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현재/시 사2021. 4. 11. 11:34

언젠가 모 대기업 오너되시는 분이 이런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우리나라는 기업은 일류, 정치는 삼류라고 말이다. 한 사람의 민주시민으로서 참 부끄러워해야 하는 말이다. 치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늘 하는 말이지만 정치라는 게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주의는 더욱 그렇다. 권위주의와 독재체제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순탄한 고속도로를 달리며 찾아오지 않는다. 수많은 인민의 피를 먹고 민주주의는 꽃을 피운다.

 

그러니까, 그 사회의 정치 수준은 그 사회 인민의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로, 정치가 삼류라면 그 사회 구성원의 수준도 삼류라는 말과 같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그 국민이 행사한 표에 의해 정치()가 구성되기에 그렇다. 쉽게 말해서, 정치하는 이들은 다 국민의 선택으로 뽑힌 사람들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기업을 경영하는 양반이 정치가 삼류라는데, 헤벌레해서 정치하는 이들 욕이나 해서 쓰겠는가? 누워서 침 뱉기와 다르지 않다.

 

나는 우리 사회 정치의 장래를 몹시 밝게 본다. 지금 수준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그리 부끄러운 수준은 아니라고 자부한다. 오히려 역동성이라는 면에서는 최고 수준이라고 본다. 세계 정치사를 공부해 보시라. 그 잘났다는 유럽이나 서구의 민주주의 수준이 많이 퇴색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성에 의한 정치라는 개념이 있다. 더 정확하게는 이성을 가진 자에 의한 정치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이는 플라톤의 철인 정치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통상 이야기하는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산물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테네의 시민이었던 플라톤은 아테네 민주주의에 그다지 마음의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임이 그 불신의 계기가 되었다.

 

플라톤은 민주주의 작동의 구성원인 아테네 시민이 모두가 철인, 즉 이성을 가진 자라고 보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그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쥐여 주었겠는가? 물론, 당시 아테네의 시민 계급은 지금처럼 사회 구성원 누구나를 말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부모 모두가 아테네인인, 일정한 재산을 가진 성인 남자였다. 노예나 여자, 외국인에게는 시민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 시민 계급조차도 플라톤이 보기에는 모두가 철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플라톤의 유명한 명언 하나를 보자.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One of the penalties for refusing to participate in politics is that you end up being governed by your inferiors)”

 

애석하게도 이 훌륭한 명구에서 말하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이란 타락한 인간, 혹은 소위 요즘 우리가 이야기하는 적폐가 아니다. 철인이 아닌 인간, 이성을 가지지 못한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요즘의 개념과 아주 다르다.

 

맞다. 당시의 플라톤이 보기에는 정치하는 이들인 아테네의 시민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다 이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성을 가진 철인에 의한 정치를 그는 주장했던 것이다. 지금에서 보면 상당히 특권 의식에 기반한 생각이라 볼 수도 있다. 이성이 없는 자가 있나?

 

이러한 사고는 아주 오랜 시간 인간 세상을 지배했다. 플라톤이 대략 기원전 300~400년대 사람이다. 이성의 유무가 깨지고, 이성에 의한 정치가 무너지는 계기가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가 이루어지면서부터다. 대략 1800년대 말이다.

 

영국에서 산업혁명 이후 노동력 착취에 시달리던 이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동자 운동을 시작하며 보통선거와 의회민주주의를 요구하게 된다. 1838년부터 1840년대 후반에 거세게 몰아쳤던 차티스트 운동이 대표적이다. 유럽사회 특히, 영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어마무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1867년 도시 거주 남성에게 보통선거권이 주어졌고, 1874년 광산 노동자 2명이 자유당과 노동자 연대를 통해 의회 진출에 성공했다. 노동자 정치 참여의 신호탄이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생각해 보라. 이성도 갖지 못한 노동자 나부랭이가 정치를 하겠다고 신성한 의회 단상에 선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려 2,50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이성 정치는 종말을 고한 것이다. 역사 발전의 장구한 세월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역시, 그 대장정에 뿌려진 많은 이들의 피는 민주주의의 앞날에 바쳐진 값지고 숭고한 성배().

 

이렇게 쟁취한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진단이 많다.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고 한탄들을 한다. 유럽의 코로나 대응 태세에서,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 등장에서, 민주주의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험하다고 세계 도처에서 아우성이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대화와 타협이다. 그러다 보니 지난한 과정의 연속일 수도 있다. 요즘 같은 초스피드 시대에 기다림은 고역이다. 그러나 그래도 상대를 향한 배려와 기다림은 민주주의의 더없는 덕목이다. 이걸 포기하는 순간, 권위주의나 전체주의로 흐르게 된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보며 이 대화와 타협 즉, 협치의 부족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 일방통행이라는 지적에서부터 다수당의 독주에 불만을 표출하기도 하며 정치 씹기에 열심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만의 특수한 상황이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가 만들어 놓은 불행한 나쁜 결과라는 말이다.

 

여기서 그 긴 얘기는 하지 않겠다. 다만, 지금 우리 정치의 현주소는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한 국면이다. 적폐는 청산과 타도의 대상이지 타협과 협치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폐 청산과 개혁이 우선이다.

 

그러면 협치는 언제 하는가? 나는 이렇게 본다. 지금의 여당이 대략 180석이다. 내년에 대선이 있다. 대선에서 분명히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3년 뒤에 총선이 있다. 그 총선에서 지금의 여당(더불어민주당)이 또 한 번 압승하며, 대략 220~230석 정도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거대한 여당 내에서 다양한 정치적 다름의 목소리들이 분출하게 될 것이다. 당연하다. 그때는 이미 적폐는 청산되었으며, 개혁은 어느 정도 완수해 놓게 될 것이다. 즉 고지를 탈환하고 정상에 오른 것이다. 이렇듯 역사전(나는 현재의 개혁을 역사전이라 부른다. 과거사 청산의 역사전쟁이다)에서 승리하고 나면, 이제 그때부터 정책 대결로 나아간다.

 

그때, 더불어민주당을 분화하자. 의원들의 성향별로 나누어 여당과 건전한 야당으로 나누자. 아니, 나뉘게 될 것이다. 지금의 국민의힘은 대구와 경북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 지역정당으로 쪼그라든다.

 

그때가 되면 우리 정치에도 대화와 타협, 협치가 가능해진다. 드디어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불과 5년여 남았다. 국민들이여, 정치하자!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