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시 사2019. 12. 25. 13:14

"지금까지 두 가지 기본적인 규범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미국 사회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 두 가지 규범이란 정당이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작용과 이해, 그리고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를 말한다. 이 두 규범은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 민주주의 기반을 강화해 왔다. [중략] 이제는 미국 민주주의의 가드레일이 흔들리고 있다. 1980년대와 90년대 시작된 민주주의 규범의 침식은 2000년대에 들어서 가속화되었다. 특히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많은 공화당 인사들은 민주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 자제의 규범을 저버렸다. 이러한 움직임은 도널드 트럼프에 의해 가속화되었을지 몰라도 그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는 그 뿌리가 무척이나 깊다. 민주주의 규범 침식은 당파적 양극화에서 비롯된다. [중략] 민주주의 붕괴에 관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양극화가 민주주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지음.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중에서)


1. 근래 들어, 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하는 학자들이 많다. 일종의 경고신호를 우리 사회에 보내는 것이다. 촛불집회를 통해 그렇게 외쳤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 또한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경고이자, 민주주의 수호의 의지였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도 민주주의의 위기를 양극화에서 찾고 있다. 양극화의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종교, 문화, 인종, 지역적 차이 등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는 부의 축적의 차이에 의한 측면이 크다.

 

지금도 우리사회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는 자유민주주의민주공화국에 대한 개념 정의도 양극화와 맥을 잇고 있다. 거칠게 비교하자면 자유우선이냐, ‘평등우선이냐의 차이 정도가 되겠다.

 

중세시대는 봉건제사회였다. 영주의 직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이 대다수인 사회였다. 점차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며 잉여생산물이 생기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호미를 만드는 대장장이가 전에는 하루에 한 개의 호미를 만들어 영주에게 상납하고 남은 호미로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었다. 이 대장장이의 기술과 제작도구의 발달로 하루에 5개의 호미를 만들게 되는 시대가 되자, 이 잉여생산물의 처리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다. 바로 상공업자들이다. 이들은 남은 호미를 들고 가 호미가 필요한 이들에게 이문을 남기고 판매를 한다. 여기에 재미를 붙인 이들은 아예 대장장이에게 선수금을 주고 대량 주문을 넣는다. 가내수공업이 산업으로 발전하게 되는 순간이다.


서구사회에서 이렇게 등장하게 되는 세력이 바로 시민사회(부르주아지)였다. 전체주의 비판으로 유명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보는 시점도 대략 이쯤이다. 근대의 도래인 것이다. 이들 시민사회의 세력이 커지자 영주들은 이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지가 아닌 곳에서 즉, 무역이나 상업을 통한 이윤의 획득이라는 것은 낯선 현상이었기 때문에 봉건사회의 토지개념으로는 이를 이해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그것이 그 유명한 동업자조합 즉, 길드이다


우리나라처럼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했던 사회를 살았던 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게 이 시민사회의 개념이다. 중앙집권적 관료사회에서 특정세력에 대한 자치권이란 생각하기 쉽지 않은 개념이기에 그렇다. 이들은 점차 세력을 확대해 가며 영주와 왕에게 대항하게 되는데, 그 핵심 주장이 자유였다. 자유를 달라는 이야기였던 셈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장사를 할 수 있는 자유 즉, 부를 획득하고 축적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함이다. 이들이 농민들과 연합해서 권력에 저항했던 것이 18세기 영국이나 프랑스의 시민혁명이었다. 농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듯하던 이들 상공업자들의 태도는 혁명의 성공 이후에 돌변하고 농민(하층민)들을 배신하게 되는데,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들이 그들 상공업자이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이유다


자유주의의 이념이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숭고한 개인의 침해받지 않는 권리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본래 가치 이면에는 이렇듯 능력껏혹은 능력 위주의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음도 알아야 한다. 물론, 자유의 가치에는 누릴 수 있는 가치와 저항해야 하는 가치도 있다. 다들 누려야 하는 자유의 가치에 치중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자유는 침해받지 않을 권리로서 ()권력에 의한 부당한 침해(자신에게 가해지는 침해든, 타인에게 가해지는 침해든)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또한 자유의 소중한 가치이다.

 

그런데 이런 자유주의의 가치는 민주공화국에서도 그대로 구현된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정의 대표자 또한 국민의 민의로 선출된 자에게 있으니 이보다 더한 자유의 가치를 구현하기도 쉽지 않다. 여기서는 능력보다는 보편적 가치체로서의 인간에 큰 방점이 찍힌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한 표의 권리, 그 권리의 형태에 의해 구성되는 대의제적 평등의 원칙이 그렇다.

 

2. 위성정당. 한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2019년 백주대낮에 위성정당이 화제다. 선거구개편과 관련해 자당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거대 정당들이 꼼수를 쓰는 행위다. 위성정당의 원조는, 독재국가들이 일당 독재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명목뿐인 정당들을 두면서 만들어진 말이다. 북한의 북한사회민주당이나 조선천도교청우당, 중국의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옛 동독의 기독교 민주동맹 등이 대표적이다.

 

진정 변화를 희망한다면 지금 시점에서 굳이 위성정당 따위 만들 필요 없다. 아예 근원부터 뜯어고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참에 정당 헤쳐모여로 정치구조를 개편해 보자. 제 정당들이 정당 해체를 선언하고 자기 색깔별로 새롭게 정당을 찾아 가는 방식이다. 그리되면 자연스럽게 우측에 더불어민주당이 보수를 대변하고, 좌측에 정의당이든 사회민주당이든 만들어 진보를 표방하게 하고, 황교안+전광훈류의 기독정치인들은 극우로 편 가르기를 하면 된다.

 

이렇게 인위적인 정치구조 개편 아니고서는, 현재와 같은 정치지형 하에서 새로운 정치란 불가능하다. 글 서두에 인용한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의 주장에서도 보듯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정치는 민주주의의 위기로 확대된다. 우리는 지난 70여 년을 서로를 인정할 수 없는 풍토에서 정치행위를 영위해 왔다


진보쪽에서 볼 때 범보수세력은 친일과 군부에 영합했던 인물들로 청산이 대상이다. 척폐청산이 의미하는 바다. 반대로 보수쪽에서 볼 때 진보는 북쪽에 우호적인 빨갱이들의 집단이다. 좌빨로 대변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한민국 정치는 대화와 타협의 예술이 아니라 적과의 동침에 다름 아니었다. 척결의 대상으로 상대를 대하는데, 애초부터 이게 발전적일 수가 없는 구조였던 셈이다.

 

이런 정치구조가 지역주의와 결탁을 해서 공고한 철옹성을 만들어 놓았다.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천박한 정치구조로 고착화 되어 버린 것이다. 뿐인가, 여기에 재벌과 언론, 일부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결탁해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들 결탁의 근거는 자신들의 이익 극대화 하기 혹은 지키기에 다름 아니다. 역시 천박하기 그지없는 행태다.

 

대한민국 양극화의 전조는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를 풍미했던 유행어 부자 되세요는 그것의 아주 전형적인 일반화였고 말이다. 이쯤에서 우리도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검찰개혁과 공수처법, 선거구제 개편은 우리의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의 일환이다. 그래서다.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정치구조의 근본부터 확 바꾸어버리자.

 

정당해체와 헤쳐모여를 통해 정치구조를 일신하라!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