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2006년/시 사2010. 6. 18. 20:06

유슈칸(遊就館)은 야스쿠니신사 내에 있는 시설 중의 하나로 일본 전쟁 박물관으로 설명되곤 하지요. 그러나 유슈칸은 야스쿠니와 함께 단순한 박물관 내지는 추모시설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곳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저 흔하디 흔한 전쟁 박물관으로 만족할 것이라면 그 위치가 지금처럼 야스쿠니신사 내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예정에도 없이 갑자기 유슈칸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제게는 한국어을 일본말처럼 멋지게 구사하시고, 한국의 웬만한 노빠 보다 노무현 대통령을 훨씬 더 좋아하는 일본인 지인이 한분 계십니다.
 
오랜만에 그 분을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노무현 대통령의 유슈칸 방문에 관련한 말씀이 화제에 올랐고, 그래서 말 나온 김에 한번 가보자고 의기투합해 유슈칸 방문을 실행에 옮기게 됐습니다. 뭐, 그 분이나 저나 머리에 털 나고 처음으로 유슈칸을 방문하게 된 것이었지요.
 
몇 년 전이었을 겁니다. 저는 제가 일본에 온지 얼마 안됐던 어느 해 8월 15일에 겁도 없이(?) 일본의 평화유족회 회원분들의 평화시위에 참석했다가 야스쿠니신사를 처음으로 방문해본 경험이 있지만, 유슈칸에는 들어가보지를 못했거든요.
 
그런데 저의 일본인 지인께서도 일본에 60년 가까이 사셨으면서도 야스쿠니신사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관계로 이제껏 가보지를 못했다고 하시더군요.
 
아무튼 그렇게 유슈칸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800엔이나 하는 입장권을 구입하고 2층 전시실로 올라가게 되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영화 상영관입니다. 약 150석 규모의 아담한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것은 '잊지 말자'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였습니다.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뭘 잊지 말자고 하는 것일까?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에 앉을 생각도 않은 채, 맨 뒷 줄에 서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봤습니다. 이상하지요. 꼭 그런 상황과 마주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어떤 대결 심리가 발동이 됩니다. 마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라는 식의 그런 묘한 감정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청일 전쟁은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전쟁이었고, 대동아 전쟁은 서구 세력으로부터 아시아 제 민족을 수호하기 위한 위대한 전쟁이었습니다. 그게 영화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극장을 나서면 전시실이 이어집니다. 여기저기 이것 저것 둘러보고 마지막 전시실로 향하게 되면 전사자들의 사진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서둘러 휘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의문이 들더군요. 도대체 뭘 잊지말자고 저렇게 차려 놓은 것일까? 전쟁을? 아니면 죽음을? 그도 아니라면 미국과도 맞짱떴던 당시의 영광을?
 
아쉽게도 그곳에는 평화는 없고, 전쟁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마저도 분명치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전쟁을 또 하자는 거야? 아니면 말자는 거야? 아둔한 나의 머리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쓰잘떼기 없는 이야기가 길어졌지요.
 
노무현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유슈칸 방문건을 놓고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좀 더 대국적인 견지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선, 현재의 일본 사회 현실을 바로 볼 필요가 있는데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일본사회의 보수 우경화 현상은 빠르고 심각합니다.
 
특히, 보수 우파적 성격을 띈 정치세력이 주도하고, 이들과 비슷한 성향을 지닌 사회지도층과 언론이 합심해서 만들어내는 뛰어난 아젠다 세팅력은 그대로 국민들에게 전파되는게 현실입니다.
 
일례로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 평화헌법 개정 문제, 자위대 파병 문제가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말을 꺼내기가 힘이 들지, 한두 번 언론에 오르내리게 되면 그건 일상용어화 되다시피 합니다.
 
이러한 일본 사회의 보수화 경향은 정치권의 지형을 일시에 자민·민주 양당 체제로 바꾸어 놓았고, 혁신세력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현재 일본 정치권의 최대 화두라 할 수 있는 차기 총리 문제도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4명의 차기 주자들 대부분이 역시 골수 우파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중에 그래도 고이즈미 총리와는 좀 다른 인물이 차기 총리가 되었으면 하는게 우리의 솔직한 바람이지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 보다는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구요. 또 그렇게 흘러갈 것으로 예상은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한 가지만 더 욕심을 내자면, 이제는 일본 정치권 내에 친한파·지한파 의원들도 좀 많이 만들고 이들과의 연대 또한 활성화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처럼 만나서 요정 가고, 양주 마시는 의원연맹이 아니라 동북아의 미래를 놓고 진지한 고민이 가능한 그런 의원들의 모임 말입니다.
 
바로 이런 두 가지를 실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정부의 차별화 된 전략도 필요하다는게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쉽게 이런 것이지요. 고이즈미 총리의 일련의 움직임이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모든 일본 정치권과 담을 쌓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반고이즈미 세력, 반고이즈미류의 인물과는 더욱 끈끈한 연대가 필요하고, 그들의 일본 내 입지가 강화될 수 있는 무수한 방법들을 우리 나름대로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이번에 나온 노무현 대통령의 유슈칸 관련 말씀도 그것의 일환으로 저는 받아들입니다. 당시 일본 언론에서도 그 말씀을 관심있게 다루면서 후쿠다씨와 나카소네씨에게 포커스가 맞추어 졌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것이지요. 일본 국민들이 보기에 "아, 후쿠다씨가 총리가 되면 주변국 관계가 많이 좋아질지도 모르겠구나"라는 기대감을 팍팍 심어줄 수 있도록 하는, 한마디로 후쿠다씨를 위한 노무현 대통령의 '선물'이었다고 저는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정도의 선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아예 말씀하신대로 유슈칸을 직접 방문하실 것을 감히 제안 드립니다.
 
실행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요. 예를 들자면 후쿠다씨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 특히 '새로운 추도시설 건립을 준비' 중인 세력들이 이와 관련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노무현 대통령을 초청하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더 욕심을 낸다면 노무현 대통령 뿐만 아니라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도 함께 초청하는 방안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날 저녁 고이즈미 총리와 마주 앉아서 딱 한마디만 해 주시면 됩니다. "도대체 뭘 잊지 말자는거요?"라고 말입니다. 사실, 어제 류슈칸을 방문하고 나서 든 생각 중에 하나가 '고이즈미 총리도 제대로 모르고 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와타나베(渡辺) 요미우리신문 회장 이야기 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는 "고이즈미 총리가 무식해서 그런다"고 했다지요. 무식하면 용감하다?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방문 시기는 8월 15일이 괜찮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들의 많은 이해와 동의가 필요하게 될텐데요. 그러나 만약 이게 실현만 된다면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엄청난 것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야스쿠니는 지금의 야스쿠니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고이즈미류가 야스쿠니를 더 이상 지금처럼 자신들의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야스쿠니의 의미가 일거에 퇴색해 버리고, 본래의 의미로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뿐이겠습니까? 평화헌법 개정 문제 등 일본 우경화를 차단하고 잠재우는데도 더 없이 좋은 명약이 될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서 한·일간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과거사와 관련한 장벽들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는 일대 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저는 확신합니다.
 
물론, 고이즈미 총리가 언제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하는가 역시 하나의 변수가 되기는 할 겁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본인 스스로도 재참배에 대한 의욕을 꺾지 않은 상태이고, 문제는 시기인 듯 싶은데요.
 
어떻게 보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시기가 차기 총리를 누구로 점 찍어 두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에 8월 15일 방문을 고수한다면, 이는 아베 관방장관을 배려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요. 아베 관방장관 역시 총리가 되면 야스쿠니를 참배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고이즈미 총리가 임기말 8월 15일에 야스쿠니신사를 전격 방문하게 되면 차기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더욱 쉬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8월 15일이 아닌 다른 날짜를 선택하게 된다면, 이는 후쿠다씨를 비롯한 참배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세력을 배려한 것으로 봐야겠지요. 그래야 차기 정부의 부담이 크지 않을테니까요.
 
우리 정부 입장에서 8월 15일 방문이 정 여의치 않다면, 고이즈미 총리와 같은 날 방문도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같은 날, 고이즈미는 신사를 참배하고,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유슈칸을 방문한다. 어떻습니까? 너무나 대조적이고 극명한 메시지 아닙니까?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