 시가 된다. 이에 학자와 문화인들이 ‘통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모든 흔적을 한꺼번에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남은 흔적이 예를들면, 고려천(川), 고려판(坂), 백원촌(고마하라 무라), 고려원(原), 고려산(山), 고려본향, 고려옥근, 고려향(鄕), 고려숙(宿), 고려치(峙), 고려구릉, 고려왕묘, 고려가(家) 등이다. 여기에 고려신사(高麗神社), 고려전정(高麗殿井), 고려전지(高麗殿池)도 있다. 

여기서 관심이 가는 것은 ‘고려전(高麗殿)’이다. 고려전은 고려신사의 본전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고려전은 고구려전이다. 

신라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라군은 이미 그 전 신좌군(新座郡)으로 개칭했다. 1896년에는 북족립군(北足立郡)으로 아예 합쳐 버린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군 명칭 두 개가 사라진 것이다. 

신라의 지명 흔적도 몇 곳 남아 있다. 신좌군(新座郡,니히구라 군), 백자촌(白子村,시라코 무라), 신창촌(新倉村,니히구라 무라) 등이 그것이다. 신창촌에는 우방산(牛房山)이 있는데 이곳은 신라의 왕족이 거처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은 신라를 시라기라 읽었기에 신(新) 혹은 시라(白) 등이 흔적의 하나였던 것이다. 

고구려 신라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신사는 일본 내에 무려 6천여 개, 그 중 무사시노 지방에만 130여 개나 있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초기에는 오늘날의 신사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고 대부분 당집의 형태를 띠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고국을 떠난 민들이 모국의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일본 땅에서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던 일종의 사당들이었다.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거의 다 사라졌다. 지진, 화재, 전쟁도 한 몫을 한 것이지만 역사 지우기에도 편승했다. 그 중 대표적으로 하나 남아 있는 것이 고려신사이다. 

궁전건축가 복신 

고려신사에는 신사 건물과 성천원(聖天院) 그리고 약광의 묘가 있다. 이 건물들은 고구려 왕족 약광과 관계가 깊다. 약광의 시대에 즈음하여 고구려 양식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고구려 망명객 중 약과 외에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복신(福信,?-789)도 있었다. 그는 중앙 무대에 진출하기 위해 이름을 다카구라(高倉)로 바꿨다. 

<속일본기> 등에 의하면 복신은 81세를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일본 조야에서 존대를 받았고 그 후손들도 번창했다고 한다. 그는 조궁경으로 역할 했는데 조궁경은 궁전 건설의 책임자를 말하는 직함이었다. 그는 고구려 궁전 건축에 탁월했던 건축가였던 것이다. 그가 세운 궁전이 양매궁이었는데 매우 화려한 궁전이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어궁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궁전 주변에 우물, 연목 등을 파 놓았는데 그것이 고려전정, 고려전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전은 약광이 살던 집이었다고 추정된다. 

고려 옥근은 고구려식 지붕을 말하는데 궁전 자첵 고구려 식으로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이 1259년의 화재로 모두 사라진다. 본전의 일부에만 고구려 양식이 남아 있다. 이 궁이 무로마치 시대(1334-1573) 말기 고려신사로 이름이 바뀌고 여러 차례 고쳐진다. 다카쿠라의 후손들이 일본 초기 많은 궁전 건축물?성들을 만들어 준다. 

고구려 탑이 보인다 

고려신사는 지금 약광을 신으로 ㅁ시고 있다. 약광의 목상이 여기에 있다. 출세와 운이 터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다. 

성천원은 약광과 그와 뜻을 같이하던 스님 승낙(勝樂)이 죽고 난 후, 약광의 아들 성운(聖雲)과 손자 홍인(弘仁)이 승낙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 승낙은 고구려에서 이곳으로 망명해 올 때 환희천이란 것을 가져 왔는데 환희천의 별칭이 성천(聖天)이었다. 

여기 경내에 약광의 묘, 즉 고려왕묘(高麗王廟)가 있다. 묘는 제사를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다. 묘 속에 탑이 하나 있는데 그 탑은 고구려 양식의 탑이다. 다섯 개의 사암을 중첩시켜 놓은 아주 독특한 탑이다. 질박한 양식을 띠고 있다. 

원래 일본에 초기에 세워졌던 탑들은 백제식 목탑들이어다. 돌탑이 들어간 것은 669년에 세워진 석탑사 돌탑이 처음이었다. 돌탑이 있어 석탑사라고 이름 붙여진 이 절은 시가현 가모군에 있다. 고구려의 돌탑은 일본에서도 아주 희소한 것이었다. 

이 신사 안에는 고려의 주택이라는 것이 있다. 고려의 것과는 건축적으로 별관계가 없고 그 후손들이 살았던 집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기둥이나 평면 형식에서 우리 쪽 느낌이 조금 드러날 뿐이다. 

1898년 이 고려신사는 일제에 의해 완전히 버림을 받는다. 절 이름도 다카구 신사로 바꾸고 약광에 대한 제사도 금지시켰다. 대신 일본의 천황신을 제사지내게 했다(량연국, ‘조선문화가 초기 일본문화 발전에 미친 영향’, 102쪽,1995,사회과학출판사) 8세기경의 응신천황과 신공황후를 이곳에 편입시켰다. 

약광은 백발이었으므로 백발신사(白髮神社)라 이름 부르기도 했다. 늙으면 백발이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던 이 고려신사와 관련된 일련의 장소들이 일제의 조선 침략과 함께 새로이 부각된다. 1930년대에 들면서 소위 내선융화의 한 심벌이 된 것이다. 일본 역사학자들이 이제는 한일관계의 상징물이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약광에 대한 제사도 형식적이나 다시 호용되었다. 물론 일본 응신천황과 신공황후의 신위가 우선이었다. 

친일파 조중응 처음 찾다 

고려신사는 조중응과 관계가 깊다. 메이지 시대가 되자 조선침략과 관계된 자들의 출입이 시작된다. 이것은 ‘참배자 제명사 방명’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통감부나 총독부의 요직에 있는 자는 조선에 부임하기 전 꼭 이 신사를 찾았다. 여기에 덩달아 우리 한국인도 줄을 잇는다. 

대신이라든가 하는 자들과 친일배가 꼭 들른다. 처음 찾아간 자는 조중응(趙重應, 1860-1919)이었다. 1900년 7월 19일이었다. 외무 참의를 하다 옷을 벗고 189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피 생활을 할 때였다. 

내가 옛날 책을 보면 이상하게 여겼던 것은 우리 나라에 귀족이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들은 거의 다 서양식 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제 부끄러워 그런 사진은 나오지 않고 있다.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것이다. 반면에 일본은 이런 사진이 지금도 붐을 일으키며 나오고 있다. 

조중응의 그런 사진이 있다. 히다카시 시립 고려향 민속자료관이 고려천 부근에 있다. 2층 짜리 건물인데 이곳 2층 전시실에는 한 현판이 걸리지도 못한 채 바닥에 뒹굴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조중응이 쓴 글자가 있는 현판이었다. ‘高麗橋’라고 쓴 것이었다. 이제는 일본인에게도 버려져 걸릴 곳을 못 찾는 것이었다. 

조중응은 1905년 통감부가 들어서자 일본에서 돌아와 이토 히로부미의 후광을 업고 이완용의 오른팔 노릇을 했다. 일본말을 제법 지껄이던 조중응은 아예 일본 여인을 부인으로 앉혔다. 그는 이후 벼락 출세의 길에 올라 법부대신, 농상공부 대신이 되어 ‘이토의 개’가 되었다. 그 덕에 귀족에도 올랐다. 서열로 보면 백작인 이완용, 남작인 조민희 사이인 자작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1911년 <시사신보>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국에서 50만원(圓) 이상의 자산가는 모두 1,018명이며, 이 가운데서 일본인은 986명이고, 조선인은 32명이다. 조선인 32명 중에서 왕족 귀족은 9명,관료 3명, 나머지는 토호, 양반 등의 대지주였다(매일신보,1911.7.28). 그들 중에 조중응이 들어 있었다. 그는 박영효, 송병준, 조민희, 이제극, 박기양 등과 함께 설립했다. 

이구열에 의하면, 그는 이완용 조민희와 함께 친일계열인 경성서화미술원의 후원자이기도 했다(이구열,한국현대미술사,국립현대미술관,1976,49쪽). 아마 붓글씨 정도는 좀 썼나 보다. 

조중응은 이인직, 이해조 등 친일 문인들과 <소년한반도>를 창간하기도 했다. 조중응은 이인직과 함께 동경정치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때 선생이 일본인 고마쓰 미도리(小松 綠)였다. 고마쓰는 한일합방 당시 이토의 오른 팔로 실질적인 실무자였던 덕에 후에 총독부 외사국장이 되었다. 

조중응은 고마쓰와 함께 고려신사를 방문하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피는 흐르지 않는다 

조중응은 이때 약광의 57댜 후손이고 고려신사 사장직(社掌職)에 있던 고려씨 고려흥환(高麗興丸,1867-1937)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현재는 59대손 고마 스미오(고려징웅,1927)가 맞고 있다. 

약광의 후손인 고려씨는 26대 500년 동안은 고구려인 자손들끼리만 혼인해 왔다. 그러나 27대부터 일본인과 통혼, 이제 피는 거의 일본피로 바뀌었다. 

지금 일본에서 고구려 계라 하는 성씨는 고려(高麗), 고려정(高麗井) 혹은 구정(駒井), 정상(井上), 신(新), 신전(神田), 구등(丘登) 혹은 강등(岡登), 강상(岡上), 본소(本所), 화전(和田), 길천(吉川), 대야(大野), 가등(加藤), 복천(福泉), 소곡야(小谷野), 아부(阿部), 금자(金子), 중산(中山), 무등(武藤), 지목(芝木), 신정(新井) 씨 등이 있다. 가등청정,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고구려 인의 후손이 된다. 당시 문학박사 나카야마(中山四郞)가 이를 글로 써낸다. 

해방 이후에는 오히려 우리 나라 고관들이 더 찾아가고 있다. 일본과 관계된 자나 대사 혹은 권력자들이 그들이다. 그 명단은 이 신사에 잘 기록되고 있다.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신사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지금도 순진하게 찾아가고 있다. 먼 조상을 생각하며…… 그리고 이름이 반가워서-. 아마 이번 연말연시에도 복을 빌러 가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고려신사의 근현대사는 그만큼 타락해 있었고 많은 순수한 사람들을 희롱해 왔다. 신사를 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가볍지가 않았다. 겨울눈은 서설이 아니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