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2006년/시 사2010. 6. 18. 17:41

한국에서는 한일협정 문서 공개로 인해 군사독재 정권의 주먹구구식 대응과 피해자 보상 문제가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19일 일본 히로시마 고등법원에서는 일제시대 미쯔비시 중공업 징용 노동자 40명이 제기한 강제 징용 원폭피해자 배상 소송에 원고 일부 승리 판결이 나왔다.

원고들이 제기했던 '지급하지 않은 임금과 원폭 피해 위자료를 배상하라'는 요구에 히로시마 고등법원은 원고측 일부 주장에 한해서만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번에 히로시마 고등법원이 내놓은 판결문에 의하면 ‘국외로 출국함으로 해서 원폭2법 등 관련법에 따른 수당 수급권을 박탈한 옛 후생성 국장 통달(업무지침) 402호는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법률상 근거가 있는지 여부 등을 충분히 조사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라며 ‘정신적 피해에 대해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 사실을 놓고 한국에서는 태평양 전쟁 한국인 피해자들이 재판에서 처음으로 승소를 했다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맞는 말이다. 지금껏 일본 고등법원은 태평양 전쟁 당시의 강제연행, 강제노동, 해외거주 피폭자 문제와 관련해서 단 한번도 국가에 배상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단지 강제노동을 강요한 기업에 대해서는 배상명령을 딱 한번 내린 적이 있는데. 작년 7월에 니시마쯔(西松) 건설회사를 상대로 중국인 원고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측 승소 판결을 내렸던 것이 그것이다. 이번과 같은 히로시마 고등법원의 판결로 기업의 안전배려 의무 위반에 대한 위법성 지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듯 전례 없는 판결이 앞으로의 다른 피해자들의 항소심에도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라며 상당히 기대하는 눈치다. 이미 작년에 위안부 할머니들이 패소한 경험이 있고, 강제징역 노동자 피해 소송에서 줄줄이 패한 기억이 있는 우리로서는 이번 판결이 앞으로의 항소심에 어떤 영양을 미칠지 주목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이번 판결내용이 썩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히로시마 고등법원은 강제연행 등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 없음으로, 미쯔비시 중공업에 대해서는 배상시효가 만료됐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이들이 과거사 관련 피해배상 소송의 벽으로 만들어 놓은 과거의 사건이라는 '시간'의 문제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어 우리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 판결의 핵심은 우리가 원했던 과거사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이 아니라 일본 행정관청의 업무지침에 대한 적법성 여부를 따지는 다분히 국내적인 성격이 강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즉 앞서 판결문에서도 살펴봤듯이 히로시마 고등법원은 옛 후생성 국장의 업무지침이 ‘국적에 관계없이 피폭자를 지원해야 한다는 인도적인 법 정신·법 적용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위법 하다고 판결한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거사와 관련된 일본 행정 관청의 판단에는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1945년 8월 15일, 이들은 이날을 기점으로 전후(戰後)와 전전(戰前)으로 나누어 과거사를 판단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전후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간혹 이번과 같이 긍정적인 판결을 내놓기도 하는데, 주가 되는 것이 일본정부나 일본기업의 공권력 및 안전의무 태만에 대한 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강제 징용 노동자들이 전쟁 종결 후 자국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 했는지의 여부 등이 그것이다.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이번 판결 역시 1974년 즉, 전후 일본관청의 업무지침과 관련된 시시비비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전전 또는 전쟁 중에 있었던 사안에 대해서는 어느 것 하나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강제연행, 강제노동, 위안부 문제, 전쟁 책임자 처벌 문제 등 단 한건도 제대로 인정하는 것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번 판결이 주는 교훈, 앞으로의 항소심과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이 과거사와 관련한 우리의 딜레마이다. 이렇듯 이들의 과거사 분리대응 사실을 알면서도 승소를 위한 전략만을 세울 수가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단순하게 승소와 배상만이 우리의 주된 목적이라고 한다면 전후의 사실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대응하면 되겠지만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 또 그에 따른 적절한 사죄와 보상을 바라는 우리로서는 결코 전전 상황을 따지고 들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 한일협정 문서 공개로 인해 불거지고 있는 재협상 및 추가 배상 문제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거기에 더해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정부 역시도 맞대응책으로 추가 문서공개를 검토하고 있다고 하지만 현 참여정부 입장에서는 전혀 부담될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국내의 과거 청산 요구에 기름을 부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추후 상정해 볼 수 있는 한일협정과 관련된 피해배상 문제의 방법론 역시 앞서 거론했던 관점에서 파악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포괄적인 과거사 피해배상 형식으로 접근해서는 별다른 성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으로 보여지며, 오히려 이들의 무관심과 시간 벌기 전략에 따른 국내 내부 분란 등으로 우리가 피해를 볼 우려가 크다.


차라리 일본의 분리대응 전략에 맞춰 일본정부를 설득하고 추가협상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지혜를 빌려보면 어떨까 싶다. 즉, 포괄적 의미로서의 과거사 관련 협상이 아니라 철저하게 1965년 한일협정에 초점을 맞춰서 당시의 분위기와 부당성, 제 3국의 간섭에 의한 영향 등을 조목조목 주장하고 주변국과 외교적 협조를 통한 전략적인 대응을 해 나간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비록 법적책임이 소멸되었다고는 해도 도의적 책임까지 소멸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이라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는 일본정부 입장에서는 과거사를 매개로 한 국가의 도의적 책임이라는 복병 아닌 복병의 출현이 결코 달갑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일관계, 전략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