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시 사2021. 4. 9. 10:33

어제 쓴 자유민주주의의 딜레마에 이어지는 글이 될 것 같다. 성숙한 민주시민이 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개인적 이익이 아닌 가치에 표를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민주시민이 된다는 게 참 쉽지 않은 길이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부(富)라는 재화에 몰두하는 분위기라면, 나만 독야청청할 수는 없는 게 자본 위주의 현 사회이기 때문이다. 경쟁사회이기에 더욱 그렇다.

 

결국 민주시민의 길은 개인의 깨우침과 소신이 중요하다. 문제는 이것이 거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앞선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민주시민은 진흙탕이 아니라 공정과 정의라는 토대에 기반한 사회에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공정과 정의 사회는 누가 만드는가? 역설적이게도 이는 민주시민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다. 결국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해묵은 논쟁으로 번진다. 물론,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도 많고, 의견도 분분했던 4차 산업혁명의 실체가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 사태로 현실화하였다. 사실, 사회적 화두로서 4차 산업혁명이 대두되기는 했어도 그것이 언제, 어떤 형태로,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조차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러니까 혁명이다. 누구나 예측 가능한 상황이라면 어찌 그것을 혁명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코로나194차 산업혁명의 실체를 우리 앞에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비대면, AI(인공지능), 재택근무 등이 그 한 형태다. 자연스럽게 일자리의 감소로 이어진다. 이는 또한 기본소득으로 눈길을 돌리게 만든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개념의 재정의로까지 관심을 확대한다. 당연한 귀결이다. 일자리는 없더라도 사회 구성원으로 사는 삶은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주목한다. 기본소득과 노동의 재정의다. 기본소득은 말 그대로 사회 구성원 누구에게나 동일한 소득을 보장해 주는 제도를 말한다. 노동의 재정의라 함은 노동이 근로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취미생활도 노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삼권 분립의 사회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독립적으로 기능하며 상호 견제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형평성이라는 차원에서 이 3권은 정말 공평하게 존재하는지 의문이 든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비대한 행정부와 약소한 입법부의 형태로 존재한다. 사법부는 판단(판정)의 심판 자격이기에, 심판이 선수와 동수일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입법부로 대변되는 민의의 전담 기구가 행정부와 비교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제대로 3권이 독립적으로 기능하려면 행정부의 규모에 비례해서 이를 감시·견제할 수 있을 정도의 입법부 규모로 키워야 한다.

 

행정부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구청, 읍면동 사무소가 존재하듯이 입법부(정당)의 구성도 중앙당과 지역구 사무소가 행정부와 거의 동수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곳에 종사하는 종사자는 당원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행정부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도록 해야 한다.

 

이들의 역할은 행정부와 산하 지방정부를 견제·감시함은 물론, 여기에 더해서 자체적인 교육과 토론 등을 통해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해 나간다. 또한, 각 당의 지자체 장과 의원, 국회의원, 대통령 후보 선출권을 이들이 가진다. 당의 정책과 정강 역시 당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더 나아가 자당의 선출직에 대한 당원 소환권도 갖는다.

 

민의의 반영으로서의 제대로 된 상향식 민주주의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시민들도 정치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꽃을 피웠다.

 

토대로서의 공정과 정의, 상부구조로서의 민주시민은 이처럼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서 형성 혹은 완성된다. 다시 말하지만, 공정과 정의 없는 사회에서 민주시민은 요원하며, 민주시민 없는 사회에서 공정과 정의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쯤 읽으신 분들은 당원의 준공무원화? 허허 재원은 어찌 만드노?” 하실 거다. 이런 분들은 나의 앞선 글 소유의 비(非)소유화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