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일 상2011. 10. 18. 17:11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 - 우리 세대는 100세까지 산다고 하니 이제 막 인생 반환점이 저 만치에 보이는 거의 절반만큼 - 살아온 날들을 이렇게 뒤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는 생각과 함께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 것이여" 라시던 옛 어르신들의 말씀이 새삼 옳았음을 깨닫게 된다.

 

어제는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일본유학을 갔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귀국한 한 젊은 친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더해 지난 4월인가에 발생한 대지진의 영향으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귀국한 터였다.

 

사실, 외국 유학생활이 결코 쉽지마는 않다. 집안이 엄청 좋아서 한 달에 최소 200~300만원씩 송금 받아 쓴다면야 재미있는 유학생활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알바를 해가며 생활하고 있으니 그 생활이 마냥 재미있다고만 하기는 좀 그런 점이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런 힘든 생활이 평생 해야 하는 본인의 직업으로써의 일이 아니라 공부가 끝나는 시점까지만 하면 되는, 공부가 끝난 이후에는 새로운 기회가 자신에게 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즉, 자신을 한 단계 레벨 업 시키는 과정으로 생각하면 어떤 알바든 못할 게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모험하기를 포기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어제 그 청년도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과감하게 부딪혀보면 다 길이 있는데 말이다. 참 아쉽게 생각한다.

 

나 역시 한 7년 일본 유학생활을 했지만, 대부분의 유학비용을 현지 알바로 해결을 했다. 물론, 쉽지마는 않았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 보니 등록금 내는 때가 제일 곤혹스러웠다. 어떻게 눈먼 장학금이든 뭐든 하나 걸려주면 좋은데, 그렇지 않으면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오죽했으면 사립대학보다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학으로 재입학을 할까라는 생각까지도 했겠는가.

 

다행히도 유학생에게 주어지는 수업료 감면제도(모든 유학생들에게 수업료의 30%를 일본 정부가 균등 지원해 주던 제도였으나 현재는 10%, 20%, 30%, 혜택없음으로 차등 지원) 덕분에 처음 한 두 학기는 어떻게 잘 넘어 갔지만, 석사 2년차가 되었을 때부터 등록금 납부 때가 항상 말썽이었다. 거의 학기마다 20만엔 정도씩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알바하는 곳 사장님께 부탁을 해서 그 금액만큼 가불을 받고, 월급에서 반 정도씩 까나가는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이 내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학기엔가는 눈먼 싼 장학금이 하나 걸려 주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어 부채를 없애주곤 하는 식으로 버텼다.

 

그런데 박사과정 공부가 거의 끝나 갈 때쯤, 그때도 역시 한 20만엔 정도가 부족해 미납 상태로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는 알바 시간도 적게 하고 있었을 때라 예전처럼 빌리기도 좀 그런 때였다. 빌린다 한들 갚을 방법이 없잖은가? 겨우 생활비 벌 정도만 알바를 했으니 말이다.

 

당시, 나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어느 가게에서 알바를 했다. 청소도 하고 가끔은 카운터를 보기도 하는 그런 허드레 알바였다.

 

물론, 그곳에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 직원 역시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잘 알다시피 일본에는 빠찡고 · 경마 · 경정과 같은 도박성 오락산업이 굉장히 발달해 있다. 그 가게에 단골로 오는 분들 중에도 빠찡고와 경마에 빠져 사는 분들도 많았고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빠찡고는 단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지만, 재미 삼아 경마는 가끔씩 하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 경마장엘 가거나 하지는 않고, 가게에 오시는 손님에게 부탁하는 식으로 해서 1년에 대 여섯번씩 열리는 대형 경주를 즐겼다. 그런 큰 경주가 열릴 때면 가게는 온통 경마 얘기로 시끌시끌했다.

 

물론, 나는 한 번 할 때마다 천엔 이상을 하지는 않았다. 절대로. 천엔 정도는 즐기는 것이지만, 그 이상은 도박이 될 수도 있다고 봤다. 천엔을 걸되, 200엔 씩 다섯 구좌를 사는 그런 식이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그렇게 몇 백엔 씩 걸고 즐겼다.

 

아마도 쿄토에서 열렸던 키쿠카쇼(菊花賞) 대회로 기억을 하는데, 이 대회도 일본에서 알아주는 굉장히 큰 경주다. 매 레이스를 예측할 때는 날씨와 말 상태, 기수의 지명도 등을 종합적으로 입력하여 판단을 내린다.

 

참 운이 좋았던 게, 나는 아마추어다 보니 다른 것은 다 무시하고 그날 예상되는 날씨 상태에 가장 우수한 실력을 냈던 말에 승부를 거는 방식을 택하는데, 경주가 열리는 날은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 비 오는 날 비교적 좋은 성적을 냈던 말을 찾아 그 녀석에게 걸었다. 그날 나의 선택을 받은 말은 별로 우승 경험도 없는 전혀 주목 받지 못하는 그런 녀석이었다.

 

아뿔싸. 그런데 그 녀석이 일을 냈다. 1등, 2등, 3등을 내가 모두 맞췄는데 1등과 2등 말은 무명의 말이었고 3등을 한 말이 그날의 우승 후보였다. 이 정도면 대박이다. 200엔을 걸어 27만엔을 받았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같이 일하는 일본인 아주머니는 내 것을 그대로 베껴서 500엔씩을 걸었다가 70만엔 가까이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자기 평생 최고의 대박이었단다.

 

행운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속으로 이어서 온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 다음주 주말에 열린 경기가 천황배(天皇賞)로 기억이 되는데, 역시 일본 최고의 경마 대회다. 그 경기에서도 내 예측이 맞아주어 14만엔 정도를 획득했다. 물론, 또 다시 내 것 그대로 베낀 그 아주머니는 나 보다 따따블로 수익을 거두었고 말이다.

 

아주 난리가 났었다. 하루 아침에 나는 경마 전문가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역시 명문 대학에서 박사 공부하는 사람은 틀리다는 말을 듣기 싫도록 들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더 이상의 행운은 오지 않았고 나의 경마 오락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래도 생각치도 않았던 그런 행운이 찾아와 주어 부족했던 등록금 무사히 납부할 수 있었으며, 귀국시까지 얼마간 쓸 용돈까지도 마련되어 한시름 덜 수가 있었다. 그런 행운이 바로 그때 나에게 찾아와 준 것, 나는 하늘이 준 선물로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은 힘 내어 살아 볼만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

 

하늘이시여!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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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