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2006년/시 사2010. 6. 19. 12:30

부산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별다른 성과 없이 서로의 입장 차이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는 것이 언론들의 주된 논지인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무언가 새로운 화제거리를 갖고 만나는 정상회담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지금까지 고이즈미 총리가 보여온 행적, 일본사회의 우경화 분위기로부터 유추해 보더라도 지금은 절대로 새로운 것이 태동할 시기가 아니라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앞선 글에서도 누차에 걸쳐 강조했듯이 평화와 공생의 동북아 건설 즉, '동북아 균형자' 역할이라고 하는 대의에 우리 스스로가 발을 깊숙이 담그고 있음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다. 문제는 내용이다. 몇 시간 동안이나 얼굴을 맞대고 있었고, 어떤 분위기의 회담이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 입장에서는 아주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무엇을 지적했고, 무엇을 주문했는지를 주의 깊게 봐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국민이 갖고 있는 생각을 일본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다'며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더 이상 일본측에 사과를 요구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본의 그릇된 역사인식도 받아드릴 수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총리를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한국에 대한 도전'이라고도 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참여정부 들어서 대일외교가 상당히 당당해졌음이 눈에 띄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직도 다소 감정적인 대응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불행한 과거사를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 우리 국민 감정상 이를 완벽하게 절제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도 좀 더 세련될 필요가 있다.

만남이 필요한 때는 주저하지 않고 만나고, 해야 될 이야기는 빠뜨리지 않고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여정부의 대일외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는 과거 국민의 정부와 故오부치 일본 전 총리가 만들어 놓은 ‘새로운 한일관계’라는 틀이 전환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새로운·미래지향적'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모호한 접근으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감이 있었다. 도대체 '새로운 한일관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한일관계'는 왜 좋은 것이며, 게다가 어떻게 하면 '새로운 한일관계'가 가능하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국민적 이해 증진에 미흡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마디로 무조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는 접근 방법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고 본다. 이것이 참여정부로 넘어오면서 변화를 보이게 되는데, 지나간 과거사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선언과 함께 대일외교의 불투명성이 걷히면서 주도권 역시 손에 쥐게 되는 양상으로 변화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참여정부가 민주정부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과거사 문제와 대일외교를 분리해서 서로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인식의 전환'에 의해서 가능했다고 본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로 인한 갈등이 엄존하고 있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외무장관 및 정상회담이 차질 없이 열리고 있음이 그 한 예가 된다.
 
과거사 문제가 한일 양국 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최대 현안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이는 상당히 용기 있는 현명한 결단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새로운 한일관계·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참 의미가 희미하게나마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참여정부의 분리대응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생을 향한 우리정부의 열정에 '진정성'을 더해주고, 나아가 일본내 '평화·온건세력'의 입지를 넓혀주게 되어 이들의 자국내 세력 확보에도 유리하게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는 두말이 필요 없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께서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아닌 일본 국민들을 상대로 한국 정부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이는 비록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는 상대는 고이즈미 총리지만,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고이즈미 총리가 아니라 일본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하고 싶으셨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즉, 고이즈미 총리를 상대로 놓고 1억 2천만 일본 국민을 설득하겠다는 계산으로 사료된다. 맞다. 그렇게 가야 한다. 그렇게 가다 보면 머지않아 일본 국민들 역시 웃음으로 화답해 올 것이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