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2006년/시 사2010. 6. 19. 12:37

1905년 11월에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일본측의 무력을 동원한 압력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두 개의 보고서가 발견되었다.
 
하나는 당시 주한 미국 공사였던 에드윈 모건(Edwin Morgan)이 미국무장관 엘리후 루트(Elihu Root,)에게 보낸 보고서, 또 하나는 일본 육군의 전쟁 보고서다.
 
이 두개의 보고서는 12일 열렸던 한 심포지엄에서 일본 스루가다이(駿河台)대학 명예교수인 아라이 신이찌(荒井信一) 교수의 발표에 의해 밝혀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게 1905년 11월 17일이었으므로 몇일 있으면 꼭 100년이 된다. 일본에서는 제2차 한일협약으로 불리고 있지만, 일본이 한반도 식민지화를 목표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힘을 동원해 강제로 맺은 굴욕적인 조약이라는 의미로 우리는 '을사늑약'으로 부르기도 한다.
 
사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이 조약의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고, 법적 유효성을 주장해서 논란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아라이 명예교수가 발굴한 자료인 1905년 11월20일 모건 주한 미국공사가 루트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모건 주한 미국공사는 보고서에 "일본 특명 전권대사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주한 일본군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사령관이 함께 미 공사관으로부터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20여 미터 떨어져 있는 회담장으로 들어갔다.

내부의 모습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일본 헌병 등이 회의실의 베란다 및 하나 밖에 없는 뒷문 통로를 굳게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보고서에는 "헌병이 공식상으로는 이토 히로부미 등의 경호를 위해 배치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대한제국 황제에게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방편도 되었다"고 적고 있으며, 당시 서울 시내에서 있었던 일본군의 무력시위와 관련해서는 "물리적인 폭력이 행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각료 등이 조약을 조인할 때 아주 자유로운 상태에서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기술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미 외교관과 본국이 교환한 공식 문서를 모은 미국의 연구서「한미관계(Korean American Relations)」 제3권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아라이 명예 교수가 찾아낸 것이다.

역시 이와 같은 강압을 입증하는 일본 육군의 보고서도 발견이 되었는데, 「메이지 37년·38년 전쟁 육군 정사(明治三十七八年戦役陸軍政史)」라는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은 조약에 반대하는 대한제국 각료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헌병을 동원해서 동정을 감시했다고 한다. 또한 대한제국의 군부 대신을 불러 "최후의 수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상세히 말하지 않겠는데…"라며 몇 마디 말로 협박하자 무서워 벌벌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그리고 서울에 보병부대나 포병대대 등을 배치한 목적을 치안유지 외에 각료의 도주 방지와 시위진압을 들고 있다.
 
아라이 명예교수는 이와 같은 일본측의 행위는  '사실상의 감금'에 다름없는 행위였고, '권총을 들이댄 것과 같다'라며 을사조약의 무효성을 지적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