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2006년/일 상2010. 6. 18. 15:36

오늘은 내 후배 이야기다.

이 후배는 유도로 꽤나 유명한 서울의 모 대학에서 유도선수 생활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을 와서 현재는 랭귀지스쿨에서 대학 진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은 가끔씩 동네 유도 체육관에 나가서 몸도 풀고 중·고등학생들 지도와 연습상대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제는 이 후배가 얼굴이 시뻘게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방에 들어와서도 씩씩거리며 쉽게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캔맥주 몇 개를 사다 놓고 마주앉아서 후배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 후배가 다니는 동네 체육관에는 초등학생에서부터 60대의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일본인들이 모여서 유도 연습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등 뒤에서 들리는 '조센징'이라는 소리가 자꾸 귀에 거슬리더란다. 앞에다 대놓고 조센징이라고 하면 조센징이 아니라 캉코꾸진(한국인)이라고 떳떳하게 말해 주겠는데 꼭 안 보이는 곳에서만 그것도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그러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 그래, 여기는 당신들 나라니까 " 라며 꾹 참았단다.

그런데, 그저께는 중학생들 몇이서 저희들끼리 연습을 하고 있다가 이 후배가 다가가자 그 중의 한 녀석이 대뜸 " 선생님, 조선어 좀 가르쳐 주세요 " 하더란다. 순간 그 '조선어'라는 말에 눈에서 불빛이 번쩍하며 더는 못 참겠더란다.

그래서 조선어를 배우기전에 유도연습을 먼저 하자고 하고, 그 중학생녀석을 메트 위로 데리고 가서는 사정없이 던져 버렸단다. 그렇게 십여분 동안 그 녀석을 아주 초죽음을 만들어 놨단다.(안봐도 상상이 간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징징울면서 이제 운동 그만두겠다고 하고서는 가방도 안들고 가버리더란다.

그런데, 어제는 그 중학생녀석의 아버님이 아들손을 끌고 체육관으로 오셨단다. 가끔 나오셔서 간단히 몸만 풀다 가시는 분인데 어제는 체육관에 들어서자 마자 대뜸 후배에게 연습 한 판 하자고 하시더란다. 순간 이 후배도 눈치를 챘단다. 아들의 복수를 위해서 오셨구나 하고.

그래 어디 한 번 해 보자 하고는 이번에는 그 중학생의 아버지를 아들이 보는 앞에서 또 반은 초죽음을 만들어 놨단다.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분노의 감정을 깡그리 쏟아 부었단다. 그렇게 한 게임을 치루고 나를 찾아 온 것이었다.

사실, '조센징'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나 역시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 특히, 60대가 넘은 분들은 우리들 앞에서는 한국인이라고 하다가도 당신들끼리 대화할 때는 조센징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나도 가끔 보아 왔다. 그러나 그것이 꼭 우리를 비하해서 부르는 차별적인 언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마도 이들의 오래된 습관 아닐까 생각한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나, 서로의 신뢰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말이라면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한국에서 우리들끼리 이야기 할 때는 별 생각없이 이들을 '쪽바리'라고 부르곤 하는데 이것 역시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현재 일본에서 한글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각급 학교의 교과서와 교과명도 한국어나 한글이 아닌 '조선어'인 것으로 알고 있다. 국영방송인 NHK(일본 방송 협회)의 경우에는 한국어 · 조선어라는 표현이 걸려서 그런지 '한글'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현재 일본에서 우리말의 공식적인 명칭도 '조선어'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2003년도부터인가 일본의 대학입시에 우리말이 제2외국어로 채택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 명칭을 한국어라고 할 것인지 아니면 조선어라고 할 것인지에 대해서 아직 일본 정부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남쪽과 북쪽의 서로 다른 팽팽한 견해 - 통일로 가는 길이 참으로 험난하고 멀다라는 느낌을 여기서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난관들이 그 하나됨의 민족적 염원을 가로막고 나설지 - 때문에 빚어진 불행한 현실이다.

그렇게, 분노로 맥주를 삼키고 있던 후배녀석의 눈가에 잠시 맺혀있던 건 ..... 도대체, 조국이 뭐길래...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2년~2006년/시 사2010. 6. 18. 15:36

상실의 시대. 사람들의 시선이 불확실한 미래로 향하기 보다는 풍유로웠던 과거로 향하고 그 시절을 회상하고 그리워함은 너 나 할 것 없이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때가 좋았지! 그러나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 임을 인정은 하면서도 그런 것이 결코 개인 및 국가를 위한 발전적인 사고가 아님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다.

4·15 총선이 끝나고 새정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높은 지금, 그러나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이렇듯 도도한 시대적 물주기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벽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특히, 그것을 단전으로 보여준 이번 총선 결과는 새정치를 향한 그 길이 결코 녹록치만은 않을 것임을 말해준다.

싹쓸이로 대표되는 망국적 지역주의와 지역 패권주의,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수구 반동이라는 벽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가로막고 서 있는 저 높은 벽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일본 사회를 떠올려봄은 너무도 비슷하게 닮아있는 개인적·지역적 상실감에 바탕을 둔 그 폐단의 유사함 때문이다.

그때가 좋았지! 구시대의 특혜와 이권, 특권의 달콤함은 현실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무시로 과거로 향한다. 자고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과거로 향하는 향수야 뉘라서 뭐랄 수 있겠는가마는 뒤로 가도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이 문제다.

눈물샘을 자극하며 퍼져오는 아련한 향수는 무덤 속의 죽은 독재자를 불러내는 주술이 되어 의회쿠데타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비민주적 작태와 썩고 문드러져 버려도 시원찮을 부정 부패마저도 망령의 품 속으로 가두어버린다.

일본의 어느 중견학자는 오늘의 일본사회를 ‘전전(戰前)의 제국주의와 닮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국가의 정책에 반대하는 국민은 보호받을 가치도 없는 역적과도 같다는 논리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이라크에서 납치되었다가 석방된 3명의 일본 젊은이들을 향한 일본정부로 부터 시작된 집단적 이지매(따돌림)가 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텔레비젼 카메라 앞서 선 일본수상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석방과 무사귀환을 위해 많은 국민들과 여러 국가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석방되자 마자 그래도 이라크에 남아 계속 활동하고 싶다니 참 한심하다"

백번 양보를 한다고 해도 이는 일국의 수상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국가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수상으로서 그와 그의 정부는 아주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또한 그 젊은들은 자기 자신들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 나라의 평화와 재건을 위해서 온갖 어려움과 죽음의 공포도 무릅쓰고 숭고한 인간애를 몸소 실천한 사람들이다.

이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칭찬받아 마땅하고 오히려 권장하고 장려해야만 할 일이며, 또한 그들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국 헌법13조가 보장하고 있는 당연한 자신의 권리를 말했을 뿐이다.

국가 정책에 반하는 행동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오만과 국민을 단지 통치의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듯한 이러한 발언은 누가봐도 전전(戰前)의 제국주의 냄새가 물씬 풍김을 알 수 있다.

또한 요즘 일본사회에서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배심원제도라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나마 일본의회에서 여야당이 합의한 내용은 이것 저것 많이 보완된 구석이 있다지만 여전히 얼떨떨함은 남는다.

일본정부는 사법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두 가지의 새로운 제도를 도입 중이거나 앞으로 도입을 목표로 법률보완 작업 중에 있다. 첫째는 로스쿨(전문법과대학원) 제도의 도입이고(이는 올 해 첫 시험을 치르고 현재 시행 중에 있다), 둘째는 미국식 배심원제도의 도입이다.

그런데 문제는 배심원제도에 있다. 어떻게 배심원을 선발하느냐는 문제가 그것이다. 약 1개월쯤 전에 처음 선보인 정부안은 선거권을 갖고 있는 국민은 누구라도 배심원에 선정될 수 있고 또한 배심원에 선정되었다는 통고를 받으면 절대 이를 거부해서는 안되며, 무단으로 거부하거나 또한 활동중에 얻은 정보에 대해서는 반드시 비밀을 엄수해야 하며 이를 어길시에는 징역형까지도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전전(戰前)의 징병제도와도 흡사하다고 보여진다.

국가의 이익과 정책, 새로운 제도의 도입과 시행이라는 명분하에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함을 너무도 당연시하는 이런 일련의 사태를 접하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역시 뒤로 가도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이다.

그때가 좋았지! 그러나 향수로 떠올려도 되는 그때는 독재자의 딸이 흘리는 눈물에 자극받은 감성적 판단에 의한 선택이 죽은 독재자의 무덤 속까지여서는 정말 곤란하며, 세계를 전쟁과 죽음의 공포로 몰아 넣고 야스쿠니에 잠들어 있는 전쟁 범죄자들의 망령의 품 속까지여서는 절대 안된다.

상실의 시대는 그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희망의 미래로 풀어야 한다. 자칫 상실의 시대가 절망의 시대로 전도된다면 전자는 다시는 극복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불행이 될 것이요, 후자는 종말을 예고하는 세계의 불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2년~2006년/시 사2010. 6. 18. 15:34

시마네(島根)현의 도발적인 '독도 망동'에 이은 고이즈미(小泉) 총리의 '안하무인격'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삐걱거리며 위태로운 행보를 거듭하던 한일관계가 고이즈미 총리의 계속되는 억지 발언과 보수 강경파 각료들의 망언으로 급기야 파행을 향해 치닫고 있다.
 
몇일 남지도 않은 올해가 한일 우정의 해라는 사실이 실로 부끄러워지는 일이다.
 
지난 5일,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는 더 이상 외교카드가 될 수 없다"고 전제하고 "한국과 중국이 야스쿠니를 외교 카드로 삼으려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했다. 이에 더해 중국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쪽이 이상한 것"이라며 그의 안일한 현실인식의 일단을 내비쳤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측의 적반하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소 타로(麻生太郞) 외무상으로 이어졌다.
 
한두 번이 아닌 계속되는 망언 뒤에 나온 지난 7일, 내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했던 기자클럽 연설은 전형적인 보수 우익 강경파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아소 타로 외상은 이날 "중국이나 언론이 지적한다고 해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그만두는 것은 일국의 총리로서 할 일이 아니며, 그것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해야 하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자신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중단을 건의할 생각도 없음을 거듭 강조 했다.
 
과거 역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국과 중국인들에게 안겨준 고통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계속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한편, "평화를 희구하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마음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허심탄회하게 봐주기 바란다"고 강변했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를 이유로 정상회담을 거부하고 있는 중국측을 겨냥해서 "지나간 과거가 미래에 장애가 돼서는 안 된다"며 중국측의 자세전환을 재촉하기도 하는 전반하장식 언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 대해서는 "가치관의 기본을 공유하고 있는 든든한 파트너, 아시아의 2대 민주주의 국가"라고 인정했는데, 이는 한국과 중국을 분리해서 대응한다는 일본측의 기본적인 주변국 외교 전략의 일단을 보여주는 발언으로 보여진다.
 
한편, 한국·중국정부 및 주변국 역시 일본 각료를 비롯한 정치 인사들의 그릇된 역사인식과 관련해 심한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와 같은 일본측의 '동북아 갈등' 전략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특히, 미국의 재외 미군 재편문제와 맞물리면서 군사력의 보유를 열망하고 있는 보수 우익들의 준동은 극에 달해 있는 상황이고, 그들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바로 그 소기의 목적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것이 '평화헌법 개정'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본 보수 우익 세력의 오랜 염원이기도 하거니와 주일미군 재편 문제는 이것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다.
 
헌법 개정론자들의 오래된 논리가 바로 '자주 헌법론'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현재의 평화헌법은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사령부 즉, 맥아더 사령관의 지시(강압)에 의해 만들어진 헌법이기 때문에 자주성을 상실하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손에 의해 자신들의 의지를 담은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와 같은 맥아더 사령관에 의한 '강압론'이 허구라는 사실은 이미 정론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본인이 번역 출판한 이토 나리히코(伊藤 成彦) 선생의 『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서 본 또 하나의 일본 (원제: 物語日本国憲法第九条)』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나 나는 헌법 개정론자들 역시 자신들의 진심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들이 진정으로 주장하고 싶은 것은 '자주 헌법론'이 아니며, 이는 단지 명목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진심은 바로 '자주 국방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자주 국방론'은 일본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핵 폭탄급 위력의 폭발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본심을 숨긴 채 '자주 헌법론'으로 포장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는 현재 진행중인 헌법 개정론의 주된 내용이 자위대를 자위군으로 하는 즉, '군대 보유' 사실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 이들의 의도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가 있다.
 
또한 주변국과의 갈등 문제를 비롯해 동아시아 공동체 결성에도 미온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 역시도 이 '자주 국방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위군으로 대변되는 군사력의 보유 의지는 어딘가에 적이 존재하고 있음을 상정하지 않고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다시 말해 평화로운 동북아시아는 일본으로 하여금 군사력의 보유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일본의 보수 우익세력은 냉전시대에는 러시아를, 냉전이 종식된 후에는 중국과 북한을 그들의 가상의 적으로 설정하고 끊임없이 안보 불안을 부채질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앞서 이야기 되었던 한국과 중국 분리정책을 통한 중국에 대한 적대·무시 정책이 그 일례가 된다.
 
이와 같은 한·중 분리정책의 이면에는 김대중 정부 이후 한반도를 녹이고 있는 햇볕정책이 큰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남과 북에서 불고 있는 따뜻한 훈풍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전략적 변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는데, 남한이 '북한을 동포요 동족으로 보는 한' 더 이상의 일방적인 북한 때리기는 약효가 떨어진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도 노무현 참여정부의 탄생은 남북 모두에게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수구집단이 정권을 잡고 반북·반민족적 행태를 지속했다면 이는 일본 보수 우익세력에게 더없이 좋은 먹이감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친일을 일삼던 신문이 한국 최대의 언론으로 행세하고 있고, 일본 왕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채 부끄러운 황국신민이 되기를 자청했던 군부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 당당하게 제1 야당의 대표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들의 미숙한 정치의식을 보여주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망국적 지역주의와 잘못된 선거제도에 기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일본 보수 우익들에게 조차도 쪽팔리는 일이다.
 
각설하고, 이제는 어떻게 이들과 사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언론보도에 의하면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고이즈미 총리의 임기 동안은 정상회담은 없다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정상회담, 장관회담 다 취소하고 만나지 않으면 속은 시원해서 좋고, 우리들의 화풀이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혀 득 되는 게 없다. 고이즈미 이후가 고이즈미 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가 어려운 것이 현재 일본의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앞선 글에서 고이즈미 3기 내각을 분석하면서 이들의 역할 분담을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강경파인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관방장관 기용과 아소 타로(麻生太郞)의 외상으로의 전진 배치, 중도파인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전 관방장관의 후방 배치는 철저한 역할 분담에 의한 후계자 경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베가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가 제일 큰 과제가 될 것이고, 후쿠다가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새로운 추도시설의 건립건이 될 것으로 분석한다.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는 이들의 행보가 그것을 추측케 한다. 그리고 그 외의 인물(아소 타로 외상이나,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재무상)들은 차기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이와 같은 후계 경쟁 구도를 북한의 김정일 정권 역시 파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아베 관방장관의 역할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며, 후쿠다 전 관방장관이 다소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이 역시도 장담하기에는 이르다. 후계자 경쟁 관계는 권력투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일본 정부 인사들을 분리해서 대응하는 전략을 펼치되,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그룹과 적극적인 관계 정상화 및 두터운 신뢰관계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이들을 지원하는 전략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일본내에서 이들의 입지 강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함께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물론, 고이즈미 총리를 필두로 한 보수 우익들과의 만남 역시 거절해서는 안되며, 적극적으로 동북아 공동체와 평화·공생을 위한 동북아 건설을 설득해야 한다. 그렇게 간단하게 가능할 동북아 평화 체제였다면 이제까지 60년을 과거사 문제로 허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차기 일본 총리는 후쿠다일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데, 현재 후쿠다씨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그와 같은 확신에 힘을 더해 준다. 그러나 문제는 후쿠다 이후가 우려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후쿠다 이후의 인물이 아베 관방장관일 수도 있고, 고이즈미 총리의 재등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에게 민감한 문제인 소비세의 인상과 의료보험 제도의 개혁 등이 고이즈미 이후 차기 정권의 과제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바, 이로 인해 자칫 총선에서의 패배나 총선 전 패색이 짙을 경우 후쿠다는 총리 자리에서 끌어내려질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런 점에서 차기는 차차기를 위한 희생양 정권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후 적어도 3년, 길게는 6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또 다시 '고이즈미류'의 인물들과 지지고 볶아야 한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2년~2006년/일 상2010. 6. 18. 15:33

애연가 분들의 심기가 심히 불편해질 수도 있는 소식이다. 흡연도 병으로 규정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의사에 의한 금연지도를 공적 의료보험의 적용대상으로 확대할 방침이라고 지나간 요미우리(読売)신문이 전하고 있다. 2006년부터 실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으므로 아마도 지금쯤은 시행되고 있지 않을까 싶다.
 
후생노동성은 지금까지는 금연은 '개인적인 의사결정의 문제' 라고 판단해 왔기 때문에 금연과 관련한 의사의 의료행위는 전액 개인부담으로 했었다.
 
그런데 흡연으로 인한 신체적 이상이나 폐암 등이 의료비 증가의 한 요인이 되고 있는 현실을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늘어나는 의료비를 억제하기 위해 금연지도를 적극적으로 실시해 나가겠다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는데, 결국 니코틴 금단증상을 '일종의 병'이라고 규정하고 공적 의료보험 적용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초진시에는 니코틴 의존도를 의사가 평가하고, 일정기간 후에는 금연 상황의 확인이나 니코틴 섭취량의 측정 등을 실시하는데 이런 것들을 모두 보험에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일본 재단법인 의료경제연구기구의 조사에 의하면 흡연으로 인한 초과 의료비가 연간 1조3천억 엔, 노동력의 손실은 연간 5조 8천억 엔에 달하는 것으로 추계하고 있다.
 
어느덧 흡연도 병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의 경험담

이번 기회에 담배 끊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실 분들을 위해 저의 경험담을 꼬리로 달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저도 꽤나 이른 나이에 담배를 배웠고, 또 꽤나 많은 양을 피웠던 남들이 말하는 소위 '꼴초' 애연가였습니다. "피울때는 맛있게, 끊을 때는 과감하게" 라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뭐 제 생각이라기 보다는 제 자신을 향한 '합리화'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누가 저보고 담배 끊으라고 하면, 이 말을 꼭 들려주면서 피울 때는 즐겁게 피우게 그냥 놔둬달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곤 했지요.^^
 
그런데 사실 그렇잖아요? 담배 피우는 분들은 니코틴 자체 만으로도 몸에 몹시 해로운데,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스트레스까지 더해 주는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을 더욱 단축시키는 행위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담배 끊으라고 지나치게 강요하고 너무 스트레스 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하던 짓도 멍석 깔아 놓으면 안 한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아마 담배 피우시는 분들, 특히 중년쯤 되신 분들의 대다수가 금연에 대한 생각들이 다들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분들께 금연.. 금연..하는 것은 오히려 오기만 돋구는 것이지 정작 금연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지요.
 
중요한 것은 동기부여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스스로가 담배를 끊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인데요.
 
어떤 여성분들은 자기가 하도 잔소리를 해서 남편되시는 분이 담배를 끊었다고 자랑을 늘어 놓곤 하시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는데요. 이거 상당히 무모한 자랑이라고 봐요. 제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보면 그렇게 부인의 성화에 못이겨서 담배를 끊게 되는 남편의 경우는 거의가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되더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잡한 세상 살아가면서 부부 싸움 한 번 안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부부 싸움만 하면 담배를 찾게 되더라는 거지요.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역시 중요한 것은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본인 스스로에 의한 동기부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의지에 의해서 끊는 게 가장 성공률도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2004년 11월 1일, 별 생각 없이...갑자기...문득... 이제 담배 좀 끊어볼까 했던 게 계기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오랜시간을 잘 참고 있습니다. 정말, 지금까지 담배 한 개비도 입에 물어 보지 않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가끔 꿈 속에서도 나타나곤 하더군요.

어느 날, 꿈 속에서 무지하게 후회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 잘 참아 왔는데,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말았던 거지요. 물론, 꿈 속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후회하는 그런 꿈인데요. 왜, 남자들이 군대 제대하고 나서 군대 다시 끌려가는 꿈을 꾸면서 꿈 속에서 "아, 나 군대 제대했는데" 하며 식은 땀을 흘리는 그런 류의 꿈을 수도 없이 꾸듯이 그런 비슷한 꿈을 금연 후에 가끔 꾸곤 합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 보다는 금연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참기 힘든 고통이 걱정돼서 금연을 미루고 계시는 분들은 용기를 갖고 한 번 결심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참을만한 정도의 흡연 욕구가 스트레스를 주기는 하는데, 뭐 그렇게 강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은근히 땡기는 한 모금의 담배 맛, 담배 향, 사실 이게 더 참기 힘들었다는 게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금연을 시작한지 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맛과 향이 그리울 때가 종종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5년 정도까지가 고비라고 보입니다. 5년만 잘 참고 견디시면 금연 성공하실 수 있습니다.^^
 
은근한 유혹?
하지만, 뭐... 참을 만 합니다.
여러분도 한 번 결심해 보세요!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2년~2006년/시 사2010. 6. 18. 15:31

4일 일본의 일간지들은 고이즈미 총리가 북에 남아있는 납치자 가족들을 데리러 평양을 다시 방문할지도 모른다는 기사를 조심스럽게 보도했다.

또한 얼마전 야마사끼 전 자민당 부총재과 함께 중국을 방문하여 북한쪽 담당자들과 납치문제와 북일수교 문제를 논의하고 돌아와 납치자 가족회 및 관련단체들로부터 배신자라며 호되게 비난을 당했던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납치자 가족들과 함께 반북 분위기 조성에 일조했던 인물로 대북 강경파의 역할을 자임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히라사와 자민당의원이 아사히 텔레비젼의 아침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암시적 메시지를 전달하며 대북 분위기 전환 조성에 주력했다.

물론, 본인의 직접적인 언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함께 출연했던 패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지금까지 얘기했던 내용들이 현재 중국에서 진행 중인 북일 당국자 공식회담에서 충분히 합의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본인 역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원론적인 수준의 이야기였지만 그들(야마사끼 전 부총재와 히라사와 의원)의 지난번 중국 방문을 고이즈미 수상이 사전에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끝까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와 야마사끼 전 부총재는 이번 공식회담을 위한 사전 예비회담의 막후 조정자 역할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히라사와 자민당의원은 북한 당국이 경제원조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따라서 무조건적인 납치문제 해결이 될 것이다라고 몇 번에 걸쳐 강조를 했지만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고 난처한 질문에 당황해 하는(특히, 평양선언 이후 북일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그쪽 주장이 어떤 의미냐? 그쪽 입장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 개인적으로 이 질문을 한 여성작가 패널은 다시는 시사프로그램 패널로 참가하지 마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리고 싶다. 몰라도 참 너무 모르고 있더라)그가 남긴 여운은 이것이었다.

북이 말하기를 "설사 납치문제가 해결이 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도 우리 내부 사정이 있는 것이다."

아무튼 1년 넘게 끌어온 북일 국교 정상화 문제가 뭔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듯이 보이며, 평양선언의 실천이 현실화 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아 반갑기 그지없다.

최근 일본의 메스컴이 쏟아내는 악의적 북한 때리기를 진저리나게 보아온 대다수 재일코리안들 역시 비슷한 감정일 것이다. 또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적 공생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약 1달 전까지만 해도 전혀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북일 문제가 어떻게 불과 몇 일 사이에 180도로 바뀌게 되었을까? 사실 평양선언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아주 당연한 결과일 뿐인데도 그동안 일본정부의 행태 및 메스컴의 동향과 연관해서 생각하면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다.

특히 일본국민들이 받아야 하는 충격은 훨씬 클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일본정부 및 메스컴이 쏟아내온 정보들은 북은 ‘악의 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런 악의 축인 북과 국교를 정상화한다? 정부의 꼭뚜각시로 전락한 일본 메스컴들이 해야할 일이 또 하나 생겼다. 북한 칭찬하기가 그것이다.

우매한 국민들에게 이제는 북도 괜찮은 나라라는 메세지를 특집으로 쏟아내야 할 것이다.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괜찮은 나라까지는 아니어도 좋으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이라도 제대로 전달해줬으면 고맙겠다.

필자가 지난 평양선언 직후에 쓴 글에서도 지적했던 바와 같이 역사적인 평양선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린 일본정부의 무모한 모험주의와 대미 종속적 외교 행태로 인해 납치문제 및 북일 국교 정상화 문제에 대한 주도권은 북으로 넘어갔다. 그 연속선상에서 이번 북일회담도 살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일본정부는 새로운 대북정책에 대한 대국민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겠지만 이번 회담이 성공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고이즈미 총리가 다시 평양을 방문하든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북일 관계가 정상화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북한외교의 승리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 사실을 제대로 국민들에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앞으로도 상당 부분 북에 끌려다니는 외교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첫 단추를 잘 꿰야된다.

사실 이런 북일 분위기가 조성된 이면에는 중국쪽의 압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북일 국교 정상화 문제는 당사자 중의 한쪽인 일본이 배제된 채 이미 지난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으로 결정난 것으로 봐야 한다.

외형적인 방문 목적이야 중국의 개방 경제에 대한 시찰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목적이었을 뿐 진짜 이유는 바로 북일 국교 정상화와 이에 대한 최종적인 의견교환 또는 이견 조율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고이즈미 정권 역시 두 가지를 얻고 윈윈 게임이었다고 자평할 수는 있겠지만 국제 외교면에서 허접함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분명 마이너스라고 본다. 그렇다면 고이즈미 정권이 얻을 수 있는 두 가지는 무엇일까?

첫째는 흔들리고 있는 정권 기반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라도 7월의 참의원선거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번 선거는 단순하게 정권의 안정화 차원이 아니라 정권 연장이냐 끝이냐의 갈림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충격적인 뭔가가 필요한데 납치자 문제 해결 만큼 현 시점에서 효과적인 처방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이은 북일 국교 정상화는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특히 비이성적일 만큼 대북 공포감에 빠져 있는 일본 국민들에게 전쟁과 핵으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다라는 심리적 만족감은 상당히 클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에너지자원 확보 문제 아닐까 싶다. 현재 진행중인 이라크 전쟁 역시도 미국에 의한 에너지 즉 석유자원 확보 전쟁이며, 미국과 중국의 알력 또한 에너지 확보를 들러싼 계산된 갈등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앞으로는 원활하게 에너지를 확보하지 않고서는 경제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현상유지조차도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일본정부가 추진해 왔던 시베리아 유전 개발 및 천연가스 송유관 건설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중국측의 요구에 어떤 형태로든 일본정부는 저자세일 수 밖에 없었고 한편으로는 일본정부 길들이기의 중요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대일 카드 중의 하나가 바로 에너지 문제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일본정부는 대북 관계 개선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여진다.

어느모로 보나 일본정부의 백기투항이라고 여겨지지만 사실 국제외교라는 것이 전쟁이 아닌 다음에야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는 없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윈윈으로 비쳐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다른 한쪽 당사자도 자국 국민들을 설득하고 정치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 아니겠는가.

비정하지만 이것이 국제외교의 현실이며, 우리 정부도 그동안 많이 당해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급박하게 변해가는 동북아시아의 정세변화 및 세계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모아야할 때라고 본다. 특히나 중국, 일본, 미국 세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이들 나라들을 어떻게 이용하고 요리할 것인지 노무현정부의 역할이 그래서 더욱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2년~2006년/여 행2010. 6. 18. 15:28

2002년인가, 2003년인가 기억마저 희미한 어느 무덥던 일요일 목원대학교 김정동 교수와 재일코리안 30여 명은 '일본 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 답사' 첫번째 프로그램으로 히다카 시(日高市)에 위치한 고마진자(高麗神社)를 방문했다. 35도, 숨이 헉헉 막히는 듯한 불볕 더위 속의 아스팔트 길을 따라 30여 분 걸어서 찾아간 고마진자(高麗神社).

그러나 아쉽게도 그 곳에는 고구려인의 기백에 찬 모습은 없었다. 시대적 풍파에 휩쓸려 변할 대로 변한 모습으로, 변절과 오욕의 역사만을 간직한 채 그렇게 그곳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 현장 답사의 스케치 사진과 김정동 교수의 고마진자(高麗神社) 안내글을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  고마역(高麗驛) & 고마진자(高麗神社)                       © 강동완



고마진자(高麗神社), 내선융화 위해 이용됐다. 
 
글: 김정동(목원대, 교수) 

고려역에 내리다

어느 겨울 날 나는 전철 세이부이케부쿠로 선을 타고 히다카 시(日高市)에 갔다. 도쿄로부터 서북쪽으로 40여km 떨어진 곳이다. 가는 길에는 옛날 비행장으로 유명했던 고코로 자와가 있었다. 고마에키에서 내렸다. 한자로는 ‘高麗驛’이다.

역 앞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두 개의 빨간 장승이 서 있었다. 한국인 관광객을 맞으려 새로 세워 놓은 것 같았다. 

히다카 시의 중심으로는 고려천이 흐르고 있었다. 지명들에 보이는 한자가 왠지 반가웠다. 이곳으로 나 있는 오래된 길은 옛날 닛코(日光)로 가는 길이었다. 지금도 닛코가도라고 부른다. 아마 우리 통신사들도 이 길을 걸어갔으리라 생각해 봤다. 내가 걷는 길 변에는 우리 나라 문인석으로 보이는 석상이 이름 없이 서 있었다. 아무 설명도 없는 것을 보면 아마 우리 것인가 보다. 무척 쓸쓸해 보였다.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들 사이에 이 마을은 일종의 마음의 고향같이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려향(高麗鄕)이란 장소만 해도 그렇다. 고려의 마을, 고려의 고향 ?여러 이미지가 떠오르기 떄문일 것이다. 일본 신문들은 가끔 이곳의 고려신사를 다루고 있다. 일본에서는 한겨울이라 해도 눈을 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마침 고려신사에 갔을 떄 눈이 왔다. 서설(瑞雪)일까. 

관동 지역의 첫 개척지 

고려신사에 대해서 처음 글을 쓴 한국인은 홍순혁이었다. 잡지 <청년>에 ‘일본 무사시노 개척자인 우리 상대인(上代人)-특히 고구려 유민에 대하여’이다(1928.3) 그 뒤를 이어 박상희도 ‘무사시노 고려촌의 유래’라는 글을 <조광>(1939.8)지에 발표한다. 

고려신사에 대해서 쓴 글들의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모두 이곳이 고구려의 땅이라는 개연성에 감복하는 내용이다. 또한 고려신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글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한 사학자(白石實三)가 1930년대에 밝혀 놓은 글을 보면. 

고려신사는 고려촌에 있다. 그곳에는 고려씨가 살았다. 이곳은 원래 무시시노로 4-500년전부터 우리 고려씨들이 개척해 놓은 땅이었다. 메이지 초기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오랜 역사를 되새겨 보면, 나라(奈良)시대 도쿄 주변 즉, 무사시노 벌판일대는 일본 수도 나라의 변방에 불과했다. 이곳은 사람이 거의 안 사는 광막한 땅이었다. 이 도쿄 주변에 고구려인이 나타난다. 그는 고구려의 왕족 약광(잣코,若光)이었다.(졸저, <일본을 걷는다>, 1권,133쪽) 그는 오이소 지방을 거쳐 이곳으로 오게된다. 

무사시노 국은 현재의 도쿄와 사이타마 일대에 있던 지방 국명이었는데 그들은 사이타마 쪽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716년 도쿄 주변 일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망명객 혹은 유민 1,799명을 모아 황무지를 개척해 나간다. 신라의 수도 경주 불국사에 석가탑, 다보탑(715년), 황룡사에 9층탑(720년) 등이 세워질 무렵이었다. 

지금의 지명으로는 시스오카 현, 야마나시, 가나카와, 치바, 이바라키, 도치기 등 7개 지역에 흩어져서 살던 고구려인들이었다.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에 각각 신라에 멸망당한다. 멸망 후 40-5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후 이곳이 고려군(高麗郡)이 된 것이다. 우리의 일본 관동지방 내 첫 ‘코리아타운’이었던 셈이다. 고려군은 고려촌과 고려천촌(高麗川村)으로 이뤄졌다. 일본인들은 고려를 ‘고마’라고 읽고 고려촌을 ‘고마 무라’라고 했다. 이 지명들은 사실 고려와는 상관이 없고 고구려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고구려를 고려라 했던 것이다. 

한편 이 부근에 신라군(新羅郡)도 생겨난다. 고려군이 설치된 지 42년이 지나서였다. 신라 스님 33명, 보살 2인 그리고 일반인 남자 19명, 여자 21명이 왔다. 사실 신라군은 고려군보다 뒤늦었지만 원래는 신라 사람들이 687년부터 이곳에 와서 살고 있었다. 고려군보다 29년 전이었다. 

신라 사람들과 고구려 사람들은 서로의 경험을 주고 받으며 이곳을 개척해 나갔다. 고국에서는 원수지간이었으나 이 먼 이역에서는 한 동포간이었다. 신라군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시점에 세워졌는데 신라인들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는 잘 모른다. 

일본은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인을 우대해 받아들이고 있었다.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고구려인들은 특히 말타기, 싸움 그리고 농업을 가르쳐 주었다. 신라인들은 건축과 미술을 그들에게 전수해 주었다. 이 유민들은 언제나 환대를 받았다. 관직에 주어 학자와 기술자는 수도 나라에 머물게 했다. 그 외 평민들은 지방에 살게 해 그 지역 토지 개간을 하게 했고 원岺琯湧?지도케 했다. 

일본 <만엽집> 14권 ‘동가(東歌)에는 이 망명객들이 ‘무사시노 풀밭에 불을 질러 개간하던 정경’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실려 있다. 

이곳은 이후 쌀의 곡창지대가 되었다. 메이지 시대만 해도 일본쌀의 반을 공급할 정도였다. 

이 고려군과 신라군은 에도(江戶)가 급성장하며 함께 발전해 나간다. 에도가 도쿄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곳 고려군, 신라군은 그 이름의 진가를 더 하게됐다. 도쿄는 우리 유민들에 의해 기틀이 놓여졌던 것이다. 

1896년 이후 버려지는 이름, 고려 

우리가 일제 침략을 받게 되며 이곳은 새로운 유민 즉, 유학생, 노동자 등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1896년 일제는 한국과 관련된 지명이 기분 나쁘다고 없애버리기로 한다. 고려군은 이루마군(入間郡)에 편입시켜 고려군이란 이름을 짓는다. 그리고 1955년에는 또다시 고려촌, 고려천촌이란 명칭을 없애 히다카 정(日高町)으로 만든다. 1991년 사이타마 현 히다카 시가 된다. 이에 학자와 문화인들이 ‘통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모든 흔적을 한꺼번에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남은 흔적이 예를들면, 고려천(川), 고려판(坂), 백원촌(고마하라 무라), 고려원(原), 고려산(山), 고려본향, 고려옥근, 고려향(鄕), 고려숙(宿), 고려치(峙), 고려구릉, 고려왕묘, 고려가(家) 등이다. 여기에 고려신사(高麗神社), 고려전정(高麗殿井), 고려전지(高麗殿池)도 있다. 

여기서 관심이 가는 것은 ‘고려전(高麗殿)’이다. 고려전은 고려신사의 본전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고려전은 고구려전이다. 

신라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라군은 이미 그 전 신좌군(新座郡)으로 개칭했다. 1896년에는 북족립군(北足立郡)으로 아예 합쳐 버린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군 명칭 두 개가 사라진 것이다. 

신라의 지명 흔적도 몇 곳 남아 있다. 신좌군(新座郡,니히구라 군), 백자촌(白子村,시라코 무라), 신창촌(新倉村,니히구라 무라) 등이 그것이다. 신창촌에는 우방산(牛房山)이 있는데 이곳은 신라의 왕족이 거처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은 신라를 시라기라 읽었기에 신(新) 혹은 시라(白) 등이 흔적의 하나였던 것이다. 

고구려 신라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신사는 일본 내에 무려 6천여 개, 그 중 무사시노 지방에만 130여 개나 있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초기에는 오늘날의 신사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고 대부분 당집의 형태를 띠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고국을 떠난 민들이 모국의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일본 땅에서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던 일종의 사당들이었다.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거의 다 사라졌다. 지진, 화재, 전쟁도 한 몫을 한 것이지만 역사 지우기에도 편승했다. 그 중 대표적으로 하나 남아 있는 것이 고려신사이다. 

궁전건축가 복신 

고려신사에는 신사 건물과 성천원(聖天院) 그리고 약광의 묘가 있다. 이 건물들은 고구려 왕족 약광과 관계가 깊다. 약광의 시대에 즈음하여 고구려 양식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고구려 망명객 중 약과 외에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복신(福信,?-789)도 있었다. 그는 중앙 무대에 진출하기 위해 이름을 다카구라(高倉)로 바꿨다. 

<속일본기> 등에 의하면 복신은 81세를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일본 조야에서 존대를 받았고 그 후손들도 번창했다고 한다. 그는 조궁경으로 역할 했는데 조궁경은 궁전 건설의 책임자를 말하는 직함이었다. 그는 고구려 궁전 건축에 탁월했던 건축가였던 것이다. 그가 세운 궁전이 양매궁이었는데 매우 화려한 궁전이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어궁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궁전 주변에 우물, 연목 등을 파 놓았는데 그것이 고려전정, 고려전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전은 약광이 살던 집이었다고 추정된다. 

고려 옥근은 고구려식 지붕을 말하는데 궁전 자첵 고구려 식으로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이 1259년의 화재로 모두 사라진다. 본전의 일부에만 고구려 양식이 남아 있다. 이 궁이 무로마치 시대(1334-1573) 말기 고려신사로 이름이 바뀌고 여러 차례 고쳐진다. 다카쿠라의 후손들이 일본 초기 많은 궁전 건축물?성들을 만들어 준다. 

고구려 탑이 보인다 

고려신사는 지금 약광을 신으로 ㅁ시고 있다. 약광의 목상이 여기에 있다. 출세와 운이 터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다. 

성천원은 약광과 그와 뜻을 같이하던 스님 승낙(勝樂)이 죽고 난 후, 약광의 아들 성운(聖雲)과 손자 홍인(弘仁)이 승낙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 승낙은 고구려에서 이곳으로 망명해 올 때 환희천이란 것을 가져 왔는데 환희천의 별칭이 성천(聖天)이었다. 

여기 경내에 약광의 묘, 즉 고려왕묘(高麗王廟)가 있다. 묘는 제사를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다. 묘 속에 탑이 하나 있는데 그 탑은 고구려 양식의 탑이다. 다섯 개의 사암을 중첩시켜 놓은 아주 독특한 탑이다. 질박한 양식을 띠고 있다. 

원래 일본에 초기에 세워졌던 탑들은 백제식 목탑들이어다. 돌탑이 들어간 것은 669년에 세워진 석탑사 돌탑이 처음이었다. 돌탑이 있어 석탑사라고 이름 붙여진 이 절은 시가현 가모군에 있다. 고구려의 돌탑은 일본에서도 아주 희소한 것이었다. 

이 신사 안에는 고려의 주택이라는 것이 있다. 고려의 것과는 건축적으로 별관계가 없고 그 후손들이 살았던 집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기둥이나 평면 형식에서 우리 쪽 느낌이 조금 드러날 뿐이다. 

1898년 이 고려신사는 일제에 의해 완전히 버림을 받는다. 절 이름도 다카구 신사로 바꾸고 약광에 대한 제사도 금지시켰다. 대신 일본의 천황신을 제사지내게 했다(량연국, ‘조선문화가 초기 일본문화 발전에 미친 영향’, 102쪽,1995,사회과학출판사) 8세기경의 응신천황과 신공황후를 이곳에 편입시켰다. 

약광은 백발이었으므로 백발신사(白髮神社)라 이름 부르기도 했다. 늙으면 백발이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던 이 고려신사와 관련된 일련의 장소들이 일제의 조선 침략과 함께 새로이 부각된다. 1930년대에 들면서 소위 내선융화의 한 심벌이 된 것이다. 일본 역사학자들이 이제는 한일관계의 상징물이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약광에 대한 제사도 형식적이나 다시 호용되었다. 물론 일본 응신천황과 신공황후의 신위가 우선이었다. 

친일파 조중응 처음 찾다 

고려신사는 조중응과 관계가 깊다. 메이지 시대가 되자 조선침략과 관계된 자들의 출입이 시작된다. 이것은 ‘참배자 제명사 방명’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통감부나 총독부의 요직에 있는 자는 조선에 부임하기 전 꼭 이 신사를 찾았다. 여기에 덩달아 우리 한국인도 줄을 잇는다. 

대신이라든가 하는 자들과 친일배가 꼭 들른다. 처음 찾아간 자는 조중응(趙重應, 1860-1919)이었다. 1900년 7월 19일이었다. 외무 참의를 하다 옷을 벗고 189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피 생활을 할 때였다. 

내가 옛날 책을 보면 이상하게 여겼던 것은 우리 나라에 귀족이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들은 거의 다 서양식 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제 부끄러워 그런 사진은 나오지 않고 있다.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것이다. 반면에 일본은 이런 사진이 지금도 붐을 일으키며 나오고 있다. 

조중응의 그런 사진이 있다. 히다카시 시립 고려향 민속자료관이 고려천 부근에 있다. 2층 짜리 건물인데 이곳 2층 전시실에는 한 현판이 걸리지도 못한 채 바닥에 뒹굴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조중응이 쓴 글자가 있는 현판이었다. ‘高麗橋’라고 쓴 것이었다. 이제는 일본인에게도 버려져 걸릴 곳을 못 찾는 것이었다. 

조중응은 1905년 통감부가 들어서자 일본에서 돌아와 이토 히로부미의 후광을 업고 이완용의 오른팔 노릇을 했다. 일본말을 제법 지껄이던 조중응은 아예 일본 여인을 부인으로 앉혔다. 그는 이후 벼락 출세의 길에 올라 법부대신, 농상공부 대신이 되어 ‘이토의 개’가 되었다. 그 덕에 귀족에도 올랐다. 서열로 보면 백작인 이완용, 남작인 조민희 사이인 자작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1911년 <시사신보>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국에서 50만원(圓) 이상의 자산가는 모두 1,018명이며, 이 가운데서 일본인은 986명이고, 조선인은 32명이다. 조선인 32명 중에서 왕족 귀족은 9명,관료 3명, 나머지는 토호, 양반 등의 대지주였다(매일신보,1911.7.28). 그들 중에 조중응이 들어 있었다. 그는 박영효, 송병준, 조민희, 이제극, 박기양 등과 함께 설립했다. 

이구열에 의하면, 그는 이완용 조민희와 함께 친일계열인 경성서화미술원의 후원자이기도 했다(이구열,한국현대미술사,국립현대미술관,1976,49쪽). 아마 붓글씨 정도는 좀 썼나 보다. 

조중응은 이인직, 이해조 등 친일 문인들과 <소년한반도>를 창간하기도 했다. 조중응은 이인직과 함께 동경정치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때 선생이 일본인 고마쓰 미도리(小松 綠)였다. 고마쓰는 한일합방 당시 이토의 오른 팔로 실질적인 실무자였던 덕에 후에 총독부 외사국장이 되었다. 

조중응은 고마쓰와 함께 고려신사를 방문하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피는 흐르지 않는다 

조중응은 이때 약광의 57댜 후손이고 고려신사 사장직(社掌職)에 있던 고려씨 고려흥환(高麗興丸,1867-1937)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현재는 59대손 고마 스미오(고려징웅,1927)가 맞고 있다. 

약광의 후손인 고려씨는 26대 500년 동안은 고구려인 자손들끼리만 혼인해 왔다. 그러나 27대부터 일본인과 통혼, 이제 피는 거의 일본피로 바뀌었다. 

지금 일본에서 고구려 계라 하는 성씨는 고려(高麗), 고려정(高麗井) 혹은 구정(駒井), 정상(井上), 신(新), 신전(神田), 구등(丘登) 혹은 강등(岡登), 강상(岡上), 본소(本所), 화전(和田), 길천(吉川), 대야(大野), 가등(加藤), 복천(福泉), 소곡야(小谷野), 아부(阿部), 금자(金子), 중산(中山), 무등(武藤), 지목(芝木), 신정(新井) 씨 등이 있다. 가등청정,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고구려 인의 후손이 된다. 당시 문학박사 나카야마(中山四郞)가 이를 글로 써낸다. 

해방 이후에는 오히려 우리 나라 고관들이 더 찾아가고 있다. 일본과 관계된 자나 대사 혹은 권력자들이 그들이다. 그 명단은 이 신사에 잘 기록되고 있다.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신사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지금도 순진하게 찾아가고 있다. 먼 조상을 생각하며…… 그리고 이름이 반가워서-. 아마 이번 연말연시에도 복을 빌러 가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고려신사의 근현대사는 그만큼 타락해 있었고 많은 순수한 사람들을 희롱해 왔다. 신사를 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가볍지가 않았다. 겨울눈은 서설이 아니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2년~2006년/시 사2010. 6. 18. 15:26

1.      드디어 일본 유사법제가 움직임을 시작했습니다. 국민들을 전쟁에 협력시키는 국민보호법이 9월 17일 시행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것의 행동부대가 될 지정공공기관 160법인이 발표되었는데요. NHK와 민영방송국 20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간 킨요비(週刊 金曜日)'가 보도의 자유를 팽개쳐버린 방송이란 제목을 달고 이들 미디어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2
.      지난 8월 9일 칸사이 전력 미하마 원자력 발전소 3호기 증기유출로 5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후쿠이현 경찰이 9월 4일부터 미하마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강제수사를 시작했습니다. 칸사이 전력 미하마 원전 사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요미우리 위클리'가 보도하고 있습니다.


1
. 국민보호법은 전쟁이 대규모 테러에 대비해서 국가 및 지방 자치단체의 역할 등을 규정하고 있는 법입니다.


국민보호법 시행에 앞서 일본정부는 9월 7일 무력공격사태법에 근거해서 국민들의 피난과 구조를 위해 협력을 의무지운 지정공공기관 160법인을 선정했습니다.


일본정부는 국민보호법을 위해서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이들 지정공공기관은 무력공격사태법에 근거해서 정부 명령이 있으면 전쟁에도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현재 발표된 160개 법인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하는데요. 내년도 중에 각 도시군 지방자치 단체장들이 별도로 지정지방공공기관을 지정할 예정이라는 것 입니다. 그 숫자는 엄청날 것이라는 것이지요.


특히 국민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전기, 가스, 운송, 전화 등 모든 사회기반이 총동원될 수 있다는 사실 입니다. 게다가 이들 사회기반 시설을 미군이나 자위대가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었다는 점을 상당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총동원체제는 외국군대에 의한 상륙공격, 탄도미사일 공격, 비행기에 의한 공중공격, 원자력발전소나 주요시설에 대한 테러로 한정되어 있다고는 합니다만 실상은 무력공격이 예상된다는 정부 판단에 의해서도 가동된다는 사실 입니다.


또한 지정공공기관으로 선정된 법인들은 내년도 중에 앞으로의 업무계획을 작성해서 일본정부에 제출해야만 한다는데요. 국민보호법에서는 업무계획에 대한 보고와 이에 대한 수상의 조언이 가능하다고 하고, 국민보호법의 상위법인 무력공격사태법에서는 무력공격사태 대책본부장인 수상이 지정공공기관의 대처상태 등에 관한 종합조정이 가능하다는 것 입니다. 즉 계획과 훈련이라는 형식으로 일상 속에 유사 또는 전쟁이 자연스럽게 침투된다는 점이라는 것 입니다.


이와 같은 수상의 조언과 조정 기능이 특히 미디어들을 상당히 위축시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미디어들이 정부 의향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부 방침에 따른 업무계획을 책정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우려인 것 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들로 인해서 미디어의 자주권과 자율권은 크게 훼손될 것이고, 일본정부의 이런 조치들은 일련의 미디어 규제와 통제를 합법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일본 미디어들이 한심하다는 지적인 것 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미디어인지 그 근본이 의심스럽다라고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2
. 원자력 발전에 대한 경찰의 강제수사는 이번이 세 번째라고 하는데요. 후쿠이현 경찰은 검사와 보수체제를 확실히 했다면 배관의 파손은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업무상과실치사죄로 입건하겠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은 칸사이 전력측이 사고가 났던 부분에 대한 검사누락 사실을 언제 파악했는가라는 것 이라고 합니다. 사고부분은 28년간 한번도 검사되지 않았었거든요.


이에 대해서 칸사이전력 사장은 처음에는 작년 11월에 검사누락 사실에 대해 들었다고 하다가 이제 와서는 사고 후에 처음으로 알았다면 말을 바꾸고 있다고 합니다. 즉, 사고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기려는 의도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원자력 발전소는 점검을 위해 운전 정지를 하면 하루 1억엔의 손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력자유화 이후에는 점검기간 축소가 지상명제 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사실과 이번 사고는 무관한가 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고직후 일본정부는 재빨리 이번사고는 ‘인재’로 규정했는데요. 그렇게 재빠르게 인재로 규정하지 않을 경우 원자력발전의 노후화를 포함한 원자력발전의 전반적인 문제점들이 이슈화 될 우려가 있다라는 정치적 계산에 의한 안전불감증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 일어난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거의가 최첨단 부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시적인 부분, 즉 현장기술로 충분히 예방 가능한 곳에서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고를 사전에 예방하지 못하는 것은 점검을 포함한 ‘현장기술의 질 저하 때문이 아닌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좀 여담성 지적인데요. 이번 사고는 2차냉각수 배관의 파열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냉각수'라는 표현을 쓰냐라는 지적입니다. 냉각수, 즉 '물'이라고 표현하니까 왠지 안전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같은 HO라고 해도 배관에 흐르는 것은 온도가 140도에 10기압의 증기라는 것이지요. 어감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2년~2006년/시 사2010. 6. 18. 15:20

요즘 일본사회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동전의 양면을 보고 있는 듯 하다. 다수의 건전한 시민계층과 한 줌도 안되는 보수 우익 패거리 집단.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과거 군국주의의 추종자들은 벌떼처럼 준동하고 있는데 비해 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일본내 건전한 시민계층들은 확고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정치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지금까지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일본 시민 사회의 수동적 정치 행태와 패전후에 맞이한 민주주의 역시 올바른 역사의 청산없이 군국주의의 잔재들에게 기득권을 쥐어준 미국이라는 점령군에 의해서 강요되고 이용된 거역할 수 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이 이다. 게다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국가의 리더를 민초들의 힘으로 뽑아보지 못한 이들의 정치력의 한계 역시도 정치의 후진성을 면치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대놓고 얘기는 못하지만 한국의 직선 대통령제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직선제는 세계 민주주의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피 흘리지 않고(혁명이 아닌 방법으로) 쟁취한 민중들의 투쟁에 의한 성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그랬던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일본에 수출하자고....

오늘의 일본 사회를 무대포적 광기의 도가니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고 있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 역시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가 않다. 역사적 진실의 인과관계에는 무심한 채 자국중심의 내셔널리즘이라는 집단 최면에 내몰려진 다수의 군중과 이를 조장하며 악용하고 있는 보수 우익집단의 여론조작, 그 속에서 소리죽여 가슴으로만 이성적 판단을 호소해야 하는 가엾은 양심적 시민세력들.

현재 진행형인 북일 국교정상화 문제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는 피해 당사자와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자극적인 눈물샘만을 찍기에 정신이 없는 편파 · 왜곡 언론에 의해서 또 이들에게만 맞겨놓은 채 뒷짐지고 구경만 하며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정부이기를 포기한 일본 정부에 의해서 정책 결정의 주체가 일본 정부와 의회 · 정책 담당자가 아닌 시골 촌로(村老)들의 입으로 옮겨간지 오래다. 그들이 내뱉는 감정 섞인 한 마디 한 마디가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시 그것이 정부의 정책인양 언론에 의해 선전 · 호도되는 비이성적 악순환만을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제 이들의 의도는 분명해졌고 일본 정부는 사면초가에 빠져있는 양상이다. 일본 정부의 그릇된 현실인식과 안일한 꼼수적인 계산법은 북일 국교정상화와 북일 정상회담의 성과들을 일거에 날려 버리고 양국 관계를 다시 고착 상태로 빠뜨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일본인 납치 인정과 사과에 이은 납치 피해자 5명의 일시 귀국(10일간) 문제는 외교적 관례를 무시한 일본 정부의 약속 불이행과 원조자금 즉 돈으로 해결 가능할 것이라는 가당치 않은 판단이 북한에 의해 보기좋게 거절당한 모양새로 진전없는 대치 상태만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 납치 피해자들의 귀국 초기만 하더라도 북일 국교정상화의 주도권은 일본측이 쥐고 있는 듯 보였지만, 일본 정부의 일관성 없는 외교 정책은 다시 주도권을 북한쪽에 넘겨주고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한 채 미국을 향한 웃음 팔기와 여론 몰이식 북한 때리기에만 열중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근거 없는 ~카더라 방송과 북한을 향한 비방 흑색 선전은 이제 도를 넘어서 북일 양국 관계의 골만 깊게 만드는 부작용만 심화시키고 있다. 핵이 있다 없다에서부터 시작해서 과연 핵이 있다면 그것이 일본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 방송에 군사 전문가가 나와서 핵이 있더라도 그것을 실어나를 로켓이 없다면 무용지물아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로켓이 없더라도 핵무기를 화물 콘테이너에 담아와서 일본에서 터지도록 한다면...." 음, 화물 콘테이너에 핵무기라) 그리고 귀순한 前북한 공작원이 쏟아내는 확인되지 않은 인터뷰 내용들, 또한 식량부족으로 인해 배고픔에 굶주리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의 앙상한 모습이 담긴 영상, 쥐와 뱀이라도 먹어야 한다며 들로 산으로 쫓아 다니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 오죽했으면 어제 모방송사에서는 마스게임 도중에 줄넘기에 실수한 어린이를 동그랗게 원안에 강조해서 보여주는 유치한 작태까지 서슴없이 방영했겠는가.


이렇듯 국민들의 입과 귀를 막고 불합리하게 형성된 일본 국민들의 절대적 비판과 보수세력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와 평화 원칙에 입각해 북한에 대한 지원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는 제대로 된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나는 그래도 이 나라의 희망을 본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일시 귀국한 납치 피해자 5명을 조속한 시일내에 다시 북한으로 돌려 보내기 바란다. 그리고 정상적인 외교 채널을 통해서 북한 당국과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재발 방지및 희망자에 한하여 영구 귀국 보장 약속등을 조건으로 적극적인 외교 교섭에 임하라.


또한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 역시도 불행했던 지난 식민역사에서 일본이 저지른 만행과 참상에 대해 절절한 심정으로 반성하고 모든 정신적 · 물질적 보상을 약속하라. 그것만이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미래와 평화를 담보하는 유일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2년~2006년/시 사2010. 6. 18. 15:20

우정산업 민영화를 향한 고이즈미 수상의 의지는 확고 합니다. 이번 내각 개편을 '우정산업 민영화 실현 내각' 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이고 우정산업 민영화에 대한 강한 집착을 내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우정산업 민영화에 반대하는 세력과는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례로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반대한다면 왜 나를 총재로 선출했는가?" 자민당내의 반대세력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 입니다.

또한 지난 9월 하순 부시 미국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이 우정산업 민영화 문제를 화제로 삼기도 했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본측에서는 이 문제를 화제로 삼기 위해 사전에 미국쪽에 부탁을 했다고도 합니다. 즉 부시대통령에게 일본의 우정산업 민영화 얘기를 꺼내달라는 부탁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현재 미일 간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 또한 산적해 있지 않습니까?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주일미군 재편문제가 있고, 쇠고기의 수입재개 문제라든가, 국제연합 개혁문제, 이라크 인도지원 문제 등 등이 있습니다. 게다가 미일 정상회담에 주어진 시간은 30분 밖에 안됐었다는 사실이지요.

그 와중에도 내정과제인 우정산업 민영화 문제를 화제로 삼고자 했다는 것은 고이즈미 총리가 이 문제를 얼마나 절실하게 보고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언론들은 전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의 이러한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정산업 민영화를 바라보는 일본 국민들의 관심은 매우 낮습니다.

우정산업 민영화 실현내각이라는 고이즈미 2기 내각 발족 직후에 실시한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새 내각이 실시해야 될 국정과제 1순위로 응답자의 52%가 연금과 복지문제를 들었구요. 두 번째가 경기회복과 고용대책 이었습니다. 우정산업 개혁에 대해서는 2%만이 점수를 주었거든요.

그렇다면 왜 고이즈미 총리는 우정산업 민영화에 올인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우정산업 민영화의 대체적인 윤곽만을 짧게 설명을 드리자면 공공 기관인 우정시설을 민영화해서 순수 주식회사화 하고 그 밑에 우편사업, 우편예금, 우편보험, 창구네트워크 등 4개의 민간회사로 분사화 하겠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우정산업 민영화의 목적은 우선 우편예금과 우편보험에 들어와 있는 350조엔을 민간으로 돌려서 경제 활성화에 연결시킨다는 구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돈의 대부분이 국채구입에 쓰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국민들 입장에서는 상당한 불이익도 있다는 점 입니다. 예를 들면 민영화에 의해 우편예금의 금리인하도 예상되고 있고, 또한 우편산업이 채산성에만 의존하다 보면 산간벽지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자칫 우편산업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결국, 앞선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서도 살펴봤듯이 연금문제와 복지문제에 대한 해결을 기대하는 국민들의 뜻과는 반대로 민영화를 통한 무한경쟁 체제로의 돌입은 거센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보여진 고이즈미식 개혁의 진실은 사회보장 제도의 축소와 무한 시장경제주의 추종에 다름아니라는 불만 역시 팽팽해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고이즈미 총리의 우정산업 민영화 의도를 우정산업의 해외(유대자본) 매각 및 정쟁과 권력투쟁이라는 두 갈래 측면에서 보는 시각도 많은 것 같습니다. 즉 해외 자본에 팔아 넘김과 동시에 반대파 제거의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인식이 그것 입니다. 우정산업이 고이즈미 총리의 최대 라이벌인 하시모토(橋本)파의 아성이라는 점 때문 입니다.

그래서 반대파(정적)의 지지기반을 허물어버리겠다는 의도도 숨어 있다는 것 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같은 여당내에서도 진지한 논의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지요. '완벽한' 민영화 정책에 대한 확고한 의지 없이 밀어붙이기식 강공책이 이를 뒷받침한다고나 할까요.


일본 정치의 파벌문제, 족벌정치. 이런 것들이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요. 그러나 이런 문제점들은 투명한 시스템의 도입으로 풀어야지 반대파 제거라는 정쟁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지적 또한 적지 않다는 사실을 바르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고이즈미 개혁의 상징이라고도 불리는 우정산업 민영화 법안이 반대파 여당의원들의 반란으로 국회에서 부결되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이는 국회해산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자민당 정권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라는 조심스런 진단 역시 일본 언론쪽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 입니다. 분수령은 내년 5월 이후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
2002년~2006년/시 사2010. 6. 18. 15:16

한국정부가 발표한 한일협정 문서 공개와 관련한 일본 사회 및 일본 언론들의 반응은 생각외로 조용하다.

우리와는 다르게 대다수의 일본 언론이 짧게 국제면 1단 또는 4단 기사로 다루고 있는데, 결론은 한결 같이 한일 기본조약 체결로 과거 식민지 시대의 지배와 피지배라는 한일 관계는 청산이 되었고 협정 조약에 따라 일본이 합계 5억 달러의 유·무상 협력을 한 것으로 양국간 재산·청구권 문제는 해결 되었다는 짤막한 내용이 주요 골자다.


사실 요 근래 일본 사회의 흐름과 언론, 매스미디어의 논지에서 보자면 이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균형감각을 상실한 채 무시로 오른쪽만을 지향하고 있는 이들에게 과거사와 지나간 역사 문제는 들추고 싶지 않은 치부처럼 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이니찌신문(毎日新聞)만이 논평과 해설 기사를 곁들여서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기사제목을 ‘한일조약 문서 공개는 역사 검증 작업의 일환인가?’로 뽑고 있는데, 한국 정부가 한일조약의 문서 일부를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은 식민지 통치시대와 독재정권 시대의 문제점들을 재조명하려는 역사 검증작업의 일환으로 보여진다고 전하고 있다. 제대로 보고 있다.

이 기사에서는 3가지 정도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먼저 보상금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일조약을 체결했던 박정희 정권은 개인보상에 대신하는 경제협력으로 무상제공 받은 3억 달러를 보상금으로 썼으나 보상 지급된 금액은 3억 달러의 5%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유는 홍보 부족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보상금을 고속도로 등 경제 발전 부분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박정희 정권의 대응을 문제시하는 시민단체의 항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의 사용처 및 군사정부가 어떻게 피해자 보상액을 산정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현재 한국에서도 불거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두번째는 노무현 정권과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기득권 세력과 유착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일본의 식민지 통치시대와 과거 군사독재 정권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는데 친일행위 진상규명법, 과거사 기본법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키로 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세번째는 문서 공개로 인해 한일조약의 교섭과정에서 개인보상 등 청구권을 포기한 한국측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지면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도 책임 추궁 당할 가능성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피해자 지원을 재검토한다는 차원에서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 대학교수의 말을 빌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비공식적으로 회의록 등을 입수하곤 했었기 때문에 이번 공개로 새로운 사실의 발견은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조약 서명을 전후한 교섭경과와 과정은 밝혀질 가능성이 높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에서도 거론되고 있는 한일 양국정부의 부도덕한 행위 즉 야합 가능성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인다. 자칫 이 부분이 한일 양국정부를 곤혹스럽게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뉘앙스로 받아 들여진다.

결론은 한국 정부는 외교문제화하지 않을 생각으로 보여지지만 시민단체 등에서 제기하고 있는 ‘개인보상을 부정한 한일조약은 재교섭해야 마땅하다’는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게 된다면 한국 정부의 생각대로 국내문제로 그치게 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라고 전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 역시 아직은 전해진 것이 없이 한국 정부에 이와 관련한 특별한 이의제기는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표면적으로 일본 정부는 한국의 주권과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속내는 전혀 그렇지 만은 않을 것이다.

한국 정부에 의한 문서 공개 후에 재협상과 보상 요구, 그리고 향후 예정된 대북 수교협상에 악영향을 이유로 난색을 표명했던 것으로 언론은 전하고 있다.



Posted by 강동완(국제정치학 박사)